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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의 말은 성공적으로 조건웅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조건웅은 한참이 지나서야 파래진 얼굴로 겨우 한 마디 했다.

“뻔뻔한 놈.”

허태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34년을 살면서 그보다 더한 말을 훨씬 많이 들어왔다. “뻔뻔한 놈” 같은 건 전혀 그에게 대미지를 주지 못했다.

“순진하면 사는 데 도움이 되나?”

그가 반대로 조건웅에게 물었다.

“뻔뻔해야 더 잘 산다는 도리는 나보다 거기 두 분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의 말에서 선명한 비꼼이 느껴졌다. 조건웅이 그걸 놓질 리가 없었다.

“너!”

조건웅이 발끈하더니 우정아를 놓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주먹을 꽉 쥔 채 허태준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불과 몇 센티를 앞에 두고 오히려 허태준한테 저지당했다.

“주제넘네.”

허태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조건웅의 손목을 꺾어 그의 몸을 반대로 휙 돌렸다.

그가 조건웅의 뒷무릎을 발로 찼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건웅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우정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처량한 비명을 내질렀다.

“여기 사람 때려요. 살려주세요!”

그녀의 날카롭고도 높은 비명 소리가 고요한 밤거리에 울려 퍼지며 유달리 귀를 찔렀다.

허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닥쳐! 아니면 너도 같이 맞을 줄 알아!”

우정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감히 당신이!”

그녀가 애써 독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눈에 담긴 공포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내가 감히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따 보면 알게 되겠지.”

허태준이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조건웅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종아리에 발을 디뎠다.

그가 발끝에 힘을 실자 조건웅이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정아야 경찰 불러!”

그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우정아가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손을 덜덜 떨며 가방을 한참이나 뒤적거려 겨우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그녀가 잠금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심유진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 휴대폰!”

우정아가 절망하며 소리 질렀다.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심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우정아는 임신을 한 상태였기에 심유진보다 훨씬 몸이 둔했다.

심유진이 슬쩍 옆으로 비켜 서자 그녀가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법 세게 넘어졌는지 한참이 지나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가냘픈 울먹임과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성통곡하며 울부짖는 것보다 이런 반응이 심유진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다가가 우정아의 몸을 바로 해주고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우정아의 안색이 창백했는데 콩알만 한 땀방울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한 손은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힘껏 위에 입은 옷의 밑단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심유진은 그녀의 연회색 통바지가 검붉은 색으로 물든 모습을 보았다.

젠장!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휴대폰으로 119에 신고했다.

“정아야!”

조건웅이 소리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서 울먹임이 느껴졌다.

그가 온 힘을 다하여 허태준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빠른 속도로 우정아 곁에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버텨!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절대 무슨 일이 생기게 두지 않을 거야!”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심유진은 그가 달려오는 모습에 진즉 자리를 내주었다. 그 시각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전 그날과 같은 상황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샤부샤부 가게에 있었던 그날처럼 슬프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속에서 조그마한 동요도 일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곁에 허태준이 서있었다.

“추워?”

그가 물었다.

그의 물음은 눈앞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심유진이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조금 춥네요.”

초가을 밤이라 가끔씩 찬 바람이 불어오곤 했었다.

심유진은 얇은 셔츠만 입고 있었기에 전혀 한기를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으로 팔을 비비며 온기를 취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태준이 자신의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성숙한 남자의 향기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그녀는 순간 적응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심유진이 옷을 벗어 허태준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에게 저지당했다.

“입어.”

허태준은 바닥에서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들처럼 울며 불며 하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을 보니 당장은 호텔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 밤 기온이 차니까 감기에 걸리기 쉬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심유진이 재채기를 했다.

허태준이 피식 웃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서더니 옷을 입혀주었다.

“봐.”

심유진이 입을 삐쭉거리며 그의 선의를 받아들였다.

**

구급차가 빠르게 도착했다.

조건웅과 우정아는 함께 차에 올랐다.

그들의 곁을 지날 때 조건웅이 표독스럽게 심유진을 협박했다.

“아이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구급차 경적소리가 점점 멀어졌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저 애…… 괜찮을까요?”

그녀가 허태준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엄청 낮았는데 어찌나 낮은지 허태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서 그 물음에 답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저 여자가 괜찮든 말든 당신한테는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심유진이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그녀의 심장이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심유진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

심유진은 불안한 마음으로 긴 밤을 보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우정아의 모습 아니면, 다정하게 그녀한테 외투를 걸쳐주던 허태준의 모습이었다.

공포심과 설레는 마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다 보니 정신 분열이 올 것 같았다.

**

미리 맞춰둔 알람이 8시 정각에 울렸다.

심유진은 3일 휴가를 끝내고 첫 번째 출근을 맞았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심해져 파운데이션을 두텁게 바르고 나서야 겨우 가려졌다.

다행히도 최근 며칠은 손님이 적었다. 허태준과 여형민, 두 “VIP”가 퇴실하자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그녀가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 할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녁 무렵 조건웅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심유진 이제 만족해? 정아가 유산했어! 내 아이가 죽었다고! 이게 네가 원하던 결과야?”

그의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 운 것 같았는데 그 사이로 거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물론 이건 심유진이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조건웅과 우정아가 아무리 싫어도 아이한테는 죄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이 일로 두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난 그저 옆으로 피했을 뿐이야. 그 애가 거기서 넘어질 줄 몰랐어.”

그녀가 차분하게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조건웅의 화를 더 불러일으키기만 했다.

“너 정아가 임신 중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심유진은 귀가 아파났다.

“너 분명 네가 비켜서면 그 애가 넘어질 걸 알고 있었어! 넌 고의로 그 애를 해친 거야! 유산시키려고! 넌 나와 정아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심유진 어떻게 이렇게 악독할 수 있어!”

“내가 악독하다고?”

심유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똑똑히 들어 조건웅. 시비는 너희 둘이 먼저 걸었어. 너희들 아이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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