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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중신장지
이해리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저 혼인신고서를 내려오려고요.”

정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의자를 밀어냈다.

훤칠한 키에 다리가 길어서 발끝만 살짝 들어도 쉽게 선반 위의 서류철에 손이 닿았다.

정지안은 혼인신고서를 쓱 훑어보다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는 혼인신고서를 이해리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군요.”

이해리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서류를 받아 들며 가볍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주버님.”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서 혼인신고서를 받아 들고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느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이 결혼이 얼마나 허망한 농담인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정도원의 그 지독한 사랑 연기 속에는 처음부터 세 사람이 공존했던 것이다.

정지안이 시선을 내렸다.

이해리보다 키가 훨씬 커서 그녀의 동그랗고 예쁜 정수리만 보였다.

그녀는 새하얀 손으로 혼인신고서를 꽉 잡고 있었는데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버렸다.

남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혼인신고서는 왜 가져가는 거죠?”

“아, 그냥 집에 가져다 두려고요.”

이해리는 서둘러 변명을 둘러댔다.

남자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데일 것 같지만 끝내 아무런 제스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소매 단추를 고쳐 매고 문밖을 나섰다.

이해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수납장에 등을 기댔다.

허벅지 안쪽에는 여전히 지독한 열기가 남아 있어 황급히 치맛자락을 끌어 내리고 혼인신고서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태연하게 문밖을 나섰다.

정도원은 아직도 뒤 정원에서 몇몇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이해리가 담담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몇몇 친척이 정도원에게 얘기했다.

“지안이가 며칠 전에 왔으면서 오늘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대.”

정도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비행기로 온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뭐 경매 같은 데 간 모양이야. 나도 얼핏 들었는데 골든 경매장에 갔다나 뭐라나.”

“에이, 아닐걸요. 저도 그날 거기 있었는데 전혀 못 봤어요.”

정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리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베일에 싸인 217번 룸의 손님이 떠올랐다. 설마 정지안이 그녀를 위해 최고가를 지른 미스터리 손님일까?

다만 그녀는 금세 그 생각을 짓눌렀다.

둘은 딱 한 번 만났을 뿐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다. 기껏해야 아주버님과 제수라는 빈껍데기만 씌워졌을 뿐인데 정지안이 아무리 대단해도 굳이 그녀를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정도원도 형이 미리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수상한 그 손님은 절대 정지안일 리가 없다.

이해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 정도원이 그녀를 데리고 정지안에게 다가갔다.

“엄마, 형, 우린 먼저 갈게. 조만간 가족끼리 따로 만나서 식사해요.”

정지안은 의자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요즘 인수 건으로 바쁘니 식사는 천천히 잡고 오히려 너 말이야.”

불현듯 그가 고개를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돌변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엉뚱한 데로 새지 말고.”

형으로서의 경고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정도원은 어릴 때부터 형에게 눌려 살았던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뭘... 회사도 잘 운영하고 있어. 못 믿겠으면 요 이틀 재무제표 보여줄게. 마음껏 확인해봐.”

“회사만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정지안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해리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 엉뚱하고도 기이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도원에게 듣기로 정지안은 늘 밖에 머물지만, 집안의 모든 일을 훤히 꿰뚫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도원이 밖에서 저지른 그 짓거리들도 다 아는 걸까?

“알았어, 형. 해리랑도 잘 지낼게.”

정도원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해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지안의 시선이 그들의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이해리는 이 인간과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피하고 싶어 무심코 손을 털어냈다.

정도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또다시 손을 잡으려 했다.

자신의 행동이 정도원에게 망신을 줄 것을 예상했기에 이해리는 정지안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정도원은 아까 그 온순하고 공손한 태도를 싹 거두어들이고 또다시 황태자가 된 것마냥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어른 행세하면서 날 가르치려고 들지! 어릴 때부터 늘 이런 식이야. 해외에서 잘 나가면 뭐? 나도 국내에서 나쁘지 않아! 해성에서 감히 나한테 덤빌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정도원은 습관처럼 담배 한 대 꺼내 물려다가 이해리를 보고는 참았다.

“요 몇 년 동안 내 회사가 잘 나가는 게 다 지안 형 덕분이라고 하는데 웃겨 정말! 왜 뭐든 다 형 공로냐고? 그리고 너도 말이야. 아까 왜 일부러 손 놨어? 형 앞에서 나 꼽 주려고 작정했니?”

정도원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고 말투에도 불만이 역력했다.

이해리는 듣는 내내 미간을 찌푸렸다.

요 몇 년간 정도원이 해성에서 얼마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람을 얕잡아보는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배후에 정지안의 세력이 없었다면 정도원은 얼마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형제 우애가 좋을 줄 알았는데 정도원은 겉으로만 형을 존중할 뿐 속으로는 이토록 반항심이 클 줄이야.

다른 건 제쳐 두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위선적으로 손을 잡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해리는 혼인신고서가 든 가방을 껴안고 끝내 한 마디 내던졌다.

“오랜만에 손잡는 거라 적응이 안 됐어.”

차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긴, 두 사람의 마지막 스킨쉽이 언제였는지 이해리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정도원은 미간을 좁히며 담배꽁초를 뚝 부러뜨렸다.

“뭐라고?”

그녀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앞으로 이런 불필요한 스킨십은 좀 줄였으면 좋겠어. 기분 별로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청을 찢는 듯한 급브레이크 소리가 울렸다.

차가 굉음을 내며 인적이 드문 길가에 멈춰 섰다.

이해리는 관성에 밀려 창문에 부딪힐 뻔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소리쳤다.

“미쳤어?”

별안간 정도원이 확 덮쳐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

이해리는 턱이 아프기도 하고 이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그를 밀쳐내려 발버둥 쳤다.

“내 말 틀렸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손잡은 지가 언제인지 넌 기억 나?”

정도원은 마치 금기라도 건드린 듯 눈빛이 어두워졌다.

“너도 설마 제수씨처럼 지안 형한테 홀린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형 앞에서 나랑 선 그으려고 스킨쉽도 거절한 거잖아.”

“정도원, 헛소리 그만해!”

이해리는 분노가 차올라 그를 힘껏 밀쳤다.

“역겨운 짓 저지른 건 너야. 괜히 나한테까지 덧씌우지 마!”

정도원은 지금 만인에게 추앙받는 정지안 때문에 완전히 긁힌 상태였다.

이해리가 발버둥 칠수록 그의 눈빛은 더욱 음침해졌다.

별안간 남자가 고개를 홱 돌리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

이해리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고개를 돌려 피하면서 그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윤유나와 수없이 키스한 저 입술, 생각만 해도 역겨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도원은 고통에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뭐한 거지?’

그는 후회가 밀려와 입술에 피를 머금은 채 이해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미안해, 해리야. 정말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 잘못했어, 자기야.”

이해리는 힘이 다 빠져서 조수석에 기댄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황량함과 혐오감만 차올랐다.

한때 그토록 갈망했던 품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역겨웠다.

“나 놓아줘.”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원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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