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거미에게 물려 기절 직전인 온모를 바라보았다.“그만하면 됐으니까 돌아와.”그제야 독거미는 독니를 집어넣고 온모의 몸에서 떨어져 온사에게로 돌아갔다.“네 집으로 들어가. 여긴 이제 네가 필요없어.”온사는 손가락으로 거미를 한번 쓰다듬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독거미는 김사도가 가져온 독벌레 중 한마리였다.그것은 파군처럼 온사의 영수를 마신 후에 온사를 주인으로 인식했다.하얗게 질렸던 온모의 얼굴은 독 때문에 검게 변해갔다. 그녀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온사는 해독제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난 인내심이 많지 않아. 독살당하기 싫으면 당장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줘.”온모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면서도 온사에 대한 증오는 점점 깊어져갔다.그녀는 피식 웃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내가 계속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내 사람들이 네 어미의 시신을 훼손할 수도 있어. 음… 토막 낼지도 모르고.”온사는 손을 뻗어 온모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철창에 박아버렸다.쾅! 쾅!그렇게 몇번 반복하자 온모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온사는 온모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에야 그녀의 멱살을 잡고 고개를 쳐들게 했다.“온모, 나한테 그런 협박은 통하지 않아. 지금 말 안 해도 괜찮아. 내 독거미가 이길지 네 자존심이 이길지 두고 보자고!”“쿨럭! 닥쳐!”온모의 코에서는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이대로 굴복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내가 어떻게 온사 이년한테 굴복해? 어머니는 졌지만 난 절대 질 수 없어!’그녀는 죽더라도 온사를 짓밟고 죽겠다고 이를 갈았다.“하,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봐!”쾅!온사는 그대로 철창 문을 닫아버리고 2층으로 내려갔다.2층은 독약을 놓아둔 곳이었다.다음 날, 밤새 온모를 괴롭힌 온사의 안색도 별로 좋지 못했다.온모가 이렇게까지 이 악물고 버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거의 숨만 붙어 있을 정도까지 괴롭혔는데도 그녀의 입을 여는데는 실패했다.“내가 찾아야겠어! 어떻게든
‘안 돼! 어머니 시신도 찾아야 하는데!’온사는 어쩔 수 없이 막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란자군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얘기를 듣고 막수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급기야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사부님!”온사는 다급히 손을 뻗어 막수를 부축했다.그러고는 공간에서 알약을 꺼내 막수의 입에 넣어주었다.“일단 진정하세요, 사부님!”“내가 어떻게 진정을 하겠어!”막수는 눈물을 흘리며 분노와 고통을 호송했다.“어떻게 자군이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누군가 란자군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옥에나 떨어질 놈들! 절대 가만 안 둬!”온사는 다급히 막수를 달랬다.“걱정 마세요, 사부. 저도 절대 용서 못해요. 하지만 지금 최우선은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성으로 돌아가려고 해요.”그녀는 진국공부에 가서 온씨 가문 조상묘에 가볼 생각이었다.만약 진짜 누군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갔다면 온권승이 이 일을 알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아니다, 나랑 같이 가!”막수는 온사의 팔목을 붙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두 시진 후, 온사와 막수는 진국공부에 도착했다.“온사 아가씨 아니야?”“어? 정말 그러네!”“뭔 소리야? 저분은 이제 진국공부 아가씨도 아닌데 들여보내면 안 되지.”대문을 지키는 호위들은 온사와 막수를 보고 곧장 앞을 가로막았다.“들어가시면 안….”“성녀인 나를 봤으면 무릎부터 꿇지 않고 어딜 길을 막고 있어!”호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호위는 그제야 온사의 신분을 떠올리고 다급히 예를 갖추었다.“성녀 전하를 뵈옵니다….”온사는 그들을 지나쳐 막수와 함께 진국공부 안으로 들어갔다.“아니, 성녀 전하! 잠깐만요!”호위들이 앞을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안으로 들어간 막수는 분노한 목소리로 온권승의 이름을 불렀다.“온권승! 당장 나와!”“온권승!
온장온은 당황스러웠다.막수 사태를 오늘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보았던 막수 사태는 항상 정중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시정잡배와 비교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온장온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막수 사태, 아버지는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지금….”“몸이 안 좋아? 하도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벌받는 거겠지!”“막수 사태!”온장온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아버지께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여긴 진국공부입니다. 당신네들 수월관이 아니라고요!”“진국공부가 아니라 황궁이라도 난 오늘 무조건 온권승을 만나야겠어!”막수는 눈을 부릅뜨고 온장온을 노려보며 압박했다.“이래도 부르러 안 가? 네가 안 가면 내가 들어가서 찾겠다! 마침 난 이 저택이 익숙하거든!”막수의 서슬퍼런 눈빛에 기가 죽은 온장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들어가서 아버지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온장온이 안으로 들어간 후, 막수는 눈이 휘둥그레서 자신을 바라보는 온사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내가 이 진국공부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온사는 그제야 자신이 출가하겠다고 폐하를 찾아갔을 때, 덕자 태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막수가 진국공부를 찾아와 진국공에게 양심도 없는 짐승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이게 사부의 진짜 모습일까?’온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밖으로 나온 사람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서 금세 웃음이 사라졌다.“막수, 넌 왜 또 왔어?”온권승은 장남의 부축을 받으며 창백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섭정왕의 손에 수십 명의 그림자 호위를 잃은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온권승은 싸늘한 눈으로 온사와 막수를 번갈아보았다.“내가 왜 왔는지 정말 몰라?”온권승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요 며칠 난 줄곧 몸이 안 좋아 저택 밖을 나가지도 않았어. 너희가 왜 왔는지 그걸 내가 어찌 알아?”“모른다고?”막수는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어!”온권승은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옆에 있던 온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진국공 어르신께서는 사부의 말을 못 믿으신다면서도 정작 온모가 사생아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으시네요. 참으로 재밌네요.”그 말에 현장의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온권승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온장온은 착잡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진작에 아버지의 침묵으로 답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실임이 확인되자 괴롭기 그지없었다.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니!그들이 아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껴주던 분이었다.그동안 아버지는 첩실 하나 들이지 않으셨고 그들 남매들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다.그런데 오늘 와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그들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배신했고 그 사생아를 집으로 데려왔다.막내의 잘못은 아니지만 온장온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온사는 담담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적녀와 사생아는 역시 다른가 봅니다. 제가 진국공부에 있을 적에 사생아가 한 마디 하면 모든 잘못은 제가 뒤집어썼죠. 이렇게나 편애가 심하신데 과연 사생아가 사랑스러워서일까요? 아니면 사생아를 낳아준 옛 정인에 대한 애틋함일까요?”온사는 사생아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온장온은 더욱 더 마음이 착잡해졌다.‘아버지는 막내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온사를 싫어하게 된 걸까?’그렇다면 그들은 막내를 위해 온사에게 상처준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정작 온사야말로 그들의 친동생이었다.그런데 아버지는 그들의 어머니를 배신하고도 그들에게 막내를 아껴주라고 가르쳤다.“닥쳐!”온권승은 음침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며 호통쳤다.“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얼마나 부인을 아꼈는지는 온 경성 사람들이 알아. 어디서 아비인 날 모함하고 있어!”막수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어디서 거짓말이야! 내 말을 못 믿겠다며? 그럼 우리랑 같이 자군이 묘 앞에 가서 확인해 보면 알 것 아
결국 온사와 막수는 묘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온사는 떠나기 전, 고개를 돌려 온장온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큰 오라버니, 어머니는 우리 남매를 세상 누구보다 아껴주셨어요. 그러니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마세요.”온장온은 멍하니 서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멀어지는 온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온사는 이 집안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그래! 난 맏이잖아! 어머니의 장남!’만약 자신의 아이들이 지금처럼 서로 싸우고 의심하는 것을 어머니께서 본다면 얼마나 상심하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저 미친년 말은 신경 쓸 거 없다. 막내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온사가 산을 비웠으니 쟤를 따라가서 어디로 가는지 막내의 행방부터 알아와.”온권승은 장남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그럼 어머니는요? 한번 보러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온장온은 고개를 들고 온권승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온권승은 잠시 당황하더니 말했다.“내가 지금 다녀오마. 하지만 넌 막내의 행방부터 알아봐. 어서 가.”그는 그렇게 말하면 온장온이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온사를 뒤따라갈 줄 알았다.하지만 온장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장남인 그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정색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보러 가요. 지금 당장이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온권승은 순간 당황해서 눈살을 찌푸리며 장남을 바라봤다.하지만 이번에 온장온은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굳건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러세요, 아버지? 설마 저도 외부인이라고 하실 건 아니죠?”외부인, 얼마나 웃긴 표현인가.온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그런데 아버지란 사람이 온사를 외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그럴 리가. 너는 내 장남 아니냐.”온권승은 굳은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뒤돌아선 그의 눈빛에 음침한 살기가 스쳤다.“예. 제가 외부인이 아니라면 어머니
“어머니…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불효를 용서하십시오!”온장온은 파헤쳐진 흔적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그들 형제가 어머니를 위해 심어둔 난초도 무덤이 파헤쳐지며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분명 지난번에 어머니의 기일에 뵈러 왔을 때도 멀쩡했었다.고작 네 달이 지났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파헤쳐진 흔적을 봤을 때, 바로 최근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았다.그들이 다녀가고 얼마 안 돼서 도굴당했단 얘기였다.‘정말 범인이 막내라면 왜 이런 짓을 했지?’온장온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온권승을 바라보았다.그는 울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아버지, 막내는 그때 저에게 맞아서 보복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걸까요?”“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온권승은 힘겹게 말했다.“온모가 그런 애가 아닌 건 너도….”“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온장온은 울며 소리를 질렀다.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의 묘비를 끌어안고 통곡했다.“저는 온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막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버지가 저희에게 말씀해 준 게 전부잖아요? 아버지가 막내를 착하고 순수한 아이라고 해서 저희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세요. 이게 순수하고 착한 아이가 할 수 있는 짓입니까? 전에 말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건가요!”눈물범벅이 된 장남을 보며 온권승은 딸을 위해 변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온모가 온사를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아이가 이런 짓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어머니를 모셔오겠습니다.”온장온은 조심스레 비석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그러고는 아버지를 내버려둔 채, 묘지를 떠났다.그가 떠난 후, 온권승은 란자군의 묘비 앞으로 다가갔다.한참의 침묵 후에야 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미안하오. 그 아이가 자네한테까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소.”만약 알았더라면 온모를 말렸을 것이다.막수가 말했던 것처럼 온모가 어떤 아이인지는 진작에
옥패 공간으로 돌아온 온사는 철장 안에서 온모를 끌어냈다.“악! 이 미친년! 또 뭐 하자는 거야?”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한 후에 도망을 꾀하던 온모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온사의 모습에 당황했다.게다가 나갔다 돌아온 온사는 성난 사자 같았다.“죽어 버려!”온사는 호되게 온모의 귀뺨을 쳤다.“마지막 기회를 줄게. 어머니 시신이 어디 있는지 말해!”온모는 발버둥치면서 고개를 저었다.“꿈 깨!”그녀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악담을 퍼부었다.“지금 날 죽여도 절대 말 안 해!”온사 어머니의 시신은 그녀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그러니 절대 쉽게 온사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것은 온사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알려달라고 애원하는 거였다.“그래, 그럼 어젯밤 하던 거 계속해야겠네.”온사는 온모를 끌고 2층으로 가서 그녀를 연금대 위에 강제로 묶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독약을 온모의 입에 집어넣었다.“쿨럭! 또 나한테 뭘 먹인 거야!”어제의 고난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온모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네가 말 안 하고 버티면 내가 방법이 없을 줄 알았어?”연금대 앞에 선 온사는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온모를 노려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어떻게든 네 입을 열고 말 테니까.”잠시 후, 온모는 현기증을 느끼더니 점점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또 수면제인가? 아니야! 온사가 저렇게 자신 있어하는 걸 보면 수면제 같은 게 아닐 거야.’‘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지?’그 생각을 끝으로 온모는 의식을 잃었다.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네 이름이 뭐지?”“온모.”“넌 누구의 딸이야?”이미 의식을 잃은 온모는 허수아비처럼 온사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진국공과 백초유(白初柔)가 내 부모님이야.”비록 온모가 아버지의 사생아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온모가 제 입으로 사실을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경성에서는 백씨 성을 가진 가문을
“쿨럭… 처리하기도 전에 납치를 당해서… 시신은 사구한테 있어.”온사가 온모를 납치하던 날에 온모가 사구를 시켜 무덤을 도굴하게 했다는 얘기였다.온사는 만약 추월이 그날 온사를 납치해서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시신은 진작에 온모의 손에 훼손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사구는 누구야?”“모… 몰라. 난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어.”‘그 사람들? 온모의 배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가?’온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환각제를 먹고도 상대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김사도 무리처럼 온모의 어미 백초유가 미처 온모한테 알려주지 못하고 남기고 간 사람들일 것이다.‘아니면 온모의 배후에 비밀의 존재가 있거나.’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온사는 어머니의 시신을 되찾은 후에 바로 온모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놈은 어디 있어? 너희는 어떻게 연락해?”“나도 걔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저 내가 필요할 때 알아서… 나타났어.”말을 마친 온모는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환각제의 약효가 끝난 것이다.온사는 싸늘한 눈으로 온모를 내려다보았다.“네가 필요할 때 알아서 나타난다라….”‘그렇다면….’방법을 떠올린 온사는 온모를 끌고 가서 다시 철장에 가두었다.그러고는 김사도에게 서신을 보내 속히 수월관으로 오라고 했다.다음 날, 김사도는 저녁 무렵에 온사의 처소 앞에 나타났다.“무슨 일인데 이리도 급하게 사람을 불렀어? 고귀하신 성녀 전하께서 내가 그리웠나?”그는 늘 이렇게 시정잡배처럼 굴었다.온사는 한심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아, 알았어. 내가 안 보고 싶었나 보네. 그럼 내 해독제 연구에 진전이라도 있는 건가?”김사도는 온사의 옆으로 다가가서 싱글거리며 질문을 던졌다.“진전은 있어. 온모의 몸에서 네가 말한 해독제 처방을 찾았거든.”김사도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성녀가 보기에 그 처방 어땠어? 만들어낼 수 있어?”그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물론 온사는 그에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