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은 오늘 게임 내부 테스트가 있는 날이라 송민아가 특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녀를 응원하러 왔다.송민아의 제안을 들은 송민준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은서 씨 생각은 어떠세요?”이전까지 송민준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는 솔직히 그와 단둘이 식사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송민아가 먼저 말을 꺼냈고 송민준도 직접 물어온 상황에서 곧장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송민준은 그녀를 여러 번 도와준 적이 있었다.이전의 페인트 사건은 물론이고 이번 게임 내부 테스트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민준 씨, 저는 좋죠. 안 그래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어요. 미리 준비한 자리는 아니지만 괜찮으시다면 가볍게 식사라도 하시죠.”어쨌든 송민준을 초대하는 자리였기에 고은서는 그의 취향을 고려해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요리뿐만 아니라 전통 차로도 유명한 식당을 골랐다.고은서와 송민준이 건물을 나와 운전기사를 기다리려던 순간 정장을 입고 노트북 가방을 든 한 남성이 급히 다가왔다.“고 대표님이십니까?”송민준이 고은서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누구시죠?”“악의는 없습니다. 고 대표님께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 기획서를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그는 서류봉투를 내밀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고 대표님,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없었기에 고은서는 서류를 바로 받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프로젝트에 관하여 논의하시려면 저희 회사 이메일로 먼저 제안서를 보내주세요. 조건이 맞다면 담당자가 연락드릴 겁니다.”그러자 남성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world 게임이 유일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메일로 여러 번 기획서를 보냈지만 번번이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지만 경비팀에서 단순 영업사원으로 오해해 건물 출입을 막았습니다.”투자 회사에는 매일 수많은 투자 제안서가 쏟아진다.특히
송민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은서 씨는 원래 정이 많으신가요?”고은서는 담담하게 답했다.“저도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저분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희망마저 사라지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하지만 본인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은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다른 사람이 무너지든 말든 왜 본인의 시간을 낭비하냐는 뜻이겠지.’고은서는 가볍게 웃었다.“때로는 한 순간에 큰 전환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저분은 모든 용기를 내어 저를 찾아왔어요. 저는 단 몇 분을 투자해 그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죠. 지금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앞으로 계속 도전할 힘은 얻었을 겁니다.”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아니면 그냥 제가 성인군자 놀이하는 걸로 생각해도 좋아요.”송민준은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는 않고 조용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약 30분 후 차는 식당 앞에 도착했다.이곳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회원제 운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비회원은 출입이 불가능했는데 고은서는 고객들과 자주 만나야 했던 탓에 자연스럽게 회원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직원이 두 사람을 2층 별실로 안내했다.완전히 밀폐된 방은 아니었지만 구슬발이나 병풍이 자리마다 설치되어 있어 적당한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비록 식사 자리는 고은서가 마련했지만 메뉴를 정하고 주문하는 것은 송민준이 맡았다.그는 예의 바르게 고은서의 취향을 물었고 직접 차를 우려 따라주며 품격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식사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송민준은 대화를 이끌면서도 고은서가 이야기할 때는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말의 어색함도 없이 매끄럽게 자리를 이어 나갔다.그는 마치 귀족처럼 세련되고 교양 있었는데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과하게 나서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를 민시후처
“재경아.”주인혁의 매니저가 반갑게 불렀다.그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설마 그 인플루언서 마재경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고은서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사람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아는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며칠 전 손을 데었을 때의 창백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아는 사이였던 주인혁의 매니저와 마재경은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밥 먹으러 왔어? 우연이네. 마침 재경이랑 얘기할 게 있었는데 저쪽에 앉을까? 은서 씨랑 친구분 방해하지 말자.”매니저가 주인혁에게 물었다.주인혁의 매니저인 이지호는 최근 교체된 인물로 더 나은 인맥과 경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그는 주인혁을 담당하기 전부터 많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주인혁이 앞에 있는 고은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촬영장에서도 주인혁은 고은서와 관련된 일에 신경을 썼고 촬영이 끝난 후에는 뒤풀이도 가지 않고 곧장 해성으로 달려갔다.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연예인이 스캔들에 휘말리면 팬들을 대거 잃을 수도 있기에 매니저는 절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인혁을 빨리 데려가고 싶었다.그 말을 듣고 주인혁이 잠시 망설이자 마재경이 먼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은서 씨, 우리 정말 인연인가 봐요. 여기서도 다 마주치네요.”그녀는 일부러 가방을 눈에 띄게 들어 보였다.그제야 고은서는 마재경이 유명 브랜드의 최신 컬렉션 원피스를 입고 있고 손에는 구하기도 어려운 한정판 명품 가방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그녀의 태도로부터 그 물건들을 누가 선물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마재경의 유치한 행동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주인혁에게 말했다.“인혁 씨, 먼저 일 보세요.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해요.”“와, 은서 씨는 정말 매력이 넘치나 보네요.”주인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과장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멋지고 성공한 남성이 옆에 있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곽승재를 마주하자 고은서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여긴 왜 또 온 거야?’지난번엔 작은 병원에서 마주치고 이번엔 식당에서 다시 만나다니 너무도 기막힌 우연이었다.고은서는 짜증이 밀려왔지만 반대로 마재경은 마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녀는 곧장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곽승재를 향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곽 대표님...”하지만 곽승재는 마재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신 주인혁과 송민준을 한번 훑어보았다.주인혁도 온라인에서 떠도는 곽승재와 마재경의 소문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에게 그다지 호감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민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우연이네요.”그러자 곽승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송 대표님과 고 대표님은 최근 협업하나 보죠? 요즘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네요.”송민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곽 대표님 덕담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의 회사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함께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게는 영광이죠.”비록 송민준이 속한 회사는 해성에 있는 한 지사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력은 고은서의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려였다.곽승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대신 그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여기서 먹을 거야? 아니면 장소 옮길까.”마재경은 고은서와 주인혁을 의식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싫어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잖아요.”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말투와 분위기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그제야 곽승재는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이지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소속 연예인이 재경이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매니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고은서는 처음부터 곽승재와 말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주인혁을 빌미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마재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지금 저를 개에 비유하신 건가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단지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고 했을 뿐인데 주인혁이 일부러 나서면서 은서 씨한테 잘 보이려고 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서서 도와주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기 싫으면 본인의 언행부터 조심하세요. 괜한 도발이나 억울한 척하는 행동은 하지 말고요.”고은서가 싸늘한 말투로 일갈했다.“저는 그런 적...”얼굴이 붉어진 마재경은 더 이상 반박을 이어 나가지 못했고 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곽 대표님, 다 제 잘못이에요.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잘못인 줄 알았으면 사과하세요.”고은서는 비꼬듯 말하고 곧장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이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죠. 이제 와서 편파적으로 행동하진 않으시겠죠?”마재경은 치를 떨었다.‘분명 곽승재의 힘을 빌려 주인혁에게 사과를 받아내려 했는데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지? 다 고은서가 능수능란하게 말싸움을 주도한 탓이야.’마재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곽승재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대했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고 이 상황 자체에 짜증이 난 듯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누구 때문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이든 도박을 걸기는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고은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마재경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다만 곽승재가 주인혁에게 억울한 사과를 강요하려 했기에 기어코 마재경에게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이미 상대가 물러섰으니 더 따질 필요도 없었다.“멀리 안 나갑니다.”고은서의 축객령에 곽승재의 얼굴은 폭풍전야처럼 어두워졌다.그는
“이대로 가면 이 게임은 틀림없이 대박 날 거야! 우리도 게임 업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어.”송민아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은서야, 네 안목은 정말 대단해. 존경스러울 정도야.”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명운 주류와 제인 제약은 그래도 노력한 결과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world 게임은 단순히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송민아는 깊이 생각하지 않겠지만 송민준이라면 의심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고은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투자라는 게 적자 날 때도 있고 흑자 날 때도 있는 거지. 우연히 아이디어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준 것뿐이야.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그녀의 말에 송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보면 은서 씨의 선의도 꼭 시간 낭비는 아니었군요.”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점심때 갑자기 찾아온 남자에게 십여 분의 시간을 준 것뿐인데 송민준에게는 그럴듯한 이유로 받아들여진 것이다.그 남자를 떠올린 고은서는 문득 한 가지 일이 뇌리를 스쳐 미간을 찌푸렸다.“왜 글? 뭘 걱정하는 거야?”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고은서는 말하려다 송민준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생각나서. 오빠랑 밥 먹어.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송민아는 고은서가 업무에 철저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대신 도시락 두 개를 건넸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먹어야 해.”“알았어, 고마워.”사무실로 돌아온 고은서는 곧장 world게임 회사의 창립자이자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고 대표님, 내부 테스트 데이터가 엄청 좋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는 몇 마디 축하의 말을 건넨 후 본론을 꺼냈다.“게임의 도용 방지 대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전생에 이 게임은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투자사와의 소송으로 최적의 출시 시기를 놓쳐 뒤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고은서 씨, 잘 지내셨어요? 현재 백유미는 특수 병동에 갇혀있습니다. 비록 간병인이라는 명목으로 배치되었지만 직접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짧은 몇 차례의 접촉을 통해 본 백유미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멍하니 아무 반응도 없거나 아니면 극도로 난폭해져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병원 측에서는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일반 병동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갑자기 미쳐버린 거지? 백승엽의 죽음조차 백유미를 완전히 무너뜨리진 못했는데 더 큰 충격은 받은 건가?’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문득 곽승재를 함정에 빠뜨리기로 결심했던 그날 밤 육현석이 했던 전화가 떠올랐다.그때 곽승재는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다가 박지연의 핸드폰으로 연락해서야 겨우 연결되었는데 전화기 너머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었다.‘울음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었는데 백유미였던 걸까?’곽승재는 바람둥이와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그와 특별히 가까운 여자는 백유미뿐이었다.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경찰로부터 백유미가 정말 미쳐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울음소리가 정말 백유미였다면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한 비서님, 최근에 백유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있었나요?”한지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아니요. 아무도 없었습니다.”“곽 대표도 안 갔나요?”“네.”한지나는 뭔가 오해한 듯 급히 덧붙였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과 백유미 사이에는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매번 백유미가 곽 대표님을 찾아온 것도 업무적인 일 때문이었어요. 곽 대표님께서 정말 백유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백유미도 제게 돈을 주고 대표님의 동선을 알려달라고 할 필요도 없었겠죠.”이생에서 곽승재는 아직 백유미를 사랑하게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난 생에서는 결국 결혼까지 하기로 했던 사이였다.고은서는 속으로 냉소했다.고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좋아. 끝나고 나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나야, 내가 갈게.”박지연은 의욕이 잔뜩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차 사려고 했잖아. 육현석이 연습용으로 한 대 빌려줬어.”“선물로 준 게 아니라?”“내가 그렇게 비싼 걸 어떻게 받아. 얼른 내려와.”고은서는 자신의 운전 초보 시절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지연아, 너 운전면허 대학 때 땄지? 그동안 운전 거의 안 했잖아. 괜찮겠어?”“무슨 뜻이야? 당연히 괜찮지!”박지연은 자신만만했다.“며칠 동안 육현석이 시간 날 때마다 나랑 같이 연습했어. 나 운전 완전 잘해.”“육현석은?”“오늘 바빠서 시간 못 낸대. 헛소리 그만하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짐을 챙긴 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반짝거리는 새 차를 타고 도착했다.그녀는 일부러 경적을 한 번 울리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자신만만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운전이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알겠네.’고은서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지연아, 너 혼자 운전하는 거 처음 아니지?”박지연은 의욕이 넘쳤다.“걱정하지 마! 처음 아니야. 오늘 아침에도 혼자 병원 주차장 한 바퀴 돌았어. 그리고 방금도 병원에서 여기까지 잘 왔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래도 괜히 초 치지 말고 믿어야지...’그녀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장엄하게 말했다.“출발하시죠!”박지연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정상적으로 행동해. 나 진짜 운전 잘해.”고은서의 걱정 속에서 박지연은 무사히 목적지까지 운전했다.주차를 마치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가 대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고까지 낸 운전자의 조수석에 앉을 용기가 있다니... 내가 실수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고은서와 박지연은 함께 피부과로 들어갔다.직원이 그들을 맞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