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은택이 자리를 뜬 뒤, 부엌에는 도복희와 최지호만 남겨졌다.
도복희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제가 사용한 그릇 정도는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최지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넌 쉬어. 내가 할게.”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 아니야. 괜히 움직였다가 다시 아프면 내가 혼나.”
최지호는 도복희를 식탁에 다시 앉히려고 손을 뻗었다가 닿기도 전에 금방 손을 거두었다. 커다란 자신에 비해 그녀의 몸은 너무 작고 약하게 느껴져서, 아무렇게나 쥐었다간 부서질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도복희는 제 앞에서 허둥대는 이 남자가 신기하고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얌전히 국그릇을 싱크대 볼 안에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최지호는 곧바로 고무장갑을 꼈다. 울룩불룩 근육이 잡힌 까무잡잡한 팔에 덧씌운 진분홍 고무장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최지호는 제 할 일을 찾은 듯 익숙하고 편안해 보였다.
“거실에서 티브이 봐도 돼.”
최지호가 잠시 돌아보고서 말했다. 혼나지 않으려고 남의 일을 떠맡은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대신 해 줄 수 있어 기쁘다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도복희는 ‘TV를 보는 일’이 꼭 미션처럼 느껴졌다.
널찍한 거실 대부분을 시커먼 가죽 소파가 차지하고 있었다. 간밤에 누워 있었던 게스트룸의 침대보다도 큰 것 같았다. 도복희는 화면이 잘 보이는 가운데가 아닌 오른쪽 팔걸이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런 다음에 리모컨을 꾹꾹 눌러 영화 채널을 찾고, 들릴듯 말듯 작게 소리를 낮춘 뒤, 의무적으로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스토리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지루했다. 뜨끈한 선지국으로 채워진 속은 나른한 포만감을 주었고, 허리에 두른 담요는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반듯하게 앉아있던 몸은 스르륵 기울어져 어느새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 웅크리고 누운 모습이 되었다.
강은택이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강은택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옅게 미소가 떠 있었다.
“애 깨우지 마라. 시끄러워지니까.”
강은택은 묵묵히 싱크대를 정리 중인 최지호에게 괜히 경고를 하고선 집을 나섰다.
차고로 통하는 뒷문이 아닌, 커다란 현관문을 통해 나온 강은택이 성큼성큼 돌길을 밟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널찍한 마당은 누구도 돌보지 않아 아무렇게나 잡초가 자라 있었다. 볼 것도 없는 풀밭이 전부인 공간은 쓸데없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끽—
철제 대문을 밀어젖히자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식구 중 유일하게 이 대문을 사용하는 강은택은 소음을 들을 때마다 ‘기름칠 좀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음을 이기지 못해 벌써 두 달째 끼익― 거리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붉은 벽돌 담장 아래에는 도복희가 부딪친, 강은택의 SUV가 서 있었다. 그와 꼭 어울리는 커다란 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흠집 하나 없는 채로 짙은 회색빛을 뽐내고 있었다. 강은택은 말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출발한 차가 한적한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차는 20여분을 달려 구도심지의 깊은 곳에 닿았다. 과거 해원시에서 가장 번화했던 동네. 아무렇게나 이어 붙인 듯 구불구불한 길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규격도 규칙도 없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저분하고 시끄럽지만, 낮이나 밤이나 복작거리는 곳이었다.
강은택은 철물점이 유난히 많은 어느 골목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어느 3층짜리 낡은 건물 앞에 멈추었다.
거대한 차체가 ‘가스콘 용역’이라는 작은 사무소의 입구를 가렸으나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용역 사무소에서 일거리를 딸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모두 다녀갔을 테니, 이 시간대에 출입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사실 그런 상식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별 상관 없었다. 주차 개떡 같이 한 본인이 건물주였으니.
강은택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흙먼지가 풀풀 나는 시멘트 계단을 밟고 2층으로 향했다. 출입문 옆에 ‘가스콘 심부름센터’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린 사무실이었다. 안에는 투박한 가죽 소파와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는 커다란 화분, 누리끼리하고 칙칙한 색깔의 철제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에는 잡무를 처리하는 여직원이 한 명 식구로 딸려 있었지만, 대부분 1층 용역 사무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덕분에 2층은 강은택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강은택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자연스럽게 컴퓨터 전원을 켰다.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쪼가리를 꺼내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도복희의 운전면허증. 그는 부팅이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빤히 신분증에 박힌 사진을 보았다. 지금의 그녀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열아홉 살 때쯤 찍었을까. 근데 그게 중요한가. 강은택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마우스를 쥐었다.
오늘은 흥신소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은택이 출근까지 감행한 이유는, 그저 도복희의 뒷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사연 있는 인간은 너무도 많다. 당장 강은택 자신도 그랬고, 식구로 지내는 나머지 세 놈도 구질구질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을 제각각 가지고 있었다. 돈도 빚도 없고 의무 교육만 겨우 마친 스물세 살짜리. 그리 특별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은택은 이상하게도 집도, 가족도, 금융 기록도, 병원 기록도 없는 도복희가 궁금했다. 차라리 처음 신원 조회를 했을 때, 모든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한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씨발, 이거 뭐냐….”
집요하게 매달리던 강은택이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짧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렸다.
심우주의 외모를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보통 그를 ‘아, 그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했고, 남자들 중엔 가끔 ‘제비’라든지 ‘호스트바 선수’와 같은 단어로 공연히 비아냥거리는 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심우주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에 속한다는 걸 뜻하는 방증이었다.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렵했다. 자칫하면 날카롭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남성 평균보다 약간 밝은 피부톤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심우주는 늘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여 그 분위기를 상당히 중화시킨 편이었다.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에서는 중간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왔으니,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완성된 심우주의 외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가벼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었다.심우주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꽤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심우주가 당연히 그런 가벼운 사람이기를 기대했기에 그렇게 자라났는지도 모른다.엄마는 젊은 시절에 나름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는 아닌 듯했고, 오전 늦게 주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왕왕 출연하여 식당에 가면 사인 한 장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다. 그마저도 심우주가 초등 저학년이 됐을 무렵엔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사라진 까닭에 그녀의 전성기엔 얼마나 위세를 떨 수 있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미혼의 여배우와 재벌가 사내에서 난 아이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으니 없는 것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다. 대신 용돈이 부족해서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또래와는 다르게 심우주의 지갑은 늘 두터웠다. 친구 중 누구도, 심지어 선생조차도 심우주의 부모를 본 적이 없는데, 심우주는 그 미스터리한 부모에게서 늘 이상할 정도로 용돈을 많이 받는 애였다. 그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 여유 덕
“어딜 간다고 그래, 돈도 없는 게.”최지호는 꼭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가로막듯 심우주와 도복희의 사이에 비집고 섰다. 심우주도 키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호리호리한 편인 그와 다르게 최지호는 덩치까지 훨씬 컸으므로 도복희는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지,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비켜.”“형, 그만해.”“내가 뭘 했다고 그만하래. 너나 그만하고 비켜, 나 복희랑 얘기 중이잖아.”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남자가 대치 중인 거실의 공기가 변했다.도복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남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티를 내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네 명 중 누구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로 살기로 했다’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은 그들이기에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형제로 봐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복희도 그걸 느꼈다.그런데 지금, 도복희의 거처 문제를 두고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 때문에 흔들릴 신의라면 애초에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구미호는 사람을 홀려서 간을 빼 먹는다.’그런 말들은 세상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실은 도복희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연구된 적 없는 숨은 존재였고 구미호족은 이미 절멸했으니까.‘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사람을 해하는 존재가 아니야.’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육류, 특히 육회나 선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게 인간의 피와 간을 탐하는
“아기 이 집에서 내보낸다.”탁유환의 발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지내는 네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큰형 노릇을 하는 탁유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성정도 아니었으므로 강은택은 그가 이미 뱉은 말을 쉽게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탁유환은 흥신소에 들이닥친 양아치들이 도복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일은 없고 아마 급하게 숨다 다친 모양이다’라고 둘러댄다고 한들 좋은 수가 될까. 아마 그 정도로는 그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이다.탁유환은 등을 돌려 제 뒤에 서 있던 도복희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접어서 마치 작은 아가씨 앞의 기사가 된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유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도복희에게는 좀 낯설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아가.”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전 강은택을 질책하던 그에게서 풍기던 싸늘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네.”그래도 도복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이런 곳에 있지 마라. 응?”언제나처럼 명령조였지만 어쩐지 오늘 탁유환이 뱉는 말투는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저 정말로 어디 맞거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루요.”도복희는 강은택 대신 해명이라도 하듯 늘어놓았다. 강은택에게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녀의 말이 꼭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다행이군.”탁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도복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속했다.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강은택마저 읽었을 그녀의 속내를 탁유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내 회사 근처에 빈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지내기엔 괜
흥신소 사무실에서의 사건을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탁유환이었다. 그 주 토요일까지도 바빠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그도 일요일에는 주말 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중이었다.거실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탁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몸이 기다란 소파에 엎드려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도복희는 두꺼운 판타지 소설책을 읽으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탁유환이 일부러 사 온 책인데, 도복희는 그것이 탁유환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큭.”탁유환은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발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듯 도복희가 그 웃음소리에 홱 그를 돌아봤다.“저 보고 웃은 거죠?”“아니다.”“거짓말.”“그래, 거짓말이다.”도복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왜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이 웃겨요?”“네가 웃긴 게 아니라 이 집에 나 말고 글자 읽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웃었어.”탁유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이 집에 있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이 밥통이거든.”“…푸핫.”신랄한 뒷담화에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헙’ 하고 갑자기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말 듣고 제가 웃었다고 소문 내면 안 돼요.”괜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입단속을 하느라 잠시 손에서 놓은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접혔다. 읽던 구간을 놓친 도복희가 작게 ‘으앗’ 소리치며 허둥지둥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 엎드려 있는 도복희의 바지 밑단이 조금 걷히며 그녀의 하얀 다리에 남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푸르뎅뎅하던 것은 이제 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충격의 흔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다리는 어쩌다 그랬나.”탁유환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아, 이거.”흥신소 사무실의 창고에 숨으면서 어딘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저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도복희의 대답을 듣고 최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물었다.“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적어도 최지호가 보기엔 그랬다. 도복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 정도로 바보 같이 착하고 순해 빠졌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그녀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서 표현하는지. 그저 겸손을 떠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냥, 숨기는 게 좀 많은 사람이요.”도복희는 사실 숨기는 것보단 속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집에 비밀 없는 사람 없어.”고작 숨기는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이 집에 머물 자격이 없는 건 아니야. 최지호의 말은 도복희에게 그렇게 들렸다.“저 그럼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돼요?”“나가라고 한 말 아닌데….”도복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지호가 귓바퀴를 조금 붉혔다. 어쩐지 그녀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길 바라는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그럼 염치 없지만, 조금만 더 잘 부탁드릴게요.”도복희는 구김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아!”용건이 끝났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최지호가 그녀의 ‘아’하는 탄성에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복희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처 알아보는 거 도와주신다고 한 거요.”최지호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겠다고 할까봐 잠시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추리닝바지를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뿌듯해야 할 감사 인사를 듣고 그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호는 ‘고마워요’란 말 뒤에 따라붙은 호칭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하고는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로보트처럼 삐꺽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오빠요....”도복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