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겨우 칵테일 세 잔이었다.
알코올 도수가 그리 높지도 않은,
그저 입안을 달콤하게 적시던 핑크빛 액체 몇 모금.
그까짓 것에 이토록 정신이 혼미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견고한 대리석 바닥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였다.
시야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아, 읏……”
걷기가 힘들 정도로 눈앞이 아찔하게 어지러웠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호텔 연회장의 크리스탈 샹들리에 불빛이,
이제는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망막을 잔인하게 찔러댔다.
귓가에는,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수군거림이 환청처럼 울렸다.
‘어머, 쟤 좀 봐. 결혼식 전날에 저런 꼴을 당하다니.’
‘문기씨가 뒤에서 딴살림 차려놓고 애까지 가질 동안, 혼자만 고결한 척 한 거야?’
축복만이 쏟아져야할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
그곳은 이미 난도질하는 처형장과 다름없었다.
10년 동안 신앙처럼 맹신했던 정혼자, 김문기.
그리고 그의 혼외임신 소식.
유진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골드 톤과 순백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호텔 화장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
그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쏟아질 듯 붉게 충혈된 눈동자.
화끈―. 뺨 위로 열기가 확 달아올랐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르하게 피어오르는 열감에 유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정신 차려, 서유진……]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수전을 가장 차가운 냉수 쪽으로 돌렸다.
쏴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얼음 같은 물을, 손바닥 가득 모아 정신없이 얼굴에 끼얹었다.
정성스럽게 받은 메이크업이 번지고 엉망이 됐다.
하지만 그 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거울 너머로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좁은 화장실 내부를 울렸다.
“유진아! 너 괜찮아?!”
유진을 따라 허겁지겁 화장실로 들어온 것은 오랜 친구, 혜선이었다.
혜선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분노가 가득 배어 있었다.
유진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대충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붉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인간 진짜 악마 아니야? 너한테 대놓고 모욕을 주려고…. 어떻게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에 나타나서 이런 짓을… 이건 널 짓밟은 거야!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혜선이 제 일처럼 분통을 터뜨리며, 유진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
그 강한 손길에 유진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혜선의 손을 살며시, 그러나 단호하게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동정이나 위로를 받아들이는 순간,
정말로 바닥까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 정말 괜찮아, 혜선아. 머리가 좀 복잡해서 그래. 화장실 좀 쓰고, 마음 좀 추스르고 갈게. 너는 먼저 자리로 가 있어.”
“하지만 너 혼자 두기엔 지금 너 안색이 너무…….”
“너까지 여기 오래 나와 있으면, 안에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응?”
유진의 단호한 어조에,
혜선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딸각 또각 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화장실 문이 완전히 닫혔다.
완벽한 고립.
그제서야 유진은 가늘게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을 툭, 놓아버렸다.
참았던 가쁜 숨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찢으며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윽……”
유진은 화장실 맨 안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두운 화장실 빈 칸으로 허겁지겁 몸을 숨겼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더는 다리에 힘이 주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값비싼 실크 드레스 자락이 더러운 타일 바닥에 걸레처럼 널브러졌지만,
그딴 걸 신경 쓸 겨늘도 없었다.
[정신 차리자. 서유진, 제발 정신 차려. 창피하게…….]
유진은 허벅지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고통을 이정표 삼아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지만 폐부 깊숙이 들어차야 할 공기는,
허망하게 허공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목구멍에 단단한 돌덩이가 턱 막힌 것 같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마비되더니,
이어서 기분 나쁜 저림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과호흡? 미친…… 왜 이래. 진짜!]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가.
그 새끼가 날 배신해서?
아니면 그의 화려한 세상에서 쫓겨나 차가운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것?
[아니야. 두렵지 않아. 두려워해서는 안 돼…….]
자존심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철저히 통제당하고,
마치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처참하게 밀려나는 이 상황 속에서,
배신감 대신 두려움을 느끼는,
제 자신이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이대로 있다간 비참함과 정체 모를 열증에,
완전히 잠식당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여기 있으면……]
유진은 간신히 벽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돌며, 온 세상이 캄캄하게 암전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지만,
유진은 벽을 붙잡고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쾅―!
호텔 화장실 입구의 묵직한 도어를 밀고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단단하고 거대한 신체와 그대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앗!”
단단한 바위를 들이받은 듯한 반동,
유진의 가냘픈 몸이 뒤로 크게 휘청였다.
이미 과호흡으로 무너진 무게중심에,
그대로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고꾸라지려던 그 짧은 찰나.
스윽―
공기를 가르는 거친 파동과 함께,
유진의 가느다란 허리로, 강하고 단단한 손길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녀의 얇은 드레스 원단 너머,
커다란 사내의 손바닥이, 그녀의 살결을 고스란히 느끼며 감싸 안았다.
순간 힘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이,
유진의 허리를 통째로 집어삼키듯 움켜쥐더니,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팍―!
남자의 두터운 가슴팍에 유진의 얼굴이 파묻혔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취...
은은하게 풍겨오는 묵직한 우드 향,
그리고 그 뒤를 부드럽게 감싸는 쌉싸름하고 퇴폐적인 라벤더 향.
그 지독할 정도로 관능적인 수컷의 냄새가,
유진의 마비되어 가던 뇌신경을 강하게 자극했다.
힘없이 흔들리던 유진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향했다.
마침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서…… 유진?”
낮고 굵직하게 가라앉은 동굴 같은 목소리.
세포 하나하나까지 진동시키는 저음이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의 체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언뜻 보아도 190cm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거구에,
수트 너머로 드러나는,
허벅지와 셔츠를 터뜨릴 듯한 가슴 근육이 유진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밤하늘의 어둠을 통째로 베어 물어 박아 넣은 듯한 진하고 깊은 눈매.
날카롭게 날을 세운 명검처럼 강인한 턱선과 높은 콧날.
태생적인 잔인함과 오만함이 깃든 얼굴.
부드러움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서슬 퍼런 무사를 연상시키는,
섹시하고 거친 남성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내였다.
유진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낯선 이방인.
[날… 내 이름을 알아? 어떻게… 아는 사람이지?]
유진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유진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허리를 감은 커다란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도망치려는 그녀를 더욱 밀착시켜 붙잡았다.
“아……! 읏,”
서로의 몸이 틈도 없이 맞닿자,
유진의 입술 사이로 얇은 신음이 새어 나갔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유진의 아랫배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시 마주친 시선이 허공에서 끈적하게 얽혀들었다.
시간조차 진동을 멈춘 듯, 두 사람의 숨결이 엉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진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는 맹수 같은 눈동자가,
묘하게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고스란히 흘러넘치는 남자의 호감 그리고 애절함에 가까운 지독한 욕망.
유진의 차갑고 잔혹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남자란 동물은 참 쉽구나. 이렇게 찰나의 순간에도, 쉽게 사로잡히는 게 남자의 욕정인데…….]
그깟 남자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목을 매며,
자신은 왜 그 구질구질한 관계를 붙잡고 이토록 비참해져야만 했을까.
애초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약속도, 계약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시금 거대한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홀로 남겨질 세상에 대한 공포.
하지만 조금 전 나만의 파티장에서,
자신을 비웃던 그 여자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복수하고 싶다.
나를 짓밟은 그 인간들에게 똑같이 갚아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이 지옥에서 날 꺼내줄 닻이 필요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완전히 뒤틀어버릴, 신의 한 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자신에게 취해 눈을 번뜩이는 이 위험한 맹수를 이용하기로.
유진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남자의 넓고 단단한 어깨 위에 부드럽게 올렸다.
스르륵,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쓸어 올리자,
남자의 거친 호흡이 훅 멎는 게 느껴졌다.
유진이 요염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남자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골반을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슬쩍 밀어 넣었다.
노골적인 자극에,
남자의 턱관절이 거칠게 맞물리며,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손가락에 핏줄이 터질 듯 돋아났다.
유진이 남자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바지춤 사이로,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존재감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눈빛이 이성을 잃은 야수처럼 변했다.
그때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유진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후회하지 마, 서유진.”
뚝.두 사람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하아…… 하아…… 유진아, 제발…… 멈추지 마…… 나 지금 여기서 멈추면 진짜 심장 터져서 죽어, 잠깐만…… 애 그냥 울게 내버려 두면 안 돼? 어?”요스케의 회색 눈동자가 정욕과 억울함으로 새빨갛게 충혈된 채 핏대를 세우며 구걸했다.그러나 엄마가 된 서유진의 모성 본능은 자비가 없었다.유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스케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제 안쪽의 중심을 가차 없이 뽑아내며 미련 없이 떨어져 나왔다.원피스를 대충 추스른 유진은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줍지도 못한 채,곧장 아기방을 향해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탕ㅡ!아내가 남겨두고 간 끓어오르는 미완의 욕정과 하반신의 묵직한 고열 앞에,홀로 남겨진 요스케는 이미 이성이 가출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거대한 야수가 된 그는 바지 지퍼가 반쯤 열린 꼴로,유진의 냄새를 쫓아 아기방으로 성큼성큼 폭주해 들어갔다.아기방 안,은은한 수유등 명암 아래서 유진은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는 아기를 품에 안고 느리게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이내 안정을 찾은 아기가 다시 살짝 잠이 들자, 유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기 침대 매트리스 위에 녀석을 눕혔다.바로 그 찰나의 순간.스르륵, 쿵ㅡ.등 뒤에서 다가온 요스케의 거대한 명암이 유진을 덮쳤다.그는 유진이 소리를 지를 틈도 주지 않은 채, 허리를 굽히고 서 있던 그녀의 원피스 스커트 자락을 뒤에서부터 허리까지 가차 없이 거칠게 끌어올렸다.그리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묵직한 무기를 그녀의 무방비한 가랑이 사이, 눅진한 안쪽 성역으로 뒤에서부터 단숨에 박아넣었다.쩍ㅡ!“앗……! 읏, 요스케……! 미쳤어요?! 여긴…… 아기방이잖아…… 안 돼요……!”유진이 깜짝 놀라 황금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반발하려 하자, 요스케가 유진의 입을 뒤에서 손바닥으로 가볍게 틀어막았다.그리고 뇌쇄적이고도 위험한 저음을 귓가에 사정없이 꽂아내렸다.“쉿…… 조용히 해, 아기 깨잖아. 얌전히 있어.”지독하게 가학
마침내 딸아이의 뒤틀렸던 밤낮이 마법처럼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비극의 육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동력으로 두 사람을 압박해 왔다.뒤집기를 마스터하자마자 사정없이 기어 다니고 움직이기 시작한 아기.진짜 단 1초라도 시선에서 멀어지면 아찔한 사고의 연속이었다.화아아악ㅡ!유진은 불 앞에서 한시간을 서서 이유식을 만들고 아기 접시를 요스케에게 건넸다.190cm가 넘는 거구의 포식자는 이제 제법 노련해진 손놀림으로 아기 의자 앞으로 그릇을 가져갔다.아직 옷도 갈아있지 않은 드레스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우람한 팔뚝 근육이 앙증맞은 실리콘 숟가락을 쥐고 바삐 움직였다.요스케는 깊은 회색 눈동자를 다정하게 휘저으며, 이유식을 후후 불어 아기의 작은 입술 사이로 조금씩 떠먹여 주었다.다행히도 이번 특제 이유식은 까다로운 딸내미의 입맛에 완벽하게 맞았는지, 단 한 방울도 거부하지 않고 아빠를 닮은 조그만 입으로 잘도 받아먹었다.요스케는 감격에 겨운 듯 대형견처럼 싱글벙글 웃어댔고,유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만찬을 준비했다.탁, 탁.유진은 오랜만에 공을 들여 만든 프레시 방울토마토 냉파스타와 로즈마리 향을 입혀 노릇하게 구워낸 그릴드 씨푸드 접시를 디너 테이블 위로 세팅했다.슬쩍 오늘의 저녁 메뉴를 확인한 요스케가 냉장고 홈바에서 시원하게 칠링되어 있던 화이트 와인을 꺼내 들었다.또르르르묵ㅡ.투명한 크리스탈 글라스 잔 가득 찰랑이는 호박빛 와인을 유진에게 건네는 요스케의 손끝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오직 저녁 식사를 아주 천천히 즐기며 이어갔다.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오랜만의 고요하고 조용한 저녁이었다.얼마 지나지않아, 배가 빵빵하게 차오른 딸아이는 포만감과 식곤증을 이기지 못한 채 아기 의자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요스케는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아이를 가만히 품에 안아 올렸다.그리고 어둠이 내린 아기방 침대 위로 녀석을
다음 날 아침 7시.출근을 위해 완벽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아이의 요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밤새 부모의 피를 말리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처럼 무해하고 투명한 얼굴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잘 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눈이 부시게 예뻐서, 출근하려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스윽ㅡ.그때 요스케가 요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진의 가녀린 허리를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화이트 셔츠 너머로 요스케의 단단한 가슴이 유진의 등 뒤로 터질 듯이 밀착해 왔다.그는 자신의 턱이 유진의 어깨 위에 기댔다.그러자 라벤더 향취와 사내 특유의 아침 온기를 뿜어나왔다.“우리 딸한테 미안하네…… 근데 왜 애는 날 완전 쏙 빼닮아서 나왔지? 엄마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원래 딸은 아빠를 똑 닮아서 나온다던데요?”유진이 그의 커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대꾸했다.“그래? 그럼…… 아들을 낳으면 너를 쏙 빼닮은 놈이 나온다는 거야?”요스케의 은밀하고도 뇌쇄적인 저음이 유진의 귀밑 살결을 간지럽혔다.은근슬쩍 둘째 계획을 밀어붙이는 포식자의 수작.유진은 일부러 아는 척 하지 않았다.“아마도……? 확률이 그렇다니까요.”“근데 넌 어렸을 때 누구 닮았었는데?”요스케가 넌지시 묻는 순간,유진의 머릿속으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훅 찌르듯 들어왔다.“너희 커플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가…… 진짜 친남매 같아. 문기선배랑 너, 얼굴부터 분위기까지 완전 똑 닮았어, 판박이야.”쿵.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서글프도록 그리운 이름,그의 잔상이 아침 햇살 속에서 스르륵 피어오르자,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칠흑 같은 명암을 띠며 흔들렸다.유진은 이내 잡념을 털어내듯, 자신을 안고 있는 요스케의 우람한 팔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아… 엄마요. 난 엄마랑 판박이였어요.”유진이 애써 목소리 톤을 올리며 미소 짓자,요스케는 그녀의 찰나의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 채, 유진의 귓바퀴를 입술로 살짝 머
백일의 기적은 도대체 언제 일어나는 걸까?벌써 150일째, 밤낮이 바뀌었다.낮과 밤이 완벽하게 전복되어 버린 대가는 참혹했다.샌프란시스코의 고요한 교외 주택가.거실의 벽시계가 서늘한 소리를 내며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유진의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는 여전히 새벽을 닮은 진한 회색 눈망울을 말똥말똥하게 빛내고 있었다.피로로 인해 전신이 사정없이 메말라가는 감각 속에서.유진은 한숨을 몰아쉬며 아이의 포동포동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딸…… 진짜 너무한다. 엄마 아빠는 내일 아침 8시에 칼같이 출근해야 하는데,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 시간에 에너지가 폭발하는 거야?”“이러니까 낮에 상주하는 보모는 이 녀석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순하고 천사 같은 아기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지. 낮에는 아주 세상 모르고 잠만 자니까 말야.”요스케가 화이트 셔츠의 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채, 작은 분유병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밤의 포식자였던 그의 깊은 회색 눈동자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의 명암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안 되겠다. 애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한 번 더 돌고 올까요?”유진이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기대며 제안하자, 요스케는 아이의 앙증맞은 손가락을 제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며 낮게 허스키한 음성을 깔아내렸다.“아무래도 이 녀석, 우리랑 놀려고 기다리는 것 같아. 그래서 낮에는 충전하듯 자고, 우리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타이밍 좋게 깨어나는 거지. 딸……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지 엄마 닮아 가지고 밀당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유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툭 튀어나왔다.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본능일지도 몰랐다.오직 밤 시간에만 온전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부모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본능적힌 애달픈 구원일 테니까.“들어가서 자. 너. 내일 아침에 논문 심의 발표 있다며.”“그러지 말고. 애 데리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요.”“그거 위험하다던데…”
에에엥ㅡㅡ……!사막의 전장보다 더 치열하고 혹독한 육아의 전장 한가운데,기계적인 아기 모니터의 알람음이 침실의 묵중한 공기를 사정없이 갈랐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요스케의 거대한 몸이 뚝, 하고 침대 바깥의 차가운 방바닥 위로 볼품없이 떨어져 버렸다.“……아윽.”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요스케는 비몽사몽 간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방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사흘 밤낮을 이어지는 경영회의와 그리고 밤마다 이어지는 가혹한 육아 피로에 짓눌린 그의 수려한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요스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방금 전 제 옆구리를 정확하게 명중시켜 침대 바깥으로 자신을 가차 없이 차서 떨어트린 장본인, 자신의 아내 서유진을 극도로 억울하고 볼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진…… 오늘 밤은 분명 너 차례잖아.”포식자의 위엄은커녕,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리는 요스케의 억울한 음성이 침실에 울렸다.하지만 유진은 그의 볼멘소리를 완벽하게 못 들은 척, 이불을 턱끝까지 바짝 끌어올린 채 미동도 없이 잠만 잤다.2년간, 수단 사막에서 생존과 사투로 단단해진 정신력은 이제 밤마다 남편을 침대 밑으로 걷어차는 생존 육아 내공으로 진화해 있었다.에에엥ㅡㅡ! 에에엥ㅡㅡ!!그 사이, 침대 머리맡의 아기 모니터에서는 다시 한번 경보음처럼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정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유진은 여전히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요스케는 기어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천하를 쥐고 흔들던 남자는 이제 가운 대신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안방을 나가 옆방의 아기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스르륵ㅡ.“아…….”아기방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피어오르는 지독하고도 묵직한 똥 냄새.요스케는 문을 잡은 채 그대로 자리에 단단히 얼어붙으며 처참하게 절망했다.침대 요람 안에서 자신의 핏줄이자 자신의 새로운 우주가 된 자신의 딸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울어대고 있었다.“……너는
“아……! 읏…… 흐으윽……!”설상가상으로 아이가 조산 미숙아 상태라, 태아의 신경 자극을 우려해 전신을 마비시켜 줄 무통주사(Epidural)조차 맞을 수 없었다.날것의 통증이 유진의 가녀린 전신을 가차 없이 짓찧었다.환자복 단추 사이로 드러난 백색 쇄골 위로 식은땀이 하얗게 흘러내려 침구를 붉은 열꽃처럼 적셔갔다.유진의 처절하게 부서지는 신음 소리에,구석에 있던 요스케는 완전히 멘붕이 와서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어, 어떡해…… 유진아! 내가 대신 아플 수도 없고…… 어떡하지? 의사! 간호사!”술까지 잔뜩 취한 채,거대한 덩치로 제자리를 뱅뱅 돌던 요스케는, 급기야 불안함을 달래려 제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뺐다 꼈다 하며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투둑.그때, 술기운에 감각이 둔해진 그의 두터운 손가락 사이로 영롱하게 반짝이던 결혼반지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탱그르르르ㅡ. 또각.“엇… 반지…!”날카로운 금속성의 파열음과 함께,반지는 가차 없이 병실 바닥을 굴러, 침대 가장 깊숙한 구석 암전의 틈새 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순간, 기적처럼 유진의 진통이 뚝 멈췄다.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찾아온 이 허무맹랑한 상황.식은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하얀 얼굴을 천천히 돌린 유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요스케를 빤히 바라보았다.황금빛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서렸다.“아니… 그게… 반지가… 손에서 미끄러져서…”“하… 진짜.”사고뭉치 대형견.저 빌딩만한 체구로 침대 밑바닥에 기어들어 갔다가는,그물에 걸린 미꾸라지처럼 그대로 끼어서 영원히 못 나올 게 뻔했다.유진은 잠시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진통이 멈춘 틈을 타 무거운 나신을 침대 아래로 움직였다.“비켜요, 내가 찾을 테니까.”유진은 환자복 자락을 늘어뜨린 채, 바닥으로 직접 엎드려 기어갔다.침대 밑 창백한 먼지 구덩이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어,기어이 요스케가 떨어뜨린 결혼반지를 끄집어냈다.유진의 하얀 손바닥 위에서 플래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