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지안 시점
잠깐이나마 강도윤이 내 다리를 걱정해 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그는 여전히 구제 불능인 인간이었다.
"호텔 밖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을……."
내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됐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엄마랑 유리한테 가서 사과나 해."
도윤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라 말했다.
또 시작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제대로 들어 주기는커녕, 늘 하던 대로 내 말을 끊어 버렸다. 마치 내가 옆에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이 남자와 살고 있는 걸까?
도윤에게 이제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문득 생각이 멈췄다.
이런 식으로 매일 싸우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건강한 가정이라는 건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닐 테니까.
솔직히 이제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이혼하고 싶어."
말해 버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다가 마침내 참았던 숨을 내뱉은 것처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방금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뭐? 지금 진심이야?"
나는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네. 제대로 들으셨네요."
나는 이번에는 더 분명하게 말했다.
"이혼하고 싶다고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더는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나는 이 관계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도윤의 가족들이 나를 돈만 보고 결혼한 비서쯤으로 취급해도 자존심을 굽혀 가며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게다가 도윤의 마음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하지 않았던가.
도윤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화를 터뜨릴 것 같았지만, 애써 참고 있는 듯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더는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도윤 씨. 난 끝났어요."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겁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지안, 너 지금 애처럼 굴고 있다는 거 알아?"
도윤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역시나.
우리가 다툴 때마다 그는 늘 나를 철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나는 감정적이고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식이었다.
마치 CEO라는 직함이 자신에게 모든 판단의 권리라도 주는 것처럼 굴었다.
그와 대화하는 건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전처럼 그에게 져 줄 생각이 없었다.
"우리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에요, 도윤 씨……."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그동안 도윤과 그의 가족들에게 당했던 일들을 전부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나를 돈을 노리고 결혼한 전직 비서 취급할 때마다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
그런데도 도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내 앞에서 유리와 다정하게 굴기까지 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말해 줄 때였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제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도윤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역시나였다.
또 다른 사람을 나보다 먼저 챙기는 거였다.
그가 통화하는 동안,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말들이 어느새 흐릿해졌다.
"알았어요, 엄마. 끊을게요."
도윤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수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끊어 버릴 생각이겠지.
"내일 존슨 앤 헤인즈사에 제출할 사업 제안서를 다시 검토해야 해."
도윤이 설명했다.
"엄마가 제안서를 봤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하시더라고."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존슨 앤 헤인즈사와의 계약이 수백만 달러 규모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내가 도윤의 신경을 건드려 투자자들 앞에서 일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화가 풀린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사업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제안서나 제대로 고쳐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요."
도윤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다음에는 무슨 말을 꺼낼지 계산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와 대화할 때면 늘 이런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주고받든 결국 승자는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한 태도.
"이 이야기를 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냥 사과해. 그러면 다 끝나는 일이잖아. 그리고 아까 네가 꺼낸…… 이혼 이야기도 없던 일로 하고."
그가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방식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마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비웃는 것 같았다.
내 말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정말 최악이네요."
나는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말은 이미 많이 들었어."
도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오늘은 그만하자. 우리 둘 다 피곤하잖아."
그는 아무 말 없이 있는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써 고개를 숙였다.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내가 눈물을 보이면 오히려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듯 굴 게 뻔했으니까.
잠시 후 도윤은 결국 등을 돌려 우리 침실로 향했다.
나는 앤에게 손님용 침실 열쇠를 부탁했다.
오늘 밤만큼은 그와 한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잠자리 한 번으로 이 결혼 생활이 해결될 리도 없으니까.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우니, 도윤과의 결혼 생활을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하나둘 떠올랐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견딜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는 한때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격려해 주는 사이였다.
나는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는 도윤의 모습이 좋았다. 그 역시 내 일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어느새 내 삶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내 잘못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일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
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을 내게 안겨 주었다.
하지만 사랑을 표현하고, 내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도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지쳐 있었다.
더 이상 그가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사실 이혼을 생각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없이 고민해 왔다.
그런데 도윤에게 이 모든 것은 그저 한바탕 소동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말해도, 그는 결국 내가 또 감정적으로 굴다가 금방 마음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태준 씨와 저녁 한 끼 먹는 것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그저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처음에는 짙은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 주는 완벽한 핏에, 적당히 과감한 네크라인까지. 태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문득 망설여졌다.‘너무 과한가?’결국 그 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입을 수 있는 익숙한 블랙 원피스와 가장 좋아하는 하이힐을 골랐다. 세련되면서도 저녁 내내 신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신발이었다.나는 태준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면서 도대체 언제쯤 올지 궁금해했다.또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태준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도착했어요.]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드디어 왔구나.문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빠르게 뛰었다.눈앞에 선 태준 씨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 보이던 거뭇한 수염 자국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덕분에 턱선이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정장까지 완벽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우디 향이 풍겼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와, 지안 씨. 정말 예쁘네요.”태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덩달아 반짝였다.“고마워요, 태준 씨. 와, 태준 씨도 정말 멋있으신데요?”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그럼 출발할까요?”태준 씨가 물었다.나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그제야 회의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도윤아,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정말이에요. 오히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두 사람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사실 이혼이 최종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클레어 고모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굳이 부정할 필요 없어, 도윤아. 네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잖니.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당연하지.”나는 고모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 결혼 생활이 대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때 클레어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그러고 보니 유리는 아직 혼자라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이 지내 보는 건 어떠니?”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유리는 줄곧 너만 기다려 온 것 같더구나. 이제는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와 연애할 때도 됐지.”“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와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그보다 어머니, 파인먼-웹스터 합병 건이나 이야기하죠. 조만간 성사될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사업 이야기로 돌렸다.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가 내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지냈다.평소보다 훨씬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금융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안서도 준비했다. 바쁘게 지내는 것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 버리고 싶었다.이혼한 뒤로 지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건 지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통화 중이었다.설마 벌써 다른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건가?요즘 지안의 태도를 생각하면 유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태준 삼촌이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안이 이렇게 빨리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3년의 결혼 생활이 지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퇴원할 때만 해도 나는 지안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반쯤 기대했다. 이혼하겠다는 생각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나는 지안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니까.하지만 집에 돌아온 내게 변호사가 전한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지안은 결국 이혼을 진행했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내가 병원에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안은 내게 관계를 되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벌써부터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비웃으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내를 떠난 게 아니라 아내에게 차인 패배자.사람들은 분명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지안은 이혼이 내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내 체면과 지위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비서에게 듣기로 지안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시절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했다.나도 아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지안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피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것만 같았다.이제야 지안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음식 하나도 예전 같지 않았
나는 몇 분 동안 휴대전화만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도윤 씨가 지금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왜 그러니, 딸? 누가 전화했어?”“아, 그냥 친구 스티비야. 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나 봐.”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도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화를 다시 돋우는 건 지금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말했다.“엄마, 아빠.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 방에서 잠깐 쉬어도 될까?”“그럼, 당연하지. 푹 쉬렴.”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해 줘서 고마워. 정말 맛있었어.”계단을 올라가는데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아, 진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혼 관련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도윤 씨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방에 들어서자 옛 추억이 밀려왔다.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붙여 놓았던 포스터와 사진들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십 대 시절 사용하던 낡은 이불까지 그대로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책장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이며 자잘한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대학에 진학한 뒤로도 엄마가 줄곧 내 방을 관리해 주신 게 분명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도윤 씨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 봤다.[전화 좀 받아 줄래? 중요한 일이야. 고마워.]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부탁 좀 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도윤 씨가 이런 문자도 보낼 줄 아네. 이혼하고 나서 예의라도 좀 배웠나 보지.’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곧
아빠는 내 질문에 눈을 반짝였다.“글쎄, 엄마가 정원을 정말 멋지게 가꿔 놨단다. 요리 실력도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지.”아빠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매주 나랑 에어로빅 수업도 듣고 있어. 덕분에 아직 젊게 살고 있지.”엄마가 웃으며 거들었다.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컨설팅 일도 몇 건 맡고 있어. 너무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그래도 이제 은퇴했으니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단다.”“그럼 우리 딸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엄마가 물었다.“아, 별일 없어. 그냥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안아,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아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도윤 씨는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우리 이혼했어.”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이고, 우리 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마음 아프네.”엄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그 순간 아빠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 위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그래,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와서 들려주는 소식이 이혼이라니!”“아빠, 진정해.”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화낼 필요 없어.”“그래도 우린 네가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니?”아빠가 속상한 듯 말했다.“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야.”아빠는 원래부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빠 성격을 생각
서지안의 시점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스티비는 내가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 원하면 내가 머리카락 잡아 줄게.”스티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이제는 꽤 익숙하거든.”나는 대답했다.구토를 마친 뒤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스티비가 임신 사실을 숨긴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였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스티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스티비, 너 울어?”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스티비는 나를 살짝 놓아주며 웃었다.“당연히 울지, 이 바보야! 내가 이모가 된다잖아!”“아니면 우리 아기의 대모가 되어 줄래?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우리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거든.”내 말에 스티비가 활짝 웃었다.“그거 정말 좋다!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네 아기의 대모가 되는 게 좋다는 뜻이야.”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비가 물었다.“잠깐, 도윤 씨는 네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나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말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 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난 좋아.”스티비는 흔쾌히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 둬. 네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우리 미래의 아기 대모가 되어 줄 사람으로서 말이야!”나는 기차를 타고 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가 함께 살던 옛집도 둘러볼 생각이었다.대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옛집을 바라보았다.집은 대체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작은 변화가 있긴 했다. 현관문의 색이 조금 달라졌고, 창문에는 새 덧문이 달려 있었다.나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손가락을 버튼 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올려 둔 채 망설였다.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