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중신장지
이해리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저 혼인신고서를 내려오려고요.”

정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의자를 밀어냈다.

훤칠한 키에 다리가 길어서 발끝만 살짝 들어도 쉽게 선반 위의 서류철에 손이 닿았다.

정지안은 혼인신고서를 쓱 훑어보다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는 혼인신고서를 이해리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군요.”

이해리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서류를 받아 들며 가볍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주버님.”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서 혼인신고서를 받아 들고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느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이 결혼이 얼마나 허망한 농담인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정도원의 그 지독한 사랑 연기 속에는 처음부터 세 사람이 공존했던 것이다.

정지안이 시선을 내렸다.

이해리보다 키가 훨씬 커서 그녀의 동그랗고 예쁜 정수리만 보였다.

그녀는 새하얀 손으로 혼인신고서를 꽉 잡고 있었는데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버렸다.

남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혼인신고서는 왜 가져가는 거죠?”

“아, 그냥 집에 가져다 두려고요.”

이해리는 서둘러 변명을 둘러댔다.

남자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데일 것 같지만 끝내 아무런 제스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소매 단추를 고쳐 매고 문밖을 나섰다.

이해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수납장에 등을 기댔다.

허벅지 안쪽에는 여전히 지독한 열기가 남아 있어 황급히 치맛자락을 끌어 내리고 혼인신고서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태연하게 문밖을 나섰다.

정도원은 아직도 뒤 정원에서 몇몇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이해리가 담담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몇몇 친척이 정도원에게 얘기했다.

“지안이가 며칠 전에 왔으면서 오늘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대.”

정도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비행기로 온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뭐 경매 같은 데 간 모양이야. 나도 얼핏 들었는데 골든 경매장에 갔다나 뭐라나.”

“에이, 아닐걸요. 저도 그날 거기 있었는데 전혀 못 봤어요.”

정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리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베일에 싸인 217번 룸의 손님이 떠올랐다. 설마 정지안이 그녀를 위해 최고가를 지른 미스터리 손님일까?

다만 그녀는 금세 그 생각을 짓눌렀다.

둘은 딱 한 번 만났을 뿐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다. 기껏해야 아주버님과 제수라는 빈껍데기만 씌워졌을 뿐인데 정지안이 아무리 대단해도 굳이 그녀를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정도원도 형이 미리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수상한 그 손님은 절대 정지안일 리가 없다.

이해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 정도원이 그녀를 데리고 정지안에게 다가갔다.

“엄마, 형, 우린 먼저 갈게. 조만간 가족끼리 따로 만나서 식사해요.”

정지안은 의자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요즘 인수 건으로 바쁘니 식사는 천천히 잡고 오히려 너 말이야.”

불현듯 그가 고개를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돌변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엉뚱한 데로 새지 말고.”

형으로서의 경고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정도원은 어릴 때부터 형에게 눌려 살았던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뭘... 회사도 잘 운영하고 있어. 못 믿겠으면 요 이틀 재무제표 보여줄게. 마음껏 확인해봐.”

“회사만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정지안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해리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 엉뚱하고도 기이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도원에게 듣기로 정지안은 늘 밖에 머물지만, 집안의 모든 일을 훤히 꿰뚫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도원이 밖에서 저지른 그 짓거리들도 다 아는 걸까?

“알았어, 형. 해리랑도 잘 지낼게.”

정도원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해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지안의 시선이 그들의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이해리는 이 인간과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피하고 싶어 무심코 손을 털어냈다.

정도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또다시 손을 잡으려 했다.

자신의 행동이 정도원에게 망신을 줄 것을 예상했기에 이해리는 정지안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정도원은 아까 그 온순하고 공손한 태도를 싹 거두어들이고 또다시 황태자가 된 것마냥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어른 행세하면서 날 가르치려고 들지! 어릴 때부터 늘 이런 식이야. 해외에서 잘 나가면 뭐? 나도 국내에서 나쁘지 않아! 해성에서 감히 나한테 덤빌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정도원은 습관처럼 담배 한 대 꺼내 물려다가 이해리를 보고는 참았다.

“요 몇 년 동안 내 회사가 잘 나가는 게 다 지안 형 덕분이라고 하는데 웃겨 정말! 왜 뭐든 다 형 공로냐고? 그리고 너도 말이야. 아까 왜 일부러 손 놨어? 형 앞에서 나 꼽 주려고 작정했니?”

정도원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고 말투에도 불만이 역력했다.

이해리는 듣는 내내 미간을 찌푸렸다.

요 몇 년간 정도원이 해성에서 얼마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람을 얕잡아보는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배후에 정지안의 세력이 없었다면 정도원은 얼마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형제 우애가 좋을 줄 알았는데 정도원은 겉으로만 형을 존중할 뿐 속으로는 이토록 반항심이 클 줄이야.

다른 건 제쳐 두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위선적으로 손을 잡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해리는 혼인신고서가 든 가방을 껴안고 끝내 한 마디 내던졌다.

“오랜만에 손잡는 거라 적응이 안 됐어.”

차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긴, 두 사람의 마지막 스킨쉽이 언제였는지 이해리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정도원은 미간을 좁히며 담배꽁초를 뚝 부러뜨렸다.

“뭐라고?”

그녀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앞으로 이런 불필요한 스킨십은 좀 줄였으면 좋겠어. 기분 별로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청을 찢는 듯한 급브레이크 소리가 울렸다.

차가 굉음을 내며 인적이 드문 길가에 멈춰 섰다.

이해리는 관성에 밀려 창문에 부딪힐 뻔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소리쳤다.

“미쳤어?”

별안간 정도원이 확 덮쳐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

이해리는 턱이 아프기도 하고 이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그를 밀쳐내려 발버둥 쳤다.

“내 말 틀렸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손잡은 지가 언제인지 넌 기억 나?”

정도원은 마치 금기라도 건드린 듯 눈빛이 어두워졌다.

“너도 설마 제수씨처럼 지안 형한테 홀린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형 앞에서 나랑 선 그으려고 스킨쉽도 거절한 거잖아.”

“정도원, 헛소리 그만해!”

이해리는 분노가 차올라 그를 힘껏 밀쳤다.

“역겨운 짓 저지른 건 너야. 괜히 나한테까지 덧씌우지 마!”

정도원은 지금 만인에게 추앙받는 정지안 때문에 완전히 긁힌 상태였다.

이해리가 발버둥 칠수록 그의 눈빛은 더욱 음침해졌다.

별안간 남자가 고개를 홱 돌리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

이해리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고개를 돌려 피하면서 그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윤유나와 수없이 키스한 저 입술, 생각만 해도 역겨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도원은 고통에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뭐한 거지?’

그는 후회가 밀려와 입술에 피를 머금은 채 이해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미안해, 해리야. 정말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 잘못했어, 자기야.”

이해리는 힘이 다 빠져서 조수석에 기댄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황량함과 혐오감만 차올랐다.

한때 그토록 갈망했던 품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역겨웠다.

“나 놓아줘.”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원아, 제발.”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Pinakabagong kabanata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100화

    여러 해 동안 집에서는 정지안의 혼사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예전에 정지안에게 집안이 비슷한 몇몇 명문가의 아가씨들을 소개해 정략결혼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정지안이 정중하게 거절했다.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심여진도 여러 번 재촉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정지안은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 사업은 점점 더 잘되었지만, 연애나 감정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생각할수록 심여진은 점점 불안해졌다.“역시 너한테 정략결혼 상대를 찾아줘야겠어. 최소한 맞선이라도 보게 해야 해! 계속 연애도 안 하고 여자도 안 만나면 이런 문제가 생기기 쉬운 거야! 고작 동생의 아내에게 휘둘려 이용당하고 있다니!”이 말을 들은 정지안은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느긋하게 말했다.“생각이 너무 많으세요. 어제는 애초에 우리가 이해리 씨에게 잘못한 거예요 저 같은 제정신인 사람이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 일은 정말 크게 번졌을 거예요 그럼 그때는 어떻게 수습하려고 했어요?”어제 일을 언급하자 심여진은 분명히 뜨끔했지만 곧 당당하게 말했다.“지난 일은 그만 말해. 어차피 다 집안일이야. 이해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이 일을 밖에 폭로할 리는 없어.”정지안은 코웃음을 쳤다.이해리는 물론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를 가둔 것도 정씨 가문 사람들이지만 몇 번이고 그녀를 도와준 것도 역시 그들이기 때문이다.오늘 이해리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눈에 감사의 뜻이 다 드러나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정지안의 마음속에 또 한 번 은근한 즐거움이 번졌다.심여진은 그를 노려보며 눈동자를 굴렸다.“됐어, 너랑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내 계획을 전부 따라! 안 그러면 너 같은 아들은 정말 없는 셈 칠 거야!”정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요.”다음 날, 눈을 뜬 이해리는 상쾌함을 느꼈다.회사 지분도 모두 양도했고, 마음에 쏙 드는 집도 교환해 얻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99화

    심여진은 정지안의 팔을 꽉 붙잡은 채 그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정지안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제 말 좀 먼저 들어 줄 수 없어요?”“안 돼! 지금 당장 나랑 집에 가!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난 너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말이 이 지경까지 나오자 이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렇게 하죠. 정지안 씨, 먼저 어머님이랑 가세요.”정지안에게 밥을 사며 감사 인사를 하는 일은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다.게다가 오늘 이해리도 정지안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두 사람이 단둘이 있게 되면 어떻게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고,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이해리도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심여진은 다시 한번 이해리를 매섭게 노려봤다.“우리 집안일에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여우 같은 년, 괜히 위선 떨지 마!”어제 정지안이 이해리를 도와줄 때, 애초에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심여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당시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정도원의 최근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래서 순간적으로 이해리를 그냥 가둬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그건 납치도 아니었다.집에 두면 최소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다 제공할 수 있었고, 그저 그녀의 이름으로 해명 글 몇 개만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충동적인 감정이 가라앉은 뒤, 심여진도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오늘, 정지안이 이해리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자 그만 폭발해 버렸다.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이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녀는 정지안이 돌아보며 두 번이나 그녀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이 일은 분명 후속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리는 그 두 사람이 이 식사를 다시 약속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다행히도 식당 전체가 북적거리고 있었고, 아까 심여진이 말할 때도 마치 난리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어서 특별히 큰 소동을 끌어내지는 않았다.이해리는 웨이터에게 간단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98화

    세 사람은 차에 올랐다.비서가 운전석에 올라 차를 조용한 주차장에 세웠다.정지안은 태블릿을 꺼냈다.긴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클릭한 뒤 이어폰을 착용했다.하지만 막 이어폰을 끼려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다시 벗었다.그리고 이해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시끄럽지 않겠어요?”이해리는 원래 숨을 죽이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으려고 했다.자신 때문에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정지안이 오히려 자신의 편안함을 먼저 신경 쓴다는 것에 놀랐다.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먼저 하세요.”정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폰을 다시 꼈다.잠시 후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그의 목소리는 원래도 낮고 깊었다.그 소리에 이해리는 묘하게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이해리는 귀가 간질거리는 것 같아 어색하게 자신의 귓불을 살짝 만졌다.그 순간 옆에서 말하던 정지안이 말을 아주 잠깐 멈춘 것 같았다.그리고 몇 마디 더 말을 하더니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회의는 약 30분 정도 이어졌다.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다.이해리는 메뉴판을 넘기며 말했다.“이 식당은 처음 와 봐요. 대표 메뉴를 시킬까요?”정지안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이해리는 고개를 들어 의견을 물어보려 했다.그런데 정지안이 아주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순간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며칠 동안 이해리 마음속에 맴돌던 어떤 직감이 이 순간 가장 또렷해졌다.사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정지안이 자신에게 뭔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있는 것 같다는 걸.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틀 사이, 정지안은 계속 그녀를 도와주었고 심지어 중요한 회의까지 취소하며 회사에 와서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그 생각이 떠오르자 이해리는 메뉴판을 정지안에게 건넸다.“뭐 드실래요? 아니면 그냥 제가 고를까요?”메뉴판을 건네면서도 그녀의 손은 메뉴판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남자의 시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97화

    이미 좋지 않던 정도원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이해리는 정지안이 자신을 대신해 한풀이해 주는 말을 들으며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회의실을 나와 뒤에서 이어지는 모든 수군거림을 뒤로 던져 버리고 난 이해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도 그제야 풀렸다.“속이 좀 시원해졌어요?”옆에 있던 정지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제야 이해리는 옆에 이 ‘큰 인물’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네, 시원해졌어요.”“지안 씨가 말한 ‘좋은 구경거리’가 이거였군요. 미리 알았으면 더 일찍 와서 준비라도 했을 텐데요.”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까 윤유나가 너무 빨리 뛰쳐나갔다는 것이었다.이해리는 사실 윤유나와 정도원이 회의실에서 서로 지켜 주며 애틋한 연기를 하는 장면을 좀 더 보고 싶었다.정지안이 낮게 웃더니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 말했다.“오늘 이해리 씨 대신 이런 일까지 해줬는데 밥 한 끼 사 줄 생각은 없어요?”사실 이해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일은 일이고 거래는 거래였다.집과 지분은 이미 거래로 정리된 것이니 정지안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았다.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마침 점심시간도 다 되어 가네요. 뭐 드실래요? 지안 씨가 고르세요.”이해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자 정지안은 오히려 조금 놀란 듯했다.그의 눈동자에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요. 평도 괜찮다던데 오늘 거기 한번 가볼까요?”정지안은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희고 탄탄한 손목이 이해리 눈앞에서 살짝 흔들렸다.“지금 바로 갈까요? 가서 주문하면 시간도 딱 맞을 것 같은데.”이해리는 이번 회의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그저 평범한 주주총회일 거로 생각했었다.그런데 정도원이 자기 애인을 위해 회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맞서 싸울 줄은 몰랐다.그동안 이해리는 정도원이 사생활은 엉망이어도 최소한 일에는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오늘 일로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96화

    누가 봐도 보호해 주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그 모습이 이해리 눈에는 그저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이해리는 비꼬듯 눈을 가늘게 떴다.곧이어 정도원이 잠시 침묵한 채, 지금 상황에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윤유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저는... 저는 그동안 일을 정말 성실하게 했어요. 회사에 해가 되는 일은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항상 최선을 다했고... 저는 그냥...”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막았다.“아니에요...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죠...”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회의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회사에서 발언권이 있는 주주들이었다.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서로의 체면을 고려해야 했다.정지안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그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며 여유롭게 말했다.“더 논의할 것이 있습니까?”그가 입을 열자 주주들은 또다시 침묵했다.속으로는 의문투성이였지만 정지안 같은 사람 앞에서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정도원은 윤유나가 방금 뛰쳐나간 장면을 계속 떠올리며 지금이라도 쫓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정지안과 이해리가 있는 상황에서 움직일 수 없d었다.마치 몸이 굳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회의실은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그때 이해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이제 다들 아셨으니 저도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지분은 모두 양도했습니다. 인수자는 정지안 씨로, 오늘부터 정지안 씨가 이 회사의 주주 중 한 명이며, 제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회의가 있더라도 저는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뒤 이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그동안 협력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마지막까지 이해리는 품위를 지켰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려 했다.정신이 멍한 상태로 서 있던 정도원은 이해리가 옆을 지나갈 때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이해리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이해리! 내가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제95화

    그래서 회사에서 이상한 일이 생기면 이 비서는 항상 그녀에게 몰래 알려주곤 했다.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이 비서가 몇 번 암시적으로 정도원과 윤유나가 너무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었다.하지만 당시 이해리는 믿고 싶지 않았다.그 생각을 하자 이해리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알려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아마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아요.”지금 그녀는 윤유나와 정도원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오늘 갑자기 주주총회를 여는 것도 아마 자신과 정도원 문제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미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이해리는 더는 그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일단 저는 안 갈게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몰래 다시 알려줘요.”비서는 알겠다고 했다.전화를 끊자마자 정지안의 메시지가 하나 떴다.[그래도 한 번 와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놓치기 싫은 장면이 있을 거니까요.]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이해리의 졸음은 완전히 사라졌다.‘정지안 말대로라면 오늘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 예정인 걸까?’이해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보조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내 자신이 생각을 바꿨다고 알렸다.일어나 세수를 하고 단정히 몸단장했다.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일부러 긴 머리를 틀어 올려 한층 더 단정하고 능력 있어 보이도록 했다.회사 회의실, 정도원은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며 위로하듯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테이블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말없이 건네는 위로였다.이 일이 벌어진 며칠 동안 윤유나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그녀도 살짝 정도원의 손을 쥐었다.두 사람의 작은 행동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이해리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이해리는 마음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주위를 둘러보니 정지안이 보이지 않았다.이해리는 오히려 조금 의아해졌다…그때, 정지안이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그를 보는 순간 정도원이 벌떡 일어났다.“형, 형이 왜 여기 와?”정지안은 밖에서 이미 자기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정

Higit pang Kabanata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