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술에 취한 걸까.’
요스케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성을 난도질하는 비현실적인 감각.
벤처스 인베스트먼트 한국지사 환영회.
무리하게 독주를 들이킨 건 사실이었다.
타국에서의 긴장감과 독한 알코올 기운이 뇌까지 마비시킨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되는 망상에 빠진다고? 설마…]
화려한 금빛 조명이 쏟아지는 호텔 화장실 앞.
그 눈부신 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서, 자신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있는 이 여자.
진짜 내가 아는 그 서유진이 맞나.
아니면, 그저 그 애와 지독할 정도로 닮은 타인인 건가.
사고회로가 정지하려는 찰나.
스윽.
품 안의 여자가, 가느다란 두 손을 뻗었다.
칠흑 같은 남자의 진한 눈동자 속으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요스케의 화이트 셔츠 깃을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멱살을 잡듯 강하게 낚아채 잡아당기는 손길.
가냘픈 외견과 달리, 남자를 끌어당기는 힘에는 악에 받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순간 190cm가 넘는 거구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읍―!
가느다란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르며,
동시에 선홍빛으로 물든 뜨거운 입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망설임 없는, 지독하리만치 진한 딥키스였다.
달콤한 핑크빛 칵테일 향,
살짝 열이 오른 여자 특유의 하얀 살내음이,
그의 입안 가득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혀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들어와 거칠게 얽혀드는 순간,
요스케의 머릿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던 기억 한 조각이 날카로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윽.”
가슴 깊은 곳.
오랫동안 쇠사슬로 묶어 봉인해 두었던 심장 언저리에서 저릿한 통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감각. 이 아찔한 체향.
[……서유진이다.]
그녀가 맞다.
기억 속의 감각이, 그리고 몸이, 그녀를 먼저 알아봤다.
8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녀의 존재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밀려드는 유혹. 폭발하는 본능.
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이 하얗게 타버린 자리에, 맹목적이고 흉포한 갈증만이 남았다.
요스케는 유진의 허리를 부서질 듯 감싸 안은 채,
화장실 바로 옆에 철제 비상계단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쾅――!
육중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엉킨 채로,
어둡컴컴하고 칙칙한 비상계단 안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아, 읏…… 읍!"
문이 닫히자마자, 요스케는 유진을 비상계단 벽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쿵ㅡ!
거칠고 단단한 회색 시멘트 벽에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등이 둔탁하게 부딪혔다.
순간 그의 두꺼운 입술이 다시 한번 유진을 집어삼킬 듯이 덮쳐왔다.
낮게 가라앉은 요스케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계단실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유진의 연약한 입술 점막을 악 물듯 빨아물고 헤집었다.
키스라기보다 차라리 유린에 가까웠다.
사각, 스르륵.
얇은 실크 원단 너머로,
맞닿은 남자의 단단한 하체가 유진의 골반을 뭉개버릴 듯 압박해 들어왔다.
숨 막힐 정도로 단단한 존재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숨결이 한데 엉켜 가파라지던 그때,
요스케가 돌연 키스를 멈추었다.
"후우…… 후……."
차오르는 뜨거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가 커다란 한 손으로, 유진의 창백한 뺨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비상구의 미약한 초록색 유도등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진한 눈동자를 기괴하게 비추었다.
그의 시선이 유진의 붉은 입술과 핏기 없는 얼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애타는 열망과 의구심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서유진…… 너, 맞는 거지? 진짜…… 너지?]
비상계단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듯 한참 동안 응시했다.
유진의 눈에 서린 새빨간 독기와 슬픔.
그리고 요스케의 눈에 가득 찬 묵직한 열망이 허공에서 질척하게 얽혔다.
유진이 먼저 그의 목덜미를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정신없이 입술을 맞부딪쳤다.
츗, 츄릅, 츄우…….
외설적인 마찰음이 계단실의 고요를 잔인하게 깨뜨렸다.
타오르는 열기에 제대로 불이 붙자, 애무의 강도는 점점 통제 불능으로 진해졌다.
요스케는 한 팔로 벽을 짚어 유진의 도망갈 구석을 완전히 차단했고,
다른 한 팔로는 유진의 가는 허리를 완전히 감싸 안아 그녀를 가두었다.
하얀 드레스 치맛자락 위로,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단단하고 거친 손길과,
요스케의 검은 가죽 시계가 유진의 하얀 살결과 부딪히며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셔츠 단추 사이를 파고드는 유진의 차가운 손끝.
두 사람의 손길이 서로의 살결을 갈구하며 가파르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딸깍― 또각, 또각.
두터운 철제 비상문 틈새로,
복도의 번쩍이는 금빛 조명이 한 줄기 날카로운 선이 되어, 어두운 계단실 바닥을 갈랐다.
그 빛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유진아! 서유진!"
"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화장실에도 없던데."
"혹시…… 문기 선배한테 갔나?"
"걔가? 너 서유진을 몰라? 걔가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문기 선배를 찾아갔을 리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답답하게."
유진을 찾는 친구들의 다급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상계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짖이기던 입술을 떼고,
서로의 품 안에서 완전히 숨을 죽였다.
유진은 요스케의 하얀 셔츠에 이마를 묻었고,
요스케는 그녀를 들키지 않게 하려는 듯,
커다란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복도의 그 화려한 빛으로부터,
그녀를 숨겨주려는 거대한 암전(暗轉)처럼.
그 어둠 속에서 오직 가파른 심장 박동 소리만이 터질 듯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서로의 살결을 타고 동기화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조여드는 긴장감 속에서,
남자의 노골적인 흥분감이 유진의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했다.
"저쪽 연회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다행히 문틈으로 새어 들던 발소리와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을 긋던 일직선의 금빛 조명도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완전한 정적과 어둠이 찾아오자,
팽팽했던 긴장감이 걷히며,
묘하게 머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열기로 터질 것 같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요스케가 먼저 유진의 몸에서 슬그머니 거리를 뒀다.
흐트러진 화이트 셔츠 깃을 고치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찾는 것 같은데,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배려 섞인 말이었지만,
유진의 귀에는 이미 ‘문기 선배’라는 이름이 비수처럼 꽂힌 후였다.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복도에서 들은 친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미치기로 했으니까. 제대로 미친년이 되어보자.]
자신을 진흙탕으로 밀어 넣은 그 세상에 복수할 수만 있다면,
이 위태로운 홀로서기를 선택한 자신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유진은 멀어지려는 요스케의 옷자락을 다시 강하게 잡아끌었다.
190cm의 거구가 유진의 작은 손길 하나에 다시금 훅 끌려들어왔다.
유진은 요염한 붉은 입술을 열어, 날카롭고도 매혹적인 제안을 던졌다.
"나랑 오늘 잘래요?"
충동적이고도 대담한 하룻밤 제안.
예기치 못한 유진의 직구에,
요스케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요스케의 시선이,
자신의 옷자락을 쥔 채, 도발해 오는 유진의 붉어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망칠 기회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유진의 허리를 다시 한번 으스러지도록 움켜쥐며,
낮고 은밀하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다음 날 아침,백색 조명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공간.의국 문을 열자마자 숨통이 턱 막혔다.유진의 책상 위, 오만하게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커먼 그림자.김문기였다.단 하나의 구김도 허용하지 않은 다크 그레이 수트 차림.완벽하게 정돈된 외피와 달리,유진을 집어삼킬 듯 응시하는 그의 시퍼런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야수의 잔혹함만남아 있었다.그리고 유진을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어제 내 톡 보고도 답이 없어서 왔는데, 서유진. 내가 분명히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기회를 줬을 텐데.”스슥.문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압도적인 거구가 불길한 실루엣을 그리며 유진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공기가 얼어붙었다.쾅. 곧이어, 문기가 유진의 등 뒤로 의국 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잠금장치가 돌아가는 날카로운 기계음.이제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완벽하게 폐쇄된 밀실.문기의 서늘한 시선이 유진의 얇은 가운 자락을 지나, 그녀의 왼손 약지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백색 조명을 받아 잔인할 정도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반지.콰득. 문기의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잘생긴 미간이 발작하듯 비틀렸다.“그 새끼가 끼워준 반지가 제법 마음에 드나 보지?”낮게 긁히는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했다.“내 통제를 벗어나 다른 남자 밑에서 구르는 게 그렇게 좋았냐고 물었잖아, 서유진.”텁―!문기의 거친 손길이 유진의 가녀린 손목을 낚아챘다.뼈가 바스러질 듯한 악력.유진의 몸이 사정없이 밀려나며 차가운 벽 구석으로 강압적으로 처박혔다.등 뒤로 닿는 하얀 시멘트 벽의 냉기.“이거 놓아, 오빠……!”유진이 온 힘을 쥐어짜 그를 밀쳐냈다.그리고 곧장 문으로 달려가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손잡이를 비틀었다.하지만 문기가 더 빨랐다.뒤에서 덮치듯, 문기가 유진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열리던 문을 향해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쾅――!의국 문이 비명 같은 소음을 내며 다시 닫혔다.유진의 어깨를 옭아맨 문기의 무거운 숨결이
붉은 피가 번지듯.어스름한 저녁 노을이 순백의 병원 외벽을 기괴하게 물들이고 있었다.지옥 같았던 복귀 첫날의 막이 내렸다.병동 복도를 끈질기게 채우던 사람들의 잔인한 웅성거림과 뜨거운 시선들.가운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던 김문기의 문자.그리고 기어이 심장 가장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온 10년의 미련까지.유진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 나간 상태였다.터덜거리는 걸음.가방 끈을 쥔 손가락엔 힘이 없었다.완전히 소진된 육체를 이끌고, 병원 로비를 걸어 나오던 유진의 시야에 비현실적인 실루엣이 걸려들었다.우뚝. 발길이 멈췄다.병원 정문 앞,저녁노을의 붉은 잔영을 받으며 웅장하게 서 있는 최고급 이사장 전용 의전 차량이 보였다.그리고 그 차 문에 기대어,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서 있는 남자, 류 요스케.피로와 혼란으로 얼룩진 유진의 가냘픈 실루엣을 발견한 그의 서늘하고 짙은 눈동자가 한순간에 다정하게 누그러졌다.요스케는 뚜벅뚜벅 다가와 사람들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유진의 차가운 손을 꽉 감싸 쥐었다.미야코지마의 그 뜨거웠던 온기가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통해 유진의 전신으로 단숨에 퍼져나갔다.“첫 출근이라 많이 힘들었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내 아내.”낮고 묵직한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요스케는 직접 차 문을 열어 유진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뒷좌석의 넓고 아늑한 시트 위로 유진의 지친 몸을 자신의 넓은 흉벽에 기대게 안는 남자.병원 내부를 뒤흔든 지저분한 소문들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더없이 거대하고 따뜻한 체온으로 유진의 떨림을 가라앉힐 뿐이었다.그리고 그의 차량은 도심 한복판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최고급 레지던스로 향했다.최상층, 테라스 펜트하우스.철제 문이 열리는 순간 유진의 숨이 멎었다.사방이 통유리로 재단되어 있어 검은 장막이 내린 화려한 서울의 야경과 남산의 푸르스름한 실루엣이 발밑으로 압도하듯 펼쳐지는 공간이었다.낯설고도 눈부신 인테리어에
유진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무릎 위에서 잘게 떨리고 있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다시 그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바닥 없는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숨을 쉴 수 없었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진을 흔든 건,그가 보낸 미치도록 잔인했던 마지막 문자 한통이 아니었다.*결혼식을 파토내고.요스케와 다시 한번 그의 아뜰리에에서 뜨겁게 몸을 섞은 그 시각.문기에게서 여러 통을 문자가 왔었다.‘화 난 거 이해해. 그러니까 돌아와.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돌아와서 내 얘기부터 들어. 서유진. 너 이렇게 가면 너 우리 어머니한테 꼬투리만 더 잡히게 돼. 그러니까… 내가 변명 구실 뭐든 만들어서 결혼을 미룰 테니까. 넌 일단 돌아오기만 해. 그럼 내가 다 수습 할 거야.’그리고 유진이 다른 남자에게 빠져 대답이 없자, 다시 들어온 문기의 문자.‘진짜 이대로 그만 두겠다는 거 아니지? 우리 10년을 기다렸어. 이제 우리 결혼만 하면 넌 이제 정말 내 사람이라고… 너와 나 진짜 가족이라고…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널 내 곁에 제대로 두려고, 내가 얼마나 참은 지 알아? 사랑해. 진심이야. 오늘 밤… 널 안고 말하고 싶었어. 지난 10년간 죽어라 참아 온 이 말을… 사랑해. 제발 돌아와. 부탁이야. 기다릴게’그때는 그저 체면 때문에 늘어놓는 비열한 변명과 거짓말인 줄만 알았다.그래서 분노에 눈이 멀어, 요스케의 손을 잡고 미야코지마로 도망쳤다.그렇게 요스케의 품에서.처음으로 온전한 육체적 해방감과 뜨거운 채움의 사랑을 맛보았다.그리고 문기를 완전히 지워냈다고 생각했다.요스케의 다정한 손길 아래서.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확신했었다.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문기의 강압적인 손길을 마주했다.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내 차갑게 돌아섰다.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오만한 면죄부 톡을 확인한 순간.유진은 흔들렸다.평생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무릎 꿇은 적 없던 오만한 김문기가.더 이상 고결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은 자신을 잡기 위해, 억지
하아, 하아, 하아.문기의 축축한 숨결을 뿌리치고.도망쳐 나온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허덕였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가파르게 요동쳤다.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의국 문을 거칠게 밀쳤다.벌컥――!백색 조명이 쏟아지는 의국 내부. 사방에 깔린 차가운 소독약 냄새.“어라? 뭐냐? 일주일 동안 이사장님이랑 아주 제대로 뜨거운 신혼생활 즐기다 오셨나 봐요? 아주 뼈만 남게 야위셨는데, 우리 이사장 사모님?”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붉게 상기된 얼굴로 들이닥친 유진을 향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의국 소파에 길게 누워 차트를 뒤적거리던 남자가 낄낄거리며 몸을 일으켰다.특유의 장난기 섞인 농담을 던지는 사내.유진의 고등학교 동창이자.그녀를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오랜 소꿉친구, 선호였다.그때 실실 거리던 그의 웃음이 딱 사라졌다.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황금빛 눈동자.평소의 유진이라면.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핀잔을 주거나, 그의 등짝을 후려쳤을 타이밍이었다.그런데 그녀는 책상 모서리를 부서질 듯 움켜쥔 채,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고 있었다.물기조차 마른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의국 내부에 서늘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선호의 안색에서 장난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성큼성큼 긴 다리로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서유진? 너 왜 그래? 왜 이렇게 떨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혹시 복도에서 누가 대놓고 너한테 더러운 말이라도 뱉었어? 아무리 네 파혼이랑 초고속 결혼 스캔들이 자극적이라고 해도, 이 병원 의료진 중에 네 앞에서 대놓고 험담할 간 큰 인간은 없을 텐데. 류 이사장이 어떤 괴물인지 뻔히 알면서, 목숨 내놓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카톡――.바로 그 순간, 적막을 찢고 유진의 가운 주머니 속에서 날카로운 진동음이 울렸다.혹여, 응급실에서 온 긴급 호출(Emergency Call)일까 싶었다.유
타악――!어둠 속에서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일었다.살과 살이 난폭하게 부딪치며 튕겨 나가는 생경한 마찰음.으스러질 것처럼 유진의 가녀린 어깨를 옥죄고 있던 김문기의 긴 손가락 사이로 기어이 균열이 생겼다.전신을 뒤틀어 짜낸 유진의 저항은 악에 받쳐 있었다.문기의 거친 악력이 허공으로 미끄러졌다.그가 다시 손을 뻗어 유진의 목덜미를 낚아채기도 전.유진은 순백의 의사 가운 자락을 사납게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질척하고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의 스산한 공기를 찢고, 차가운 철문을 힘껏 밀쳤다.쾅――!철문이 비명 같은 소음을 내며 무겁게 닫혔다.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계단실에는 오직 한 남자만이 유령처럼 덩그러니 남겨졌다.김문기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멀어지는 하얀 잔상을 좇던 시선이 천천히 제 손바닥으로 향했다.얼룩진 공기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다섯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넋이 나간 듯 완전히 경직되어 버린 육체.10년 전이었다.중학교 3학년의 유진.불의의 사고로 부모의 시신을 치르고 검은 상복 차림으로 자신의 저택의 무거운 대문을 열고 들어왔던 첫 순간.상실감에 얼어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만지려던 자신의 손을 향해,열다섯의 소녀는 지금처럼 차갑고 가차 없는 거절의 손짓을 날렸었다.그날, 남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관통했던 생생한 거절의 촉각.문기는 그 비참한 촉각을 느낀 직후 결심했었다.다시는 그녀가 자신을 거역하게 두지 않겠다고.자신의 손길을 밀어내지 못하게 하겠다고.그렇게 10년을 완벽한 새장을 짜고 그녀를 가두었다.오직 자신만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이라고.그녀가 자신만을 갈구하며, 숨소리조차 자신의 통제 아래서만 쉴 수 있는 자신만의 순종적인 인형으로 사육해 왔다.그런데 오늘, 그 견고했던 10년의 감옥을 깨부수며.유진의 손끝에서 또다시 그 잔인한 ‘거절’의 감각이 전해졌다.남자의 잘생긴 미간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문기는 그제서야 처절하게 깨달았다.서유진은
순백.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하얀 풍선들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화려한 백색의 생화들.그 중심에 선명하게 박힌 문구.[Bride to be 서유진]최고급 호텔 파티룸.유진은 몸에 딱 맞는 아이보리빛 미니 파티 드레스를 입은 채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수많은 친구들의 축하와 환호성.10년이다.그 기나긴 기다림과 인내의 끝자락.마침내 김문기의 정식 아내로, 그의 완벽한 짝으로 세상에 공인받는 날이었다.늘 문기의 숨 막히는 통제 속에서,사막처럼 메말라 있던 유진의 뺨 위로, 모처럼 선홍빛 생기가 돌던 바로 그 순간.스르륵ㅡ.파티룸의 묵직하고 웅장한 문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열렸다.유진의 고요한 세계를 송두리째 찢어발길 거대한 파멸의 서막.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을 긁었다.뚜벅, 뚜벅.사방의 소음이 일시에 멎었다.모든 시선이 단 하나의 점으로 고정되었다.피부가 아슬아슬하게 비쳐 보이는 얇은 블랙 실크 원피스.움직일 때마다 백색 조명을 받아 잔인하게 반짝이는 화려한 다이아몬드 귀걸이.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을 향해 지독한 열등감과 신분 상승의 칼날을 갈아왔던 여자.김문기의 비서, 한정희였다.아이보리와 블랙.극단적인 두 색채가 파티룸 정중앙에서 날카롭게 충돌했다.친구들의 웅성거림이 소음으로 깔렸다.정희는 오만한 걸음으로 다가와 유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그녀의 붉은 입술 끝에 걸린 잔인한 조소.“행복해 보이네, 서유진?”비아냥이 귀를 찔렀다.“문기 선배가 10년 동안 적선하느라 정결하게 모셔만 뒀다던 그 불쌍한 고아 약혼녀의 브라이덜 샤워라니.”“……한정희. 난 널 여기에 초대한 적이 없는데. 미안하지만 당장 나가줘.”유진의 목소리가 굳어졌다.“내가 왜 나가?”정희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김문기의 진짜 ‘여자’인 내가, 내 남자의 이미지 세탁 노릇을 해줄 인형한테 선물을 주러 왔는데.”착ㅡ!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정희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이 유진의 얼굴을 향해 가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