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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중신장지
이해리는 거실 구석에 서서 모두가 정지안에게 와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도원도 심여진 옆에 서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정도원에게 아부하던 삼촌들은 방향을 틀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지안아, 어떻게 갑자기 돌아오게 된 거야?”

“너 요즘 국내 회사를 하나 인수하느라 바쁘다며? 정말 갈수록 대단해지는구나.”

“자자, 얼른 들어와 앉아. 최고급 차로 타 놨어.”

정도원은 자신을 향한 삼촌들의 온도 차가 확연히 다른 걸 느끼며 미소가 옅어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씩 웃으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이해리는 훤칠한 몸매에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정지안이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거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도 몰래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뒤따라 들어오는 이들에게 길을 내주며 존재감을 낮추려 노력할 따름이었다.

이때 정지안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정도원의 화려하고 밝은 모습과는 달리 이 남자는 더 침울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고귀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정지안은 주변의 아첨에 고개만 끄덕일 뿐 무심코 모두를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이해리에게 시선이 스쳤고 그 순간 정지안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이에 정도원도 잇달아 멈춰 섰다.

“왜 그래 형?”

정지안은 대꾸 없이 이해리를 무심히 훑어보았다.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이해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왠지 모르게 침범당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정도원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정지안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고 저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해리야, 이리 와서 아주버님께 인사드려야지.”

이해리가 막 걸음을 떼려는데 정지안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도원과 다른 사람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에게 먼저 다가갔고 그는 꿈쩍하지 않았으니까.

정지안의 깊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이해리 씨?”

이해리는 숨이 멎고 귓가에 미풍이 스치는 듯했다.

정지안이 먼저 말을 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몇 년 만에, 그것도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자신을 알아보다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버님, 오랜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지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동작이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이해리도 예의상 악수했다.

손을 맞잡는 순간, 남자가 살짝 힘주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정지안이 자신의 손을 살짝 힘주어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등 위를 스치는데 낯설 만큼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정지안은 그녀와 짧게 악수하고는 손을 거두었다.

이때 정도원이 불쑥 다가와 이해리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왼손에 깍지를 꼈다.

“형,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나중에 시간 되면 나랑 해리가 식사 대접할게.”

정지안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살펴보다가 이해리와 깍지 낀 그의 손을 힐끗 보았다.

“한 달 정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태균이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정지안이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알렸다.

이해리는 정도원을 따라 주 테이블의 왼쪽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속속들이 자리에 앉았다.

정지안 두 형제는 장남 쪽이었고 주 테이블의 상석은 정태균, 그다음은 심여진과 정지안 순이었다.

이해리는 정도원의 옆에 나란히 앉았는데 마침 정지안과 대각선 방향이 되었다.

가족 모임이 시작되자 다들 정지안의 근황을 물었다.

이해리는 고개를 숙인 채 밥만 먹으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월트리트의 권력자, 카일 그룹의 대주주, 금융거래소, 교통 스마트 AI 창업자 등...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너무 많고 하나같이 화려했다.

정지안의 직함은 너무나 많고 놀라웠다.

이해리는 문득 예전에 월트리트에서 받았던 연회 명단이 떠올랐다.

정지안의 이름은 세 번째에 있는데 그녀는 맨 끝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이 남자와 거의 교류가 없었다. 결혼 초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아주버님은 그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잠시 들렀다가 결혼 선물만 주고 떠났다.

불과 몇 년 만에 정지안은 월트리트에서 명망 높은 인물이 되었으니 그의 실력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족 모임이 끝나고 다들 흩어져서 디저트를 먹으러 갔다.

이해리는 혼인신고서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위층으로 향했다.

그 시각, 정도원은 정지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줄곧 그쪽을 주시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빨리 갔다 와.”

이해리는 즉시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모두 아래층에 모여 있었고 그녀는 별장 3층으로 올라가 정도원의 방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자 혼인신고서가 책장 맨 위의 액자 안에 놓여 있었고 옆에는 둘의 웨딩 사진도 있었다.

가까이 다가선 이해리는 정도원과 윤유나의 다정한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서 저도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저 한 장의 혼인신고서가 왜 이토록 아니꼽게 느껴질까? 꼭 마치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음 약해져서 정도원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게 아닌데!

사실이 말해주듯 바람피우는 남자는 결국 또 바람을 피우게 되어 있다.

이해리의 눈가에 약간의 혐오감이 스쳤다. 그녀는 책상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왔다.

바퀴가 달린 회전의자라 약간 불안정했지만 밟고 올라가 한쪽 발로 침대 옆을 지탱하며 간신히 서 있었다.

그녀는 진주처럼 은은한 빛이 감도는 무릎길이의 원피스 자락을 살짝 끌어 올렸다.

손끝이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딱 2인치 정도가 부족했다.

이해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간신히 닿으려 했지만 좀처럼 닿지 않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위를 내려다보다가 탁자 옆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려고 몸을 숙이려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고 침착한 남자의 발걸음 소리였다.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책상을 붙잡고 황급히 내려오려는데 공교롭게도 다른 팔의 소매가 탁자 모서리에 걸렸다.

서둘러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미 글렀다.

바로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해리는 온몸이 굳어버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의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예상했던 낙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정확히 잡아줬고 다른 손은 허리를 감싸 안아 순식간에 품으로 끌어당겨 바닥에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가슴에 부딪히자 상쾌하고 차분한 백단향이 확 풍겨왔다.

이것은 정도원의 향기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하마터면 남자의 턱에 부딪힐 뻔했다.

정지안은 곧장 손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두었다.

이해리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방금 정지안이 세게 잡았던 허벅지는 불타는 듯했다.

그녀는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에 표정이 굳어버렸다.

“고, 고마워요.”

정지안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의 빨개진 얼굴과... 방금 세게 잡혀서 시뻘건 자국이 난 허벅지를 훑어보았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안에 계신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이해리는 더욱 난감해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그녀가 폐를 끼친 건데...

문득 정지안이 위를 힐끗 보았다.

“도와줄까요?”

그녀도 따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책장 위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혼인신고서만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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