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인의 시점
나로 하여금 첩을 들이겠다는 현명한 결정을 내리게 만든 그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역시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잊히지 않고, 지루하며, 미쳐버릴 것 같은 날이었다. 내 운명을 달의 여신에게 내맡기고 감정을 믿기로 했던 그 멍청한 결정을 내린 이후부터 내 삶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삶이 완벽한 어둠 속으로 처박히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을 소진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술로 독을 타듯 시름을 덮는 것이 좋은 방법처럼 보였으나, 그것도 내 머릿속의 마귀들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조용히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샬라짓(Shilajit) 차였다.
내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한가운데서부터 이미 귓가를 울리는 끔찍한 멜로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마신 술이 감각을 완전히 짓뭉개놓은 게 아니라면, 내 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곡조는 들리브의 <락메> 중 ‘꽃의 이중주’가 분명했다. 내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왕궁 정원에서 연주하시던 바로 그 클래식 곡이었다.
저 곡을 연주하고 있는 자가 누구든,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했거나 나를 그 과거 속으로 다시 끌고 간 죄로 지독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터였다.
아련한 향수가 감각을 찌르며 스쳐 지나갔고, 이 하루를 끝내버리기 위해 샬라짓 차를 향해 가려는 내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내가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은 안대를 차고 반누드로 목재 플루트를 입에 붙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내 안의 늑대가 요동치기 시작할 때까지 내 모든 생각은 몇 초간 멍하게 정지해 버렸다.
미미한 자스민과 바닐라 향의 파도가 공기 중에 몽글몽글 피어나 내 후각 시스템을 공격했고, 나와 랄프(Ralph) 둘 다 ‘이성’이라는 아슬아슬한 끈에서 거의 튕겨 나갈 뻔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운명의 짝이 그토록 끔찍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신한 이후로, 내 늑대인 랄프는 내 안에서 침묵을 지켜왔다. 녀석은 전투와 피바람이 불 때만 눈을 뜨곤 했는데, 억눌러둔 과거의 조각을 다시 끌어올린 이 낯선 여자 한가운데서 녀석은 마침내 다시 수면 위로 깨어나는 것을 택했다.
그 적발의 여인은 내가 문을 닫고 그녀 앞에 섰을 때조차 플루트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대담함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나간 내 그 어떤 첩들도 이토록 대담했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내 베타조차도 내게 이런 식의 접근을 감행할 만큼 대담하지는 못했다.
신입인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메인라드의 안목에 치하를 보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적어두었다.
붉은 진저 빛 머리칼이 그녀의 등 뒤로 흘러내려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심지어 그 향을 들이키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 여자는 내 방에서 안대를 쓴 채 플루트를 부는 것이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내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앞이 훤히 파인 긴 검은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으로 검은색 레이스 란제리가 드러나 그녀의 가슴을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밀어 올려주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호기심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그 에너지의 일부는 한층 더 강력한 무언가로 변형되어 내 하반신으로 직행했다.
그 여자를 천천히 탐색하는 시간을 가진 뒤, 나는 마침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쩌면 내 목소리가 그녀의 황홀경을 깨뜨렸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곡조를 즉시 멈추더니, 옆 바닥에 목재 플루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깊숙이 우아한 커트시(우아한 절)를 해 보였다.
"좋은 저녁이에요, 알파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은근한 날이 서 있어서, 마치 내 존재감이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신원을 물었지, 인사를 받은 게 아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여자는 다시 한번 침묵에 빠졌고, 나는 내 존재감이 정말로 그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상대로 머리를 굴리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 여자에게 약간의 의구심을 느낀 채, 나는 그녀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최선을 다해 탐색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 안의 늑대의 존재감이 한층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여자에게는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거나 추측하는 짓 따위는 질렸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내 늑대 모두를 달랠 수 있는 행동에 착수했다. 손을 자유롭게 놀려, 나는 그녀의 쇄골 바로 옆의 피부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거의 즉시 그녀의 턱 막히는 호흡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 소리는 나를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나는 손을 가운의 끝자락으로 옮겨 가운을 벗겨 버렸고, 그녀를 란제리 차림으로 완전히 노출시켰다.
하반신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피어나기 시작하며, 오늘 밤 내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샬라짓 차뿐만이 아님을 똑똑히 깨우쳐 주었다.
"안대를 벗어라."
내가 명령하자, 그녀는 거의 즉각 따라주었다.
조금 전까지 이 여자가 유혹적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반항적인 에메랄드빛 초록 눈동자가 내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을 설명할 단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면서 나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첩 따위가 그중 하나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파께서 보시는 풍경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녀가 간드러지게 속삭이자, 내 입술이 비틀려 능글맞은 미소를 그려냈다.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자, 내 눈앞의 이 이상한 여자는 내 손길에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내 감각을 침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자스민과 바닐라의 믹스 향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애액과 흥분이 섞인 유혹적인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지금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내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여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내 거대한 팽창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걸로 네 질문에 답이 되었나?"
"완벽할 정도로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응수했다.
이 상황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내 방에 들어와 목재 플루트와 중독적인 향기로 나를 사로잡은 이 이상한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안의 늑대가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심장 박동이 폭풍처럼 쿵쾅거렸고, 당장 이 여자를 탐하지 않는다면 내 안의 늑대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주도권을 빼앗을 것처럼 위협해 왔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그녀의 향기를 더 깊게 들이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랄프 역시 날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적발의 여인의 목덜미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으며, 나는 자국이 남을 것이 확신해질 때까지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머리를 살짝 기울여 주며, 이 이상한 여자는 내 임무가 완수될 때까지 내 공격을 완벽하게 받아내 주었다.
그녀를 더 애타게 만들고 싶었다. 내 늑대와 내가 그녀에게 질릴 때까지 그녀의 몸 전체—모든 곡선, 끝자락, 완벽함과 불완전함—를 구석구석 탐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랄프는 끈질겼고, 내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은 랄프에게 모든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주어 녀석이 직접 이 적발의 여인을 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내 허리를 감싸도록 적발의 여인을 들어 올린 나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부드럽게 눕혔다.
" 거칠고 빠르게 끝낼 거다. 하지만 다음번엔 더 부드럽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한쪽 손으로 옆의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나는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려 고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거칠고 빠른 거,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어요."
나는 그 어떤 첩에게도 스스로를 설명하거나 변명한 적이 없었으나, 이 여자에게는 나도 모르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몰아붙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결과에 감사했다. 그녀의 대답은 가뜩이나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내 남성에 더 많은 피를 쏠리게 만들었으니까.
단 한 번의 재빠른 동작으로 나는 그녀가 입고 있던 레이스 검은 란제리를 찢어발겼고, 그녀의 몸을 내 앞에 완벽히 무방비로 노출시켰다.
내 머릿속에 그녀의 나체 형상을 완전히 각인시키기 위해 몇 초간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내 손을 그녀의 부드럽고 연약한 살결 위로 자유롭게 놀렸다.
내 손이 그녀의 풍만한 두 언덕을 찾아쥐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허리를 살짝 뒤로 젖히기 시작했다. 자제력을 잃은 나는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감싸 쥐고 부드럽게 쥐어짜며 튕겼다.
다른 쪽 젖꼭지에도 똑같이 해준 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입안에 가득 품고 혀로 그 모든 구석구석을 핥고 애무하며 흔적을 남겼다.
그녀의 여린 신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지금처럼 그녀의 나머지 몸도 시간을 들여 탐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통제력’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늑대와 벌이게 된 전쟁이었고, 나는 거기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나는 몸을 일으켜 내 옷들을 벗어던졌다.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나를 향하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흥미를 눈채챈 내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와서 쫄아서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저어 부정하자, 그녀의 심장 박동이 가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언제쯤 절 안아줄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건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응답은 언제나 내 성기로 곧장 새로운 에로틱한 에너지의 파도를 쏘아 올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그녀의 위로 자리를 잡은 나는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젖어있는 골짜기 위로 손가락을 훑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군, 좋아."
내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고, 그것은 아까 그녀가 연주하던 곡조만큼이나 멜로디컬하게 들렸다.
그녀가 더 이상 무슨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나는 단 한 번의 날카로운 찌르기로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내 정체불명의 적발의 여인이 앞으로 나를 더 자주 찾아와 주길 바라면서.
"난 환생해서는 안 되었고, 그 시절에도 헬레네로서 되살아나선 안 되었어요. 이 모든 비극은 나 때문에 시작된 거예요. 내가 죽어 묻혀 있었더라면 이런 미친 짓 따윈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제 내가 모든 것을 바로잡겠어요." 난 아랫배 위에 손을 얹었다. "부디 내 아이만은 살려줘요. 아직 온전히 자라지도 못한 핏줄이잖아요. 제발 다른 이들은 내버려 둬요. 대신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테니까. 애초에 난 살아 숨 쉬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에스메랄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것은 나직하고 섬뜩한 울림이었으나 곧이어 온 방을 채우는 광기 어린 폭소로 번져나갔다. "내 어머니들과 자매들이 그따위 수작을 미처 내다보지 못했을 줄 알았더냐? 네 그 멍청한 짝이 널 또다시 이승으로 끌고 올 텐데 말이지. 설령 그자가 그러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번뜩였다. "아이의 순결한 영혼보다 더 강력한 힘을 품은 제물은 세상에 없다. 그러니 당장 대가를 내놓아라!""멈춰요."단 한마디의 외침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제나가 책을 한층 더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거센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선 무슨 생각이 스치고 있는 것일까?"내가 치르겠어요." 그녀가 선언했다.내 고개가 홱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뭐라고? 안 돼!""맞아요." 그녀는 어깨를 곧게 펴고 에스메랄다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내가 제물이 되겠어요. 엄밀히 따지면 내 혈관 속에도 헬레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난 이미 얼마 전부터 아이를 배고 있었어요. 사미야 언니, 이게 바로 내가 언니에게 청했던 그 부탁이에요. 바로 이거라고요."난 결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생에서 우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 제나. 그딴 건 효력이 없다고—"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잔혹한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효력이 있다. 영혼의 피는 생애를 거듭해
사미야의 시점메이더란의 변장은 오래 쳐다보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광대라는 단어를 목놓아 외치게 만들 법했으나, 그것은 그자의 사정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제인이 메이더란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었을 확률은 한없이 높았고, 난 성으로 향하는 길에 그 어떤 샛길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우리에게 천만다행으로 에스메랄다는 제 뜻대로 쓸 수 있는 온갖 가발과 드레스, 망토들을 넉넉하게 갖추고 있었다. 메이더란이 뒤집어쓰고 이 오두막에 남은 자신의 모든 흔적을 감추기에 안성맞춤이었다.'우리가 저 머저리를 원했었다니.' 메이더란이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스칼렛이 비웃음을 흘렸다.메이더란은 짙은 청록색의 긴 드레스를 걸치고 그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갈색 곱슬머리가 그의 얼굴을 감싸며 그에게 결코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판을 한층 더 흥미롭게 만들려는 듯 그는 새빨간 립스틱까지 바르고 있었다. 메이더란의 입술은 당분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험악한 찌푸림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뺨에 거뭇하게 돋아난 수염 자국 또한 몰골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고, 꽉 끼는 드레스 틈새로 털이 덥수룩한 그의 널찍한 가슴팍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꼴이었다!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번에는 스칼렛의 비아냥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메이더란의 그 꼴사나운 차림새 때문이었다."하, 하, 하. 빌어먹을, 당장 출발이나 하지." 메이더란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짓씹었으나, 내 웃음을 멈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오두막 뒤편에 말 한 마리가 매여 있었던 모양인지, 처음엔 다소 애를 먹었으나 메이더란과 난 잠시 후 간신히 말등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돌아보자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의문들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잠깐만요, 메이와 제나, 제인은 줄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았던 거죠?""왔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은폐
사미야의 시점임신한 노예.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내 처지를 가리키는 정확한 말이었다.지난 나흘 동안 에스메랄다는 내다 팔기 위해 살을 찌우는 새끼 돼지마냥 내게 음식을 먹여댔다. 바닥이 의자이자 침대 노릇을 하던 오두막의 비좁은 구석자리에서 벗어나 이제는 어엿한 침실이 생겼으니, 내 거처 또한 격상된 셈이었다. 제인과 내가 성에서 함께 쓰던 침실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어쨌든 처우가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메이더란은 감시자 노릇을 했다.그는 내가 에스메랄다의 뜻대로 모든 것을 따르도록 감시했고, 첫날엔 격렬히 반항해 보았으나 에스메랄다가 내 뺨따귀를 사납게 후려치고는 당장이라도 제물로 삼아버리겠노라 칼을 치켜들며 위협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순종하는 법을 터득했다.순종이 언제나 나약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깨우친 교훈이었다.내가 붙잡힌 이래 매일 밤마다 에스메랄다는 날 찾아와, 오늘날의 에트라나를 일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자신들 마녀들이 대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물론 내겐 얌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한탄을 들으면 들을수록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 마침내 모든 전말을 똑똑히 기억해 내기에 이르렀다.그리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마녀들이 손을 내밀었던 것은 아르테미스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마녀들은 그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고, 아르테미스는 그 대가로 베타 바로 아래의 서열을 내어주어 그들을 온 에트라나에서 세 번째로 막강한 권세를 지닌 존재로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식처와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물론 내 영혼이 그들의 뜻을 거스른 채 억지로 되살아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아르테미스와 내가 거래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배신하기 전까지는 아르테미스와 마녀들의 관계는 평온했다.애초에 그들은 에트라나의 더 커다란 영토를 직접 다스리길 원했으나, 달의 여신께서 친히 축복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하사하신
제인의 시점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쏟아부어 사미야를 찾아 헤맸으나, 그 어떤 흔적도 건져내지 못했다.지독하고 위태로운 나흘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음에도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난 근위병들을 이끌고 그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마땅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곳으로 말을 달렸으나, 그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텅 빈 공터뿐이었다. 오두막이 분명히 위치해 있었으리라 확신했던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마치 내가 그 모든 광경을 머릿속으로 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밤마다 난 에스메랄다가 사미야를 감금해 두었을 법한 은신처들을 그려보는 것으로 지새웠고, 아침은 분노로 가득 차올랐으며, 내 평생 처음으로 랄프가 통제권을 쥐고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찢어발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마치 헬레네를 또다시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슬피 울며 찾아갈 무덤도, 내 상념들을 적어 내려갈 종이쪽지도 없다는 점만이 달랐다. 난 그저 머릿속으로 수없이 갈라지는 온갖 가정들을 억지로 되감기하며 괴로워해야만 했다.하지만 닷새째 되던 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제나와 함께 마차에 오르려던 바로 그 찰나에 전갈이 닿았다. 두 발은 내 평생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나를 실어 날랐고, 요동치는 심장은 발걸음보다 한참 앞서 내달렸다. 성문에 다다를 때까지 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날 걸치고 나갔던 바로 그 옷차림이었으나, 이제는 갈기갈기 찢겨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찔렀고, 굳이 감추려 애쓰지 않았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내 짝인데, 대체 어떻게 감출 수 있단 말인가?내 빨간 머리 여인이었다.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얼굴은 극심한 피로로 처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하게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던 총기가 완전히 꺼
사미야의 시점난 마녀라는 존재들에 늘 묘한 호기심을 품어왔으나,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마주치게 될 마녀가 하필이면 내 짝의 옛 연인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달의 여신께서 날 상대로 잔인한 장난질을 치기로 작정하신 모양이었다.웃기지도 않았다. 손톱만큼도 유쾌하지 않았다."있잖아, 내가 널 이곳으로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나-난... 그저 널 이 흉측하고 낡은 구덩이에서 죽게 내버려 두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어. 내 진짜 뜻은 널 에스메랄다에게 데려가서 그 마녀로 하여금 우리 둘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려는 거였단 말이다. 그러면 우린 늑대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되는 그 모든 미친 짓거리들에서 벗어나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미야. 더 이상 신분 따위도 없고, 늘 이것저것을 내놓으라며 우리 머릿속을 쏘아 다니는 그 멍청한 늑대 놈들도 사라지는 거지. 우린 완벽함을 손에 쥘 수 있었단 말이다!"여신께서 내 전 짝과 날 한자리에 나란히 가두어두셨다는 사실을 미처 언급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농담이었다.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난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제 아비가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앞뒤 안 가리고 경합에 기어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완벽한 한 쌍이 되었을지 줄줄이 늘어놓는 메이더란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제인과 내가 아르테미스와 헬레네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그자가 전해 듣는다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사방으로 헝클어진 백발을 휘날리며 지껄이는 말 한마디마다 두 손을 요란스레 휘젓는 꼴은 이미 미쳐 날뛰는 토끼나 다름없어 보였다.어쩌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자는 정말로 온전히 돌아버린 미치광이 토끼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내 가설이 맞는지 당장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으나, 내 두 손은 이미 손목을 파고들며 가렵게 짓누르는 억센 매듭에 꽁꽁 묶여 있었고, 입에는 보기 좋게 재갈까지 물려 있는 처지였다. 변신을 감행하여 밧줄을 끊어내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제인의 시점무능함.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남은 시간이 없어요." 그 의문의 오두막으로 마차를 타고 내달리는 내내 제나가 남긴 그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녀들과 위험천만한 거래를 맺었고, 그 대가로 소중한 무언가를 바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떠올렸으나, 그토록 중대했던 단 하나의 제물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답을 얻어내려 제나를 몇 번이고 몰아세웠으나, 그녀는 매번 이전보다 훨씬 더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대답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제나는 울화를 치밀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사미야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황을 조금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고, 그리하여 난 그저 자리에 편히 기대앉아 눈앞에 닥쳐올 예기치 못한 파도를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참으로 완벽하지 않은가!"제인." 거칠게 소용돌이치던 상념 속에서 사미야의 목소리가 날 건져 올렸다.달팽이처럼 느릿한 속도로 사미야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사미야." 그녀가 내게 건넸던 어조를 그대로 흉내 내며 나지막이 불렀다."메이더란에 대해 진작 털어놓지 않아서 화난 거죠, 안 그래요?" 낮게 깔린 속삭임으로 물어오는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온전히 머물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으나, 내 앞에 도사린 미지의 위험에 대한 염려가 훨씬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화가 났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털어놓으려 약속했었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잖아요. 그래서 메이더란의 일은 우리 문제들 중 가장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을 뿐이에요." 그녀가 변명하듯 설명했다.입술을 굳게 다물어 얇은 선을 그렸다.그녀의 심정을 훤히 이해하고 있었고, 특히나 이 소중한 두 번째 기회를 거머쥔 마당에 사미야를 향해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을 수 있는 구석 따윈 내 안에 전혀 없었다. 나 역시 메이더란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