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거든!”고은혜는 부끄러운 듯 유성준을 슬쩍 바라보더니 곧바로 고은서에게 대꾸하였다.“너나 잘해.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속 혼자 지낼 거야?”고은서가 대답도 하기 전에 단은숙이 먼저 대답했다.“은성아, 은혜 말이 맞아. 너 그렇게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잖아. 네가 네 일은 알아서 하겠다지만 그래도 짝은 있어야지! 곽승재는 다시 만날 생각 없다면서? 그럼 민시후는? 들으니까 다시 해성으로 돌아왔다던데?”고은서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했다.“숙모, 제발 그만요! 아직 연애 생각 없어요. 진짜 생기면 제일 먼저 말씀드릴게요!”그 모습을 보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단은숙도 결국 설득을 포기하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너 엄마처럼 고집만 안 부리면 돼.”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여재훈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로 물었다.“삼촌, 숙모, 혹시 아빠가 엄마를 버린 거라고 생각하세요?”고국성은 남자라 그런지 그런 생각까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단은숙은 이렇게 말했다.“그런 것 같지 않아. 네 엄마는 보기에는 순해 보여도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정말 원망했다면 무슨 방법을 쓰든 되돌려 줬을 거야. 아마 다른 사정이 있었겠지.”그 말을 듣고 고은서는 조금 놀랐다. 숙모가 엄마를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럼 제가 친아빠를 찾게 된다면 두 분은 원망하지 않으실 건가요?” 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 정말 그 사람이 네 엄마를 힘들게 했다면 난 절대 용서 못 해!”고국성은 목소리를 높였다. 고은서가 물었다.“만약 그 사람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삼촌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면요?”술기운이 올라온 건지 평소에 실리적이던 고국성이 뜻밖으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네 엄마를 괴롭혔다면 용서 못 해!”그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고은서의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엄마에게는 지켜 주는 가족이 있다
고은서는 문 쪽을 바라봤다. 고은혜와 유성준이 들어왔다. 고은혜는 문을 열었고 유성준은 과일과 선물 상자를 잔뜩 손에 들고 있었다.“은서야, 왔어!”고은혜의 얼굴은 발그레했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응, 방금 도착했어.”고은서는 대답하며 유성준에게 인사를 했다.“오빠.”유성준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은서 왔구나.”“테이블에 놔요. 내가 과일 씻어 올게요.”고은혜는 그렇게 말하고 과일 씻으러 부엌으로 향했다. 유성준은 고국성에게 인사를 건네고그와 나란히 앉았다.고국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준성에게 MQ 신제품 출시와 매장 판매 상황에 대해 물었다.유준성은 차분하게 잘 대답했다.고은서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예전처럼 고국성과 유성준 사이에 상하 관계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고국성은 유성준에게 훨씬 더 다정했고 마치 집안 아이에게 말하듯 푸근한 느낌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값비싼 선물들, 그리고 아까 고은혜와 유성준이 함께 들어올 때의 다정한 분위기를 떠올리자, 고은성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유성준과 고은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고국성과 단은숙의 허락도 받은 것 같았다.오늘 단은숙이 자신을 부른 이유도 어쩌면 이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는 아주 푸짐하게 차려졌고 고국성은 술까지 꺼내 유성준과 한잔하자고 했다. 유성준은 흔쾌히 대답했고 고은혜도 반 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은서도 같이 한잔해!”고국성은 말리지 않고 고은서와 고은혜에게 반 잔씩 따라 주었다.고은혜는 잔을 들며 다 같이 마시자고 말했다.고은서는 살짝 한 모금 마시고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은혜야, 너 오늘 기분 엄청 좋은데 혹시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있어?”그러면서 일부러 유성준을 힐끔 보았다.고은혜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헛소리하지 마. 나 원래 매일 기분 좋아!”유성준은 다정하게 고은혜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야, 사실 말인데, 은혜가 나랑 정식으로 만나기로 했어. 아저씨랑
“아니... 아니에요...” 곽승연은 거짓말하는 걸 싫어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대답했다. “오빠한테 메시지 보냈는데, 오빠가 메시지로 말했어요.”고은서는 곽승연의 당황함을 금방 알아챘다.지난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누군가가 뒤에서 안아주었는데 틀림없이 곽승재라고 생각했다. 그저 너무 졸려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곽승연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곽승연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고은서는 비로소 곽승재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C선생 사건을 돕기로 한 이후부터 곽승재는 항상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곽승재는 몹시 걱정했었다.고은서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큰 화재를 겪고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도 곽승재는 그녀의 상태를 묻지 않았고 불쌍한 척도 하지 않았다. 고은서는 그저 바쁜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면, 왜 그는 시간을 내어 본가에 돌아왔고 곽승연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오빠 몸 상태는 어때?” 고은서가 물었다. 곽승연은 무심코 대답했다. “전과 비슷한데, 모자를 써서 좀 이상해 보...”말을 끝내자 그녀는 입을 막았다. 곽승재가 안 왔다고 했는데 바로 들통났다. 그야말로 현장에서 딱 걸린 꼴이다.고은서는 곽승연이 거짓말한 걸 탓하지 않았다. 곽승재가 본가에 돌아왔다는 건, 몸에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본가에서 전미자, 곽승연과 함께 아침을 먹고 고은서는 인사를 건넸다.곽승연은 아쉬웠지만 고은서의 일이 방해될까 봐 아쉬운 마음을 담아 작별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오전에는 회사에서 바쁘게 지냈고 오후에는 단은숙의 전화를 받았다.최근 MQ는 신제품 향수로 유명세를 타면서 판매량도 늘었다. 고국성과 단은숙은 매우 기뻐하며 고은서에게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졌고 종종 전화해 집에 밥 먹으러 오라 했다.평소에는 바쁘다고 거절했지만 오늘은 단은숙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고은서가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승연아?”옆에 있던 사람이 순간 멈칫하자 얼굴의 간질거림도 사라졌다.고은서는 손을 뻗어 곽승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덩치가 커?”곽승연이 움직이지 않자 고은서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한 야간등 아래, 곽승재는 품 안에서 잠든 고은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방 밖에는 퍼 재킷을 입은 곽승연이 따뜻한 물 한 컵을 들고 있었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오빠, 언니 얼굴만 보고 나온다더니 왜 문을 잠그고 한참을 안 나와? 물 식을 때까지 엄청 오래 기다렸어.”곽승연은 고은서가 잠든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곽승재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녀가 연못에 빠진 것을 알렸다. 뜻밖에도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해외에 있다고 했던 곽승재가 곧 도착한다고 하며 곽승연한테 기다리라고 했다. 정말 한 시간도 안 되어 집에 도착했다.곽승재는 목이 아프다며 따뜻한 물을 부탁했고 곽승연이 물을 가지고 올라왔을 때 그는 방문을 잠갔다. 그는 고은서가 깰까 봐 노크하지 말라며 메시지를 보냈다.곽승연의 불만 섞인 말에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했다.“언니가 악몽을 꿨어. 혹시 널 놀라게 할까 봐 내가 잠깐 곁에 있었어.”“정말이야?”곽승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오빠,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곽승재는 곽승연이 가져온 물을 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언니가 물에 빠졌으니 놀랐을 거야. 그래서 무서웠을 거야.”곽승연은 고은서가 물에 빠진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편이 떨렸다. 그리고 곽승재의 말을 믿었다.자신도 아직도 무서운데 고은서가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오빠,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언니를 연못에 빠지게 했어.”곽승연은 미안함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곽승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번에는 괜찮았지만, 다음부터 더 조심해. 자신과 언니를 꼭
“오빠가 아주 복잡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서 많이 바빠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전미자는 일부러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은서야, 네가 승재의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평소에 내가 승재 얘기하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고은서는 전미자의 뜻을 알았다. 자신과 곽승재가 다시 화해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놀리지 마세요. 저번에 집에 왔을 때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저랑 오빠는 협력하는 사이고, 오빠가 저 맞은편에 이사 왔어요. 그래서 당연히 오빠 상황을 알죠!”전미자는 고은서의 애교에 무너져 웃었다.“그래, 그래. 놀리지 않을게. 너희 젊은이 일에 참견 안 할게!”그때 곽승연은 들어와 고은서를 붙잡았다.“언니, 우리 놀러 가요!”마침 전미자가 예불하러 가려던 참이라 고은서는 곽승연과 함께 뒤뜰로 나갔다.뒤뜰 풍경은 아름다웠고 고은서는 곽승연과 그녀의 강아지를 데리고 뛰어놀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강아지는 갑자기 멈추지 못하고 수련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곽승연이 급히 물속으로 뛰어 들려고 하자 고은서가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관성에 휩쓸려 고은서는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언니!” 곽승연이 급히 도우미들을 불렀다.“빨리 와!”연못은 깊지 않았지만 바닥이 진흙이라 고은서가 바닥을 딛고 일어나려 하자 빠졌다.다행히 도우미들이 곧 달려와 고은서를 연못 밖으로 끌어내고 강아지도 건졌다.아직 날씨가 쌀쌀해 그녀는 다소 처진 모습으로 나왔다.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해 집으로 데려가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고은서는 예전에 곽승재와 함께 본가에서 묵은 적이 있어 옷이 몇 벌 남아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전미자는 이미 의사를 불러 고은서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고은서는 거절할 수 없었고 의사의 검진을 받았다. 의사가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자 전미자는 시름을 놓았다.“은서야, 돌아다니지 말고 오늘 밤에는 여기서 쉬어. 아
송민아가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주인혁도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의 응원에 주인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민아 씨는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요.”주인혁은 창밖을 바라보며 현재 자신의 직업 특성상 연애할 시간도 없고 자주 함께 있지 못하기에 그녀를 붙잡아 두는 건 이기적인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비록 덕질한 적은 없지만, 온라인에서 극성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결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사생활을 침해하는 사례를 본 적이 있었다.송민아는 연예계 사람이 아니기에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관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은서는 송민아가 연애하면서도 남몰래 숨어 다녀야 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어 그녀는 더 이상 주인혁을 설득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송민아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알아서 해요. 나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무조건 민아 편이에요. 만약 민아에게 안정적인 삶을 줄 수 없다면 시작할 필요도 없죠.”고은서가 말했다. 주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다음 날, 고은서는 유일 투자은행에서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해 질 무렵, 곽승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언니, 언제 본가에 올 거예요?”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저녁 먹으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운전기사가 그녀를 데려다 주었고 입구 앞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곽승연이 보였다. 고은서를 본 곽승연은 반갑게 맞이했다.“언니, 드디어 왔네요! 아줌마가 맛있는 거 엄청 많이 했어요! 어서 들어가요. 할머니께서도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고은서는 웃으며 곽승연의 손을 잡았다. “그래.”거실로 들어서니 정말로 저녁 만찬이 정성껏 차려져 있었고 전미자가 그녀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은서 왔구나. 승연이가 하루 종일 네 얘기만 했어.”고은서는 잠깐 쉬고 저녁을 함께했다. 식사하는 동안 고은서는 전미자의 곁에 앉아 회사 일이나 일상 중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