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요일 정오, 오래된 낡은 건물인 MH 엔터테인먼트 5층 사장실.
이곳의 사장 마호는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젊은 대표를 위해 살며시 창문을 열었다.
사당과 낙성대 사이, 구도심의 낡은 골목길에 자리 잡은 5층짜리 건물에서는 오늘도 낮게 깔린 음향이 희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앞은 어린 여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저마다 손에 쥐고 있는 플래카드와 응원 도구들은 이곳에 핫한 아이돌 그룹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개한 벚꽃처럼 거리를 물들이는 소녀들의 함성. 세련된 금속 현판이 붙은 입구 옆으로는 웅장한 아우라를 풍기는 검은색 익스프레스 튜닝 밴과 독일 명품 차량 브랜드의 최고급 세단이 바짝 붙어 주차되어 있었다.
낡고 칙칙한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압도적인 사내가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단정한 슬랙스에 편안한 흰색 셔츠 차림이었지만, 느슨하게 꼬아 올린 기다란 다리와 나른하게 그늘진 턱선은 그 자체로 연예인 같은 화보였다.
이 젊은 대표의 존재감은 겨울 서리처럼 냉혹하고 날카로웠다.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숨통을 조여오는 위압감이 팽배했다.
한참 나이가 많은 대표 마호조차 그가 등장하면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일 정도였다.
몇백억 단위의 돈도 취미 생활에 쓰는 푼돈처럼 가볍게 던져줄 만큼 거대한 재력가이자, 수가 틀리면 이 회사 따위는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 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천재작곡가인 그는 순전히 기부하는 차원으로 이 회사를 후원해주고 있었다.
태하가 소파에서 등을 떼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마호는 침을 삼키며 냉장고에서 그가 즐겨 마시는 더치커피 병을 꺼내 놓았다.
“태하야, 요즘 자주 오네.”
“볼일이 있어서.”태하는 길고 선이 고운 손가락으로 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어 목을 축였다.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에 고혹적인 분위기가 뚝뚝 떨어졌다.
“드라마 시즌 2 OST 작업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끝.” “와, 역시 능력자. 시즌 1 메인 테마랑 오프닝 전부 음원 차트 탑 10에 박혀 있더라.”어떤 칭찬에도 미동조차 없는 모습. 하얗고 차가운 도자기 인형처럼 텅 비어버린 그의 시선은 오직 창밖만을 향해 있었다.
마호는 침을 바짝 삼키며, 태하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이름을 슬그머니 흘렸다.
“경신 양하고 다시 좀 잘해보지 그래.”
그 순간, 텅 비어 있던 태하의 짙은 눈동자에 진득한 파동이 일렁였다.
“됐어.”
“내가 다시 연락해 볼게. 페이도 훨씬 더 얹어주고······.” “그만.”단칼에 잘라버리는 서늘한 음성에 마호는 억류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경신과 멀어진 이후, 태하의 예민함은 매일 밤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기에 마호는 부랴부랴 화제를 돌렸다.
“JJ에서 너한테 곡 달라고 난리도 아니다.”
“귀찮아.”태하가 긴 속눈썹을 떨어뜨릴 때마다 마호의 가슴은 조마조마하게 졸아들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예민하게 굴려나.
경신과 헤어지고 난 뒤 너무나 날카로워진 태하라 그저 살얼음판만 걷는 기분이었다.
*** 태하는 끊임없이 떠드는 마호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허름한 창가로 걸어 나갔다.망해가는 이곳을 몇 년 전 후원한 단 하나의 이유는 경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신인 가수의 소속사가 망해가서 아쉽다고 한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경신이 오늘이 퇴원하는 날인데.’
태하는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소녀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쌀쌀하게 감도는 기온 때문에 아직 그는 겨울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백색 소음 같은 그 소란 속에서, 태하는 유독 맑고 고왔던 그 여자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그리워졌다.
그 곧고 고집스러운 성격에 졸업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테지.
그런데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렇게 차갑고 도도한 그녀인데. 어떻게 그새 친구를 그리 빨리 사귈 수도 있는 건지.
그동안 경신은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가까이에 지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친구가 하나 있다고 했지만, 제대로 언급조차 안 했기에 이 역시도 의문이 가득했다.
그런데, 송화야와 한규련은 허물없이 편하게 대했고, 그저 자신이 돌보는 동생이나 반려 동물처럼 살뜰하게 보살핌을 받는 인간적인 모습도 의아하기만 했다.
'나에게만 차가웠나?'
자신이 경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평소에도 멀어지려고 그리 애를 쓰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생일 파티 날, 경신에게 무언가 일이 터졌던 것이 분명했다.
유독 어둡고 불안해 보이던 표정. 그리고 선물처럼 자신을 던져온 그 뜨겁고 잔인했던 밤.
태하는 그날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제 품 안에서 그 도도하고 오만한 경신이 겁에 질린 채 떨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받아내던 고운 몸이었다.
처음이라는 증거처럼 침대에 붉은 흔적을 남겨놓고, 태하의 심장이 터져나갈 만큼 애틋한 온기를 안겨주었던 그녀.
아침까지 품에 안아 달래며 제발 가버리지 말라고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잠시 깜빡 잠든 사이 그녀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신데렐라는 질색이야······ 끝내는 게 정답이지.]
제 생일날 그토록 모질게 경신이 곧은 눈빛으로 말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그 밤을 선물로 주고 떠나버린 대가는 너무나 무겁고 단단했다.
상념이 깊어지던 그때, 누군가와 통화를 끝낸 마호가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태하야, 고기나 먹으러 가자. 봉 실장이 쏜대.”
“······귀찮아.” “근데 왜 너의 SUV가 강남 고깃집에 세워져 있는 거야? 봉 실장이 네가 거기서 식사하는 줄 알고 놀랐다고 하던데.”그 순간, 태하의 뇌리에 한규련에게 차를 빌려준 기억이 번개처럼 꽂혔다.
“그래?”
“그래서 봉 실장이 거기 불쑥 들어가서 지금 줄 서서 대기 중이래.”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태하의 몸은 용수철처럼 바로 튀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지체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 빨리 일어나.”
태하는 지체 없이 사장실 문을 향해 거침없는 걸음을 옮겼다.
화야와 학식을 먹자마자 버스에 오른 경신은 어느새 MH 엔터테인먼트 근처 정류장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무슨 낯짝으로 거길 다시 들어가나.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애초에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경신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한 경우의 수로 가득 찼다. 규련에게 부탁해 한 다리 건너 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아가들아, 엄마가 온 게 정답 맞겠지? 이미 도착해 놓고 물어봐서 미안.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직접 만회해야 하니까.’경신은 잠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추위가 가신 3월의 봄 풍경을 무심하게 눈에 담았다. 과거의 자신이 수없이 겪어본 계절이었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가들과 함께 맞이하는 매 순간은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행복했다.‘과거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 행복을 키워낸 거야. 그리고 이제 난 혼자가 아니지.’경신은 소중하게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 아가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예전에는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걸하듯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조금 여유를 되찾은 경신은 상황별 행동 지침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묘했다.‘오늘,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태하가 그곳에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경신은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여학생들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한산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가 시야에 들어왔다.“아! 있다, 저 차!”저 곳에 주차된 차라
화려한 조명과 진한 향수 냄새가 엉킨 S방송국 JW소속사 위주로 쓰는 전용 대기실.서정민은 제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 후배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살결이 마찰하며 나는 은밀하고 축축한 소리가 단단히 닫힌 대기실 문 안쪽에 야릇하게 울려 퍼졌다.“선배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하흣, 말만 잘하지······.”입가에서는 매끄럽고 아찔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정민의 눈빛은 냉정할 만큼 서늘했다.키스 한번도 안 하면서도 절정에 달해 번들거리는 남자의 표정을 마주하기 싫어 그녀는 유연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뒤에서 해줘.” “네, 선배님. 원하는 대로요.”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등 뒤에서 밀려드는 저돌적인 자극이 척추를 따라 찌릿하게 내달렸다.어린 남자의 거친 패기를 즐기는 것은 정민에게 그저 팽팽하게 당겨진 일상의 지루함을 터뜨리는 가벼운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엎드린 그녀의 시선이 대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로 향했다. 화면 속에는 막 사전 녹화를 마친 초특급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무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압도적인 비주얼, 거친 짐승 같은 피지컬, 완벽한 성량까지. 단숨에 가요계를 씹어 삼킨 사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정민의 허리를 굳건히 잡고 속도를 올리던 후배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헐떡였다.“······너, 에스트렐라랑 친해?”정민이 아래에서 밀려드는 쾌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낮게 묻자, 후배는 허탈한 한숨을 섞어 쓰게 웃었다.“아니요······ 같이 데뷔했지만 솔직히 넘사벽이라. 이제는 그냥 우러러볼 뿐이죠.” “너희도 꽤 대단하잖아.” “저희는 소속사 빨로 버티는 중이죠. 듣기로는 저 에스트렐라 멤버들, 집안까지 전부 엄친
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직접 안고 병원까지?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태하 씨가 나를 고, 고, 공주님처럼?”“대박 멋졌다니까요. 완전 영화 한편 찍었죠.&rd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 “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 “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 “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 “휴······ 화야.” “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
경신이 너무 진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기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정적을 비웃듯 다시 경신에게 다가와, 만개한 노란 국화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예쁜아, 우와. 감동인데? 나 방금 눈물 날 뻔했잖아. 그래, 고마워.”오늘 경신은 도윤의 낯선 민낯을 보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좋았던 기억조차 얼룩질까 두려워 더는 과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그를 폄하하는 것도 멈추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그때, 눈치 없는 현수가 다시 다가와 경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너, 볼일 끝났으면 어서 꺼져. 시시한 너 따위를 상대할 정도로 여기 사람들 한가하지 않거든? 설마 관심 끌어보려고 아픈 척 연기한 건 아니지?”아, 저 어여쁜 입술에 칼날이라도 달린 걸까. 사람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말을 어쩜 저리도 찰지게 할까. 아마 태하나 도윤이 경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견디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경신은 아가들에게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현수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시시하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원래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은 거에요.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면 얼굴 더 못생겨져요.”여자들만의 서늘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역시나 경신이었다.“야! 너 뭐라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현수가 다시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찰나, 쾅ㅡ! 태하가 과격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굉음을 냈다.“아, 시끄럽게.”의자 하나로 상황을 평정한 태하는 나른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한지 경신의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가 다정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순간이었다.“아, 놀라라. 태하 씨, 젊어서 그런가 힘이 넘치시네?”“자자! 나도 피곤하고 지쳤다. 오디션 마무리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얼른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