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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태평성대
‘박도현이 믿어 줄까? 혹시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일부러 접근해서 이 집안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해 팔자를 고쳐보려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당장 고용 계약을 끝내고 나더러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할수록 불안해진 강채원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한 그 행동이 휴대폰 너머의 남자에게 얼마나 큰 곤란을 안겨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박도현이 침을 꿀꺽 삼키고 황급히 시선을 돌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뒤 낮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준이 얼굴 좀 보여줘요.”

“네, 지금 바로 방으로 갈게요.”

강채원이 그제야 안도했다.

한 손에 죽 그릇을 들고 다른 손에 휴대폰을 쥔 채 최대한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박도현에게는 그녀의 발소리뿐 아니라 숨소리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러자 또다시 꿈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꿈속의 강채원은 그를 다정하게 ‘도현 씨’라고 불렀다.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눈망울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게다가 그저 고용 관계일 뿐이라 지금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 시각 강채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이준이 진작 잠에서 깨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반짝 빛났다.

“아빠!”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강채원이 얼른 휴대폰을 박이준에게 건네 두 사람이 통화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후후 불었다. 이따가 박이준에게 먹여 줄 생각이었다.

그때 박이준이 갑자기 박도현에게 말했다.

“아빠, 나 채원 누나가 너무 좋아요. 누나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 엄마처럼.”

목소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이 가져온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강채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귓불이 다시 뜨거워졌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전 주방에서 있었던 일만으로도 충분히 민망한데 이제 박이준까지 이런 말을 하다니. 박도현이 오해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박이준은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라 아이의 말에 악의가 있을 리 없었다. 강채원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장 가까운 가족과 나누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 안 되면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돈을 모아 박도현에게 천만 원을 갚으면 되었다.

적어도 아버지의 병원비는 이미 납부했다. 박도현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그녀를 아무리 싫어하게 되더라도 환자 가족이 있는 그녀에게 모질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박이준.”

박도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지만 그래도 다정한 말투로 정정했다.

“누나는 누나고 엄마는 엄마야. 둘을 같은 사람처럼 생각하면 안 돼.”

간단한 말로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박이준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풀이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런 말 안 할게요.”

“강채원 씨.”

박도현이 갑자기 강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박도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다고? 참 소심하단 말이지.’

‘아무래도 그만 놀려야겠네. 무서워서 그만두겠다고 하면 이준이한테 맞는 과외 선생님을 다시 구해야 하고 할아버지한테도 둘러댈 말이 없어.’

박도현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죽 먹여요.”

“네, 아버님.”

강채원이 얼른 그릇을 들고 박이준에게 죽을 먹이러 다가갔다.

그녀의 손길이 무척 세심했다. 한 숟가락씩 떠서 충분히 식힌 다음에야 아이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아이도 얌전히 입을 벌려 한입씩 받아먹었다.

몇 숟가락 먹인 그때 휴대폰 너머의 박도현이 갑자기 먹여 주지 말라고 했다.

“직접 먹게 해요. 다른 사람이 먹여 줘야 할 정도로 어리지 않아요.”

강채원도 아이를 지나치게 응석받이로 키우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아이에게 한 번쯤 밥을 먹여 주는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았다.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기에 고용주가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다.

강채원이 그릇 밑에 수건을 받쳐 박이준의 손에 건네주었다.

“손으로 잘 잡고 천천히 먹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박이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방 안에 박이준이 죽을 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강채원은 긴장하면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가뜩이나 빨갛던 아랫입술이 더욱 빨개졌다. 마치 누군가 꺾어주기를 기다리는 여린 꽃 같았다.

박도현이 먼저 침묵을 깼다.

“채원 씨도 이준이만 돌보지 말고 끼니 챙겨 먹어요. 난 사흘 뒤에나 돌아갈 것 같네요. 집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직접 사도 돼요. 돈은 내가 줄 테니까.”

“네, 아버님.”

강채원이 얼른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당장은 날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놓았다.

영상 통화를 마친 뒤 박도현이 강채원에게 4백만 원을 송금했다.

송금 메시지를 확인한 강채원이 곧바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님, 이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해요. 다시 돌려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답장이 도착했다.

[시간이 없어서 매번 송금할 수 없어요. 일단 받아 두고 일상 지출 내역을 가계부에 잘 정리하도록 해요.]

앞으로 한동안 발생할 비용을 한꺼번에 미리 준 셈이었다.

강채원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박도현에게서 받은 돈을 다른 카드에 따로 넣은 뒤 가계부 앱까지 다운로드했다.

그 후 이틀 동안 강채원은 계속 박도현네 집에 머물며 박이준을 돌보았다. 박이준이 마침내 완전히 회복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누나, 아빠도 집에 없는데 누나가 나 학교에 데려다주면 안 돼요?”

박이준이 강채원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고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아침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리러 갈 테니까 수업이 끝나면 혼자 다른 데 가지 말고 꼭 교문 앞에서 기다려. 누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데리러 오면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박이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채원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모르는 사람은 다 유괴범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강채원이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정도로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면 안심이었다.

그날 강채원의 첫 수업이 오전 열 시라 시간이 충분했다. 박이준을 데려다준 뒤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면 되었다.

그런데 시내에서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버스가 평소보다 훨씬 먼 길로 우회한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결국 수업이 거의 시작될 무렵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아무 자리에 앉은 다음 교재를 꺼내려던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룸메이트 조혜성이 몸을 돌려 앉더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너 요 며칠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던데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개인적인 일이 있어.”

강채원은 조혜성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알아챈 그녀는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조혜성이 눈을 흘겼다.

‘잘난 척은.’

바로 그때 강단에 선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출석을 부르는 대신 수업 중에 간단한 시험을 보도록 할 거야.”

평소 공부를 성실하게 해 온 강채원은 시험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박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 시험지가 배부되기 전이었기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이준이 학교에 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혜성이 마침 고개를 돌려 강채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누구랑 메시지를 주고받는 거지? 게다가 돈까지 받았네? 얼핏 봐도 꽤 많은 액수 같은데.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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