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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심계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8 13:27:13

“선지국…….”

난데없이 튀어나온 ‘선지국’이란 단어에 부엌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드러운 계란찜이나 아니면 영양가 있는 전복죽 따위를 예상했던 최지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는 일시 정지한 채 멍하게 도복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이 애가 너무 아파서 헛소리를 하는 건가?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 듯했다.

“…허.”

탁유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아픈 애기가 선지국.”

도복희는 그의 말에서 ‘아픈’에 주목해야 할지, ‘애기’에 주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어붙은 거실 공기를 깨뜨린 건 심우주의 웃음 소리였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제 귀를 의심한 듯 몇 초간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 있던 심우주가 폭소를 터뜨렸다.

“와, 이거 진짜 웃기네. 복희야, 너 진짜 재밌는 애다.”

도복희는 선지국을 먹고파 하는 게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들의 반응은 그녀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야, 그거 먹으면 낫겠어? 그럼 먹여 드려야지.”

심우주는 여전히 낄낄대며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엄지로 화면을 톡톡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짧은 신호음이 간 끝에 귀찮아하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같은 집안에서 왜 전화질이야, 미친놈이.」

강은택이었다.

“네가 주워 온 애가 선지국 먹고 싶대.”

능청스러운 심우주의 목소리를 덮으며 2층에서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편안한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강은택이 부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강은택의 시선이 빠르게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훑어 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 웅크린 도복희. 대놓고 실실 쪼개고 있는 심우주. 옅게 웃고 있는 탁유환. 조금 놀란 표정의 최지호.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정보가 더 필요하진 않았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타박인지 혼잣말일지 모를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강은택은 계단 옆에 걸려 있던 낡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뒷문으로 향했다.

“이야, 바로 가네.”

빈정거리는 심우주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보인 그는 곧장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말 제 말 한 마디에 선지국을 사러 가는 건가? 여전히 붉은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의 도복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당황스러움. 그 여러가지가 뒤섞여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 무의식이 강렬하게 원하던 선지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텅 비었던 몸에 기운이 차오르고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묘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복희야, 그거 먹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

최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선지국 하나에 도복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안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도복희는 잠시 부엌에 혼자 남겨졌다. 그녀는 부엌 싱크대 쪽에 작게 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흐렸던 하늘이 조금씩 개고, 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어제 자신을 괴롭히듯 때려붓던 폭우는 꿈속에서나 있던 일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시 뒤, 강은택은 정말로 선지국을 사왔다. 하얀 봉투를 식탁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는 팔짱을 끼며 식탁 앞에 앉았다. 그는 정말로 이 작은 여자애가 아저씨들이나 좋아할 법한 선지국을 먹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최지호가 도복희를 대신하여 포장을 뜯어 주었다. 이틀 굶은 빈 속에 먹은 것이라곤 흰죽 조금이 전부인 사람이 건더기까지 먹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국그릇에 최대한 국물만 덜어서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강은택이 포장해서 돌아오는 동안에 선지국은 조금 식어서, 오히려 그녀가 먹기 딱 좋은 온도로 떨어져 있었다. 도복희는 숟가락을 사용해서 잠시 온도와 맛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과감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국그릇을 감싸쥐고서 입을 대고 직접 마시기 시작했다. 그릇이 기울여지고 작게 후루룩- 하는 소리와 함께 뜨끈하고 진한 국물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꿀꺽 꿀꺽― 쉬지 않고 몇 모금을 더 마신 도복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국그릇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속에서부터 기분 좋게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어느새 핏기 없던 뺨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몸이 풀리는 듯한 나른함에,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뱉었다.

“…살겠다….”

극적인 변화였다. 어젯밤만 해도 죽도 못 삼키고 끙끙 앓던 여자가, 아저씨처럼 국그릇을 들고 마신 뒤 ‘살겠다’라니. 최지호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도복희가 국그릇을 들고 마시는 모습을 쭉 지켜본 강은택은 괜히 ‘크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쩐지 허탈하고 민망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아무도 안 뺏어 먹는다.”

툭 던진 말이었다. 도복희는 강은택의 무심한 말에도 빙그레 웃었다.

“고맙습니다, 사다 주셔서.”

아직은 작고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사 인사는 분명했다. 강은택은 그 말에 이상하게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아 괜히 손을 뻗어 제 뒷목을 주물렀다.

“다 먹었으면 올라가서 자든가. 거실에서 티브이 보고 쉬든가.”

강은택은 귓바퀴가 조금 붉어진 채로 2층으로 홱 올라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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