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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3화

Author: 류한나
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현석을 바라보았다.

육현석은 그녀가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어. 막 이혼해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건 알아. 그래서 내 감정을 마음 깊숙이 숨긴다고 숨겼어. 네가 내 고백에 놀라 멀어질까 봐 두려웠거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

육현석은 단호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연아, 좋아해.”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육현석에게 직접 들으니 박지연은 여전히 놀라웠다.

조건 좋은 육현석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명문가의 아가씨들도 많았다.

‘조건 좋은 아가씨들은 뒤로하고 나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오래전부터?’

“조건이 좋으니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말로 나를 거절하지는 마. 나도 많은 여자를 만나봤고 새로운 사람에게 끌린 적도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야. 나는 낙관적이고 자신감 있는 네 모습, 밝고 활기찬 네 모습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좋아. 당연히 너의 그 착한 마음도 좋아.”

육현석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왜 그 사람들이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가끔 너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이 네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

박지연은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계속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날 좋아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 보며 마음 아파하며까지 아껴줄 줄은 몰랐네. 육현석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호감을 품었어.’

“육현석, 우리...”

“지연아, 나 거절하지 말아줘. 나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육현석은 부드럽게 박지연이 하려던 말을 제지했다.

“네가 사업적으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 남자가 너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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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144화

    “괜히 산 게 아니야.”송민아는 송민준에게 다가가 버블티 한 잔을 받아 들고는 아양을 떨며 말했다.“나는 그냥 객관적으로 분석했을 뿐이야.”“오빠가 정말 고은서를 좋아한다면 잘해봐. 어차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애라 내 말에 휘둘리지 않아. 아, 맞다. 중요한 전화를 받아야 해서.”송민아는 이마를 탁 치더니 잽싸게 도망쳐버렸다.고은서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방금까지 송민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터라 두 사람만 남으니 살짝 어색했다.그녀가 차분하게 물었다.“들어와 좀 앉을래?”송민준은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하게 걸어들어와 남은 버블티를 건넸다.“민아한테서 너희 둘 다 이런 과일차를 좋아한다고 들었어. 마침 지나가다 보이길래 사 왔어.”고은서는 버블티를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그녀는 송민준에게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민아를 찾아온 거야? 아니면 나랑 볼 일이 있는 거야?”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닌 송민준이 일부러 버블티를 전하러 온 것은 아닐 테니까.송민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원래는 민시후의 수술 소식을 알리려고 왔는데, 이미 민아한테서 들었겠네.”고은서는 여전히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아가 어젯밤에 알려줘서 민시후에게 전화도 했어. 지금쯤 수술이 시작됐어?”전화한 지 몇 시간 지났으니 수술이 시작됐을 것이다.송민준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아직. 이틀 뒤로 미뤄졌어.”고은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미뤄졌지?”“갑자기 두통이 심해져서 수술을 진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나 봐.”“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순간 고은서는 신경이 곤두섰다.“구체적인 원인은 모르겠어. 민 시장님이 바쁘셔서 자세히 묻지 못했어.”“너무 걱정하지는 마. 외국 병원으로 옮긴 후 다른 외상은 거의 회복됐다고 들었어. 다만 잦은 두통과 현기증 때문에 대부분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하나 봐.”“이번 두통은 의료진이 예상했던 거래.”고은서는 이게 다 위로의 말이라는 걸 알았다. 민시후의 상태는 그녀가 상상했던

  • 어게인, 비긴   제1143화

    통화를 끝낸 후, 고은서는 침대에 쓰러졌다.민시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민시후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축복이다. 그녀는 이 평온을 깨지 말아야 했다.잠을 설친 탓인지, 이튿날 출근한 고은서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송민아가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됐어? 민시후에게 전화했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왜 이렇게 우울해 보여? 민시후가 걱정돼?”고은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민시후의 수술이 끝나면 그 결과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송민아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민씨 가문에서 줄곧 고은서를 경계하고 있으니, 또 누군가가 경고했을 것이다.“고은서, 민시후가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할 거야?”“민시아 말로는, 의사 선생님께서 수술이 잘돼도 최근 2년간의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대. 설령 기억을 되찾는다 해도 민시후는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리고 요즘 괜찮은 여성이 민시후를 보살피고 있고,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양가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할 거라고 했어.”“애초에 우리는 친구 사이일 뿐이니 민시후가 나를 떠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야.”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을 듣고 오히려 자책했다.“예전에 민시후가 나를 피해 다닐 때, 너무 화나서 ‘연애길이 확 막히고 좋아하는 사람과 안 됐으면 좋겠다’고 저주한 적이 있어.”“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고은서, 나 너무 악독한 거 아니니?”자책하는 송민아를 보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정도 능력이면, 회사 다니지 말고 점집을 차려도 되겠어.”그래도 송민아는 속상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풀이하는 건 옳지 않았다.송민아가 곁에 앉자, 고은서는 그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반성도 잘하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네가 어떻게 악독한 사람이야?”“송민아,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를 놓친 민시후가 오히려 손해지.”고은서의 칭찬에 송민아는 살짝 어색해하며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민시후가

  • 어게인, 비긴   제1142화

    “민시후, 너 지금 몸 상태는...”“알고 싶으면 영상통화를 걸어 직접 볼래?”고은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민시후가 단칼에 잘라버렸다.“...”고은서는 잠시 민시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은 건지?“시후야, 이른 시간에 누구랑 통화 중이야?”침묵이 흐르는 동안, 전화기 너머로 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시후, 나라고 말하지 마.”고은서가 급히 귀띔했다.민시후는 민시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물었다.“왜?”고은서가 설명했다.“네가 나 때문에 다쳤잖아. 가족분들이 줄곧 나를 원망하고 있는데, 내가 연락한 걸 알면 더 노여워하실 거야.”민시후는 이 말을 듣더니 민시아에게 말했다.“고은서야, 누나. 자기 이름을 밝히지 말라네.”고은서는 어이없었다.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면, 민시후는 정말 그 누구라도 감싸주는 일이 없었다.곧이어 휴대폰이 민시아의 손에 넘어갔고 한참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병실에서 나온 민시아가 입을 열었다.“은서 씨?”고은서는 즉시 사과했다.“죄송해요.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민시후가 곧 수술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 상태가 어떤지 묻고 격려하려고요.”민시아는 의외로 비아냥거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시후는 지금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수술 난이도가 높긴 하지만 성공 확신이 있다고 하셨어요.”민시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다만 ‘난이도가 높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이번 수술은 반드시 순조롭게 진행될 거예요.”민시아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민시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어찌 됐든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시후에게 연락하지도, 시후 앞에 나타나지도 말아주세요.”“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뇌에 남은 혈종을 제거하더라도 최근 2년간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대요. 그러니까 정말 시후를 위한다면 더 이상 연락하지 마세요.”고은서는 수술만 잘된

  • 어게인, 비긴   제1141화

    송민아의 전화였다. 그녀는 민시후의 수술 방안이 확정됐고, 내일 진행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나도 시후 오빠 소식을 오랜만에 들었어. 방금 부모님이 언급하셔서 알게 됐어.”“민시후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 집안에서도 네가 연락하는 걸 허락하지 않지만 그래도 너한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민시후의 수술에 관해서는 그때 절에서 송민준에게 들은 바 있다.그때는 대략적인 방안이 나왔지만 최종 확정은 아니고 수술 일정도 미정이라고 했다.이제 민시후가 수술을 앞두고 있다.“부모님께서 수술 성공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씀해 주셨어?”고은서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송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부모님도 잘 모르던데, 별일 없을 거야. 아저씨가 시후 오빠를 위해 최고의 병원, 최고의 의료팀을 준비했대.”고은서가 걱정할까 봐 건네는 위로의 말이었다. 간단한 수술이라면, 수술 방안을 잡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국내 의사가 어려운 수술이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민시후 씨의 지금 연락처를 구할 수 있을까?”민시후를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가 수술을 앞둔 지금 몇 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친구로서의 응원과 격려라도 좋았다.송민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네가 달라고 할 줄 알고 아빠 휴대폰으로 아저씨한테 연락해서 캐냈어. 특별히 너를 위해 알아낸 거야. 바로 보내줄게.”고은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민아야, 고맙다.”모든 사람이 그녀가 민시후에게 연락하는 걸 원치 않는데, 송민아는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잠시 후, 송민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고은서는 그 숫자들을 보면서 약간 두렵고 망설여졌다.민시후가 외국 병원으로 떠나기 전,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그의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겠다고 결심한 그녀였다.이제 와서 전화하면 폐를 끼치지 않을까?한참 망설이던 고은서는 결국 번호를 저장했다.라이트문 아파트에 돌아온 그녀는 민시후의

  • 어게인, 비긴   제1140화

    고은서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어느 정도 마무리는 됐지만, 또 다른 귀찮은 일이 생겼어요.”고은서는 자신이 하마터면 사고를 당할 뻔했던 이야기를 서연정에게 간단히 털어놓았다.다만, 여재훈이 자신을 위해 다쳤다는 등 민감한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서연정은 곽승연을 돌보느라 바쁘기도 하고, 본인의 일도 있는데 괜히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 마재경 씨라는 분, 예전에 승재랑 스캔들 났던 그 사람 맞지?”서연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생각해 보면, 이 일도 어쩌면 승재가 일을 크게 만든 셈이네.”마재경과 관련된 일은 사실 명확하게 누구의 잘못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일이었고, 고은서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다.곽승연이 주방에서 나온 걸 본 고은서는 마치 그제야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어머니, 승연이가 그러는데 며칠 전에 정월 광장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다던데요?”서연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연더러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말한 뒤, 고은서에게 자세히 설명했다.그날 참여한 건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위한 자선단체가 주최한 공익 행사였다고 했다.“승연이 말로는, 그날 손문호 씨도 오셨다던데요?”고은서가 조심스레 덧붙였다.“맞아요. 문호 씨는 그런 행사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쪽에서 연락을 받은 모양이에요.”‘그날 손문호가 진짜 단순히 행사만 참여하러 간 걸까?’고은서가 의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나타난 장소가 두 번이나 공교롭게 겹친 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이 문제는 서연정에게 더 묻기 어려운 사안이라, 나중에 곽승재와 따로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의 호기심은 그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어머니, 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고은서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손문호 씨에게 감정이 있으신가요?”손문호는 서연정에게 오랜 세월 마음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서연정이 Y국에 있을 때 손문호도 그곳에 있었고

  • 어게인, 비긴   제1139화

    곽승연이 찍은 건 한창 만개한 꽃다발이였고, 손문호는 마침 그 꽃 근처에 서 있었다. 인물은 또렷하게 나오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손문호는 서연정과 거의 가족처럼 지내는 친구였기에, 곽승연이 손문호와 함께 있는 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승연아, 이 삼촌이 너 데리고 놀러 간 거야?”고은서는 무심한 듯 말을 꺼냈다.곽승연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무언가 기억이 난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날은 엄마가 나 데리고 어떤 행사에 갔었어. 삼촌은 거기서 우연히 만난 거야.”“근데 난 삼촌 찍은 건 아니고, 꽃이 예뻐서 찍은 거야.”곽승연은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언니, 행사장 광장에 있던 로고가 너무 예쁘게 만들어져서 내가 사진 찍어뒀어. 봐봐!”고은서는 사진을 힐끔 내려다봤다. 곽승연의 말처럼 그 로고는 정말 독특했다. 문자나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마치 맨눈으로 보는 3D처럼 느껴졌다.칭찬하려던 찰나, 광장의 이름을 본 고은서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마재경이 언급한 그 ‘접선 장소’가 바로 이 광장이었다.백승엽이 고은서와 민시후를 해치기 전, 곽현수를 만나러 경마장에 갔던 날, 손문호도 그곳에 있었다.그리고 이번에, 마재경이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던 중간인을 만난 장소에도 손문호가 있었다.‘단순한 우연일까?’“언니, 왜 그래? 이거 별로야?”곽승연이 조심스레 물었다.고은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곽승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니, 정말 예뻐. 승연아, 이 사진 언니한테도 보내줄 수 있어?”“그럼! 당연하지!”곽승연은 흥분해서는 바로 사진을 고은서에게 전송해 주었고, 고은서는 그걸 저장해 두었다.얼마 후, 차가 호원 저택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서는 서연정이 미리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곽승연은 활짝 웃으며 서연정에게 달려갔고, 고은서도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인사했다.“어머니, 안녕하세요.”서연정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고생 많았어. 승연이랑

  • 어게인, 비긴   제1138화

    이번 일은 여시은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은 배후에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이전에는 그저 그녀가 누군가와 협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이제는 거의 확실해졌다.“혹시 C선생일까?”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단정 짓긴 어려워. 내가 이미 사람을 시켜 송민준의 요 며칠 동안의 일정을 조사하게 했어. 그중에서도 여시은과 연락이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하고 있고.”고은서는 곽승재의 업무 처리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고 느꼈다.“C선생이 남자가 아닐 수도 있잖아?”고은서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네 말은 C선생이 여시은이라는 거야?”곽승재가 되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피해 가는 일을 한 적이 없었고, 그저 여시은만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근데 여시은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 큰일을 벌이면서까지 나를 공격하려는 걸까?”고은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백유미가 날 못마땅해하는 건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근데 여시은은? 물론 너한테 호감은 있는 것 같지만, 너 아니면 안 된다는 태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곽승재 역시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곽승재는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C선생이 여성이었다면, 백유미가 진작 눈치챘을 거야. 남녀는 말투나 행동 방식 같은 것들에서 차이가 있거든.”곽승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백유미 정도의 눈치라면,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 일은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은서는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많이 풀리는 것 같았다.한 시간쯤 지나, 곽승재는 술을 마신 것 때문인지 아니면 피곤해서인지 눈가가 살짝 붉어졌고 검은 눈동자에도 열기가 감돌았다.비록 고은서와 곽승재가 서

  • 어게인, 비긴   제1137화

    여시은은 개업 리셉션 건으로 인해 여재훈이 그녀에게 크게 실망하고 그녀의 인품을 의심하게 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여시은은 여재훈 앞에서 일부러 해코지당한 척 ‘연극’을 벌였다.처음엔 모든 사람들더러 그녀를 비난하게 했다. 그녀는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고,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사람들의 의심과 손가락질을 감내했다.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을 때,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결백을 증명해 냈다. 이게 바로 여시은이 생각해 낸 완벽하게 계산된 ‘절박함’이였다.모두가 여시은은 더 이상 구제 불능이라 여길 때, 진실이 드러났다.이번 사건은 여시은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그녀 또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재훈만큼은 그녀를 안쓰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그리고 여재훈이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게 된다면, 여시은은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들까지 완벽히 ‘세탁’할 수 있다.이른바, 벼랑 끝 전술로 다시 살아난 셈이다. 여시은의 계산은 정말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여재훈은 이제 여시은을 다시 신뢰하게 될지도 모르고, 오히려 그가 여시은을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며 죄책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밤이 되자, 곽승재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그는 여시은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고, 자연스레 고은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바비큐집에 갔다.“이런 거 못 먹잖아,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야?”고은서가 의아해서 물었다.곽승재가 말했다.“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고기로 해결 못 할 일은 없다고. 한 번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두 번 먹으면 된다고.”고은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곽승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한 번 내가 아파서 서재에 누워 꼼짝하지 않고 있었는데, 넌 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당한 줄 알고 바비큐 사주겠다고 했잖아. 그땐 네가 날 그렇게 위로하려 했어.”고은

  • 어게인, 비긴   제1136화

    경찰은 해외 계좌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다. 그 계좌는 외국에 있는 한 화교 명의로 되어 있었고, 그 인물은 여시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그러니까, 이번 사건은 여시은과는 무관하고, 마재경이 일부러 그녀를 모함한 거라는 말인가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현재까지 확보된 증거로는 이 사건이 여시은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마재경 또한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녀 역시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가 아는 건 그저 지시를 전달한 중간자였을 뿐이었다.그 순간, 고은서는 그날 경찰서 앞에서 마주쳤던 여시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던 표정과 입가에 아른거리던 그 비웃음.그녀는 자신이 곧 풀려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때 여시은은 고은서에게 경고까지 했다.“너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이제 와 생각해 보니 여시은은 처음부터 모두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고은서는 확신했다. 이 일 역시 여시은의 손이 닿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은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여시은은 마재경이 그녀를 지목하게 내버려두었을까? 또 왜 며칠씩이나 경찰서에서 용의자 신세를 감내한 걸까?’경찰은 조사를 마친 후 고은서에게 결과를 통보했다. 그리고 여시은은 곧 규정에 따라 석방될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다만, 마재경과 중간자에게 지시를 내린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고은서는 묘한 허탈함을 느꼈다.그녀는 여시은의 약점을 잡았으니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여시은이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멘탈이 순식간에 무너졌다.그녀는 이 소식을 곽승재에게 전한 뒤, 조용히 경찰서를 나서려 했다.그러나 로비에서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그 사람은 바로 여재훈이었다.그는 비서와 변호사로 보이는 남성과 함께 경찰 쪽 사람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아마도 여시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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