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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Author: 슬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등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언니 처소는 참으로 처량하리만치 허름하네요."

강연우가 몸을 돌렸다.

붉은 비단에 화려한 금박을 수놓은 옷자락을 늘어뜨린 모설희가, 아직 부르지도 않은 아랫배를 조심스레 감싸 안은 채 처연한 햇살 아래 서 있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모설희는 일부러 놀란 척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태자 전하께서 동궁의 귀한 보물들을 죄다 제 처소로 보내버리신 걸 깜빡했지 뭐예요. 언니 방에 장식품 하나 남지 않았으니 이리 살풍경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강연우의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져왔지만 강연우는 그 통증을 삼키며 싸늘하게 눈을 들었다.

"네가 여긴 왜 왔느냐?"

모설희는 부드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교태 섞인 웃음을 흘렸다.

"요즘 입덧이 어찌나 심한지 자꾸만 새콤한 게 당겨서요. 듣자 하니 언니가 만드는 매실 다과가 그리 별미라기에 염치 불구하고 몇 개 얻어먹으러 왔답니다."

강연우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곁을 지키던 시녀 청음이 결국 참지 못하고 강연우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설희 낭자! 우리 아가씨는 엄연히 국혼을 앞둔 태자비이십니다. 고작 측비로 들어올 몸이면서, 감히 승상가의 적녀이자 태자비 되실 분께 수라간 궁녀나 할 일을 시키려 드십니까? 동궁의 기강이 언제부터 이리 무너졌단 말입니까!"

짝!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청음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손을 거둔 모설희의 눈매에 서슬 퍼런 살기가 돋아났다.

"주인이 말을 하는데 어디서 천한 계집년이 주둥이를 놀려? 여봐라, 저년의 입을 백 대 쳐라!"

강연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청음의 앞을 막아섰다.

"네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손을 대느냐!"

모설희는 붉은 입술을 뒤틀며 생긋 웃었다.

"제가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녀가 나직하게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무현아."

찰나의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땅을 딛고 나타났다.

순간, 강연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

서제겸의 최측근이자 황실 최고의 무공을 지닌 호위무사. 십여 년간 그의 그림자가 되어 곁을 지키던 자였다.

'서제겸이... 이 자마저 모설희에게 내어주었단 말인가.'

무현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으로 강연우의 두 팔을 강하게 제압했다. 그사이 험악한 덩치의 노비들이 달려들어 청음을 바닥에 짓눌렀고, 이내 무자비한 매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철썩! 철썩!

청음의 입꼬리가 찢어지며 선혈이 튀었다. 그러나 그녀는 악에 받친 눈으로 모설희을 노려볼 뿐,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만하거라!"

강연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 만들어 줄 테니... 청음이를 놓아주거라."

모설희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매질을 멈추게 했다. 포박이 풀리자마자 청음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강연우의 발치에 엎어졌다.

"아가씨, 안 됩니다… 존귀하신 아가씨께서 어찌 저런 것에게…"

강연우는 허리를 굽혀 거친 옷소매로 청음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속삭였다.

"나는 괜찮다."

처소에 딸린 작은 주방.

강연우는 아직 아물지 않은 가슴의 상처가 짓눌리는 통증을 삼키며 밀가루를 치대고, 속을 채워 찜통에 올렸다.

첫 판이 하얀 김을 내뿜으며 완성되었을 때, 모설희는 정자에 앉아 느긋하게 내리는 눈을 감상하고 있었다.

"너무 달아요."

그녀는 겨우 한 입 베어 물고는 과자를 흙바닥에 툭 던져버렸다.

두 번째 판을 대령하자, 모설희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신맛이 너무 과해 이가 시리네요."

세 번째 판이 나오자, 아예 접시째 바닥으로 엎어버렸다.

쨍그랑.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언니, 일부러 제 입덧을 핑계 삼아 절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지요?"

강연우의 두 손은 뜨거운 김에 데어 붉게 짓무른 상태였다. 그럼에도 동요 없이 평온하게 물었다.

"원하는 맛이 정확히 무엇이냐."

"언니, 왜 그렇게 억울한 표정을 지으세요?"

모설희는 돌연 강연우의 귓가로 바짝 다가왔다. 뱀처럼 매끄럽고 서늘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사실 다과 따윈 관심 없어요. 전 그저..."

"그 옛날 제겸 오라버니를 대신해 칼날을 받아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 오만방자한 승상댁의 아가씨께서, 대체 어디까지 비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강연우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먹을 생각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다."

그녀가 냉정하게 몸을 돌려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풍덩!

강연우는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모설희가, 제 발로 그 서슬 퍼런 얼음 호수 속에 뛰어든 것이었다.

"살려주세요! 전하, 살려주십시오!"

깨진 빙판 아래 차가운 물속에서 모설희는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때, 공기를 가르는 검은 잔상 하나가 나타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얼음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시 후, 서제겸이 모설희를 품에 안고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전하… 언니를 탓하지 마세요… 결코 고의가 아니었을 거예요…"

서제겸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흡사 칼날처럼 매섭게 강연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설희가 아이를 품은 걸 네가 정녕 몰랐단 말이냐!"

강연우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손끝이 서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연우야. 내가 말했지 않았더냐. 설희를 동궁에 들인 건 오직 짓밟고 보복하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런데 왜 구태여 시비를 가리려 드느냐."

강연우의 입술 사이로 서글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복이라고요? 그 지독한 보복의 결과가… 아이란 말입니까?"

"추워요... 오라버니, 저 너무 추워요…"

모설희가 가녀리게 신음하며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자, 서제겸의 미간에 숨길 수 없는 애틋함과 심통이 스쳤다.

그가 다시 눈을 부릅뜨고 강연우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이리 속이 좁고 투기가 심해서야, 어찌 일국의 태자비 자리를 감당하겠느냐! 동궁의 법도는 엄한 법. 소란을 피운 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제겸은 거칠게 강연우의 어깨를 밀쳤다.

콰당!

깨진 얼음 호수 속으로 강연우의 몸이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머리끝까지 밀려드는 얼음물. 뼈마디를 잘게 부수고 골수를 찌르는 듯한 극통이 온몸을 덮쳤다.

강연우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고개를 처들었을 때, 저 멀리서 서제겸의 서늘하고 잔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진을 채우기 전까진, 누구든 뭍으로 끌어올리지 마라."

섣달 한겨울의 얼음 호수는 살점을 저미는 칼날 같았다.

사지의 감각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강연우의 머릿속엔 역설적이게도 그 아득한 유배길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폭설이 대지를 집어삼키던 날.

그녀는 고열로 혼절한 서제겸을 등에 업고 발이 푹푹 빠지는 빙판 위를 한 걸음씩 걸었었다. 얼음이 깨져 차가운 구렁텅이에 빠지면서도 몸을 던져 그를 지켜냈다. 마침내 구조되었을 때, 그는 강연우의 손을 꽉 쥐며 오열했었다.

"연우야, 내 평생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

이제야 깨달았다.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던 그 비장한 약조는, 결국 다른 여인을 위해 자신을 이 차가운 얼음 호수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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