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행위 예술이라도 하는 듯 곧게 앉아 와인잔을 들고 우아하게 와인을 마셨다.털털한 모습 그대로인 민시후는 비스듬히 앉아 웨이터가 와인잔을 손에 쥐여주기를 기다렸다.두 사람은 시합이라도 하는 듯 열 잔이 넘도록 계속 마셨다.민시후는 전부터 술 마시고 노는데 능숙한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많이 했었는지라 와인 열 잔씩 마시고도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이젠 많이 익숙하기도 했다.그런데 곽승재는 달랐다. 고은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모습을 보며 약간 의아했다.전에 곽씨 가문 가족 모임에서는 분명히 취한 모습을 보였었다. 게다가 전생에도 술에 취한 채로 소파에 앉아 요지부동인 그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기에 더 믿을 수 없었다.‘술에 문제가 있나?’전에 가족 모임에서 마신 술이 소주라는 걸 번뜩 떠올린 고은서는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XO술이 강하다고 해도 소주는 못 따르는 법. 속도가 느린 것 같은데 그냥 백주로 바꾸지 않을래?”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그쪽 생각은 어때?”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바꾸면 되지. 나도 곽 대표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꽤 궁금했거든.”고은서는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주 몇 잔만 더 마시면 곽승재가 지겠지. 이 판을 벌인 것도 곽승재인데 졌다고 행패를 부리진 않을 거야.’이내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있는 XO술을 백주로 바꾸었다.백주의 특유한 짙은 술 냄새가 룸 안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술 냄새를 맡은 고은서는 속이 울렁거렸다. 전에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과는 달리 토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은서는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일어섰다.“먼저 마시고 있어. 난 화장실 갔다 올게.”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을 발견한 곽승재가 물었다.“어디 불편한 거야?”“괜찮아.”고은서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시원한 바깥 공기를 마시고서야 토하
임철원이 ZY그룹이 아무리 많은 노동력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민시후를 지금처럼 여러 번이고 건드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곽승재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쫓겨난 후로 조용히 살아야 마땅한데 갑자기 겁도 없이 한 무리 싸움꾼들을 데리고 복수하러 온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잃을 것도 더는 없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어머, 다 여기에 계셨네요. 마침 잘됐네요. 우리 똑똑히 따져보자고.”고은서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임철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가 데려온 사람들이 룸 안에 우르르 들어서더니 문까지 잠가 버렸다.겁에 질린 웨이터는 소파 구석으로 숨었고 백유미도 뒤걸음을 쳤다.곽승재는 고은서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녀 앞에 막아섰다.민시후도 차가운 표정을 한 채 다가와 물었다.“임철원, 지금 뭐하려는 거야?”“허, 뭐하려는 거겠어. 방금전에 경고했잖아, 후회할 거라고. 지금 이 상황에 놓이게 되니까 무서워?”“지금 당장 이 사람들 데리고 나가면 한 번은 봐줄게. 그렇지 않으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당신도 잘 알 거야.”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건드린 덕에 시궁창으로 떨어지게 생겼는데 내가 그따위 소리에 겁먹을 것 같아? 너희도 사람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걸 뼈저리게 느껴봐.”임철원은 싸움꾼들에게 덮치라고 손짓했다.“뭐해? 얼른 가서 혼내주지 않고.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혼쭐을 내주라고!”임철원의 명령을 들은 싸움꾼들이 순식간에 몰려오면서 허리 뒤에 숨겨두었던 쇠방망이를 꺼내 들었다.“고집부리지 말고 뒤에 가 있어.”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당부하고는 술병을 들고 덮쳐드는 사람을 향해 휘둘렀다.옆에 있던 민시후도 망설임 없이 싸움판에 들어가 두 사람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룸 뒤쪽으로 숨으면서 해결 방법을 생각했다.곽승재와 민시후의 실력으로 혼자 서너 명을 쓰러뜨리는 건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싸움꾼은 무려 열세 명 정도였고 심지어 다 무기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순간,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벌벌 떨고 있는 웨이터와 달리 백유미는 술병을 들고 곽승재를 도와주려고 했다.“옆에 물러서. 네가 낄 데가 아니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호통했다.그러나 연약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견고함이 담겨 있었다.“안 돼. 상대가 사람이 너무 많잖아. 네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바로 이때, 싸움꾼 한 명이 백유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곽승재는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백유미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오면서 발로 싸움꾼을 차버렸다.그다지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이 장면을 본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갔다.곽승재가 지키는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 아니었다. 백유미가 위험에 처하거든 그 또한 방금전처럼 나설 것이다.그러나 곽승재가 못 본 사이, 아까 술병에 머리를 맞았던 남자가 땅에서 일어나 흉측한 표정을 한 채 그녀에게 다시 덮쳤다.고은서는 재빨리 그를 향해 쇠방망이를 휘둘렀다.그러나 체격 차이가 꽤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은서가 있는 힘껏 휘두르지 않은 탓에 남자는 뒷걸음을 치다가 이마에 피를 닦고 더 흉악한 표정으로 또다시 덮쳤다.악에 받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고은서가 들고 있던 쇠방망이를 내팽개쳤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쇠방망이가 땅에 떨어졌다.무기를 잃은 고은서는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땅에 있던 방망이를 들고 그녀를 내리치려고 했다.“피해!”고은서가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로 남자의 발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귀가에 백유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자신과 부딪치는 커다란 힘을 못 이긴 고은서는 옆으로 넘어졌다. 그녀 몸 위로 덮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유미였다.“으윽!”남자가 내리친 방망이를 대신 막아낸 백유미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고은서도 큰 충격 때문에 배가 아파오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바로 이때, 문이 열리면서 주민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얼른 처리해!”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
무언갈 떠올린 민시후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민시후를 밀어냈다.“저리 비켜!”그는 주민기에게 백유미를 맡기고 두 손으로 땅에 있는 고은서를 안아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임신한 사실을 들킬까 봐 아픔을 참고 발버둥을 쳤다.“상관하지 말고 나 내려줘! 민시후, 나 병원까지 데려다줘...”“고은서!”저녁 내내 참았던 곽승재는 더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 룸에서 민시후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부하를 꾸지람하는 것까지 보게 되었었다.그러나 현재 거의 쓰러짐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계속 민시후만 부르고 있었다.“내가 네 남편이라는 걸 잊었어?”고은서는 입술을 꼭 깨물면서도 여전히 민시후를 불렀다.“민시후 보고 데려다 달라면 돼...”“너!”곽승재는 얼굴빛이 무척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더는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가 급하게 소리 냈다.“민시... 읍!”그녀가 민시후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화가 난 고은서는 숨이 차고 복통까지 더 심해져 끝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가 깨났다.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주변은 차가운 벽뿐이었고 손에는 링거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병실과 이어진 베란다에서는 담배를 피고있는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고은서는 담배 피우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주변에서는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고 베란다에 기대어 내뿜는 담배 연기마저도 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쓰러지기 전에 심각한 복통을 느꼈던 고은서는 갑자기 배 속의 아이가 생각났다.‘아이는 어떻게 되었지?’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물으려고 했는데 링거 주삿바늘을 건드린 탓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곽승재도 그녀가 깨났을 감지하고 병실로 들어왔다.“어디 가려고
한기뿐만이 아니라 억울함, 분노... 그리고 좌절감이 느껴졌다.곽승재가 말하는 새 남자가 민시후일 가능성이 있었다.‘곽승재가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건 내 배 속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의미하겠지?’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고은서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몇 번이고 말했다시피 전에는 내가 어리석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지금은 그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것뿐이야.”“이게 네가 잘못을 바로잡는 방법이야?”곽승재는 고은서와 민시후가 함께 호텔로 들어가고 또 같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그녀 앞에 던졌다.사진 속 민시후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아주 다정해 보였다.전에 일부러 송민아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이 사진들이 곽승재 손에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은서는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것 또한 잠시뿐이었다.민시후가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곽승재가 두 사람 사이를 철저히 조사할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이혼한다고 해놓고 번복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의 턱을 잡고 한기가 서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그 짧은 시간도 못 견디겠단 말이야?”고은서는 전혀 꿀리지 않고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며 답했다.“난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너!”곽승재는 이를 갈았다.“그래서 대체 누구 아이야?”“이미 속에 답이 있으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더 강해졌다.“네 입으로 직접 말해.”턱이 아파온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직접 말한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일은 이미 일어났고 어떻게 해결할지 당신 용건이나 말해.”
고은서의 입가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그때는 확실히 안 샀어. 그런데 다음날 당신이 나를 두고 출장 갔을 때,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지연이에게서 피임약을 받아 먹었어. 72시간 안에 먹으면 피임 효과는 있겠지만 자주 먹으면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지고 몸에 해롭다며 적당히 먹으라는 충고까지 받았어. 나도 더 이상 피임약을 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 믿지 못하겠다면 지연이를 불러와서 확인해 봐.”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지는 않았지만 전에 피임약에 관해 찾아본 적은 있었다. 게다가 박지연도 자신을 위해 사실을 숨겨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곽승재는 구체적인 부분까지 흐트러짐 없이 일일이 다 말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자신의 추측을 의심했다. 전에 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을 일이 전혀 없었기에 직접 먹어보지 않고서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곽승재는 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나랑 아이를 가지는 건 무섭고 민시후랑 가지는 건 괜찮다는 얘기야?”고은서는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 무섭긴 하지. 그런데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별로 없었어. 또 이튿날 할머니가 부르셔서 본가로 갔다가 부랴부랴 M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약 챙겨 먹는 거 까먹었어. 게다가 피임약을 먹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서 설마설마하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곽승재는 고은서가 술에 취해 자신의 허리를 둘러안고 같이 자자고 애교 부리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그러나 고은서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게 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턱을 더 꽉 잡았다.“그래서 M국까지 와서 날 보살펴준 게 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거야?”“아파!”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썼다.곽승재는 아픔 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면서도 전혀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면 분노의 불길이 점점 더 타오르는 것 같았다.“고은서, 대체 왜 그런 거야?”고은서는 애
“마침 야간 당직 서고 있는데 네가 다친 채 병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만, 네가 계속 자고 있어서 다시 돌아가서 당직 서다가 왔어. 그런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박지연은 면봉을 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혈은 되었어. 조금만 기다려, 연고 가져다줄게.”박지연이 나간 후, 고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라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이내 박지연이 연고를 가지고 들어와 그녀의 입술에 발라줬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기 다쳐서 쓰러진 건데?”박지연이 캐물었다.“곽승재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차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어.”고은서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알려주었다.“민시후는 병원에 다녀갔어?”박지연이 답했다.“내가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이미 네가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후였어. 그래서인지 곽승재만 보았지 민시후는 보지 못했어...”민시후가 왔었는지는 나중에 전화를 걸어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 고은서가 가장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내 배 속에 아이는... 괜찮아?”곽승재의 태도로부터 간단히 추측해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박지연한테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괜찮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안 괜찮았으면 좋겠어?”박지연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되물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이 아이를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았었다.그런데 복통을 느낄 때마다 아이를 잃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그녀는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지금까진 별문제 없어. 출혈 현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강하게 잘 버텨내 줘서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로는 자극받지 않고 푹 쉬면 별일 없을 거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지연아, 이런 일을 겪고도 내 배 속에
백유미의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백유미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분명히 구급차를 부른 거로 기억하고 있는데, 설마 나처럼 이 병원에 온 건가?’박지연의 말은 그녀의 추측을 사실로 만들었다.“우리 병원이 클럽이랑 가까우니까 구급차도 자연스레 여기로 데려온 거겠지.”“지금 백유미 상황은 어때?”고은서가 물었다.“다른 층 병실에 있는데 등이 심하게 다친 것 같아. 근육도 상하고 척수도 상해서 아마 한참 동안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다녀야 할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대체 무슨 심보지? 왜 심하게 상하면서까지 대신 막아주려 했던 거지?’“듣기로는 주민기 씨가 데려왔다던데, 수속도 주민기 씨가 하고. 설마 같은 시간 때에 같이 상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전에 고은서는 클럽에서 있었던 일만 간단히 얘기해줬을 뿐 백유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연도 물어본 이상 그녀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백유미가 달려와서 너 대신 쇠방망이에 맞았다는 거지? 대체 왜 그랬대?”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곽승재를 대신해 맞았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왜 굳이 날 대신해 맞은 걸까? 내가 다치면 도리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니까. 아무리 곽승재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곽승재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빤히 알고 있을 텐데.”박지연은 말하면서 갑자기 무언갈 떠올렸다.“혹시 백유미가 널 넘어뜨리려고 일부러 너한테 덮친 건 아닐까?”박지연의 뜻을 깨달은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일부러 날 구하는 것처럼 하다가 날 유산시키려 했다는 거지?”“그래야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잖아. 설마 갑자기 선심을 써가면서 자신의 안부 따위 상관하지 않고 널 구했겠어?”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였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