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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Author: 차차
심유진과 허태준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로열 호텔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 가지러 가야 한다고 했다.

다리가 긴 편인 그는 보폭도 커서 그녀가 두 걸음 걸어야 그의 한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결국 심유진은 거의 뛰다시피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긴 했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녔기에 발도 아프고 다리 근육도 점점 저려왔다.

그때 그녀의 종아리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심유진은 갑작스러운 고통에 이를 악물고 다급히 허리를 숙여 다리를 잡았다.

허태준은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상을 감지했다.

그가 몸을 돌리자 그와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심유진이 이상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비록 심유진은 이미 그의 앞에서 여러 번 망신을 당했지만 결국 다시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애써 자신의 얼굴을 어둠에 감췄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리에 쥐가 났어요.”

허태준은 그녀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가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큰 손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잡았다.

“이쪽 다리 맞아?”

그의 말투는 평범했고 손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주무르는 동작에도 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심유진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긴장하며 그의 손에서 다리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자마자 곧바로 다시 그의 손에 붙들렸다.

“움직이지 마.”

허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빛으로 그녀를 꾸짖고 있었다.

심유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애써 미소 지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주무르실 필요 없어요.”

허태준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쥐가 난 곳을 주물렀다.

길 양쪽에 있는 가로등은 이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스레한 가로등 불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는데 심유진은 그 모습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방금 떠오른 기괴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리려고 했다.

허태준이 따스하다고?

그건 어불성설이다.

“어머 유진 언니. 저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정말 언니였네요!”

놀란 여자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을 타고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심유진이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옆에 있던 산책로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심유진은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조건웅과 우정아였다.

우정아는 조건웅의 팔에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건웅의 얼굴은 굳어있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본 심유진은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다리가 아직 허태준의 손에 붙잡혀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밀며 낮게 말했다.

“이제 됐어요.”

허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다리를 놓아준 뒤 몸을 일으켰다.

짧디짧은 2분이라는 시간 사이에 조건웅과 우정아는 이미 그들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유진 언니, 언니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우정아는 그녀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그런 그녀의 행동이 꺼림직하고 역겨울 뿐이었다.

“그쪽과 상관없잖아요.”

그녀가 싸늘하게 답을 하고 오른손을 뒤로 쑥 내밀더니 허태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만 가요.”

보드라운 촉감이 손에서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하던 허태준이 곧바로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잠깐만.”

심유진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건웅이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그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허태준을 노려보더니 이를 악물고 심유진에게 물었다.

“이 남자 누구야?”

그는 마치 바람난 아내를 잡으러 온 남편과 같이 행동했다.

상황만 놓고 보면…… 확실히 그렇게 보일만했었다.

심유진의 대답은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너랑 상관없어.”

그녀는 조건웅의 팔을 뿌리치며 허태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녀의 말에 조건웅이 더욱 화를 냈다.

“왜 나랑 상관없는데!”

그가 노기등등해서 물었다. 우정아까지 옆으로 밀치며 자기 몸으로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심유진 너 잊었나 본데.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아직까지 내가 네 남편이라고!”

눈까지 새빨개진 모습을 보니 확실히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심유진은 처음에는 그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틈타 그녀한테 온갖 모욕을 주며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이번엔……

“당연히 안 잊었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긋 웃었다.

“그럼 너는…… 지금 곁에 네 애를 임신한 상간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조건웅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우정아는 심유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가 분노로 발작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거 무슨 뜻이에요 건웅 씨! 원래 마누라하고 재결합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녀는 그를 밀치고 때리며 입으로는 온갖 욕을 해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양심이란 게 있긴 해요? 내가 건웅 씨 애를 가지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이 상황에서 예전 마누라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나랑 결혼하기 싫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해요. 지금 당장 가서 지워버릴 테니까!”

조건웅은 순간 겁이 났다.

그는 우정아의 뱃속 아이가 걱정되어 그녀가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반항 한 번 못했다…… 심지어 모진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열심히 어르고 달래며 빌기만 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왜 너랑 결혼하고 싶지 않겠어. 어떻게 이 아이를 버릴 수 있겠어? 너랑 아이 둘 다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보물들이야!”

“화내지 마 응? 나 심유진과 재결합 안 해. 이혼 협의서에 사인만 하면 바로 법원에 가서 이혼할 거야!”

조건웅은 심유진이 있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내뱉고 있었다.

심유진은 이미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아서 마음이 둔해졌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슴 한편이 여전히 따끔따끔거렸다.

지금껏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허태준이 앞으로 나서더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가자.”

“네.”

정신을 차린 심유진이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가요.”

“심유진!”

조건웅이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

심유진은 그 말을 무시한 채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당장 이혼 협의서에 사인해!”

조건웅이 그녀가 듣든 말든 상관치 않고 소리 질렀다.

“이렇게 시간 끌면 나랑 정아만 손해 보는 게 아니야. 지금 네 곁에 있는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도 아마 곧 기다리다 지칠 거야!”

그가 유독 ‘기생오라비’에 힘을 실어 한껏 조롱하며 말했다.

그가 그녀만 욕했다면 심유진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개가 짓나보네 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을 욕하는 건……

만약 허태준이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녀한테까지 피해를 주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결국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경고하는데.”

심유진의 눈빛이 싸늘했다.

“말 좀 가려서 해.”

조건웅은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놀란 동시에 분했다.

“왜? 내가 저놈을 ‘기생오라비’라고 한 게 네 아픈 곳을 찌른 거야? 이제 보니 정말로 네가 키우고 있는 기생오라비인가 보네.”

그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허태준을 바라보았다.

“다 큰 남자가 멀쩡하게 손과 발이 있는데 여자 등이나 처먹고 말이야. 그렇게 살면 안 쪽팔리나?”

심유진은 그의 후안무치에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가 막 반박하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태준이 그녀와 조건웅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내가 왜 쪽팔려야 하지?”

허태준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거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기생오라비’가 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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