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목요일 오후, 결혼사진 상담·촬영 자리 보기』
경란이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치웠다.
“여기 앉아. 주원이가 뭘 골랐는지 봐 달래.”
이헌은 의자를 당기기 전에 나를 봤다. 나는 내려놓은 펜을 예약표 위로 옮겼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안녕하세요.”
직원이 이헌 앞에 정장 사진을 놓았다. 경란은 아까 고른 검은 재킷을 짚었다.
“이거 어때? 주원이 평소 입는 것하고 비슷하지?”
“본인한테 사진 보내시면 됩니다.”
“보냈는데 답이 없잖아. 너는 같은 회사에 있었으면서 옷 크기도 모르니?”
“같은 건물에 있었던 겁니다. 치수는 모릅니다.”
직원이 예약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크기는 나중에 신랑님께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여하실지만 정해 주셔도 돼요.”
“빌리지는 않을 거예요. 집에 있는 걸 입힐 거니까.”
경란이 대답했다. 이헌은 정장 사진을 덮지 않고 직원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면 가져올 옷을 확인할 날짜만 알려 주세요.”
직원이 빈칸에 메모했다. 나는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넣었다. 주원에게 받은 문자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헌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넥타이 매듭 아래를 손가락으로 당겨 느슨하게 하고 앉았다. 반듯하던 매듭이 옆으로 조금 돌아갔다. 나는 펼쳐진 앨범으로 눈을 내렸다.
“드레스는 골랐습니까?”
이헌이 물었다.
“입어 볼 것만요.”
“두 벌 준비하기로 했어요.”
직원이 표시한 사진을 펼쳤다. 경란이 긴 소매 쪽을 손으로 눌렀다.
“나는 이게 낫더라. 집안 어른들도 보실 건데.”
이헌은 사진보다 내 앞에 놓인 예약표를 먼저 봤다.
“윤나경 씨가 고른 건 어느 겁니까?”
나는 짧은 소매가 달린 사진을 짚었다.
“이쪽이요. 팔을 움직이기 편하대요.”
“그럼 입어 보고 정하면 되겠네요.”
“그러기로 했어.”
경란이 앨범을 덮었다. 직원이 두 벌 모두 적혀 있는지 확인해 줬다. 나는 종이 사이에 끼워진 표시를 보다가 물잔을 들었다.
“장소는 더 보실까요?”
직원이 물었다.
“실내는 다 봤고요. 옥상만 남았어요.”
내가 대답하자 경란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거긴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잖아.”
“그래도 보고 싶어요.”
경란은 화면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이 전화 받고.”
문이 닫히기 전에 경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보낸 사진 보셨어요?”
직원이 앨범 밑에서 의자 사진을 꺼냈다. 내가 따로 빼 두었던 사진이었다.
“옥상에도 이 의자를 놓을 수 있습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데는 받침을 대고요.”
“실제로 놓인 자리도 볼 수 있나요?”
“네. 지금 촬영이 없어서 괜찮아요.”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이헌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저도 봐도 됩니까?”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나는 가방 끈이 손잡이에 닿지 않도록 안쪽으로 당겼다.
복도 끝에서 경란이 통화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귀걸이 아래를 누른 채 우리 쪽을 돌아봤다. 직원이 옥상 방향을 가리켰다. 경란은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창가로 몸을 돌렸다.
계단 앞에 생수병이 놓인 선반이 있었다. 직원이 내게 한 병을 건넸다.
“위에는 물이 없어서요.”
“감사합니다.”
이헌은 내 뒤에서 한 병을 받았다. 직원이 먼저 계단을 올라갔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신발 밑창이 계단 끝의 금속판에 닿았다.
수장고에서 내려오던 날에는 이헌이 한 칸 아래에 있었다. 오늘은 뒤에 있었다. 나는 난간에 손을 대지 않고 올라갔다.
옥상 문에는 안쪽으로 여세요, 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모서리를 고정한 테이프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직원이 문을 당기자 종이 끝이 접혔다.
“이건 다시 붙여야겠네요.”
직원이 종이를 떼려 했다.
“다 떼지 말고 들뜬 테이프만 바꾸세요. 종이까지 찢어질 수 있어요.”
직원이 손을 멈췄다.
“아까도 앨범 고쳐 주셨다면서요.”
“붙여 두는 방법만 알려 드렸어요.”
직원은 종이 끝을 살짝 눌렀다. 나는 옆으로 비켜 옥상으로 나갔다.
바닥에는 나무 발판이 깔려 있었다. 벽 쪽에 의자 두 개와 테이블이 있었고, 난간 안쪽으로 화분이 놓여 있었다. 사진에서 봤던 흰 의자는 발판 끝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의자 앞으로 가서 등받이를 잡았다. 다리 하나가 발판 틈에 걸려 있었다.
“여기에 앉아서 찍는 건가요?”
“촬영할 때는 가운데로 옮깁니다. 지금은 청소 때문에 밀어 뒀어요.”
직원이 다가와 의자를 빼 주었다. 나는 팔걸이에 손을 얹고 앉았다. 등받이가 허리 중간에 닿았다. 일어날 때 한쪽 팔걸이에 힘을 주자 의자가 조금 기울었다.
이헌이 의자 뒤에 손을 댔다. 내가 일어선 뒤에야 손을 뗐다.
“회장님은 다른 의자가 낫겠습니다.”
“네. 아까 사진에 있던 의자로 준비할 수 있어요.”
“앉는 자리도 계단에서 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직원이 휴대폰에 적었다.
“동선까지 같이 적어 둘게요. 잠시만 계세요. 받침이 아래에 있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지금 안 가져오셔도 돼요. 자리만 보러 온 거라서요.”
“그럼 의자 사진만 더 보여 드릴게요. 상담실에 다른 견본도 있거든요.”
직원이 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의자에서 손을 뗐다.
이헌은 내가 선 자리에서 옆으로 물러났다.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섰다. 아래층에서 전화받는 목소리가 문이 닫힌 뒤에는 들리지 않았다.
“바깥 촬영을 하고 싶습니까?”
“아직은 모르겠어요.”
나는 빈 발판 쪽을 봤다.
“사진으로만 보면 발밑이 어떤지 모르니까요. 옷을 입고 걸을 수는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보고 정하면 됩니다.”
“다들 이미 정하고 오신 것 같아서요.”
가방 끈이 어깨에서 내려왔다. 나는 끈을 고쳐 걸고 생수병을 반대 손으로 옮겼다.
이헌이 덮이지 않은 발판 틈을 봤다.
“이쪽은 직원한테 말해 두겠습니다.”
“제가 말할게요.”
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자를 원래 있던 벽 쪽으로 돌렸다. 이헌이 반대쪽 다리를 들어 줬다. 함께 내려놓고 나서 손잡이를 놓았다. 손은 닿지 않았다.
테이블 옆 화분에 마른 잎이 떨어져 있었다. 잎 끝이 갈색으로 말려 있었다. 나는 생수병을 내려놓고 화분 가까이 몸을 낮췄다.
흙이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엄지로 표면을 가볍게 눌렀더니 가루가 묻었다.
“물이 많이 말랐네요.”
이헌도 화분을 내려다봤다.
“죽은 겁니까?”
“줄기는 아직 괜찮아요. 잎은 좀 떼 줘야겠지만.”
나는 떨어진 잎을 주워 화분 받침에 모았다. 이헌이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부어도 됩니까?”
“한꺼번에 많이 말고요. 조금씩요.”
이헌이 화분 가장자리에 물을 부었다. 흙 위에 고인 물이 옆으로 흘렀다.
“잠깐만요.”
내 말에 병이 바로 멈췄다.
“너무 말라서 바로 안 들어가요. 기다렸다가 다시 주세요.”
이헌은 병을 든 채 기다렸다. 나는 받침 바깥에 떨어진 잎까지 주웠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려는데 이헌이 자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나는 흙 묻은 손가락을 접었다.
“그건 빨아야 하잖아요.”
“빨면 됩니다.”
“휴지 있어요.”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냈다. 이헌은 손수건을 다시 넣고 화분을 봤다. 고였던 물이 흙 속으로 들어간 뒤에 병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물이 덜 흘렀다. 받침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이헌이 병을 세웠다.
“이 정도요?”
“네. 됐어요.”
병에 물이 조금 남았다. 이헌은 뚜껑을 닫지 않고 옆 화분을 봤다.
“저것도요?”
“저건 흙이 젖어 있어요.”
이헌이 병을 내려놓았다. 나는 잎을 휴지로 감싸 테이블 아래 쓰레기통에 버렸다.
“책만 보는 줄 알았습니다.”
“작업실에도 화분이 있어요. 다은이가 자꾸 물을 줘서 못 주게 하는 쪽이지만요.”
“직원분입니까?”
“네. 제가 책을 말리면 다은이는 화분을 적셔요.”
이헌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나는 손가락에 남은 흙을 닦다가 휴지를 접었다.
“그건 마시려고 받으신 건데.”
“아래 가면 있습니다.”
이헌이 병뚜껑을 닫았다. 나는 열지 않은 내 생수병을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이건 아직 안 마셨어요.”
“윤나경 씨 거잖아요.”
“저도 아래 가면 있으니까요.”
이헌은 병을 집지 않았다. 나도 더 밀지 않았다. 병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문 쪽에서 손잡이를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뒤 아래층에서 직원이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손에 휴지 조각이 남아 있었다. 손끝에 붙은 것을 떼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먼저 내려가세요.”
내가 말했다.
이헌은 문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의자 옆에 놓인 내 가방을 봤다.
“직원이 사진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같이 있는 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입으로 말하고 나니 더 낮춰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가방을 집어 어깨에 걸었다.
이헌이 테이블에서 자기 물병을 들었다.
“불편하면 내려가겠습니다.”
한 발 물러서는 구두 끝이 보였다. 나는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실장님이 불편한 건 아니에요.”
이헌의 걸음이 멎었다. 나는 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주원 씨랑 사진 찍을 곳을 고르는 자리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장님한테 의자를 봐 달라고 하고, 물까지 나눠 드리고.”
“의자는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나는 테이블에 남은 생수병을 봤다.
“그런 걸 하나씩 따지자는 게 아니에요.”
“네.”
짧은 대답 뒤에 말이 더 붙지 않았다. 이헌은 물병의 상표가 붙은 부분을 손으로 쥐었다. 나는 가방 끈에서 손을 떼고 코트 소매를 내렸다.
옥상에 올라올 때 외투를 입고 왔어야 했다. 상담실 의자에 걸어 둔 코트를 떠올리고 문 쪽을 봤다. 내려가면 됐다. 직원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바닥 틈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네.”
이헌이 먼저 문 쪽으로 비켰다. 가까이 지나가려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간 넥타이 매듭이 보였다. 셔츠 깃 한쪽도 접혀 있었다. 상담실에서 코트를 벗을 때부터 그대로였다.
“잠깐만요.”
이헌이 멈췄다.
“넥타이가…….”
나는 내 목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헌이 빈손을 들어 매듭을 만졌다. 옆으로 당기면서 접힌 셔츠 깃이 더 눌렸다.
“아니요. 그쪽 말고요.”
말을 하면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매듭에 닿고 나서야 손을 거둘 자리를 생각했다. 이헌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접힌 깃을 펴고 매듭을 가운데로 옮겼다.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아래쪽 넥타이를 당겨 길이를 맞췄다. 작업대에서 하던 손놀림보다 느렸다.
이헌은 턱을 들지도, 내 쪽으로 숙이지도 않았다.
매듭은 곧아졌는데 나는 손을 놓지 못했다. 손가락을 펴면 됐다. 엄지부터 떼고, 검지를 내리면 됐다.
나는 이헌의 셔츠 단추를 보고 있었다.
“됐어요.”
말끝에 숨이 섞였다.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잡은 매듭 아래로 손을 뻗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손을 떼는 데 3초가 걸렸다.
나는 손을 내려 가방 끈을 잡았다. 손바닥에 넥타이 천의 결이 남아 있었다. 뒤로 물러나자 구두 뒤축이 나무 발판 끝에 닿았다.
이헌이 발밑을 봤다.
“뒤에 틈 있습니다.”
나는 옆으로 발을 옮겼다. 이헌은 따라오지 않았다.
테이블의 생수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려가려면 저것도 챙겨야 했다. 나는 병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경란이 휴대폰을 쥔 채 문턱에 섰다. 나를 보고, 이헌을 보고, 다시 내 손을 봤다.
나는 가방 끈에서 손을 놓았다.
경란이 문을 더 밀었다.
“둘이 여기서 뭐 해?”
(13화 끝)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