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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Von:  별Abgeschlossen
Sprach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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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가슴 아픈 사랑

반전

편애/이기적인

이성적인

null

후회

로얄

변방의 경계가 뚫리자, 고씨 가문의 젊은 장군이 출사표를 던졌다. '적국을 파멸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노라.' 아바마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그에게 묵직한 포상을 내리기로 하셨다. 경성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도진과 나의 하나뿐인 언니가 서로 마음이 통한 사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나를 선택했다. 혼례를 치른 첫날밤. 그는 침상 앞에 서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전쟁은 죽을 고비가 태반이다. 난 채영이가 그런 사지로 내몰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헌데 거역할 수 없어 너를 선택했을 뿐이다. 너한텐 미안하게 되었구나." 나는 잠시 침묵하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저는 무엇입니까?" 그가 서늘하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빚을 졌다 생각하거라." 잠시 후, 그가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도진은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사람이 있었음을. 그러니 그와 나 사이에 빚 따위는 없었다. 변방에서 함께 보낸 피비린내 나는 칠 년의 세월. 암살을 당할 뻔하고, 습격을 받으며, 상처를 입고,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나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고도진이 군심을 잡도록 돕고 뒤를 수습했다. 심지어 그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맬 때, 맹독을 다스릴 뱀의 쓸개가 필요하다 하여 친히 독사굴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도진은 대승을 거두고 오랑캐를 무찔러 영토를 넓혔다. 개선문으로 들어선 그에게 아바마마께서는 진북왕이란 칭호를 내리시며 원하는 바를 물으셨다. "소인, 간절히 청하옵나이다. 지금의 아내를 첩으로 강등하고, 채영 공주를 정실로 삼게 해주시옵소서.” 그는 끝내 언니를 곁에 두고자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나 역시 마침내 오랜 소원을 이루고,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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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itel 1

제1장

고도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넓은 대전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아바마마의 얼굴에 머물던 웃음기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윽고 분노로 가득 찬 호통 소리가 대전을 뒤흔들었다.

"네놈이 감히 공주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기생집의 천한 기생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고도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바닥에 엎드려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공주마마를 오랫동안 연모해 왔사옵니다. 서역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공주마마께서 소인과 함께 고생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사옵니다. 이제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왔으니 소인에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뿐이옵니다."

"그 어떤 하사품도 원치 않사옵니다. 그저 폐하께서 소인의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옵니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청에 용상에 앉은 아바마마의 낯빛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가 나라는 딸을 위해 분노한 것이 아님을.

그저 황실의 체면과 군주의 위엄이 짓밟힌 것에 모욕감을 느꼈을 뿐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

신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렸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조롱이 묻어 있었다.

나의 서방이라는 자가...

내 눈앞에서 나를 첩으로 강등하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청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저 가만히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아바마마! 도진 오라버니가 돌아오셨다면서요?"

붉은 비단옷을 차려입은 윤채영이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몸을 장식한 값비싼 장신구들이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조정의 팽팽한 긴장감을 단숨에 깨뜨리며 대전을 오가는 그녀의 행동에도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무섭게 일그러져 있던 아바마마의 미간조차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윤채영은 나를 스쳐 지나치며 힐끗 눈길을 주었다. 마치 보잘것없는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아바마마의 곁으로 다가가 다정하게 귓속말을 건네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앙탈을 부렸다.

"아바마마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전 도진 오라버니가 아니면 절대 시집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정 안 된다면, 제가 첩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사옵니까. 어차피 도진 오라버니는 제가 첩이라고 해서 홀대할 분이 아니신걸요."

아바마마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철없는 소리! 명색이 제국의 공주가 어찌 남의 첩실로 들어간단 말이냐."

윤채영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나를 향한 시선에는 서늘한 야유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평처(平妻)는 어떻사옵니까..."

...

결국 혼사는 윤채영이 고도진의 평처로 들어가기로 결정났고, 삼 일 뒤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칠 년간 변방을 지키고 고된 여정 끝에 돌아왔건만.

내가 왕부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내 서방이 다른 여자를 맞이하는 걸 돕는 일이었다.

장부를 정리하고 혼례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을 때였다.

고도진이 하인들을 대동한 채 화려한 보석 상자들을 들여왔다.

경성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전부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희귀품들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된 봉관이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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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도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넓은 대전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아바마마의 얼굴에 머물던 웃음기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이윽고 분노로 가득 찬 호통 소리가 대전을 뒤흔들었다."네놈이 감히 공주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기생집의 천한 기생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고도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바닥에 엎드려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소인은 공주마마를 오랫동안 연모해 왔사옵니다. 서역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공주마마께서 소인과 함께 고생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사옵니다. 이제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왔으니 소인에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뿐이옵니다.""그 어떤 하사품도 원치 않사옵니다. 그저 폐하께서 소인의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옵니다."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청에 용상에 앉은 아바마마의 낯빛이 무섭게 일그러졌다.하지만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아바마마가 나라는 딸을 위해 분노한 것이 아님을.그저 황실의 체면과 군주의 위엄이 짓밟힌 것에 모욕감을 느꼈을 뿐이다.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신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렸다.그런 그들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조롱이 묻어 있었다.나의 서방이라는 자가...내 눈앞에서 나를 첩으로 강등하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청하고 있다.그리고 나는 그저 가만히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바로 그때,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아바마마! 도진 오라버니가 돌아오셨다면서요?"붉은 비단옷을 차려입은 윤채영이었다.그녀가 걸을 때마다 몸을 장식한 값비싼 장신구들이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조정의 팽팽한 긴장감을 단숨에 깨뜨리며 대전을 오가는 그녀의 행동에도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심지어 무섭게 일그러져 있던 아바마마의 미간조차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윤채영은 나를 스쳐 지나치며 힐끗 눈길을 주었다. 마치 보잘것없는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아바마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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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봉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순간,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게 아려왔다.세상 어느 여인이 화려하고 성대한 혼례를 꿈꾸지 않겠는가.하지만 애석하게도.내게는 이번 생에 결코 허락되지 않을 꿈이었다.나는 이내 쓸데없는 감상을 떨쳐냈다."소첩이 오늘 밤 안으로 전부 확인하여, 내일 아침 일찍 황궁으로 올려 보내겠사옵니다."살그머니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손끝을 움직여 하던 일에 집중했다.그때, 고도진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이 물건들이 황궁으로 갈 것이라는 걸 네가 어찌 아느냐? 네게 주려고 준비한 것일 수도 있지 않으냐."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소첩, 제 분수 정도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부디 소첩을 놀리지 마시옵소서. 사흘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사온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이옵니다."고도진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그렇다면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내일 이것들을 모조리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거라."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소매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문가에 다다랐을 때였다.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도자기병 하나를 꺼내 옆에 내려놓았다."밤이 깊었다. 그러니 일찍 쉬거라. 혼례 준비는 내일 해도 늦지 않다."그 도자기병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경성에서 이름난 성심당의 물건이었다.귀부인들만 쓴다는 최고급 손 연고.고도진이 떠난 후에도, 나는 쉬지 않았다.사흘은 정말이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할 시간도 따로 남겨두어야 했으니까.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장부 정리가 끝났다.나는 그것을 집사에게 넘겼다.하인들이 내 지시대로만 움직인다면, 앞으로의 혼례 준비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황궁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간단히 씻고 채비를 마친 뒤 하인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했다.무려 칠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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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언니가 고도진을 설득해서 제게 휴서를 내리게 한다면, 오히려 더 고맙겠습니다."이 말이 윤채영의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도대체 너 같은 바보 멍청이가 도진 오라버니에게 무슨 미약을 쓴 건지 모르겠구나. 내가 어제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널 내치지 않으시겠다잖아!"그 말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랐다. '고도진이 나를 내치지 않으려 한다고? 대체 왜?'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윤채영의 입가에 다시금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그렇다고 네 자리가 탄탄할 거라 착각하지 마. 마지막으로 경고할게. 당장 도진 오라버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거야."이윽고 윤채영의 표정이 갑자기 공포에 질린 듯 변하더니, 그녀의 몸이 호수를 향해 기우뚱 넘어갔다.그 찰나.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꾸미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풍덩!"꺄악!"윤채영의 비명이 물소리에 묻혀 퍼지는 것과 동시에, 벼락 같은 고함이 정적을 깨뜨렸다."윤채원, 지금 무슨 짓이냐!"아바마마와 고도진이 궁인들을 거느리고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었다. 윤채영이 나를 모함하는 수작이 아무리 어설프다 한들.저들은 늘 내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의만을 내던졌다.심지어 똑같은 수법을 또다시 쓴다 해도, 그들은 어딘가 수상하다는 의심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궁을 떠난지 칠년이나 되었건만, 여전히 천박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구나. 나에게 너 같은 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형벌이로다."아바마마가 화를 참지 못하고 가슴을 거칠게 헐떡였다.그 사이 윤채영은 어느새 고도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더 이상 변명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잠시 후, 아바마마가 소매를 거칠게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고도진, 고씨 가문의 가법이 엄격하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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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나는 비틀거리며 침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윤채영은 두툼한 여우 가죽 옷을 두른 채 탕약을 홀짝이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승리자라도 된 양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무릎 꿇어라. 채영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해. 그러면 오늘 일은 넘어가 주지.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법으로 다스릴 테니 그리 알거라."고도진이 무심하게 내뱉었다.하지만 나는 단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제가 한 일이 아닌데, 어찌 사과하라는 말씀이시옵니까."고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순간,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늘 순종적이었던 내가 말대꾸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윤채원, 대체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어릴 적부터 줄곧 채영이를 질투해 온 건 그렇다 치자. 앞으로는 너희 둘 다 내 부인이 될 터인데, 대체 무엇이 부족해 또 질투를 부리는 게냐? 정녕 널 첩으로 강등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그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질책하는 어조에는 짙은 분노가 묻어났다.한편, 나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렇다면 전하, 부디 제게 휴서를 내려 주시옵소서."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에는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고도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윤채원, 어찌 그리 천박하게 구는 것이냐! 채영이는 좋은 뜻으로 너와 우애를 다지려 했거늘 너는 그저 채영이를 해칠 궁리만 하는구나. 역시 채영이 말이 맞았어. 너같이 어미 없이 자란 천것은 단단히 버릇을 고쳐놔야 해. 오늘, 무릎을 꿇을 것이냐 말 것이냐."변방의 장수들조차 지금의 고도진을 보았다면 오금이 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덤덤했다."전하, 부디 휴서를 내려 주시옵소서."고도진의 이성이 마침내 툭 끊어졌다."휴서? 꿈도 꾸지 마라! 여봐라, 당장 가법으로 다스려라! 왕비가 고집을 꺾을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마라!"나는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살을 에이는 찬 바람 속에서 가혹한 채찍과 매질이 사정없이 쏟아졌다.끔찍한 고통에 의식이 점점 희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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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하인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얼음장 같은 바늘이 되어, 붉은 비단으로 가득한 신방을 찢고 들어왔다.같은 시각.나는 왕부에서 가장 외딴 별채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가사약의 효능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맥박이 멈추고 숨결이 사그라들었다.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마치 정말로 황천길에 들어선 듯했다.담장 몇 개를 사이에 둔 신방은, 틀림없이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을 것이다.고도진의 손은 아직 윤채영의 면사포에 머물러 있었다.원앙이 수놓아진 붉은 면사포가 살짝 들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공들여 화장한 그녀의 반쪽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그는 마치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화려한 촛불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그때, 윤채영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거칠게 고도진의 손을 쳐낸 그녀는 곧바로 문가의 하인을 향해 매섭게 호통을 쳤다."방자하구나! 진북왕부의 유일한 안주인은 바로 나다! 윤채원은 그저 왕비 자리나 꿰차고 있던 쓸모없는 년 아니더냐!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어찌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당장 네놈들의 목숨을 거두기 전에 입 다물지 못할까!"쿵!하인은 사색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었다.이윽고 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연신 목숨을 구걸했다.그럼에도 윤채영은 끊임없이 악담을 퍼부어댔다.고도진의 몸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그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었다.그저 벼랑 끝에 몰린 듯한 끔찍한 불안감이었다.마치 수년간 그를 지탱해 주던 보이지 않는 기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의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칠 년 전 변방의 흙먼지.독사굴에 불던 피비린내.깊은 밤 군영을 밝히던 등불.그리고 내가 그를 대신해 맞았던 칼날과, 그를 위해 구해온 뱀의 쓸개까지...그가 애써 외면하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그는 내가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마치 말 없는 돌멩이처럼,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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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손끝이 내 피부에 닿은 순간, 뼈를 깎는 듯한 차가운 냉기에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채원아..."그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그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제발 나 겁주지 마라. 응?"그가 손을 뻗었다.내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이내 맥박을 짚었다.느껴지지 않았다.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 순간, 고도진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쿵!그가 침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두 손으로 내 옷소매를 사력을 다해 꽉 움켜쥐었다.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이윽고 칠 년 간 변방에서 함께 보낸 수많은 기억들이 성난 해일처럼 밀려와 그를 집어삼켰다.처음 군을 따라나섰던 날.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전장에서 입술이 파랗게 질려 떨면서도, 끝내 병사들의 해진 옷을 기워주던 나의 모습.군영이 기습을 당했던 날. 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억지로 미소 지으며 부디 옥체를 보존하라 말하던 그 순간.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날. 홀로 독사굴에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뱀의 쓸개를 구해왔건만, 눈을 뜬 자신은 오직 윤채영만을 찾으며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그 야속함.그리고 그들의 첫날밤. 차가운 목소리로 빚을 졌다고 읊조리던 날과, 윤채영에게 털옷을 벗어주라 명하던 단호함, 가법으로 다스리라 포효하던 광기 어린 분노까지.그가 애써 외면하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나의 모든 희생이, 이제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참혹하게 난도질하고 있었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가 목메어 울먹였다.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너한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를 그렇게 고생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제발 일어나 봐, 응? 내가 다 보상하마.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다 너에게 줄 테니까, 제발 죽지 말거라..."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절망적인 오열을 토해냈다.그는 차갑게 식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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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아무도 감히 나서서 그를 말리지 못했다.모두가 잠든 깊은 밤.빈소에는 오직 고도진만이 남아 있었다.그가 손을 뻗었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관을 어루만졌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이곳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바로 너를 찾으러 가겠다..."하지만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그가 깊은 후회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 황후마마가 보낸 자들이 이미 은밀히 묘지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칠 년 전의 약조대로였다.그들은 어둠을 틈타 내 무덤을 파헤치고, 관 속에서 나를 꺼냈다.무리를 이끈 자는 황후마마의 심복, 이씨 어멈이었다.죽음에서 돌아온 나를 보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이내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공주마마, 황후마마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공주마마는 더 이상 황실의 사람이 아니며, 두 번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잣돈이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 살아가십시오."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칠 년의 인내.칠 년의 희생.칠 년의 기다림.마침내 이 순간, 그 모든 것에 마침표가 찍혔다.나는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이씨가 데려온 자들이 미리 준비된 마차에 나를 태웠다.이윽고 마차는 서쪽을 향해 내달려 경성을 벗어났다.내 애증이 얽힌 그곳을 영원히 뒤로한 채.밤낮없이 이어지는 고된 여정이었다.그렇게 한 달 남짓이 지났을 무렵.마침내 마차가 강남의 한 작은 마을에 멈춰 섰다.나는 마차에서 내렸다.눈앞에 펼쳐진 익숙하고도 낯선 골목길을 마주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이곳은 바로 심건우의 고향이었다.칠 년 전, 나는 한 시회에서 심건우를 처음 만났었다.그는 그해 조정을 휩쓴 장원이었다.드높은 재학을 갖춘 데다 천하를 품을 만큼 원대한 뜻을 지니고, 변법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사내.나는 그의 이상과 뜨거운 열정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 역시 나의 총명함과 강인함을 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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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심건우,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상관없어. 남은 평생, 내가 네 곁에 있을게."심건우는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그래."그날따라 햇살은 눈부시게 따스했고,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우리는 이 아담한 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황궁의 음습한 권력 암투도, 왕부의 피 말리는 기 싸움도, 변방의 핏빛 칼부림도 없는 곳.이곳엔 오직 소박한 일상의 평온함과 서로의 체온을 보듬는 온기만이 맴돌았다.심건우는 마을에 작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그리고 나는 집안일을 도맡으며 간간이 그를 도와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한가로운 날이면 강가를 함께 거닐고, 나란히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시와 노래를 나누고, 다가올 미래를 함께 꿈꾸었다.비록 가진 것 없는 소박한 삶이었지만 그 하루하루는 벅찬 행복으로 가득했다.일 년 뒤.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얻었다.이름은 심온유.늘 평안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다.반면, 경성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내가 '죽은' 후, 고도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그는 왕부의 하인들을 대부분 내쫓고 화려했던 저택을 냉궁처럼 삭막하게 방치했다.그 어떤 연회에도, 조정의 국정에도 완전히 손을 뗀 채 온종일 내 위패 앞을 지키며 폐인처럼 시들어 갔다.윤채영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첫날밤이 지난 후.그는 단 한 번도 윤채영의 처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그녀가 정성스레 보낸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간곡한 알현 요청마저 차갑게 무시했다.처음에는 윤채영도 조신하고 현숙한 척 연기를 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하지만 어떤 노력도 고도진의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윤채영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평생을 오만방자하게 살아온 공주가 이런 수모와 냉대를 견딜 리 만무했으니까.혼례를 올린 지 일 년이 되던 날.고도진이 돌연 출가하여 승려가 되겠다고 선언했다.남은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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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그리고 너."고도진은 윤채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에는 짙은 혐오감이 가득했다."오늘부로 너와 나는 끝이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그대로 윤채영의 뺨을 향해 매몰차게 후려쳤다.찰싹!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윤채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무자비한 따귀에 그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도진을 쳐다보았다."... 감히 날 쳤어?"고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인 윤채영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홱 돌려 황궁을 향해 뛰쳐갔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갔다.그는 본래부터 고도진의 공이 황권을 위협할 만큼 커진 것을 몹시 꺼림칙하게 여겨왔었다. 그런데 이제 감히 공주를 구타하고 황실의 위엄마저 짓밟았으니...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그는 당장 어명을 내렸다."당장 저놈을 옥에 가두어라!"고도진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은 즉각 변방으로 전해졌다.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이 일었다.변방의 장수들은 대부분 고도진이 직접 발탁하고 키워낸 자들이었다.그렇기에 그들은 고도진을 향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품고 있었다.주군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자, 장수들의 분노가 맹렬히 들끓었다.그들은 빗발치듯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고도진의 석방을 청원했다.심지어 변방에서 직접 군대를 집결시키는 자들마저 생겨났다.당장이라도 궁으로 쳐들어가 고도진을 구출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그렇게 조정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과거 구 귀족들이 심건우를 모함했던 까닭은 단 하나였다.그가 추진하려던 변법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협했다는 것.모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아바마마는 그제야 깨달았다.자신이 지난 수년간 그토록 철저히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을.심건우가 정말 역모를 꾀한 줄 알았다.고도진이 윤채영을 진심으로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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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심건우의 공적 덕분에 나 역시 정경부인으로 책봉되었다.평온한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어느덧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우리 아들 온유는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으로 자라났다.심건우는 여전히 나라와 백성을 가슴에 품은 승상이었고, 나는 그런 그의 곁을 온화하게 지키는 부인이었다.어느 날, 나는 온유를 데리고 저잣거리에 다과를 사러 나갔다.길모퉁이에 들어섰을 때였다.누더기를 걸친 채 몰골이 흉흉한 걸인 하나가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몸에서는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고, 헝클어진 머리칼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그가 앙상하게 마른 손을 내밀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부인, 제발 적선 좀 베풀어 주십시오. 먹을 것 좀 주십시오..."온유는 깜짝 놀라 내 등 뒤로 쏙 숨어버렸다.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녀를 시켜 은전 몇 잎을 꺼내 그에게 건네라 일렀다.하지만 그는 은전을 받지 않았다.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지독히 낯선 얼굴이 드러났다.고도진이었다.오 년 만에 마주한 그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과거의 늠름하고 위풍당당했던 기백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오직 얼굴 가득 깊게 파인 풍상과 처절한 회한만이 맴돌고 있었다.심지어 두 눈은 끔찍하게 탁해져 있었다.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찢어질 듯한 고통과 애절한 구걸로 가득했다."채원아..."그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이윽고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정말 너구나... 네가 살아 있었어..."한편,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는 바닥에 꿇어앉아, 나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그때는 내가 미안했다. 눈이 멀어서 네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어. 너를 홀대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너에게 상처를 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그의 말이 띄엄띄엄 이어졌다.목소리에는 뼈저린 회한이 서려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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