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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억의 빈자리에 채워지는 익숙함]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0 11:19:12

드디어 일주일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 경신은 퇴원 수속을 밟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절차를 밟기도 전에 이미 모든 병원비 정산과 수속이 끝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규련 오빠가 이렇게까지 꼼꼼하고 매너가 좋았다니.’

게다가 병실 안에는 그동안 그가 사다 날라 준 맛있는 먹거리들로 짐까지 한가득 늘어 있었다.

“화야야, 올 때는 빈손이었는데 갈 때는 왜 이렇게 된 거지?”

“사람은 숨만 쉬어도 살림이 늘어나게 돼 있어요.”

화야는 냉장고를 열어젖히며 알뜰살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 속 화야와 규련은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경상도 남녀였다. 

멀리서 보면 늘 싸우는 것만 같아 ‘저러다 헤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적도 많았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세상 다정한 커플이 따로 없었다. 

이래서 인생에서 좋은 친구는 시간을 두고 겪어봐야 하는 법이라 느끼며, 퇴원 준비를 서둘렀다.

***

한편, 현수는 아무도 없는 JJ엔터테인먼트 휴게실에서 도윤과 입을 맞추면서도 힐끔힐끔 유리창 너머 복도를 살폈다.

요즘 자신은 한가했고, 시간도 넘쳐났다. 그렇다 보니 도윤과 밀회를 즐기며 은밀하게 스킨십을 나누는 이 여유로운 시간도 마냥 환영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광경을 들킨다 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대형 스캔들이 터져 이슈가 된다면 더 좋을 일이었기에, 그녀는 몸을 쭈뼛거리면서도 도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현수 씨, 되게 섹시하네. 군살이 없어.”

그룹 활동 시절에는 죽어라 해도 안 빠지던 살이, 요즘은 도윤과의 연애 놀음에 입맛이 없어 절로 '뼈말라' 상태가 되어 있었다. 

현수는 슬그머니 허리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는 도윤을 향해 눈을 슬쩍 흘기면서도, 오히려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밀착했다.

“아, 그런데 우리 듀엣곡 말이에요.”

“안 그래도 JJ에서 이미 발표했던 곡으로 리메이크하라고 하더라고. 내가 그래서 좀 짜증을 냈어.”

그래도 신곡으로 하나 빼주지. 기왕이면 요즘 최고가를 치고 있는 태하 작곡가의 곡이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현수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은 채 도윤의 가슴팍을 살살 밀어붙이며 그를 압박했다.

“도윤 씨가 힘 좀 써봐요, 응? 이왕이면 명곡 하나 탄생하면 좋잖아요? 예를 들면 태하 님 곡이라든가······.”

귓가에 바짝 다가가 악녀처럼 살랑거리며 유혹을 건네자, 도윤이 입술을 삐죽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에이, 요즘 태하 님은 연애하다 차인 사람처럼 완전 저기압이라고 봉 실장님이 그러더라고.”

그 말에 현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움찔하며 도윤의 목을 감쌌던 손에 힘이 팍 들어갔다.

“어? 그때 여친 있지 않았어요?”

“아, 뭐······ 잘 안됐나 보지.”

그 대단하고 오만한 남자가 설마 여자한테 차였다고? 아마 생일 파티 때 봤던 경신이라는 어린 여자애에게 공을 들이는 것 같았는데.

감히 태하를 차버리다니. 충격도 잠시, 현수의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꼬리를 치며 올라갔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 절로 가슴이 뛰고 심호흡이 빨라졌다.

‘그럼······ 지금 솔로라는 건가? 당장 MH엔터테인먼트로 가서 곡이나 달라고 태하 님 좀 만나봐야겠어!’

도윤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현수의 머릿속엔 이미 태하를 향한 헛된 욕망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

퇴원 수속을 마친 경신과 화야는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택시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향하려는데, 로비 회전문 코앞에서 한규련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빠, 이사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짐이 얼마 없어서 금방 끝났어. 차 가져왔으니까 가자.”

코앞까지 차를 대기시켜 놓은 그의 센스에 경신은 절로 찬사를 내뱉었다. 

“우와, 차 되게 좋다. 그런데 이거 트렁크 어떻게 열지?”

“화야, 내가 알 것 같아. 운전석 옆에 저기 누르면 돼. 아, 차키에도 누르는 버튼 있고.”

“우와, 보살님! 차에 대해 아는 것도 많으시네요!”

경신은 규련도 모르는 버튼을  척척 느낌으로 알아낸 덕분에 무사히 트렁크를 열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입고 있는 옷도 청바지에 남방 하나뿐이었지만 꽤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고급스러운 독일 M사의 검은색 SUV 차량의 온갖 복잡한 버튼도 이상하게 어떤 용도인지 자연스레 알 것만 같았다.

“어쨌든 규련 오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 때문에 돈 많이 쓰셨죠? 계좌번호 문자로 찍어주세요.”

“됐어. 나 돈 쓴 거 없어.”

1인실 입원비를 몇 마디로 퉁 치고 넘어가다니, 대인배가 따로 없었다. 

“아, 그래도 너무 죄송한데······ 살면서 꼭 갚을게요.”

“화야한테 잘해줘. 그럼 된 거야.”

규련은 의젓하게 말하며 학교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운전석에 앉더니 내비게이션을 켰다.

“와, 정말 훌륭한 남자네요. 화야, 넌 전생에 복을 참 많이 쌓았나 보다.”

“또 전생 이야기? 그 이야기는 작작 하세요, 보살님.”

“그런데 왜 자꾸 보살님이래? 이제 내 이름 좀 불러줘.”

“이미 늦었어요. 입에 착착 붙어버렸거든요. 게다가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미래를 안다면 영험한 분이니까 잘 모시라고요.”

황당함에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몰라 경신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결국 화야가 부르고 싶은 대로 두기로 하고, 다시 규련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이 차 진짜 좋네요.”

“우리 건물주님한테 빌렸지.”

아니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면 이렇게 차도 빌려준단 말인지.

“건물주님이 마음씨까지 좋으시네요.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아서 복받으신 분인가 봐요.”

경신은 웃으며 차 안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건물도 가진 사람이 이런 고급차까지 끌다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지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 순간, 머리 한쪽이 지끈! 하고 신호를 보내듯 아파왔다.

‘윽!’

분명 처음 타보는 차여야 하는데, 묘하게 낯설지 않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경신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자꾸만 차 내부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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