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혼자 내려올 수 있지. 혹시 구르면 병원에는 데려다 주지. 머리가 깨진 애기를 내버려 둘 정도로 각박한 사람들은 아니니.”
탁유환은 안절부절 못하는 최지호의 손에 들린 담요를 잡아챘다. 그리고 ‘어디 가져갈 테면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들어 보였다.
도복희는 방 밖으로 나오면서 분명 제 상태를 간단히 점검했다. 티셔츠가 원피스마냥 무릎까지 늘어지니, 문제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희롱하듯 훑어보는 심우주의 시선, 속내를 알 수 없는 탁유환의 조소, 불안한 표정의 최지호, 뒤늦게 나와 이마를 짚는 강은택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도복희는 이 민망한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손에 들린 담요를 얼른 받아들어 제 허리에 두르는 것. 결심한 그녀는 난간을 생명줄처럼 붙잡고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풀썩 꺾일 것 같은 무릎에 의식적으로 힘을 실으며 간신히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마지막 한 칸, 바닥에 맨발이 닿는 순간이었다.
도복희는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찌르는 두통과 함께 이명이 동반했다.
“아…….”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는 도복희를 잡아챈 것은 탁유환이었다. 시험이라도 하듯 그의 얼굴에 떠 있던 묘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여린 팔뚝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쯧. 비리비리해서는.”
혀를 차며 나직하게 읊조린 탁유환이 그녀를 받느라 놓쳤던 담요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도복희의 어깨에 툭 걸쳐 주었다.
“걸음마 제대로 걷기 전까지 싸돌아다니지 마라.”
“…….”
“지호. 네가 책임지고 회복시켜 놔.”
아이를 대하는 건지 환자를 대하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응.”
최지호는 그의 명령이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는 듯 빠릿하게 대답했다.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에 도복희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탁유환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마음대로 판단한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복희는 제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집어서 느릿느릿 허리에 둘렀다. 흘러내리지 않게 끝자락을 쥐고 매듭을 묶는 손길은 너무도 맥아리가 없어서, 보던 심우주가 속 터지는 소리를 냈다.
“하…. 뭐 하냐?”
심우주가 다가와 길고 다부진 손으로 단단히 마무리를 해주었다. 드러난 다리를 희롱하던 사람 같지 않은 태도였다.
탁유환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것처럼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다시 잡아 끌어서는 식탁 앞에 앉혔다. 도복희는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겨우 걸쳐 앉았다.
“아가, 똑바로 앉아야지.”
까딱. 탁유환의 턱끝이 불안정하게 앉은 도복희를 가리켰다. 어른이 아이를 훈계하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도복희는 꾸물꾸물 엉덩이를 당겨 식탁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탁유환은 만족스럽다는 듯 옅게 웃었다.
“밥은 먹었나.”
“네….”
식탁에는 잠시 기묘하게 평화로운 정적이 흘렀다.
“저…, 죄송해요….”
머뭇거리던 도복희의 입에서 개미 기어가는 듯 작은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의외로 그 내용은 명확하게 남자들의 귓가에 닿았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한, 그러나 딱 떨어지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하는 사과.
“뭐가 죄송하냐?”
심우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엔 조금 짜증이 서려 있었다.
“너 어디 모자라냐? 쓰러져 있는 걸 우리가 오지랖 발휘해서 주워와서 돌봐준 게 아니라, 네가 이 새끼 차에 치였다니까?”
심우주가 갑자기 자신을 끌어들이자 강은택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앓아 눕게 된 건, 장시간 굶어 영양 부족에 내리는 비까지 맞아 체온이 떨어진 탓이 클 테다. 그렇다고 해서 강은택의 차에 치인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영 틀린 말도 아닌지라 할 말이 없었다.
강은택은 짧게라도 사과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뱉지 못하고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기며 자리를 떠버렸다.
탁―
타이밍 좋게 도복희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와 해열제가 놓였다. 옅은 노란 빛을 띄는 컵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꿀물인 듯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제게 꿀물을 주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도복희는 적어도 그것이 최지호의 선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복희는 머그컵의 손잡이를 쥐고 온기를 느끼며, 유난히 뜨거운 것을 못 먹는 제 혀가 적응할 정도로 온도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독이라도 탔을까 보냐.”
탁유환이었다.
도복희는 자신의 행동이 선의를 수상케 여기거나 혹은 거절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더이상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해명을 할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들고 있던 컵을 얼른 입가로 가져다 댔다. 그 바람에 혀가 데이는 감각을 느끼며 알싸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탁유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편식하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도, ‘나 억지로 마시고 있어요’하는 것만 같은 찡그린 표정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심우주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에서 머그컵을 빼앗아 들었다. 그가 보기에도 도복희가 남의 눈치를 보느라 원치 않는 것을 꾸역꾸역 마시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뭔…, 고문받아? 억지로 먹으면 탈 나.”
“형, 걔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그래. 식혀서 먹게 그냥 좀…, 냅둬.”
차마 탁유환에게 반기를 들지는 못하고 동동거리기만 하던 최지호에게는 심우주가 구원투수 같았다. 도복희를 잘 아는 것처럼 얼른 설명을 갖다 붙인 최지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탁유환은 그녀를 감시하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떨떠름한 기색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더는 혀를 차거나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대로 부엌을 빠져나가려던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약을 착하게 잘 먹으면 저녁에는 맛있는 걸 사주마.”
도복희는 이 남자가 자신을 몇 살로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따로 묻진 않았다.
“먹고 싶은 것 있나? 적당히…, 네 몸 상태에도 먹을 수 있는 걸 얘기해야 할 거야.”
그 말은 터무니없는 메뉴를 말해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먹고 싶은 것. 도복희는 그 다섯 글자를 듣는 순간, 머릿 속이 어떤 음식 하나로 가득 차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말했다.
“선지국…….”
머릿속을 지배하던 뜨겁고 진한 국물에 대한 갈망이 여과없이 툭 튀어나왔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안에 침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심우주의 외모를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보통 그를 ‘아, 그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했고, 남자들 중엔 가끔 ‘제비’라든지 ‘호스트바 선수’와 같은 단어로 공연히 비아냥거리는 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심우주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에 속한다는 걸 뜻하는 방증이었다.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렵했다. 자칫하면 날카롭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남성 평균보다 약간 밝은 피부톤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심우주는 늘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여 그 분위기를 상당히 중화시킨 편이었다.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에서는 중간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왔으니,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완성된 심우주의 외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가벼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었다.심우주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꽤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심우주가 당연히 그런 가벼운 사람이기를 기대했기에 그렇게 자라났는지도 모른다.엄마는 젊은 시절에 나름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는 아닌 듯했고, 오전 늦게 주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왕왕 출연하여 식당에 가면 사인 한 장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다. 그마저도 심우주가 초등 저학년이 됐을 무렵엔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사라진 까닭에 그녀의 전성기엔 얼마나 위세를 떨 수 있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미혼의 여배우와 재벌가 사내에서 난 아이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으니 없는 것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다. 대신 용돈이 부족해서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또래와는 다르게 심우주의 지갑은 늘 두터웠다. 친구 중 누구도, 심지어 선생조차도 심우주의 부모를 본 적이 없는데, 심우주는 그 미스터리한 부모에게서 늘 이상할 정도로 용돈을 많이 받는 애였다. 그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 여유 덕
“어딜 간다고 그래, 돈도 없는 게.”최지호는 꼭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가로막듯 심우주와 도복희의 사이에 비집고 섰다. 심우주도 키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호리호리한 편인 그와 다르게 최지호는 덩치까지 훨씬 컸으므로 도복희는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지,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비켜.”“형, 그만해.”“내가 뭘 했다고 그만하래. 너나 그만하고 비켜, 나 복희랑 얘기 중이잖아.”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남자가 대치 중인 거실의 공기가 변했다.도복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남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티를 내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네 명 중 누구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로 살기로 했다’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은 그들이기에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형제로 봐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복희도 그걸 느꼈다.그런데 지금, 도복희의 거처 문제를 두고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 때문에 흔들릴 신의라면 애초에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구미호는 사람을 홀려서 간을 빼 먹는다.’그런 말들은 세상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실은 도복희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연구된 적 없는 숨은 존재였고 구미호족은 이미 절멸했으니까.‘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사람을 해하는 존재가 아니야.’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육류, 특히 육회나 선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게 인간의 피와 간을 탐하는
“아기 이 집에서 내보낸다.”탁유환의 발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지내는 네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큰형 노릇을 하는 탁유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성정도 아니었으므로 강은택은 그가 이미 뱉은 말을 쉽게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탁유환은 흥신소에 들이닥친 양아치들이 도복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일은 없고 아마 급하게 숨다 다친 모양이다’라고 둘러댄다고 한들 좋은 수가 될까. 아마 그 정도로는 그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이다.탁유환은 등을 돌려 제 뒤에 서 있던 도복희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접어서 마치 작은 아가씨 앞의 기사가 된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유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도복희에게는 좀 낯설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아가.”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전 강은택을 질책하던 그에게서 풍기던 싸늘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네.”그래도 도복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이런 곳에 있지 마라. 응?”언제나처럼 명령조였지만 어쩐지 오늘 탁유환이 뱉는 말투는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저 정말로 어디 맞거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루요.”도복희는 강은택 대신 해명이라도 하듯 늘어놓았다. 강은택에게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녀의 말이 꼭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다행이군.”탁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도복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속했다.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강은택마저 읽었을 그녀의 속내를 탁유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내 회사 근처에 빈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지내기엔 괜
흥신소 사무실에서의 사건을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탁유환이었다. 그 주 토요일까지도 바빠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그도 일요일에는 주말 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중이었다.거실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탁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몸이 기다란 소파에 엎드려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도복희는 두꺼운 판타지 소설책을 읽으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탁유환이 일부러 사 온 책인데, 도복희는 그것이 탁유환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큭.”탁유환은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발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듯 도복희가 그 웃음소리에 홱 그를 돌아봤다.“저 보고 웃은 거죠?”“아니다.”“거짓말.”“그래, 거짓말이다.”도복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왜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이 웃겨요?”“네가 웃긴 게 아니라 이 집에 나 말고 글자 읽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웃었어.”탁유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이 집에 있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이 밥통이거든.”“…푸핫.”신랄한 뒷담화에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헙’ 하고 갑자기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말 듣고 제가 웃었다고 소문 내면 안 돼요.”괜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입단속을 하느라 잠시 손에서 놓은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접혔다. 읽던 구간을 놓친 도복희가 작게 ‘으앗’ 소리치며 허둥지둥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 엎드려 있는 도복희의 바지 밑단이 조금 걷히며 그녀의 하얀 다리에 남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푸르뎅뎅하던 것은 이제 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충격의 흔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다리는 어쩌다 그랬나.”탁유환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아, 이거.”흥신소 사무실의 창고에 숨으면서 어딘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저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도복희의 대답을 듣고 최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물었다.“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적어도 최지호가 보기엔 그랬다. 도복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 정도로 바보 같이 착하고 순해 빠졌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그녀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서 표현하는지. 그저 겸손을 떠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냥, 숨기는 게 좀 많은 사람이요.”도복희는 사실 숨기는 것보단 속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집에 비밀 없는 사람 없어.”고작 숨기는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이 집에 머물 자격이 없는 건 아니야. 최지호의 말은 도복희에게 그렇게 들렸다.“저 그럼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돼요?”“나가라고 한 말 아닌데….”도복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지호가 귓바퀴를 조금 붉혔다. 어쩐지 그녀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길 바라는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그럼 염치 없지만, 조금만 더 잘 부탁드릴게요.”도복희는 구김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아!”용건이 끝났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최지호가 그녀의 ‘아’하는 탄성에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복희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처 알아보는 거 도와주신다고 한 거요.”최지호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겠다고 할까봐 잠시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추리닝바지를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뿌듯해야 할 감사 인사를 듣고 그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호는 ‘고마워요’란 말 뒤에 따라붙은 호칭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하고는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로보트처럼 삐꺽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오빠요....”도복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