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어젯밤 밧줄에 묶였을 때 생긴 멍 자국인데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샤워할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곽승재가 어젯밤에도 약을 발라줬다고?’“병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몸이 아프거나 매우 아프면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어.”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의 얼굴이 또 약간 달아올랐다. 곽승재는 비록 어디가 불편한지 분명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약간 붓고 아프고 불편했으며 걷는 것도 약간 아팠지만 이 일로 병원에 가기에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하나도 아프지 않거든.”말을 마친 고은서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녀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승재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반쯤 껴안고 그녀를 호텔 밖으로 안고 나왔다.주차장에서 주민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보였는지 아니면 곽승재가 그녀를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주천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바로 예의를 갖췄다.“대표님, 사모님.”“이 사람은 격투기와 운전 솜씨가 뛰어난 이 군입니다.주민기는 몸이 좋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군이라는 남자는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했다.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네가 고은서의 운전을 책임져라.”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왜 나에게 운전기사를 배정해 줘?”곽승재는 담담하게 말했다.“너의 출입이 편리해지라고 그랬어. 밖에 나가면 저 사람은 네 경호원도 해줄 수 있고.”고은서는 둘러서 거절했다.“괜찮아, 어젯밤 일은 사고일 뿐이야. 난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필요 없어. 필요하더라도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찾을게.”고은서는 또 곽승재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고 곽승재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다못해 곽승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먼저 쓰고 있다가 사람 찾으면 얘기하자.”외부인 앞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고
“아픈 건 아니고 약을 좀 사려고.”“무슨 약을 사려고? 주민기한테 사서 별장으로 보내라고 해.”고은서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했다.“불편해. 내가 가서 사면 돼.”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으로 짐작해 냈고 눈을 아래로 뜨면서 기쁜지 화난 지 모른 채 말했다.“객실에 안전용품이 다 준비되어 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미 조처를 해놓았다는 뜻을 알아차렸다.그러자 고은서는 시름을 놓았다. 어젯밤에 이미 사고가 발생했으니 아무래도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내서는 안 됐다.고은서가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마음속의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예전에 나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암시한 적 있지 않아?”고은서는 말했다.“시간대마다 생각이 있으니 과거 얘기는 꺼내지 말자.”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예원 별장에 도착한 고은서는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이어 그는 옆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바로 껴안고 내렸다.“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는 입을 열었다.“너 너무 늦게 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처럼 이런 수단을 써서 접근하는 것에 이제는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곽승재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서 방으로 들어가자 장순이의 얼굴에는 의외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눈치껏 자기 일을 했다.고은서는 뻔뻔하게 애써 못 본 척하고 곽승재가 그녀를 안아서 올라가게 하였다.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목 자국을 가린 고은서는 단정한 화장을 하고 스탠드칼라의 치마로 갈아입은 뒤 트위드 자켓을 입으니 사람 자체가 기운이 있어 보였다.얼굴에는 더 이상 초췌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나절이었다.차에서 내릴 때 곽승재는 그녀를 안고 내리려고 했지만 고은서가 막아서며 말했다.“혼자 갈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안겨서 가면 얼마나 큰 관심을 끌까.
곽현수의 말에 백유미는 곽승재를 한번 쳐다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친한 사이라고 해도 조심해야죠. 곽 대표님은 지금 결혼하셨으니 저는 곽 부인님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습니다.”“그것도 기분 나쁘다니. 마음도 좁아라.”곽현수는 꾸짖는 눈빛을 고은서에게 돌렸다.“고은서와 상관없습니다.”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하지만 곽현수는 여전히 불만스러웠다.“여자를 위해 소꿉친구까지 멀리하면 하면 백 아저씨의 마음이 상할까 봐 두렵지 않으냐?”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호칭하나 가지고 소원했다고 말할 수 없죠.”“맞아요, 큰아버지. 승재를 탓하지 마세요. 우리의 정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백유미가 대답했다.백유미가 일부러 곽현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또 정을 언급하는 것은 고은서를 화나게 하여 자기와 말다툼하려는 속셈이었다.고은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곽 이사님, 저는 유미 씨가 곽승재를 어떻게 부르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마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저와 곽승재, 곧 이혼할 겁니다. 그러니 유미 씨 때문에 저와 불평하실 필요 없어요. 아마 곧 새며느리가 될 거니까 당신도 만족하실 거예요.”어차피 이혼해야 하는데 굳이 겉치레할 필요도 없었다. 배짱이 없으면 그만이지, 그녀는 시중을 들 생각도 없었다.“죄송합니다. 전 먼저 할머니를 뵈러 가야 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고은서는 곽승재를 뿌리치고 자신의 어깨를 안은 손을 뿌리치고 곽현수의 어떤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방안으로 향했다.“무슨 태도야? 내가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얼굴을 찡그리며 나한테 그래?”곽현수는 화가 났다.“제가 가볼게요.”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고은서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곽현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쟤가 방금 말한 이혼은 어떻게 된 거야?”곽승재는 자신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저희 부부가 갈등을 좀 일으켰는데 그저 홧김에 한 말입니다.”“홧김에 하는 말이라고 해도 나한테 전혀 예의를 차
백유미는 시선을 거두고, 곽현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큰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승재랑 함께 있고 싶지만, 너무 성급하게 굴면 그가 저를 싫어할까 걱정이에요.”“네가 귀국해서 GS 그룹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다 지지했잖아. 근데 지금 와서 승재의 마음도 못 잡아놓고 나더러 프로젝트에 투자해달라고? 말이 돼?”곽현수 매우 불만스러워했다.백유미가 말했다.“큰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제가 못나서 그런 거죠. 승재 일에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 이런 사소한 일로 큰아버지를 귀국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큰아버지도 보시다시피 승재는 고은서에게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들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프로젝트는 친척에게 부탁할 건데 그가 잘되어야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도 큰아버지와 승재의 배려 덕분에 간신히 운영되고 있어서, 이렇게 많은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큰아버지께 도움을 청한 겁니다.”곽현수가 차갑게 말했다.“자금은 내가 줄 수 있어. 네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여 승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야 해.”“열심히 할게요.”백유미는 대답했지만, 여전히 좀 이해가 안 됐다.“승재는 큰아버지 아들인데 왜 그를 괴롭히시는 거예요?”곽현수가 쌀쌀하게 말했다.“자기 일이나 잘해. 다른 건 네가 간섭할 필요 없어!”백유미는 눈치 있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싸늘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고은서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낮잠을 못 주무셨는지 전미자의 안색은 다소 피곤해 보였고, 장순이가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할머니!”고은서가 달콤하게 불렀다.“은서 왔어.”전미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할머니한테 와!”“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매년
“이제야 마누라 아까운 거 알겠냐.”전미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자를 노려보았다.“진작에 뭐 했어?”“할머니...”“할머니 말씀 맞아요. 예전에는 내가 잘해주지 못했어요.”고은서가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너무 무리했어.”이 말을 하고 나서 고은서는 전미자에게 말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거의 올 때가 된 것 같아요. 할머니, 저 좀 나가볼게요.”그녀는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백유미의 말이 자꾸 떠올라 그에게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고은서가 핑계를 댄 걸 알았지만 전미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고은서가 나간 후, 전미자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다.“저리 가, 너는 서툴러서 은서의 반도 못 해!”곽승재는 손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멍하니 뭐해. 마누라한테 가지 않고!”전미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곽승재도 거절하지 않고 고은서를 따라갔다.외삼촌과 외숙모는 과연 도착해서 곽 씨 일가족과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고은서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아 조용한 곳에 앉았다.도우미에게 물을 시키려는 순간, 깡마른 팔 하나가 뻗어 나왔다.곽승재가 그녀에게 물잔을 내밀었던 것이다.따끈한 물컵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왜 왔어?”곽승재는 물잔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내 손이 서툴다고 쫓아냈어.”고은서가 말했다.“그럼 친척들에게 인사하고 와. 난 잠시 조용히 있고 싶어.”곽승재는 그녀 옆에 앉으면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분은 누구에게나 불만이 많으셔. 너에게만 그런 게 아니야.”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백유미에게는 꽤 만족해 보이더라.”곽승재: “백 씨 아저씨는 예전에 호원 저택의 집사였고 아버지는 그를 꽤 신뢰했었어. 그래서 백유미에게도 몇 푼의 애정이 더해진 거야.”곽승재가 그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고은서, 왜 모든 일에 유미를 끌어들이는 거야? 이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조사하는 이유는 네가 진실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고은서는 코웃음 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에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전에 몇 번이나 엉뚱한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갔는데, 방금 아버지 앞에서도 또 그런 말을 하더라. 내가 무슨 행동을 했길래 너에게 유미와 결혼할 거라는 착각을 준 거야?”고은서는 속으로 말했다.‘착각이 아니야. 전생에서도 너는 백유미 때문에 나와 이혼했어. 그리고 내가 너희들의 결혼식을 망칠까 봐 나를 정신병원에서 못 나가게 했잖아.이번 생에서는 내가 방해하지 않아서 네가 아직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이 말을 당연히 곽승재에게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은서는 며칠 전의 일을 꺼냈다.“지난번에 할머니가 보내주신 약을 넣은 해삼탕을 네가 마셨잖아. 내가 널 거절한 후 너 백유미를 찾아간 거 아니었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고은서, 네 마음속에서 나는 그렇게 도덕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냐? 와이프가 있는데 왜 다른 여자를 찾아?”정상적인 남자는 그럴 리 없겠지만, 그는 애초에 그녀에게 감정이 없는 데다 약까지 먹었으니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어쨌든 그 이틀 동안 그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그 후에 고은서는 백유미의 인스타에서 식사 모임 사진을 보았다.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읽고, 참지 못하고 그녀의 섬세한 턱을 살짝 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그때 나는 병원에 갔어. 진료 기록을 보여줘?”고은서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럴 필요 없어. 난 이미 전에 말했잖아. 네 일에 관심 없다고.”곽승재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고은서, 그때 네가 성아연을 보내 소란을 피우게 한 것도 내가 그 며칠 계속 유미한테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그날 유미는 아저씨가 나에게 고맙다고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어. 그런데 내가
내일 순조롭게 이혼할 수 있으려나?“형부랑 무슨 얘기 한 거야? 싸웠어?”이때 고은혜가 다가왔다.고은서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넌 왜 여기 있어?”고은혜는 옆에 앉으면서 귀찮은 듯 말했다. “엄마한테 끌려온 거야. 오늘 온 사람 중에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 보라잖아.”외숙모는 고은혜에게 부잣집 신랑감을 소개해 줄 기회만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나한테 무슨 볼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그냥 수다 떨려고 온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그 정도로 좋지는 않았으니까.고은혜가 말했다.“지난번 형부가 파리에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형부가 먼저 그 친구한테 얘기 좀 해놓고 나한테 연락처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고시은: “너 방금 승재를 봤잖아. 왜 직접 말 안 해?”고은혜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화장실에서 고시은과 함께 곽승재에 대해 그렇게 말해놓고 어떻게 다시 부탁할 수 있겠는가.“넌 그의 와이프니까, 당연히 네가 말해야지. 또 내가 그에게 접근하려고 한다고 오해하지 말고!”고은혜는 약간 짜증이 난 듯 말했다.“도대체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지난번에는 내가 해외로 나가길 바란다고 하더니 그냥 해본 말이었어?”고시은은 고은혜를 흘겨보더니 말했다.“상대방 연락처를 가져서 무슨 소용 있어? 외숙모가 너 해외 가는 걸 허락했어?”“아직 허락은 못 받았지만, 아빠는 거의 설득했어. 지금 며칠 동안 기분 좋을 때 계속 설득하면 엄마도 허락하실지 몰라.”고은혜는 이 말을 하면서 얼굴에 기쁜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되든 간에, 나도 파리 쪽 상황을 미리 알고 싶어. 마음의 준비도 있어야지.”고은혜가 주동적으로 외삼촌을 설득하고 또 미리 학교 상황을 알아보려는 걸 보니 그 결심이 꽤 굳은 것 같았다.“이따가 기회가 되면 물어볼게. 하지만 그가 꼭 도와줄지는 보장할 수 없어.”고은서가 말했다.아까 곽승재가 갈 때 안색이 안 좋았는데, 그가 혹시라도 꽁하게 기억하고 있으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그
예전에 고준석은 고국성을 혼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요즘 고준석과 함께 해찬시에 있다 보니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설마 성씨 가문의 그 주문은 아니겠지.고은서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은혜에게 말했다.“네 일은 나중에 얘기해. 나 삼촌 좀 만나봐야겠어.”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고국성을 찾아갔다.그는 한창 곽씨 가문의 친척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기뻐 보였다.고은서는 친척에게 죄송의 말씀을 드리고 고국성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은서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을 막 끌어내고 너무 예의가 없구나.”고국성이 불쾌하게 말했다.고은서가 물었다.“요즘 성씨 가문이 큰 거래를 소개해주던가요?”이 말에 고국성은 웃으며 말했다.“뭐야. 너도 들었어!”“동욱이는 여전히 의리가 있더라고. 예전에 우리 집이 그들에게 잘해줬던 걸 기억하고 이번에 친구가 주문이 필요하자 바로 나한테 연결해 준 거야.”“아직 협상 중인가요, 아니면 이미 계약을 체결한 거예요?”고은서가 급하게 물었다.“모든 조항이 다 확정되었고, 내일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어.”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삼촌, 며칠 만에 이렇게 큰 주문을 상대방이 이렇게 흔쾌히 계약하다니, 중간에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으세요?”고국성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게 무슨 뜻이야?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 상대방은 성의를 가지고 왔고 또 동욱이와도 친구이니 협력이 자연스럽게 빠르게 진행된 거지.”고은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삼촌, 저는 삼촌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얼마 전에 뉴스에서 어떤 사람의 상황이 삼촌과 비슷한 것을 봤는데 나중에 물건을 납품할 때 큰 문제가 생겨서 회사가 파산했다잖아요.”고국성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그런 일도 있었어?”“M·Q에는 내 지분도 있으니 나도 잘 되기를 바라죠. 삼촌, 비서더러 나에게 계약서를 보내주라고 하세요. 이따가 전문가를 찾아서 분석 좀 해볼게요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