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상여금은 없어요! 이건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 다시는 같은 실수하지 마세요.”황인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 비서실장 됐다고 아주 유세야.”조금 전 사과를 하던 여자가 투덜거렸다.“그러게 말이야.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경력도 우리보다 짧으면서! 주 비서님께서 일부러 승진시킨 게 아니었다면 제 차례도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다른 한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목소리 좀 낮춰. 주 비서님이랑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어.”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지난번에 프런트에 서류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마침 주 비서님을 마주쳐서 주 비서님이 임무를 줬대. 완성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승진했잖아.”두 여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어쩐지 그날 시원시원하게 이혼 서류에 사인한다 했어! 비서한테 시켜서 서류를 바꿔치기했구나.’고은서는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이 조심성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곽승재의 계략이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사무실에 있던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사모님,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그때 주민기가 걸어 나왔다.고은서는 평소처럼 주민기와 인사를 나누는 대신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곽승재의 사무실로 향했다.주민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에게 무슨 미움을 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프런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그는 고은서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자 확인차 나온 것이었다.사무실에서 곽승재는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그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치며 그의 주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똑똑.고은서가 노크하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섰다.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출현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는 듯이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 맞은편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작은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보며 곽승재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곽승재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고은서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날 자극해서 당신한테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키가 큰 곽승재는 서 있을 때 기세가 더 강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은서를 압도했다.곽승재는 몇 차례 분노에 찬 상태로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했다. 이틀 전 병실에서 더 도를 넘어선 그였다. 그녀의 허벅지는 여전히 은은하게 아려왔다.고은서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을 위해 더 이상 곽승재를 도발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무심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곽승재, 이혼은 꼭 해야겠어! 변호사를 매수했다고 해서 다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곽승재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시후가 해성에서 쫓겨나길 바란다면 어디 계속 해 봐.”“정말 너무 비열해!”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미래의 민시후는 곽승재와 비등하게 겨룰 수 있었지만 현재 민시후의 실력은 곽승재에 훨씬 못 미쳤다.민씨 가문의 주요 산업은 모두 북제에 있었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본거지가 아닌 타지에서 그 세력을 제대로 떨칠 수는 없었다. 곽승재가 정말 민시후를 물고 늘어지려고 한다면 민시후도 막아내기 벅찰 것이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와 상생하려는 것이지 그에게 폐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비열한 게 뭐 어때서?”분노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고 목소리도 담담했다.“고은서, 내 마지노선은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고은서는 정말 곽승재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네가 먼저 약속을 어겼잖아. 근데 왜 내가 네 마지노선을 침범한다고 해? 내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건데!”곽승재가 그녀를 조용히 돌아봤다.“퇴원하면 예원 별장으로 가. 그러면 민시후는 봐줄게.”마음속에 분노가 쌓인 고은서가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보며 답했다.“그래서 당신은 내가 애를 지우길
병실을 나온 박지연은 조용한 곳을 찾아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알렸다.육현석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형이 사랑을 강요하는 건가?’“지난번에 곽승재를 설득하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박지연이 물었다.박지연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육현석은 고개를 저었다.“잘 안됐어요. 웬만한 일은 그대로 말릴 텐데 이 일은 정말 힘들어요.”“그럼 오늘 일은 더 말리기 힘든 거 아니에요?”“맞아요.”육현석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형은 어려서부터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져서 성격이 포악하고 오만해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을 거라서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없네요.”“그럼 어떡해요? 은서는 안 그대로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곽승재가 계속 이대로 하면 정말 원수가 될 것 같아요.”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육현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일단 형한테 연락해 볼게요. 하지만 99.99%의 확률로 소용없을 거예요. 지연 씨랑 형수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박지연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그렇다면 괜히 연락할 거 없어요. 굳이 매를 벌 필요는 없죠.”육현석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위해서라면 한번 해보는 거죠 뭐.”“그럼 행운을 빌어요.”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육현석은 바로 곽승재에게 연락했다.“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말투는 까칠했다.“형, 형수님한테 아이를 지우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면서?”곽승재가 싸늘하게 답했다.“그래서? 뭐가 문제야?”“형수님이 미워할까 봐 무섭지 않아??”“지금은 사랑한대?”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형, 형수님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알아.”“아쉬워하지 않아!”곽승재는 차갑게 육현석의 말을 끊었다.“이건 은서가 치러야 하는 대가야!”잠시 멈칫한 육현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승재 형...”“다시 한번 고은서 편을 든다면 너도 같이 정리할 거야!”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
송민아는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걸어왔다.“송민아 씨가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대체 시후 오빠를 언제까지 해칠 생각이야? 지금 당신 때문에 ZY 그룹이 얼마나 큰 곤경에 처했는지 알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기에서 여유롭게 햇볕이나 쬐고 있냐고!”‘ZY 그룹 일로 온 거구나.’“민시후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어요.”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시후 오빠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랑 엮인 후로 시후 오빠한테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밀회한 일로 망신당한 것도 모자라 얼마나 힘겹게 그 일을 처리했는데 또 당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요!”고은서는 자신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송민아는 고은서가 자신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오해하면서 계속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지금 무슨 태도에요?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거예요? 대체 당신이 어디가 좋다고 시후 오빠가 계속 도와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당신은 시후 오빠 곁에 있을 자격도 없어!”고은서가 차근차근 설명했다.“송민아 씨, 이번 일은 확실히 저 때문에 발생한 일이 맞아요. 그런데 그룹을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피면 할 수 없는 법이에요. 민시후가 그룹을 계승 받은 이상 이런 일쯤은 잘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워요. 시후 오빠는 속여도 난 못 속여!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다면 배 속에 아이 없애고 시후 오빠 곁을 떠나요.”송민아가 배 속의 아이를 타깃으로 삶으려고 하자 고은서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별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병실로 돌아갈게요.”“어딜 가려는 거야! 전에도 이미 아이를 없애라고 경고했었는데 언제까지 끌 생각이에요? 내가 직접 손을 쓰기라도 바라는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의 눈빛이 순간 매
백유미는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버둥 치는 척하면서 입으로 계속 고은서를 자극했다.“네가 승재랑 자고 임신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아무튼 지키지 못하는데...”“독한 년!”고은서는 미친 듯이 백유미의 목을 졸랐다. 백유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했다.“네가 이 아이가 곽승재 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네가... 운이 나쁜 거지... 누가 너한테 미용실에서... 박지연이랑 그 얘기를 하라고 했어...”고은서는 그제야 그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옆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걸 떠올렸다.‘백유미도 그날 그 미용실에 있었단 말이야?’고은서는 백유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곽승재랑 곧 이혼할 건데 왜 날 가만두지 않는 건데!”“근원을 없애야지 않겠어? 하하하...”백유미는 숨이 차 하면서도 크게 웃어댔다.“미친년, 너도 죽어!”고은서는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있는 힘껏 백유미를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다. 그녀의 손톱이 백유미의 살을 파고들면서 피가 흘렀다. 백유미는 점차 눈동자가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은서 지금 뭐 하는 거야?”백유미가 곧 질식하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송민아가 황급히 달려왔다.이를 본 백유미는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면서 한쪽으로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은서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비웃는 듯했다.“아악! 죽어!”고은서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한 번 더 뺨을 내리치려고 할 때 곽승재가 다가오며 그녀를 막았다.“고은서, 얼른 손 놓아!”곽승재가 고은서의 손을 강제로 백유미의 목에서 떼어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유미는 숨을 고르면서도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세요.”곽승재는 옆에 있던 의사에게 말했다.“피!”바로 이때,
고은서는 곧 쓰러질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곽승재의 옷소매를 잡고 집요하게 그를 막았다.곽승재는 순간 멈칫했다.반면 백유미는 호수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휠체어는 이미 호수에 잠몰 되었다.“얼른 백유미 씨를 좀 구해주세요! 곧 죽는 다고요!”옆에 있던 간병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의사와 간호사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들 간병인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신고하면서 백유미를 호수에서 꺼낼 나무 막대기를 찾았다.“승재야...”백유미가 곽승재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으려고 했다.이를 곽승재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고은서의 손을 뿌리치고 호수로 뛰어들었다.백유미를 향해 헤엄치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환자분!”간호사의 부름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그대로 쓰러졌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박지연이 마침 옆에서 물을 따르고 있었다.“지연아.”그녀는 쉰 목소리로 박지연을 불렀다.“은서야, 깼어? 괜찮아? 불편한 곳은 없어?”박지연은 황급히 물잔을 내려놓고 고은서한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았다.박지연 또한 고은서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은서야, 우린 아직 젊잖아. 기회도 이번뿐만이 아닐 거야...”고은서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았다.사실 그녀도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 희망을 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기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내 지키지 못한 탓에 아이가 사라졌어.’“은서야, 이러지 마... 우선 네 몸 건강이 첫째야.”박지연은 마음이 아파 오면서 고은서와 같이 눈물이 흐를 뻔했다.똑똑.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걸어들어오는
고은서는 수술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백유미는 지금 어디 있어?”“곽승재 덕분에 살긴 했는데 폐에 물이 너무 들어간 탓에 응급실에 들어갔어. 아직 깨어나진 않았고.”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하며 엄숙하게 말했다.“고은서, 네가 백유미를 증오하는 건 알겠는데 다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돼. 백유미가 진짜 죽기라도 하면 너도 끝이야. 백유미 같은 인간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잖아.”“그런데 내 아이를 죽였잖아!”고은서는 백유미가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알겠어, 알겠어. 우선 진정해.”박지연은 흥분해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고은서를 달랬다.고은서가 진정이 된 후 박지연은 그녀를 병상에 다시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물이라도 마시면서 분노를 가라앉혀봐.”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박지연은 물잔을 고은서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달랬다.“조금이라도 마셔. 그러면 위도 덜 아플 거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몸도 따라 따뜻해지는 듯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해서 병상에 눕히면서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우선 몸부터 챙겨. 그리고 흥분해 하지 말고. 모든 게 다 백유미 짓이라면 꼭 널 망가뜨리는 게 목표일 거야.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널 망가뜨리려 할 거야. 넌 절대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 알겠어?”고은서는 북받쳐 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백유미가 더는 연기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고은서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건 바로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의 멘탈을 뒤흔들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다.‘그런데 무슨 이유로 곽승재를 타이밍에 맞춰서 불러온 거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목적이었던 거야. 악독한 년!’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밥을 부탁한 뒤 민시후에게 연락했다.민시후는 그녀가 변호사 일 때문에 그러는
곽승재 어머니, 서연정 여사였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영상통화로만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그러나 서연정과 곽현수는 정식으로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 이혼한 사이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전미자 생일에도 해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아서는 아마 결혼생활에 대해 이미 마음을 접은 게 분명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고 그녀에게 이혼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었다.잠시 후, 서연정이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부터 했다.“어머니, 저 고은서입니다.”서연정은 약간 의아했다.“안녕하세요. 저한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죠?”“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습니다.”고은서의 허약한 목소리로부터 간절함이 느껴졌다.“저 곽승재와 이혼하고 싶습니다.”서연정은 또 한 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나요? 정서가 약간 불안정한 것 같은데.”서연정이 온화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교양이 있는 지적인 여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방금전까지 애써 정서를 억누르고 있던 고은서는 자신을 관심해주는 서연정의 말을 듣자마자 약간 울컥했다.“저...”서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다.“사정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전에 곽승재가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서류에 사인해준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사인해주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이젠 저를 협박하면서까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는 건 사실인데 저랑 곽승재 사이에 오해만 존재할 뿐 이혼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게다가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이런 일로 할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서연정은 그녀의 말을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 테니까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말을 마친 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은서야, 잠시만 기다려 봐.”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부모님이 민아를 보러 곧 해성에 올 것 같아. 민아가 부모님께 네가 평소에 많이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어. 혹시 그때 시간이 되면 오지 않을래?”고은서는 송민아의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라는 말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북성에서 지냈었고 송민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어머니와 송민아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작은 정보라도 얻을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민아를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거지.”송민준은 부모님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이 되면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민아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 연락했어?”“은서야,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안 자는 줄 알고 전화했어.”곽승재는 고은서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에 그녀는 자주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서 일찍 누웠어.”그녀의 목소리가 곽승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고은서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곽승재는 지난번에 호텔에서 고은서와 같이 중독된 날을 떠올렸다.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고은서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도 고은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곽승재를
송민준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감정은 원래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야. 나도 언제부터 너한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랑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지. 정확히 그날부터 좋아했다는 건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는 나한테 있어서 그저 친구의 오빠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빠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오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송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은서야,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송민준이 갑자기 호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은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가 정색하면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 해성과 북성에서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남자로 보이지 않더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송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곽 대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민시후 때문인가?”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내 생각이니까 이해해 줘.”송민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내가 갑자기 호감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지? 네가 나를 그저 민아의 오빠로만 보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남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 말해봤자 의미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그가 말을 이었다.“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너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야. 만약 내가 부담스럽게 굴었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예전처럼 계속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고은서는 송민준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송민준은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화내거나 욕하지 않고 이 상황
곽승재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송 대표님은 온화하지만 늘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고은서한테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그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송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곽 대표님 말대로 은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송민준을 쳐다보았다.송민준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송민아와 박지연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송민준이 명확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잘해줄 때마다 동생의 친구여서 챙겨주는 줄 알았다.오늘 송민준이 갑자기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말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민준 오빠,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나처럼 한번 갔다 온 여자가 어떻게 송씨 가문의 며느리를 꿈꾸겠어요?”고은서가 자신을 비꼬자 송민준이 다정하게 말했다.“은서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곽 대표님과 민시후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낄 자리가 없어.”“낄 자리가 없으면 마음을 접어야죠.”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그리고 고은서는 송 대표님 같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송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곽 대표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곽 대표님이라고 해서 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곽승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은서는 두 사람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곽승재를 향해 말했다.“바쁘니까 먼저 가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곽승재는 떠나기 싫었지만 이곳에 남아있어도 할 수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들어보니 확실히 여시은답지 않은 것 같아. 여재훈이 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건 아닐까?”여재훈은 여시은의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곽승재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오늘 마재경을 너무 쉽게 설득해서 그런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그의 말에 고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러면 여시은이 지시한 게 아니라 마재경이 우리를 속이려고 그랬다는 거야? 마재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고은서가 불안해하자 곽승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추측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지만 나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생각이야. 해외 아이디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줄게.”곽승재와 고은서가 같이 걷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였다.곽현수는 Y 국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씨 가문의 개업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귀국했거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서 곽승재의 책임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고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곽승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 편에서 곽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기사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먼저 가 봐.”곽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까 봐 그래.”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고은서를 혼자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