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으로 가는 동안 곽승재는 주민기와 함께 일 얘기만 나눴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곽승재는 계속 업무 처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얻게 된 고은서는 편하게 비행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좌석 등받이를 내려 편히 잠을 청했다.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만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자 고은서가 잠에서 깼다.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멀미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고은서는 지금껏 비행기를 타며 멀미를 한 적이 없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옆 좌석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눈을 떠보자 곽승재는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침에 금방 일어났을 때 느꼈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곽승재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곧이어 승무원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오더니 예의 바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손님, 여기 따뜻한 물 나왔습니다.”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승무원은 테이블에 컵을 살며시 올려놓았다.“손님, 비행기 탑승 이후로 계속 서류만 보고 계시던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서류만 보시면 눈에도 안 좋거든요. 적당한 휴식도 취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승무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초승달 같은 눈매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곽승재에게 물을 건네줄 때는 매끈한 곡선의 몸매도 더욱 부각되었다.고은서는 빠르게 승무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곽승재는 겉모습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고, 그 특유의 냉정하고도 절제된 분위기는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예전에 많은 여자들이 협업을 빌미로 곽승재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얘기를
고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승재가 승무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그는 손을 뻗어 고은서의 목을 끌어안더니 차가운 눈길로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날 꼬시고 싶으면, 먼저 우리 와이프 허락부터 받으시죠.”승무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비행기 탑승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해? 그냥 전화번호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뭘 꼬셔…”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기침이 나올 지경으로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팔에 힘을 조금 푼 곽승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무장님 불러오세요.”곽승재의 말에 승무원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복숭아꽃처럼 발갛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발 사무장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던 승객을 건드렸던 탓일까, 그 소란은 금방 사무장을 불러들였고 상황파악을 마친 사무장은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 사안을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다.“따뜻한 물 한 잔 더 갖다 주세요.”곽승재는 여전히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사무장은 곧바로 승무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고 온 승무원은 두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맛있게 드십시오, 손님.”말을 마친 승무원은 재빨리 그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곽승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쳐다보며 말했다.“난 물 마시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딱딱했다.“몸 안 좋다며. 물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곽승재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밖에 운전기사 대기 시켜놨어. 같이 차 타고 가자.”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아직 8시밖에 아 됐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치안 안 좋은 나라도 아닌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네가 M국에서 며칠 동안이나 날 돌봐줬는데, 이렇게 귀국하자마자 널 공항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할머니께서 아시면 분명 난리 치실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할머니한테 혼나는 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고, 주민기는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명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고은서 역시 이런 곳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하지만 난 호텔로 갈 거야.”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없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탓에 고은서는 자신의 짐도 챙기지 못했다.“내 캐리어!”고은서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짐을 챙기려 하던 그때였다. 주민기가 곧장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모님, 짐은 제가 챙기겠습니다.”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나 발 아픈데, 좀 천천히 걸어줄 수 없…”고은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자 고은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화가 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 좀 내려줘!”하지만 곽승재는 그런 고은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잔뜩 화 난 듯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들쳐 안고 성큼성큼 공항을 빠져나갔다.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 강제적인 “공주 대접”을 받아들여야 했다.다행히도 두
곽승재의 눈에는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찼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이준은 차를 출발시키며 눈치껏 운전석과 뒷좌석의 가림막을 올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코웃음을 흘렸다.“곽 대표님, 말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언제 당신한테 신경 안 쓴 적이 있기는 해요?”곽승재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인 아내라면, 다른 여자가 남편한테 들이대로 있는데 아무 반응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친구였어도 곤란할까 봐 어떻게든 도와주겠어!”아, 역시 그 일 때문에 기분이 계속 안 좋았던 거구나.“누가 너한테 들이대는 게 싫으면 그냥 무시하고 쫓아내면 될 거 아니야!”고은서가 대답했다.“근데 넌 쫓아내긴커녕 오히려 계속 대답해줬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네가 먼저 그렇게 여지를 줘놓고 나한테 화풀이는 왜 하는 건데?”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에 고은서도 지지 않고 곽승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곽승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았다.고은서도 더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그 후로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은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웠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곽승재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오늘 오후에 나한테 문자를 보내셨어. 내일 우리 본가로 오라고.”고은서는 M국에 있던 때에도 할머니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그녀에게 귀국하는 대로 집에 들르라는 말을 하곤 했다.출가한 지 열흘이나 지났으니 할머니가 자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일단 오늘 푹 자고 내일 바로 갈게.”곽승재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급히 차에서 내리려는 고
고은서가 직접 식자재를 사서 요리를 한다고 해도 그곳의 식자재 자체가 고은서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아픈 사람 돌봐주려고 그 먼 곳까지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 적어도 감동한 티라도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또 너 바람 맞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이혼 서류에 서명을 결심한 순간, 곧장 이 좋은 소식을 박지연에게 전해주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고은서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같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설득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화도 안 내고 그냥 받아들이더라.”박지연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여자한테 차여본 적이 있겠어? 자존심 하나 꺾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곽승재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은서는 정말 진지하게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은서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고기의 풍미와 상추의 신선한 향이 어우러지더니 이내 양념의 매운맛까지 더해져 환상적인 맛을 냈다. 고은서는 더 입을 열지 않고 그 맛에 한껏 취해있었다.맛있게 먹는 고은서의 모습에 박지연도 군침이 돌았는지 같이 고기를 몇 점 집어먹기 시작했다.“민시후 씨도 M국에 갔었다며?”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약혼녀가 자꾸 귀찮게 군다더라. 그래서 나 만나러 온다는 핑계 대면서 갔대.”박지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랑 민시후 씨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잖아. 평소에 네 얘기 들어보면 일 처리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해도 되는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일은 잘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일전 서인수가 보육원에서 한 소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던 일을 말해주었다.“그때 민시후 씨는 서인수를 돕지 않았어. 그 대신 아름 언니한테 그 사실을 알렸지. 적어도 인성이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잖아.”고은서는 그의 이런 점을 보고 함께 일하기로 마음 먹
안으로 들어선 곽승재는 고은서의 많은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화장대 위에 있던 여러 스킨케어 병들이 반쯤 사라져 있었고 그녀가 자주 착용하던 머리띠와 얼굴을 비추는 이상한 램프 등 같은 것들도 전부 사라졌다.드레스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그녀의 화려한 옷들도 사라져 있었고, 신발과 가방을 보관하던 선반도 몇 칸 텅 비어 있었다.방금 느꼈던 허전하고 공허한 감정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곽승재는 M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온종일 바쁘게 일만 했고 비행기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탓에 지금 곽승재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베개와 이불에서는 아직도 고은서의 향이 느껴졌다.그는 M국에서 지내던 그 며칠 동안 고은서와 함께 있다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줄곧 그녀와 각방을 써왔다. 고은서가 화를 내며 먼저 귀국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곽승재 나름대로 많이 참아왔다.하지만 지금은 그 결정이 가장 후회되었다.그때 그냥 같은 방에서 잤어야 했다. 한밤중에라도 고은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더라면, 몇 시간 동안이라도 가까이 있었을 텐데.몸은 이미 피곤함에 잔뜩 찌들었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곽승재는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음이 울린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작별 인사를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전화해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날, 잠에서 깬 고은서의 머리가 어지러웠다.어젯밤, 고깃집에서 박지연과 함께 식사하며 수다를 떨다 보니 거의 11시가 다 되어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비행기에서 너무 오랫동안 자버린 나머지 잠이 오지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잠에서 깨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카톡을 확인해보니 곽승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점심에 함께 본가로 가자는 내용이었다.보낸 시간을 확인해보니 두 시간
곽승재의 입술에 고은서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곽승재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고개를 돌린 운전기사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차 문을 열고 모습을 감춰버렸다.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고은서는 자신의 눈앞에 가까이 있는 곽승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눈썹을 찌푸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 나른함이 묻어 있었고, 그 목소리가 곽승재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태연하게 몸을 곧게 세우고는 말했다.“도착했어. 너 깨우려고 그런 거야.”“아, 그렇구나.”고은서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본가에 도착해 있었다.고은서는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기사님은 어디 가셨어?”곽승재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내려.”함께 응접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전미자를 발견했다.고은서를 만난 전미자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식사 중에도 전미자는 계속해서 고은서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정작 친손자인 곽승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곽승재는 회사에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잠에서 완전히 깬 고은서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곁을 지켰다.…육현석은 GS 그룹 대표이사실에서 곽승재를 기다리고 있었다.“형은 어쩜 이렇게 매일 바빠? 밥 한 끼 같이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안 와서 나 혼자 쓸쓸하게 배달 음식만 시켜 먹었잖아.”육현석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면서도 곽승재는 농담할 틈도 없이 바쁘다는 듯 대충 물었다.“여기까지는 왜 왔어?”“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당연히 보러 와야지.”“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조사 중이야, 곧 있으면 결과 나올 거야.”육현석이 궁금하다는 듯
육현석이 뭐라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줘.”고은서가 마침 본가에서 나왔을 때, 민시후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귀국할 예정이니 데리러 와.”“운전기사가 없어? 아니면 택시 예약할 줄 몰라서 그래? 왜 굳이 나한테 오라는 거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M국에 왔을 때 내가 아니었다면 고생 좀 했을 거였잖아. 나한테 신세 졌으니 갚아야지.”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민아가 네 귀국 항공편을 알고 있어서 데리러 가는 거지?”“항공편은 몰라. 하지만 M국에서 해성으로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2대밖에 없는데 그 자리를 지켜서면 되지 않겠어?”민시후의 말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우리 집 영감이 나랑 송민아를 결혼시키려고 굳게 마음먹은 것 같아. 아니면 우리 한번 협력해 볼까? 나는 네 이혼을 도와주고 너는 이 혼사를 망쳐주는 거야. 어때?”“어떻게 도와줄 건데?”“나한테 다 방법이 있지.”“그럼 난 어떻게 네 혼사를 망쳐야 하는데?”“네가 수락만 한다면 나한테 맡겨.”고은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비록 민시후의 제안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조건이 조금 까다로웠다. 고은서는 자신이 이 판에 뛰어들어 혼사를 망치면 앞으로 평온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곽승재는 수중에 있는 급한 프로젝트만 끝내면 이혼을 진행하기로 했었다.두 제안을 비교해 본다면 곽승재 쪽이 좀 더 이로운 것 같았다.“그 얘기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고 항공편 알려줘. 내일 데리러 갈게. 이걸로 신세는 갚은 거다? 앞으로 또 나한테 이상한 일 시키면 안 돼.”민시후는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알았어. 그럼 내일 데리러 오기로 한 거다.”다음날, 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미리 연락하고 그녀가 일하는 병원으로 향했다.위만 검사하려고 했는데 박지연은 건강 검진 시트를 들고 있었다.“위에서 지난번 2천만 원을 네가 기부했다는 걸 알고 감사의 의미로 건강 검진을 무료로 진행하라고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