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국을 언급하자 시간을 세어보던 고은서는 무언가 떠올랐다.“지연아, 너 휴가 낼 수 있잖아. 왜 온 선생님과 같이 안 갔어?”“나 시간 없어. 시댁 가정부도 일 있다고 휴가 내서 내가 매일 가서 청소하고 밥도 해주고 밤에는 어머님과 같이 운동도 해야 해.”“가정부가 휴가를 냈으면 임시 가정부 구하면 되지. 넌 L국에 가서 온 선생님 만나.”고은서가 말했다.“결혼할 때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지금이 그걸 만회할 좋은 기회야.”박지연은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역시나 거절했다.“됐어, 비자도 만료됐는데 다음에 가지 뭐.”“비자는 갱신하면 되고 정 안 되면 여행사에 신청해서 투어로 가면 되잖아. 좋은 기회인데, 온 선생님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박지연은 곧바로 마음이 동했다.“그럼 해볼까?”“당장 해!” 고은서가 재촉하자 박지연은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평소에는 나랑 남편에 대해 거의 물어보지 않더니 오늘 갑자기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고은서는 차분하게 말했다.“내 결혼생활은 실패했으니까 절친한 친구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잘못됐어?”“...”좀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고은서가 아니었지만 박지연은 그래도 설득당했다.“네 말이 맞아, 비자 갱신해야겠어.”“그래.”전화를 끊으며 고은서는 살짝 안도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전생에 온 의사는 L국에 출장을 갔을 때 첫사랑을 만났고, 이후 그 여자가 온 이사의 병원으로 전근해 오며 박지연과 온 이사의 결혼을 파탄 내는 이유가 되었다.이번에 박지연이 해외로 가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바꾸길 바랐다.알려줄 건 알려주고 욕도 실컷 한 후 고은서는 계속해서 투자계획서를 다듬었다.그녀는 빨리 마무리해서 민시후에게 넘기고 싶었다.데이터 분석은 지루했지만 데이터를 통해 기업의 운영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보람찬 일이었다.또 한 번의 밤샘 작업 끝에 고은서는 마침내 계획서를 완성했다.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하늘은 이미 하얗게 물들어 있었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화장을 한 후 아침을 먹고 민시후를 찾아가려 했다.컴퓨터로 가보니 옆 포트에 꽂아 두었던 USB가 사라졌다.고은서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어젯밤까지 자료를 저장해 두었는데 어디로 갔을까?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미숙에게 물었지만 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아침에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길래 안 잠겨 있어서 들여다봤을 뿐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어요.”“오늘 아침에 곽승재가 내 방에 들어왔어요?” 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들어갔어요. 사모님 방에 핸드폰이 있는 걸 보시고 외출 안 하셨다고 하셨어요. 사모님, USB가 중요한가요? 제가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USB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결정적인 데이터가 많다는 게 중요했고, 만약 곽승재가 그걸 봤다면 며칠 동안 일한 게 헛수고가 된다!“아뇨, 제가 직접 찾아볼게요.”고은서는 곧바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없었다.개자식, 전화를 안 받을 거면 휴대폰은 왜 써!고은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대충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몰고 GS그룹으로 향했다.회사 로비에 도착한 고은서는 또다시 제지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런트에 새로 온 직원이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그리고는 적당히 살가운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오셨어요. 바로 대표님 사무실로 모실게요.”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가 제가 오는 걸 알고 있어요?”직원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연락은 받지 못했지만 사모님이 오시면 아무도 막지 말고 대표 사무실로 모시라는 규정이 있어요.”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을 곽승재가 동의했다고? 게다가…“저를 어떻게 아세요?”직원이 답했다.“저희가 교육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GS그룹과 대표님 주변의 중요한 분들을 파악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GS그룹 사람도 아니고, 곽승재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
GS그룹 인턴십 계약서였다.“네 노력의 대가로 판주 투자은행에 인턴으로 갈 기회를 줄게.” 곽승재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신분을 내세워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고 모든 건 회사의 규정에 따라야 해.”고은서는 웃음이 났다.“내가 언제 판주에서 인턴 하겠다고 했어?”고은서가 인턴이라는 신분에 불만을 품은 거라고 생각한 곽승재는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GS그룹은 사람을 뽑는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서 기획서만으로는 정식 사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아. 네가 이 정도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한 달 안에 정직원이 되면 알맞은 부서로 보내줄게.”핀트가 안 맞는 말에 고은서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나한테 어떤 직책을 줄 건데?”고은서가 먼저 물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비웃음이 살짝 묻어났지만 곽승재는 꿋꿋이 대답했다.“보통은 투자자 어시스턴트지만 능력이 뛰어나면 얼마든지 원하는 직책에 지원할 수 있어.” “그럼 내가 투자 이사 자리를 원한다면?”“고은서!” 곽승재가 경고 섞인 어투로 말했다.“왜 소리는 질러?”고은서의 작은 얼굴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당신이 줘도 내가 안 해! 내 허락도 없이 기획서를 봐 놓고 어디 인턴십을 주겠다는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이 뭔데, 신이라도 돼?” “너!” 곽승재는 분노에 말문이 막혔다.보스와 고은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주민기는 황급히 말했다.“대표님, 사모님, 전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고은서, 그만 비아냥거려!” 곽승재는 화가 났다.“고작 인턴 자리라서 싫어? 그 기회를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드는 줄 알아!” “곽승재, 잘난 척 그만해!” 고은서는 무심하게 되받아쳤다.“처음부터 끝까지 난 판주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내 USB를 몰래 훔쳐 간 건 당신이야!”묻지도 않고 가져간 건 도둑질이다. 훔친 것도 모자라 내용까지 봤다. 판주와의 싸움에 사용
“대표님, 찾으셨어요?”주민기는 무고한 자신까지 피해를 볼까 봐 머리털이 곤두섰다.곽승재가 그에게 USB를 던졌다.“이 안에 있는 계획서 프린트해서 판주로 보내고, 통과되면 고은서에게 기준에 따라 보너스 주세요.”명운이 특별히 큰 프로젝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GS그룹이 판주를 인수한 이후 첫 번째 프로젝트인 만큼 더 완벽하게 준비해서 명예를 지켜야 했다.하여 최근 투자자들이 열심히 계획서를 만들고 있고 회사에서도 이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 보너스를 책정했다.그런데 고은서가 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짧은 시간 안에 곽승재마저 인정할 만한 계획서를 만들 줄은 몰랐다.주민기는 마음속으로 몰래 감탄하며 USB를 받아 들었다.“네, 대표님.”...“은서 씨, 먹고 싶은 거나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대로 시켜요, 예의 차리지 말고.”조용하고 고급스러운 프라이빗 클럽, 푹신한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올려놓았고 양옆으로 늘씬한 미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이 느긋한 모습을 남들이 봤으면 업무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호화로운 생활을 자랑하는 줄로 알 것이다.“도련님, 사람들 좀 내보내도 될까요?” 고은서가 물었다.“안 돼요.”민시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은서 씨, 이 여자들이 나가면 우리 둘이 한 방에 남게 되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고은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도련님께선 절 동성 친구로 생각하세요.”민시후는 건들거리며 대꾸했다.“안되죠, 어떻게 은서 씨처럼 예쁜 사람을 동성으로 대할 수 있겠어요?”고은서는 말을 멈추고 민시후 옆에 있는 두 미녀를 향해 말했다.“올 때 보니까 여기 스파가 있더라고요. 두 분은 나가서 전신 스파 좀 받고 오세요. 비용은 전부 도련님이 부담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두 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은서 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만 가 봐. 누가 곽승재랑 부부 아니랄까 봐, 조금도
민시후는 고은서를 비웃듯 바라보았다.“판주가 입찰도 안 했는데 명운이 그런 큰 먹잇감을 포기하고 우리랑 같이 일할 것 같아요?”“보통 상황이라면 안 되겠지만 누군가 밀어붙이면 또 모르죠.”“오호?” 민시후는 자세를 고쳐 앉고 흥미롭게 고은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고은서는 휴대폰을 열어 파일 하나를 꺼내 민시후에게 건넸다.“명운의 서인수 대표에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금 알게 된 정보인데 그가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건 독점 제조법 외에도 처가댁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아내의 말은 무척 잘 듣는다더군요.”“은서 씨 말은 그 사람 아내를 통해 서인수를 설득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게 하겠다는 건가요?”민시후의 말투는 한층 담담해졌고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기 직전이었다.고은서가 먼저 협업을 제안하길래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했는데 고작 이런 수작이라니.그는 고은서의 휴대전화를 밀어내며 말했다.“명운의 미래 상장에 관한 일인데 그 사람 아내도 성급하게 결정하진 않을 거예요.”고은서도 당연히 민시후의 조급함을 눈치채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도련님, 이것 좀 다시 봐요.”그녀는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서인수 부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이분은 서인수 씨 장모님인데 몇 달 전 심장마비로 돌아가실 뻔했을 때 간호사가 제때 응급조치를 해서 사모님이 무척 고마워하고 계세요.”민시후는 고은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간호사가 제 친한 친구입니다. 이미 저를 대신해 사모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고 내일 오전에 계획서를 들고 댁으로 찾아뵙기로 했어요.”고은서는 이렇게 말하며 간단한 제안서를 민시후에게 건네주었다.“너무 번거롭지 않게 간단하게 요약한 제안서를 만들었으니 한번 보세요.”민시후는 서류를 받고 조금은 놀란 모습이었다.“아침에 USB를 잃어버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거예요?”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으니 당연히 놓칠
“필요 없어요.” 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친구를 사귄다는 태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은서 씨, 생각보다 꽤 똑똑하네요.”고개를 든 민시후는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고은서는 칭찬으로 여기고 답했다.“도련님 칭찬 감사합니다.”민시후도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기획서를 고은서게 다시 건넸다.“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다음 날, 고은서는 일찍 일어나 적당히 화장을 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서인수의 집으로 향했다.서씨 가문은 도시의 고급 동네에서 작은 마당과 화단이 있는 별장에 살고 있었다.고은서가 도착했을 때 도아름은 어머니와 함께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있었다.고은서는 당당하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자기소개를 한 후 가져 온 선물을 건넨 다음 서두르지 않고 할머니와 함께 잠시 볕 쪼임을 하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식사 후에야 고은서는 본론에 들어갔다.“사모님,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명운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여러 군데 있는 걸로 알지만 저희 미래가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겁니다.”고은서는 생각을 전하며 계획서를 건넸다.“투자 금액과 지분율을 보면 저희의 성의를 알 수 있을 겁니다.”도아름도 시장 상황을 이해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료를 넘겨보았다.“이 문제는 나중에 남편이랑 주주들과 상의해서 이틀 안에 소식 전해드리죠.”거절하지 않은 것 자체가 좋은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고은서는 도아름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맙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지연 씨 친구면 당연히 도와야죠.”도아름은 당당하고 유능하며 성격도 솔직했다.사업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고은서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그럼 지연이가 돌아오면 저도 밥 얻어먹으러 올게요!”“좋아요!”도아름과 작별 인사를 나눈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상황을 알리며 관련 서류와 계약서를 제때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일을 마친 고은서는 예원 별장으로 돌아갔다.도아름이 도와준다고 했
스피커 모드였던지 곧이어 반대편에서 할머니의 속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은서야, 승재 그 자식 때문에 화가 나서 할머니랑 시간도 보내기 싫은 거니?”할머니의 그런 말투를 당해내지 못한 고은서가 서둘러 말했다.“전 당연히 할머니랑 있는 게 좋죠.”“그럼 그렇게 해, 내일 너희한테 기사 보내마.”고은서의 다음 말을 할 틈도 없이 전미자는 이미 통화를 끝냈고 그녀의 목소리 톤은 한결 가벼워졌다.“...”다음 날 오후, 고은서는 운전기사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차에 가서 문을 열어보니 곽승재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서늘한 눈매와 인상적인 분위기가 마치 금융 잡지의 표지 모델처럼 보였다.문을 여는 소리에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개자식, 분명 자기 기사도 있으면서 굳이 할머니 차를 타겠다고!고은서는 그와 같이 앉고 싶지 않아 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으려 했다.“심술부리지 마,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의 말투가 살짝 가라앉았다.분명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생각은 또 어떻게 읽었을까.운전기사가 자신을 돌아보자 고은서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삐죽거리며 뒷좌석에 올라탔다.이동하는 동안 고은서는 곽승재와 말을 섞지 않고 휴대폰만 보았고 곽승재 역시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컴퓨터만 바라봤다.차는 한참을 달렸고 운전자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 고은서는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앞좌석에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조심해.”곽승재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자 고은서는 흔들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도련님, 사모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끼어들어서.” 운전기사는 서둘러 사과했다.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은서는 이미 그의 가슴에 반쯤 기대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베이지색 프릴이 달린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각도에서 그녀의 하얗고 섬세한 쇄골과 특정 부위가 은근히 보였다.“어딜
고은서는 당황했다. 할아버지가 준 200억은 민시후와의 협업에 사용할 예정이었고, 지난번 곽승재의 블랙카드는 한도를 다 써 버린 상태였다.요즘 수중에 현금이 많지 않아서 이 돈만 들어온다면 생활이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어쨌든 그 계획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쓸모가 없으니 판주에서 쓸 테면 쓰라지.하여 고은서는 태연하게 물었다.“2천만 원만 더 주면 안 돼?”“...” 곽승재가 그녀를 올려다봤다.“고은서, 그렇게 돈을 좋아하면서 전에는 왜 고고한 척 재산 한 푼도 필요 없다고 했어?”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에게 카드 한 장을 던졌다. 생활비는 충분히 줄 테니 결혼으로 자신을 묶어두지 말라면서.당시 고은서는 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의 카드를 거절했다.그래서 결혼 후부터는 곽승재에게 줄 선물을 사거나 생활비 일부를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아까워 죽겠네!“이제라도 보상해 주는 게 어때?” 고은서가 떠보듯 묻자 역시나 곽승재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나랑 이혼할 건데, 내가 왜 너한테 생활비를 줘?”사업가에겐 천성적으로 이익이 중요했기에 고은서도 더 따지지 않았다.“그냥 2억으로 해.”곽승재가 요구를 제기했다.“앞으로 프로젝트 진행에 참여하고 계획서와 관련된 데이터 수정도 책임져.”“곽승재, 나한테 돈 주기 싫은 거지?” 고은서가 화를 냈다.“난 판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어. 판주 일에도 관여하지도 않을 거야!”곽승재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규정을 어겨서라도 널 이 프로젝트에 투자자로 참여시킬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포기하면 나중에 할머니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어.”“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끼워준다니, 넓은 아량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곽승재의 분노에 찬 서늘한 표정에 고은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성의는 도로 집어넣어. 내가 할머니한테 가는 건 고사하고, 당신이 애원하러 와도 판주에 안 들어갈 거니까!”곽승재는 더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