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민망하긴 했지만 곽승재가 이미 이렇게나 높게 들어 올렸겠다, 기회를 틈타 더 망설이지 않고 소원패를 제일 높은 나뭇가지에 걸었다.“언니 소원패는 엄청 높은 곳에 걸었으니까 소원이 꼭 이뤄질 거야!”곽승연은 꺄르르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때마침 송민아와 송민준도 안에서 나와 그 둘을 향해 다가왔다.고은서는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어 곽승재한테 어서 내려달라고 사인을 보냈다.멀지 않은 곳에서 박지연과 육현석도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육현석은 당연하게도 기뻤지만 박지연은 불쾌하다는 듯 곽승재의 손을 내치고는 고은서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그리고는 곽승재에게 그 인플루언서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고은서에게 찝쩍대서야 되겠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박지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전 그냥 은서가 키가 작아 높은 곳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아서 도와준 것뿐이지 찝쩍거린 게 아니에요.”박지연은 곽승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러시구나, 참 마음씨도 좋네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 사다리나 하시면 되겠어요. 높은 곳에 닿지 않는 사람은 다 도와주시지 그래요?”숨도 안 쉬고 몰아붙이는 박지연에 곽승재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지만 육현석도 그를 달리 도와줄 수 없었다.육현석은 몰래 곽승재를 부른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모험을 한 격인데 박지연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송민준이 와서야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곽 대표님도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요.”“곽 대표님, 여시은 씨는 함께 오지 않은 건가요?”송민준이 무심결에 곽승재에게 물었다.이에 곽승재가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시은 씨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곽승재를 따라 굳이 이곳까지 함께 온 여시은이 얼마 있지도 않고 바로 이렇게
사실 육현석도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은서와 곽승연을 데려다주는 일이 아니라면 육현석도 충분히 박지연과 함께 차를 타고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고은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고은서가 말해주길 송민준이 자신에게 푹 빠져 어딜 가나 따라다닌다고 그랬었다.게다가 육현석이 보기에도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육현석은 곽승재를 위해서라도 그 두 사람을 사이를 가로막는 게 응당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육현석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박지연도 이번만큼은 육현석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민준 씨, 피곤하실 텐데 은서와 승연이는 현석이가 데려다주게 내버려 두세요.”박지연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육현석을 도와 말을 해주기도 했다.송민준은 작게 미소를 지었고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차에 앉자 박지연은 그제야 육현석의 정곡을 찔렀다.“왜, 민준 씨가 은서 마음을 얻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육현석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난 단지 어머님을 뵌 지도 오래됐고 오늘 마침 시간이 있으니까 어머님을 뵈러 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박지연은 일부러 육현석의 속셈을 모르는 척했다.“그래,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쨌든 난 은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민준 씨도 꽤 괜찮은 사람이고.”하지만 육현석의 생각은 달랐다.“송민준 그 사람은 곧 서른이잖아. 은서랑 나이 차이도 크게 나니까 분명 세대 차이가 있을 거야.”박지연이 다시 반박했다.“세대 차이 같은 소리 좋아하네. 성숙한 남자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사람한테 잘한다고!”육현석은 급히 말을 바꿨다.“승재 형도 스물일곱 살이니까 형도 자기 사람한테 잘할 거야. 게다가 송민준보다 세대 차이도 덜 나잖아.”“얼씨구, 육현석 씨 계산이 빠르시네요?’박지연은 비아냥댔다.“근데 곽승재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까먹었고?”육현석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지연아, 승재 형은 절대 그
저택에 도착해서도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진 곽승연은 도우미가 데리고 올라갔고 고은서는 일행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저번에 곽승재와 함께 호원 저택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호원 저택은 더 북적이는 것 같았다.집안에 적지 않게 놓인 귀여운 장식품들은 집안의 활기를 북돋아 주었다.“승연이 거야.”서연정은 정신과 의사가 다양한 사람과 물건들을 접촉하는 것이 곽승연의 심신 건강에 좋다고 알려준 사실을 고은서에게 말해주었다.“오늘 승연이랑 함께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승연이가 많이 지친 것 같긴 한데 분명 그만큼 즐겁게 지냈을 거야.”그 후에도 서연정은 도우미에게 그들에게 차와 과일을 대접하라고 부탁했고 저녁도 먹고 갈 것을 제안했다.“괜찮아요, 어머니. 저희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다가 가는 거로 충분해요.”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그래요, 저희는 어머님을 뵈러 온 것뿐이니까 저녁은 괜찮아요.”육현석도 웃으며 고은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아버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육현석의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아까보다 살짝 옅어졌다.“승재 아버지는 바쁘셔. 매일 퇴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육현석은 서연정과 곽현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곽승연이 키우는 강아지가 뛰어나왔고 육현석은 박지연과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서연정과 함께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서연정은 고은서에게 해성의 부녀 자선 단체에서 자신을 초대해 그곳에 갔다 온 일을 말해주었다.“Y국에도 가지 않게 됐고 승연이 상태도 점점 안정되고 있어서 뭐라도 해서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너무 좋죠.”고은서는 서연정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종일 집안 남자들 옆에 머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그 후에도 고은서는 서연정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고은서는 손문호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으나 적절한 대화 주제를 생각해내지 못
곽현수는 여태 늘 사람들에게 추종받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들이 자기 뜻을 거스르고 막 나가기 시작한 뒤로 고은서도 자신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곽현수는 자신의 위상이 얼마나 바닥을 쳤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한들 자존심도 다 버리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과 설전을 벌이는 것은 곽현수가 딱 질색하는 것이었다.곽현수가 그저 잔뜩 굳은 얼굴로 애써 무시하고 돌아서자마자 육현석과 박지연이 집에서 나왔다.육현석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곽현수는 냉랭한 태도로 대답했다.“현석아, 내가 듣기론 너희 아버지께서 최근에 승재를 도와서 GS그룹의 주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더구나?”육현석은 곽현수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는 대답했다.“아버님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성취욕 같은 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 일에 관해서도 아버지께 여쭤본 적이 없어서 저는 정말 잘 몰라요.”육현석이 능글맞게 주제를 피해간다는 것을 눈치챈 곽현수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곽승재 아빠라는 사람이 진짜 무섭긴 하네. 괜히 승연이가 아빠 얘기를 꺼내면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박지연이 소곤대며 곽현수의 흉을 보았다.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을 바로잡았다.“그건 아니야. 승연이는 딸이니까 아마 그렇게까지 엄하진 않으실 거야. 근데 승재 형은 어릴 때부터 엄청 엄하게 키우셨대. 형이 정신력이 강하니까 망정이니 나였으면 진작에 어릴 때부터 문제아로 자랐을 거야.”“...”집에 들어선 곽현수는 그늘이 잔뜩 드리운 얼굴을 하고는 소파에 앉았다.도우미가 내온 차를 마시며 채 가시지 않은 분노를 표출했다.“하나둘 다 나한테 시비를 걸지 못해서 안달이구먼!”그런 곽현수의 모습을 본 서연정은 그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고은서를 만나 기분이 나쁘겠거니 예상을 할 수 있었다.“그 누구도 당신한테 시비를 건 적이 없어요. 은서는 승연이를 하루 동안 돌봐주고 방금 승연이를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고요.”“앞으로 승연이 더러 고은서랑 작
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이용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바였다.하지만 여시은은 분명 곽승재 때문에 생긴 골칫덩어리였고 애꿎은 고은서만 속앓이했던 터라 고은서도 큰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곽승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그날 절에서의 만남 이후로 고은서는 요 며칠 라이트문 아파트에서 곽승재를 보지 못했다.출장을 간 것인지 마재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만은 사실이었다.‘설마 그날 절에서 몇 마디 쏘아붙였다고 화나서 답장 안 하는 건가?’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고은서는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박지연에게 자신의 일정을 말해준 뒤 미리 준비해둔 녹음펜을 넣은 가방을 챙기고 운전 기사에게 여시은의 집으로 가달라고 했다.여시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고은서의 핸드폰이 울렸다.다름 아닌 여시은의 집에는 왜 가냐는 내용의 곽승재가 보낸 문자였다.고은서는 향수를 전해주러 간다고 곽승재에게 솔직하게 알려주었다.곽승재는 급한 일만 처리하고 가겠다고 답장을 주었다.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고은서는 여시은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단순히 향수를 시향하려고 부른 것이라면 곽승재가 여시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쩌면 이미 그 집에서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향수만 전해주고 바로 돌아갈 것이니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곽승재에게 문자를 보냈다.그 이후로 곽승재는 답장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가 탄 차는 여시은의 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도우미의 안내하에 뒷마당으로 향했다.마당에는 바비큐 그릴이 놓여있었고 또 다른 도우미가 불을 피우며 식자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캐주얼한 차림과 슬리퍼를 신은 여시은이 한쪽에 서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탓에 붕대를 감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마 여시은이 말했던 다친 발가락인 것 같았다.여시은은 쿠아를 품에 안은 채 도우미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은서 왔구
쓸데없는 여시은의 질문에 고은서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대한 참고 물었다.“여시은, 불만이라도 있어?”“아니.”여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떠본 거야, 난 꽤 만족해!”고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여시은, 매일 이렇게 연기하는 거, 안 힘들어?’“잠시 후 향기 지속력 좀 보자, 문제없으면 이걸로 결정하면 될 것 같아!”여시은은 기분 좋게 말했다.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이 일이 일단락될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고은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여시은이 일부러 그녀에게 직접 향수를 조제하게 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기에 반드시 경계해야 했다.“은서야,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까 같이 고기를 구워 먹을래?”여시은이 초대했다.쿠아는 도우미가 실내로 데려간 상태였다. 고은서는 앉아 있기엔 조금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여시은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에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여시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앞에는 구운 고기의 맛을 확실히 살려주는 숯불 바비큐 그릇이 놓여 있었다.만약 여시은이 화상을 입거나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해명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게 상책이었다.고은서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사실 오버하는 것은 아니었다.지난번 농장에서 물에 빠진 일로 트라우마가 남았기 때문이었다.그날 조금 전까지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던 여시은이 어느새 그녀를 끌고 연못에 빠뜨렸다.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점잖은 남자의 모습이 다가왔다.여재훈이었다.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의 바르게 ‘여재훈 씨’라고 불렀다.그녀를 발견한 약간 놀란 듯했다.“은서 씨가 놀러 왔네요?”“은서가 맞춤형 향수를 가져다주러 왔어요.”고은서가 대답하기 전에 여시은이 여재훈 곁으로 다가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이제야 오셨어요. 아까부터 기다렸는데.”여재훈이 여시은의 발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발가락은 좀 괜찮아졌니?”여시은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아직도 아파요. 예전에
“아악!”갑자기 여시은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고개를 든 고은서는 쿠아가 여시은을 할퀸 뒤 심하게 손목을 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여시은이 쿠아를 떼어내자 쿠아는 등을 둥글게 말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마치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공포에 질린 채 방어적인 모습이었다.도우미들은 혹시라도 여시은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 쿠아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화를 내고 있는 쿠아는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시은아!”여재훈이 급히 여시은에게 달려갔다.한편 쿠아는 그 틈에 빠르게 실내로 도망쳐 들어갔다.여재훈은 고양이를 쫓을 겨를도 없이 여시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피도 나네! 빨리 의사를 불러!”여시은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아빠, 괜찮아요. 의사 부를 필요 없어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그게 무슨 소리야! 고양이에게 물렸으면 광견병 백신을 맞아야 해!”여재훈은 여시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도우미에게 의사를 집으로 부르라고 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고은서는 왠지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시은은 왜 일부러 쿠아에게 물린 것일까?10분 만에 의료 가방을 들고 도착한 의사는 이내 여시은의 손목에 난 상처를 처리했다.여시은이 쿠아가 예방접종을 모두 마쳤다고 말했지만 여재훈은 의사에게 광견병 백신을 놓으라고 했다.주사를 맞고 상처 처리가 끝난 후 의사는 여시은에게 이상 반응이 없는지 관찰하기 위해 집에 있다가 정해진 시간에 나머지 주사를 놓기로 했다.모든 것이 정리된 후 여재훈이 도우미에게 물었다.“고양이가 왜 갑자기 사람을 물었어?”도우미가 두려운 듯이 대답했다.“쿠아는 평소에 온순해서 사람을 물지 않아요.여시은 씨가 평소에 계속 안고 다닐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고은서 씨가 온 이후로 실내에 있다가 나오더니 갑자기 사람을 물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의사가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꺼냈다.“어린 고양이는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소리, 물건, 혹은 특
여시은이 이렇게 말할수록,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억울함을 참고 사태를 무마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은서도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이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여재훈 씨, 부탁드려도 될까요?”고은서는 차분하게 여재훈에게 물었다.“그럴 필요 없어!”차가운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키가 크고 잘생긴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고은서는 약간 놀랐다.‘곽승재에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온 거지?’곽승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고은서를 바라봤다. 고은서는 꼿꼿이 서 있었고 표정은 담담했지만 곽승재를 보는 눈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비쳤다.곽승재는 고은서와 말을 나누지 않은 채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소파에 앉아 있는 여시은은 손등과 손목에 상처가 나 있었으며 눈가가 약간 붉어진 것만 봐도 조금 전 무슨 일을 겪은 것을 알 수 있었다.여시은 옆에 앉아 있는 여재훈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의사와 도우미들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승재야, 여긴 어쩐 일이야?”여재훈이 놀란 얼굴로 묻자 곽승재는 고은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저씨를 만나러 왔어요. 그러다가 마침 고은서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 대표님, 고은서는 다른 사람을 해칠 행동을 하지 않아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예전에는 곽승재가 백유미를 위해 성급하게 그녀를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오해라고 생각해. 아마도 고양이가 먹이를 지키려고 문 것일 거야.”“쿠아는 먹이를 지키지 않아요. 제가 먹이를 입 앞에서 가져가도 소리조차 안 내요.”유은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은수, 그게 무슨 말이야!”여시은이 화를 내며 말했다.“쿠아가 먹이를 지킨 게 아니라면 은서가 나를 해치려 했다는 거야?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유은수는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더 이상 말하지 않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