LOGIN나는 방문만 바라보며 서지안이 우리 침실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존슨 앤 헤인즈의 사업 제안서를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지안이 이혼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못하도록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쓰며 바쁜 척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안이 왜 그렇게까지 비이성적으로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괜히 소란을 피우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망신을 자초했다. 그러고는 내가 유리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시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이제는 갑자기 이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꺼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의 지안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늘 감탄했던 점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현명하게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머릿속에서 스위치라도 바뀐 것처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가 지안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주지 못해서 그런 걸까?
결혼한 뒤로 내가 전보다 바빠진 건 사실이다. 그래도 아내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고, 나름 그 약속을 잘 지켜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집중했는지, 이제 내 회사는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안이 친정아버지의 회사가 무너졌을 때처럼 또다시 모든 것을 잃고 침몰하는 배에 올라탄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처럼 힘들게 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은 지안이 나를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서로 더 솔직하게 대화하기 위해 부부 상담을 받아야 한다면, 그 정도는 함께 해 볼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유리에게는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몇 주 전, 나는 유리가 어린 시절 친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변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나를 구해 준 뒤, 내가 선물했던 조개껍데기 팔찌를 그녀가 아직도 차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안이 유리처럼 조금만 더 이해심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리는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짊어지고 있는지 이해해 줬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회사 일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반면 지안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곤 했다. 아마 내 관심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집에 돌아와서까지 누군가를 아이처럼 달래 줘야 한다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조금 더 지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밤 내가 제대로 만족시켜 주기만 하면, 이혼하겠다는 말도 쏙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혼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내일은 중요한 회의까지 잡혀 있어 일정이 빡빡했다. 어머니도 찾아뵈어야 했다.
지안과의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머니 댁에 차를 몰고 갈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가꿔진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대저택은 우리 집안의 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반듯하게 깔린 긴 돌길은 정문까지 이어졌고, 저택 곳곳에는 예술적인 조각상과 고급 잡지에서나 볼 법한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마침 밖으로 나오는 강태준과 마주쳤다.
“태준 삼촌. 엄마 안에 계세요?”
“아, 도윤이 왔구나.”
태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안에 계셔. 그런데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업 일이 생겨서 말이야.”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브런치라도 같이 드시죠.”
내가 그를 붙잡았다.
“여기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태준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윤아, 네 가족에게도 신경을 좀 써야지. 가족들 말이야.”
우리 가족?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삼촌, 왜 남처럼 말씀하세요? 삼촌이 엄마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복동생이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태준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난 가 봐야겠다.”
“그럼 나중에 뵙죠.”
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더 붙잡아 봐야 소용없었다. 그에게도 운영해야 할 사업체가 있으니까.
태준은 유럽의 유명 브랜드들을 거느린 대기업, 딥 호라이즌 인더스트리의 오너였다. 내가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 죽어라 뛰어다니는 동안,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올라 여유롭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내 회사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태준의 회사는 두말없이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가족에게 충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태준이 맥라렌을 몰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왜일까?
어젯밤 태준과 지안이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을 우연히 봤던 일이 떠올랐다. 지안은 그때 유난히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태준이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안이 저렇게 활짝 웃었던 걸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라도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는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안이 이혼을 입에 올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여전히 지안이 약을 먹여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이성적으로 사랑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비열한 계략을 꾸민 사람을 어떻게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그녀가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이혼하면서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 내려고 하는 건가?
정말 영악한 여자였다.
내 재산을 떠올려 보니, 지안은 이혼만으로도 적게는 1억 달러, 많게는 3억 달러까지 챙겨 갈 수 있을 터였다.
어머니는 늘 지안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동안 나는 아내를 감싸며 그녀를 믿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 내 회사들이 상당히 성공한 상황이다 보니, 지안이 바로 지금을 이혼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판단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일단 그녀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 주지.
하지만 순순히 이혼해 줄 생각은 없었다. 정말 나와 이혼하고 싶다면 내 규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어쩌면 결국에는 나와 이혼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은 실수였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안이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차갑게 굴기 시작하면 그녀는 결국 내게 기어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냥 태준 씨와 저녁 한 끼 먹는 것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그저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처음에는 짙은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 주는 완벽한 핏에, 적당히 과감한 네크라인까지. 태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문득 망설여졌다.‘너무 과한가?’결국 그 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입을 수 있는 익숙한 블랙 원피스와 가장 좋아하는 하이힐을 골랐다. 세련되면서도 저녁 내내 신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신발이었다.나는 태준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면서 도대체 언제쯤 올지 궁금해했다.또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태준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도착했어요.]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드디어 왔구나.문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빠르게 뛰었다.눈앞에 선 태준 씨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 보이던 거뭇한 수염 자국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덕분에 턱선이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정장까지 완벽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우디 향이 풍겼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와, 지안 씨. 정말 예쁘네요.”태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덩달아 반짝였다.“고마워요, 태준 씨. 와, 태준 씨도 정말 멋있으신데요?”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그럼 출발할까요?”태준 씨가 물었다.나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그제야 회의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도윤아,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정말이에요. 오히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두 사람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사실 이혼이 최종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클레어 고모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굳이 부정할 필요 없어, 도윤아. 네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잖니.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당연하지.”나는 고모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 결혼 생활이 대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때 클레어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그러고 보니 유리는 아직 혼자라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이 지내 보는 건 어떠니?”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유리는 줄곧 너만 기다려 온 것 같더구나. 이제는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와 연애할 때도 됐지.”“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와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그보다 어머니, 파인먼-웹스터 합병 건이나 이야기하죠. 조만간 성사될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사업 이야기로 돌렸다.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가 내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지냈다.평소보다 훨씬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금융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안서도 준비했다. 바쁘게 지내는 것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 버리고 싶었다.이혼한 뒤로 지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건 지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통화 중이었다.설마 벌써 다른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건가?요즘 지안의 태도를 생각하면 유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태준 삼촌이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안이 이렇게 빨리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3년의 결혼 생활이 지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퇴원할 때만 해도 나는 지안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반쯤 기대했다. 이혼하겠다는 생각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나는 지안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니까.하지만 집에 돌아온 내게 변호사가 전한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지안은 결국 이혼을 진행했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내가 병원에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안은 내게 관계를 되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벌써부터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비웃으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내를 떠난 게 아니라 아내에게 차인 패배자.사람들은 분명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지안은 이혼이 내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내 체면과 지위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비서에게 듣기로 지안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시절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했다.나도 아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지안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피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것만 같았다.이제야 지안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음식 하나도 예전 같지 않았
나는 몇 분 동안 휴대전화만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도윤 씨가 지금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왜 그러니, 딸? 누가 전화했어?”“아, 그냥 친구 스티비야. 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나 봐.”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도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화를 다시 돋우는 건 지금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말했다.“엄마, 아빠.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 방에서 잠깐 쉬어도 될까?”“그럼, 당연하지. 푹 쉬렴.”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해 줘서 고마워. 정말 맛있었어.”계단을 올라가는데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아, 진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혼 관련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도윤 씨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방에 들어서자 옛 추억이 밀려왔다.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붙여 놓았던 포스터와 사진들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십 대 시절 사용하던 낡은 이불까지 그대로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책장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이며 자잘한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대학에 진학한 뒤로도 엄마가 줄곧 내 방을 관리해 주신 게 분명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도윤 씨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 봤다.[전화 좀 받아 줄래? 중요한 일이야. 고마워.]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부탁 좀 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도윤 씨가 이런 문자도 보낼 줄 아네. 이혼하고 나서 예의라도 좀 배웠나 보지.’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곧
아빠는 내 질문에 눈을 반짝였다.“글쎄, 엄마가 정원을 정말 멋지게 가꿔 놨단다. 요리 실력도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지.”아빠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매주 나랑 에어로빅 수업도 듣고 있어. 덕분에 아직 젊게 살고 있지.”엄마가 웃으며 거들었다.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컨설팅 일도 몇 건 맡고 있어. 너무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그래도 이제 은퇴했으니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단다.”“그럼 우리 딸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엄마가 물었다.“아, 별일 없어. 그냥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안아,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아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도윤 씨는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우리 이혼했어.”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이고, 우리 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마음 아프네.”엄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그 순간 아빠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 위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그래,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와서 들려주는 소식이 이혼이라니!”“아빠, 진정해.”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화낼 필요 없어.”“그래도 우린 네가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니?”아빠가 속상한 듯 말했다.“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야.”아빠는 원래부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빠 성격을 생각
서지안의 시점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스티비는 내가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 원하면 내가 머리카락 잡아 줄게.”스티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이제는 꽤 익숙하거든.”나는 대답했다.구토를 마친 뒤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스티비가 임신 사실을 숨긴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였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스티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스티비, 너 울어?”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스티비는 나를 살짝 놓아주며 웃었다.“당연히 울지, 이 바보야! 내가 이모가 된다잖아!”“아니면 우리 아기의 대모가 되어 줄래?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우리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거든.”내 말에 스티비가 활짝 웃었다.“그거 정말 좋다!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네 아기의 대모가 되는 게 좋다는 뜻이야.”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비가 물었다.“잠깐, 도윤 씨는 네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나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말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 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난 좋아.”스티비는 흔쾌히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 둬. 네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우리 미래의 아기 대모가 되어 줄 사람으로서 말이야!”나는 기차를 타고 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가 함께 살던 옛집도 둘러볼 생각이었다.대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옛집을 바라보았다.집은 대체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작은 변화가 있긴 했다. 현관문의 색이 조금 달라졌고, 창문에는 새 덧문이 달려 있었다.나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손가락을 버튼 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올려 둔 채 망설였다.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