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술에 취한 걸까.’
요스케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성을 난도질하는 비현실적인 감각.
벤처스 인베스트먼트 한국지사 환영회.
무리하게 독주를 들이킨 건 사실이었다.
타국에서의 긴장감과 독한 알코올 기운이 뇌까지 마비시킨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되는 망상에 빠진다고? 설마…]
화려한 금빛 조명이 쏟아지는 호텔 화장실 앞.
그 눈부신 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서, 자신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있는 이 여자.
진짜 내가 아는 그 서유진이 맞나.
아니면, 그저 그 애와 지독할 정도로 닮은 타인인 건가.
사고회로가 정지하려는 찰나.
스윽.
품 안의 여자가, 가느다란 두 손을 뻗었다.
칠흑 같은 남자의 진한 눈동자 속으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요스케의 화이트 셔츠 깃을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멱살을 잡듯 강하게 낚아채 잡아당기는 손길.
가냘픈 외견과 달리, 남자를 끌어당기는 힘에는 악에 받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순간 190cm가 넘는 거구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읍―!
가느다란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르며,
동시에 선홍빛으로 물든 뜨거운 입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망설임 없는, 지독하리만치 진한 딥키스였다.
달콤한 핑크빛 칵테일 향,
살짝 열이 오른 여자 특유의 하얀 살내음이,
그의 입안 가득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혀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들어와 거칠게 얽혀드는 순간,
요스케의 머릿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던 기억 한 조각이 날카로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윽.”
가슴 깊은 곳.
오랫동안 쇠사슬로 묶어 봉인해 두었던 심장 언저리에서 저릿한 통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감각. 이 아찔한 체향.
[……서유진이다.]
그녀가 맞다.
기억 속의 감각이, 그리고 몸이, 그녀를 먼저 알아봤다.
8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녀의 존재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밀려드는 유혹. 폭발하는 본능.
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이 하얗게 타버린 자리에, 맹목적이고 흉포한 갈증만이 남았다.
요스케는 유진의 허리를 부서질 듯 감싸 안은 채,
화장실 바로 옆에 철제 비상계단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쾅――!
육중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엉킨 채로,
어둡컴컴하고 칙칙한 비상계단 안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아, 읏…… 읍!"
문이 닫히자마자, 요스케는 유진을 비상계단 벽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쿵ㅡ!
거칠고 단단한 회색 시멘트 벽에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등이 둔탁하게 부딪혔다.
순간 그의 두꺼운 입술이 다시 한번 유진을 집어삼킬 듯이 덮쳐왔다.
낮게 가라앉은 요스케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계단실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유진의 연약한 입술 점막을 악 물듯 빨아물고 헤집었다.
키스라기보다 차라리 유린에 가까웠다.
사각, 스르륵.
얇은 실크 원단 너머로,
맞닿은 남자의 단단한 하체가 유진의 골반을 뭉개버릴 듯 압박해 들어왔다.
숨 막힐 정도로 단단한 존재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숨결이 한데 엉켜 가파라지던 그때,
요스케가 돌연 키스를 멈추었다.
"후우…… 후……."
차오르는 뜨거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가 커다란 한 손으로, 유진의 창백한 뺨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비상구의 미약한 초록색 유도등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진한 눈동자를 기괴하게 비추었다.
그의 시선이 유진의 붉은 입술과 핏기 없는 얼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애타는 열망과 의구심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서유진…… 너, 맞는 거지? 진짜…… 너지?]
비상계단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듯 한참 동안 응시했다.
유진의 눈에 서린 새빨간 독기와 슬픔.
그리고 요스케의 눈에 가득 찬 묵직한 열망이 허공에서 질척하게 얽혔다.
유진이 먼저 그의 목덜미를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정신없이 입술을 맞부딪쳤다.
츗, 츄릅, 츄우…….
외설적인 마찰음이 계단실의 고요를 잔인하게 깨뜨렸다.
타오르는 열기에 제대로 불이 붙자, 애무의 강도는 점점 통제 불능으로 진해졌다.
요스케는 한 팔로 벽을 짚어 유진의 도망갈 구석을 완전히 차단했고,
다른 한 팔로는 유진의 가는 허리를 완전히 감싸 안아 그녀를 가두었다.
하얀 드레스 치맛자락 위로,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단단하고 거친 손길과,
요스케의 검은 가죽 시계가 유진의 하얀 살결과 부딪히며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셔츠 단추 사이를 파고드는 유진의 차가운 손끝.
두 사람의 손길이 서로의 살결을 갈구하며 가파르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딸깍― 또각, 또각.
두터운 철제 비상문 틈새로,
복도의 번쩍이는 금빛 조명이 한 줄기 날카로운 선이 되어, 어두운 계단실 바닥을 갈랐다.
그 빛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유진아! 서유진!"
"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화장실에도 없던데."
"혹시…… 문기 선배한테 갔나?"
"걔가? 너 서유진을 몰라? 걔가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문기 선배를 찾아갔을 리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답답하게."
유진을 찾는 친구들의 다급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상계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짖이기던 입술을 떼고,
서로의 품 안에서 완전히 숨을 죽였다.
유진은 요스케의 하얀 셔츠에 이마를 묻었고,
요스케는 그녀를 들키지 않게 하려는 듯,
커다란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복도의 그 화려한 빛으로부터,
그녀를 숨겨주려는 거대한 암전(暗轉)처럼.
그 어둠 속에서 오직 가파른 심장 박동 소리만이 터질 듯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서로의 살결을 타고 동기화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조여드는 긴장감 속에서,
남자의 노골적인 흥분감이 유진의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했다.
"저쪽 연회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다행히 문틈으로 새어 들던 발소리와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을 긋던 일직선의 금빛 조명도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완전한 정적과 어둠이 찾아오자,
팽팽했던 긴장감이 걷히며,
묘하게 머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열기로 터질 것 같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요스케가 먼저 유진의 몸에서 슬그머니 거리를 뒀다.
흐트러진 화이트 셔츠 깃을 고치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찾는 것 같은데,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배려 섞인 말이었지만,
유진의 귀에는 이미 ‘문기 선배’라는 이름이 비수처럼 꽂힌 후였다.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복도에서 들은 친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미치기로 했으니까. 제대로 미친년이 되어보자.]
자신을 진흙탕으로 밀어 넣은 그 세상에 복수할 수만 있다면,
이 위태로운 홀로서기를 선택한 자신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유진은 멀어지려는 요스케의 옷자락을 다시 강하게 잡아끌었다.
190cm의 거구가 유진의 작은 손길 하나에 다시금 훅 끌려들어왔다.
유진은 요염한 붉은 입술을 열어, 날카롭고도 매혹적인 제안을 던졌다.
"나랑 오늘 잘래요?"
충동적이고도 대담한 하룻밤 제안.
예기치 못한 유진의 직구에,
요스케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요스케의 시선이,
자신의 옷자락을 쥔 채, 도발해 오는 유진의 붉어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망칠 기회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유진의 허리를 다시 한번 으스러지도록 움켜쥐며,
낮고 은밀하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뚝.두 사람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하아…… 하아…… 유진아, 제발…… 멈추지 마…… 나 지금 여기서 멈추면 진짜 심장 터져서 죽어, 잠깐만…… 애 그냥 울게 내버려 두면 안 돼? 어?”요스케의 회색 눈동자가 정욕과 억울함으로 새빨갛게 충혈된 채 핏대를 세우며 구걸했다.그러나 엄마가 된 서유진의 모성 본능은 자비가 없었다.유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스케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제 안쪽의 중심을 가차 없이 뽑아내며 미련 없이 떨어져 나왔다.원피스를 대충 추스른 유진은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줍지도 못한 채,곧장 아기방을 향해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탕ㅡ!아내가 남겨두고 간 끓어오르는 미완의 욕정과 하반신의 묵직한 고열 앞에,홀로 남겨진 요스케는 이미 이성이 가출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거대한 야수가 된 그는 바지 지퍼가 반쯤 열린 꼴로,유진의 냄새를 쫓아 아기방으로 성큼성큼 폭주해 들어갔다.아기방 안,은은한 수유등 명암 아래서 유진은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는 아기를 품에 안고 느리게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이내 안정을 찾은 아기가 다시 살짝 잠이 들자, 유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기 침대 매트리스 위에 녀석을 눕혔다.바로 그 찰나의 순간.스르륵, 쿵ㅡ.등 뒤에서 다가온 요스케의 거대한 명암이 유진을 덮쳤다.그는 유진이 소리를 지를 틈도 주지 않은 채, 허리를 굽히고 서 있던 그녀의 원피스 스커트 자락을 뒤에서부터 허리까지 가차 없이 거칠게 끌어올렸다.그리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묵직한 무기를 그녀의 무방비한 가랑이 사이, 눅진한 안쪽 성역으로 뒤에서부터 단숨에 박아넣었다.쩍ㅡ!“앗……! 읏, 요스케……! 미쳤어요?! 여긴…… 아기방이잖아…… 안 돼요……!”유진이 깜짝 놀라 황금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반발하려 하자, 요스케가 유진의 입을 뒤에서 손바닥으로 가볍게 틀어막았다.그리고 뇌쇄적이고도 위험한 저음을 귓가에 사정없이 꽂아내렸다.“쉿…… 조용히 해, 아기 깨잖아. 얌전히 있어.”지독하게 가학
마침내 딸아이의 뒤틀렸던 밤낮이 마법처럼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비극의 육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동력으로 두 사람을 압박해 왔다.뒤집기를 마스터하자마자 사정없이 기어 다니고 움직이기 시작한 아기.진짜 단 1초라도 시선에서 멀어지면 아찔한 사고의 연속이었다.화아아악ㅡ!유진은 불 앞에서 한시간을 서서 이유식을 만들고 아기 접시를 요스케에게 건넸다.190cm가 넘는 거구의 포식자는 이제 제법 노련해진 손놀림으로 아기 의자 앞으로 그릇을 가져갔다.아직 옷도 갈아있지 않은 드레스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우람한 팔뚝 근육이 앙증맞은 실리콘 숟가락을 쥐고 바삐 움직였다.요스케는 깊은 회색 눈동자를 다정하게 휘저으며, 이유식을 후후 불어 아기의 작은 입술 사이로 조금씩 떠먹여 주었다.다행히도 이번 특제 이유식은 까다로운 딸내미의 입맛에 완벽하게 맞았는지, 단 한 방울도 거부하지 않고 아빠를 닮은 조그만 입으로 잘도 받아먹었다.요스케는 감격에 겨운 듯 대형견처럼 싱글벙글 웃어댔고,유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만찬을 준비했다.탁, 탁.유진은 오랜만에 공을 들여 만든 프레시 방울토마토 냉파스타와 로즈마리 향을 입혀 노릇하게 구워낸 그릴드 씨푸드 접시를 디너 테이블 위로 세팅했다.슬쩍 오늘의 저녁 메뉴를 확인한 요스케가 냉장고 홈바에서 시원하게 칠링되어 있던 화이트 와인을 꺼내 들었다.또르르르묵ㅡ.투명한 크리스탈 글라스 잔 가득 찰랑이는 호박빛 와인을 유진에게 건네는 요스케의 손끝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오직 저녁 식사를 아주 천천히 즐기며 이어갔다.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오랜만의 고요하고 조용한 저녁이었다.얼마 지나지않아, 배가 빵빵하게 차오른 딸아이는 포만감과 식곤증을 이기지 못한 채 아기 의자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요스케는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아이를 가만히 품에 안아 올렸다.그리고 어둠이 내린 아기방 침대 위로 녀석을
다음 날 아침 7시.출근을 위해 완벽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아이의 요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밤새 부모의 피를 말리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처럼 무해하고 투명한 얼굴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잘 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눈이 부시게 예뻐서, 출근하려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스윽ㅡ.그때 요스케가 요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진의 가녀린 허리를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화이트 셔츠 너머로 요스케의 단단한 가슴이 유진의 등 뒤로 터질 듯이 밀착해 왔다.그는 자신의 턱이 유진의 어깨 위에 기댔다.그러자 라벤더 향취와 사내 특유의 아침 온기를 뿜어나왔다.“우리 딸한테 미안하네…… 근데 왜 애는 날 완전 쏙 빼닮아서 나왔지? 엄마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원래 딸은 아빠를 똑 닮아서 나온다던데요?”유진이 그의 커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대꾸했다.“그래? 그럼…… 아들을 낳으면 너를 쏙 빼닮은 놈이 나온다는 거야?”요스케의 은밀하고도 뇌쇄적인 저음이 유진의 귀밑 살결을 간지럽혔다.은근슬쩍 둘째 계획을 밀어붙이는 포식자의 수작.유진은 일부러 아는 척 하지 않았다.“아마도……? 확률이 그렇다니까요.”“근데 넌 어렸을 때 누구 닮았었는데?”요스케가 넌지시 묻는 순간,유진의 머릿속으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훅 찌르듯 들어왔다.“너희 커플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가…… 진짜 친남매 같아. 문기선배랑 너, 얼굴부터 분위기까지 완전 똑 닮았어, 판박이야.”쿵.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서글프도록 그리운 이름,그의 잔상이 아침 햇살 속에서 스르륵 피어오르자,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칠흑 같은 명암을 띠며 흔들렸다.유진은 이내 잡념을 털어내듯, 자신을 안고 있는 요스케의 우람한 팔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아… 엄마요. 난 엄마랑 판박이였어요.”유진이 애써 목소리 톤을 올리며 미소 짓자,요스케는 그녀의 찰나의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 채, 유진의 귓바퀴를 입술로 살짝 머
백일의 기적은 도대체 언제 일어나는 걸까?벌써 150일째, 밤낮이 바뀌었다.낮과 밤이 완벽하게 전복되어 버린 대가는 참혹했다.샌프란시스코의 고요한 교외 주택가.거실의 벽시계가 서늘한 소리를 내며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유진의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는 여전히 새벽을 닮은 진한 회색 눈망울을 말똥말똥하게 빛내고 있었다.피로로 인해 전신이 사정없이 메말라가는 감각 속에서.유진은 한숨을 몰아쉬며 아이의 포동포동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딸…… 진짜 너무한다. 엄마 아빠는 내일 아침 8시에 칼같이 출근해야 하는데,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 시간에 에너지가 폭발하는 거야?”“이러니까 낮에 상주하는 보모는 이 녀석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순하고 천사 같은 아기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지. 낮에는 아주 세상 모르고 잠만 자니까 말야.”요스케가 화이트 셔츠의 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채, 작은 분유병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밤의 포식자였던 그의 깊은 회색 눈동자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의 명암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안 되겠다. 애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한 번 더 돌고 올까요?”유진이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기대며 제안하자, 요스케는 아이의 앙증맞은 손가락을 제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며 낮게 허스키한 음성을 깔아내렸다.“아무래도 이 녀석, 우리랑 놀려고 기다리는 것 같아. 그래서 낮에는 충전하듯 자고, 우리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타이밍 좋게 깨어나는 거지. 딸……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지 엄마 닮아 가지고 밀당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유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툭 튀어나왔다.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본능일지도 몰랐다.오직 밤 시간에만 온전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부모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본능적힌 애달픈 구원일 테니까.“들어가서 자. 너. 내일 아침에 논문 심의 발표 있다며.”“그러지 말고. 애 데리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요.”“그거 위험하다던데…”
에에엥ㅡㅡ……!사막의 전장보다 더 치열하고 혹독한 육아의 전장 한가운데,기계적인 아기 모니터의 알람음이 침실의 묵중한 공기를 사정없이 갈랐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요스케의 거대한 몸이 뚝, 하고 침대 바깥의 차가운 방바닥 위로 볼품없이 떨어져 버렸다.“……아윽.”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요스케는 비몽사몽 간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방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사흘 밤낮을 이어지는 경영회의와 그리고 밤마다 이어지는 가혹한 육아 피로에 짓눌린 그의 수려한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요스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방금 전 제 옆구리를 정확하게 명중시켜 침대 바깥으로 자신을 가차 없이 차서 떨어트린 장본인, 자신의 아내 서유진을 극도로 억울하고 볼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진…… 오늘 밤은 분명 너 차례잖아.”포식자의 위엄은커녕,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리는 요스케의 억울한 음성이 침실에 울렸다.하지만 유진은 그의 볼멘소리를 완벽하게 못 들은 척, 이불을 턱끝까지 바짝 끌어올린 채 미동도 없이 잠만 잤다.2년간, 수단 사막에서 생존과 사투로 단단해진 정신력은 이제 밤마다 남편을 침대 밑으로 걷어차는 생존 육아 내공으로 진화해 있었다.에에엥ㅡㅡ! 에에엥ㅡㅡ!!그 사이, 침대 머리맡의 아기 모니터에서는 다시 한번 경보음처럼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정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유진은 여전히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요스케는 기어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천하를 쥐고 흔들던 남자는 이제 가운 대신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안방을 나가 옆방의 아기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스르륵ㅡ.“아…….”아기방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피어오르는 지독하고도 묵직한 똥 냄새.요스케는 문을 잡은 채 그대로 자리에 단단히 얼어붙으며 처참하게 절망했다.침대 요람 안에서 자신의 핏줄이자 자신의 새로운 우주가 된 자신의 딸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울어대고 있었다.“……너는
“아……! 읏…… 흐으윽……!”설상가상으로 아이가 조산 미숙아 상태라, 태아의 신경 자극을 우려해 전신을 마비시켜 줄 무통주사(Epidural)조차 맞을 수 없었다.날것의 통증이 유진의 가녀린 전신을 가차 없이 짓찧었다.환자복 단추 사이로 드러난 백색 쇄골 위로 식은땀이 하얗게 흘러내려 침구를 붉은 열꽃처럼 적셔갔다.유진의 처절하게 부서지는 신음 소리에,구석에 있던 요스케는 완전히 멘붕이 와서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어, 어떡해…… 유진아! 내가 대신 아플 수도 없고…… 어떡하지? 의사! 간호사!”술까지 잔뜩 취한 채,거대한 덩치로 제자리를 뱅뱅 돌던 요스케는, 급기야 불안함을 달래려 제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뺐다 꼈다 하며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투둑.그때, 술기운에 감각이 둔해진 그의 두터운 손가락 사이로 영롱하게 반짝이던 결혼반지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탱그르르르ㅡ. 또각.“엇… 반지…!”날카로운 금속성의 파열음과 함께,반지는 가차 없이 병실 바닥을 굴러, 침대 가장 깊숙한 구석 암전의 틈새 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순간, 기적처럼 유진의 진통이 뚝 멈췄다.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찾아온 이 허무맹랑한 상황.식은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하얀 얼굴을 천천히 돌린 유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요스케를 빤히 바라보았다.황금빛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서렸다.“아니… 그게… 반지가… 손에서 미끄러져서…”“하… 진짜.”사고뭉치 대형견.저 빌딩만한 체구로 침대 밑바닥에 기어들어 갔다가는,그물에 걸린 미꾸라지처럼 그대로 끼어서 영원히 못 나올 게 뻔했다.유진은 잠시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진통이 멈춘 틈을 타 무거운 나신을 침대 아래로 움직였다.“비켜요, 내가 찾을 테니까.”유진은 환자복 자락을 늘어뜨린 채, 바닥으로 직접 엎드려 기어갔다.침대 밑 창백한 먼지 구덩이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어,기어이 요스케가 떨어뜨린 결혼반지를 끄집어냈다.유진의 하얀 손바닥 위에서 플래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