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지원기금 첫 모집에 예상보다 많은 신청서가 들어왔다.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눈에 걸렸다.박미라.과거 우리 집에서 비공개 합의서를 훔쳐 판매했던 청소 노동자와 같은 이름이었다.사진과 생년을 확인하자 동일인이 맞았다.그녀는 사건 이후 형사처벌과 손해배상을 받았고, 지금은 소규모 청소업체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지원서에는 과거 범죄 사실도 직접 적혀 있었다.[잘못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심사위원이 물었다.“자동 탈락 처리할까요?”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개인적인 피해자와 재단 이사장의 위치가 충돌했다.도현에게 말하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탈락시키십시오.”“심사는 독립적으로 하기로 했어요.”“당신의 사생활을 팔아넘긴 사람입니다.”“알아요.”“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줄 이유가 있습니까?”목소리에 오래전 분노가 살아났다.“제가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에요.”“지원금을 받으면 당신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그래서 더 제가 결정하면 안 돼요.”나는 박미라의 지원서를 익명 심사로 넘기기로 했다.범죄 이력은 법률·윤리 심사위원만 확인하고, 사업 심사위원에게는 이름과 과거를 가렸다.도현은 동의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이 선정되면요?”“결과를 받아들여야죠.”“당신은 정말 괜찮습니까?”“안 괜찮아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원서 보는 순간 그때 생각났어요. 집 안 서랍도, 기사도, 조사받던 것도.”“그럼 하지 마십시오.”“제가 힘들다는 이유로 심사 기준을 바꾸면 재단이 제 감정대로 움직이는 거잖아요.”도현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대신 말했다.“결과 발표 때는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왜요?”“그 사람이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경호 때문이에요?”“아닙니다.”도현의 손이 내 손등 위에 놓였다.“당신이 괜찮지 않을 때 옆에 있고 싶어서.”박미라는 사업성 심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하지만 최종 윤리심사 결과는 조건부 통과였다
재단 출범식 날, 나는 차명희가 준 브로치를 재킷에 달았다.작은 검은 보석을 은색 테두리가 감싼 디자인이었다.도현은 준비를 마친 나를 한참 바라봤다.“왜 그래요?”“어머니의 브로치를 할 줄 몰랐습니다.”“한 번 해 본다고 했잖아요.”“불편하지 않습니까?”“조금.”“그럼 빼도 됩니다.”그가 직접 손을 대지 않고 기다렸다.나는 거울을 봤다.브로치가 내 이름을 지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명희와 협상해 얻은 자리를 기억하게 했다.“그냥 할게요.”출범식 보도자료의 첫 문장은 합의대로 나갔다.[한서윤 유럽 총괄 겸 차도현 의장 배우자, 여성 경영인 지원기금 초대 이사장 취임.]기자들은 배우자 호칭에 더 관심을 보였다.“차씨 집안의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는 것입니까?”“아닙니다.”“차명희 회장님의 후계자로 거론될 가능성은요?”“지원기금과 무관한 질문입니다.”도현이 대답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멈췄다.차명희는 의외로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한서윤 이사장은 제 후계자가 아닙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한꺼번에 움직였다.“자기 자리가 있는 사람에게 남의 자리를 물려줄 이유가 없어요.”그녀의 대답은 차가웠지만 정확했다.행사가 끝난 뒤 내가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그래도요.”차명희의 시선이 브로치에 닿았다.“불편하면 다음에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오늘은 괜찮았어요.”“다행이군요.”그녀는 먼저 돌아섰다.도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어머니와 가까워진 것 같아 묘합니다.”“질투해요?”“조금.”“어머니한테도요?”“당신의 시간을 가져가는 모든 대상에게 그렇습니다.”“재단 일도 회사만큼 바쁠 수 있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그 부분은 듣지 못했습니다.”“지금 말하잖아요.”“얼마나 자주입니까?”나는 웃었다.“또 일정 확인부터 하네요.”그가 숨을 고르고 질문을 고쳤다.“제가 함께 보내고 싶은 시간을 미리 말해도 됩니까?”“그건 돼요.”도현은 달력에 매달 마지막
차명희에게서 정식 초대장이 왔다.이번에는 가족 식사가 아니라 재단 이사회였다.재단은 유럽 지역에 여성 경영인 지원기금을 설립하려 했다.차명희는 내게 초대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제가요?”“유럽 총괄이라는 상징성이 필요합니다.”“상징으로 세우려는 거면 거절하겠습니다.”차명희는 예상했다는 듯 자료를 넘겼다.기금 규모와 선발 기준, 이사회 권한까지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었다.“직접 운영권을 드리죠.”“조건은요?”“재단 행사에 차씨 집안 대표로 참석하는 것.”역시 조건이 있었다.“한서윤 총괄이 아니라 차도현 의장의 아내로요?”“둘 다입니다.”“어느 쪽을 앞에 놓느냐가 중요해요.”차명희의 표정이 굳었다.“결혼한 뒤에도 집안 이름을 그렇게 거부해야 합니까?”“거부하는 게 아니라 제 이름 뒤에 놓으라는 거예요.”도현이 입을 열려 하자 나는 손을 들어 막았다.이번에는 내가 직접 말하고 싶었다.“공식 명칭은 ‘한서윤 유럽 총괄 겸 차도현 의장 배우자’로 해 주세요.”차명희가 물었다.“굳이 배우자라는 표현을 넣어야 합니까?”“집안 대표가 필요하시다면서요.”“며느리라는 표현은?”“안 씁니다.”침묵이 길어졌다.차명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운영위원 절반은 재단이 선임합니다.”“나머지 절반은 공개 모집하고요.”“최종 선발권은?”“독립 심사위원회요.”“내가 돈을 내는데 권한이 없군요.”“그래야 지원기금이 집안 홍보가 안 돼요.”차명희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도현보다 더 까다롭군요.”“도현 씨는 감정이라도 보이죠.”옆에 있던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저는 왜 비교 대상입니까?”“조용히 있어요.”차명희가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회의가 끝난 뒤 그녀는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안에는 오래된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차씨 집안 며느리들이 공식 행사에서 사용했던 물건이에요.”“이것도 조건인가요?”“아닙니다.”그녀는 상자를 내 손에 직접 쥐여 주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싫으면 두고 가세요.”나
도현은 작업실 경계를 지나치게 잘 지켰다.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점심시간 외에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사흘째부터 다른 문제가 생겼다.그의 서재 문이 계속 잠겨 있었다.“왜 잠가요?”내 질문에 도현이 문 앞에서 멈췄다.“기밀 자료가 있습니다.”“예전에는 안 잠갔잖아요.”“합병 자료가 추가됐습니다.”논리적인 이유였지만 마음이 묘했다.사생활 유출 사건 이후 우리는 집 안에서 일부 공간을 잠그지 않기로 했었다. 중요한 문서는 이중 인증 금고에 넣고, 방 자체는 서로에게 닫지 않았다.“제가 들어갈까 봐요?”“그런 뜻이 아닙니다.”“그럼 문은 왜?”도현은 잠시 침묵하다 열쇠를 꺼냈다.“습관적으로 잠갔습니다.”“진짜요?”“절반만 사실입니다.”그가 솔직하게 말을 고쳤다.“당신이 제 화면을 보고 또 제 도움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숨겼습니다.”“무슨 자료인데요?”서재 안 화면에는 유럽 총괄실의 조직 안정성 보고서가 떠 있었다.도현이 개인적으로 의뢰한 자료였다.내 권한이 합병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법적 위험을 검토하고 있었다.“왜 말 안 했어요?”“당신이 요청하지 않았으니까.”“그래서 문까지 잠갔어요?”“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을 들키면 또 개입한다고 할 것 같았습니다.”가슴이 답답해졌다.도현은 통제하지 않기 위해 숨기고, 숨긴 일 때문에 다시 벽을 만들고 있었다.“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요.”“거절당하면?”“그럴 수도 있죠.”그의 얼굴이 굳었다.“그게 싫어서 숨긴 거예요?”“네.”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보고서는 도움이 될 만했다.“자료는 줘요.”“필요합니까?”“네.”“제가 만든 것이라서 받는 겁니까?”“내용이 필요해서요.”도현은 파일을 내게 전송했다.“그리고 앞으로 문 잠그지 마요.”“기밀 자료는요?”“금고에 넣어요.”“당신 작업실도?”“저도 안 잠글게요.”그는 문고리에서 열쇠를 뺐다.그날 밤 도현은 열쇠를 보관함에 넣으려 했다.나는 막았다.“버리진 마요.”“왜?”“문
다음 달부터 나는 매주 하루를 ‘무결재일’로 정했다.총괄실에 들어가지 않고 도시 책임자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두는 날이었다.첫 무결재일 아침, 평소처럼 정장을 입자 도현이 물었다.“회사에 갑니까?”“회의는 없지만 사무실에는 있어야죠.”“그러면 직원들이 결국 당신에게 물을 겁니다.”“문 잠가 놓으면 돼요.”“그럴 거면 집에 있으십시오.”“집에 있으면 도현 씨가 자꾸 말 걸잖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방해했다는 뜻입니까?”“그게 아니라 집중이 안 된다고요.”“저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방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정말요?”도현은 지나치게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결국 나는 집의 작은 작업실에서 자료를 읽기로 했다.도현은 반대편 서재에서 회의를 했다.한 시간 동안은 조용했다.두 시간이 지나자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뭐 해요?”문을 열자 도현이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커피를 가져왔습니다.”“말 안 걸 수 있다며요.”“전달만 하려고 했습니다.”“지금 말했잖아요.”“미안합니다.”그는 커피를 내려놓고 돌아갔다.삼십 분 뒤 다시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뭐예요?”“점심시간입니다.”“배 안 고파요.”“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았습니다.”“도현 씨.”그가 멈췄다.“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건강을 확인하는 것은 방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그걸 도현 씨가 정하면 어떡해요?”표정이 굳었지만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문이 닫힌 뒤 오히려 집중이 되지 않았다.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 다시 오지 않았다.내가 서재로 가 보니 도현은 혼자 식사 중이었다.“왜 혼자 먹어요?”“방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점심은 같이 먹을 수도 있잖아요.”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당신이 정한 경계를 제가 추측해서 바꾸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맞는 말이었다.“그럼 다음부터는 점심시간에는 물어봐도 돼요.”“작업실 문을 두드려도 됩니까?”“네.”“커피는?”“하루 한 번.”“건강 확인은?”“제가
공동위원회의 첫 회의에는 다섯 도시 직원대표가 모두 참석했다.서울 직원은 성과급 차이를 문제 삼았고, 프라하는 야간근무 수당을 요구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생산직과 사무직의 복지 격차가 지적됐다.파리 대표는 말했다.“같은 그룹인데 왜 출산휴가와 병가 기준이 다릅니까?”스톡홀름 대표가 반박했다.“각국 법이 다른데 완전히 같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회의는 세 시간 만에 고성이 오가는 자리로 변했다.나는 중간에 끼어들어 결론을 정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오늘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직원들이 술렁였다.“대신 각 도시가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최소 기준을 제출해 주세요.”“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일주일입니다.”회의가 끝난 뒤 마르틴이 말했다.“총괄이 방향을 정하지 않으니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처음부터 제가 정하면 공동위원회가 아니에요.”“합의가 실패하면요?”“그때 조정할게요.”도현은 보고서를 읽고는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일주일 안에 모든 요구를 검토할 인력이 부족합니다.”“총괄실에서 밤새면 되죠.”그의 표정이 즉시 굳었다.“또 당신이 직접 합니까?”“중요한 일이잖아요.”“그러니까 더 나누십시오.”“누구한테요?”“마르틴과 한 전무에게.”“둘 다 자기 분야만 보잖아요.”“그래서 당신이 전체를 보고 조정하는 겁니다. 모든 표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맞는 말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도현 씨는 말은 쉬워요.”“제가 해 드릴까요?”“그건 또 싫어요.”그가 한숨을 쉬었다.“도움을 거절하면서 혼자 힘들다고 말하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나는 입을 다물었다.도현은 잠시 기다리다 물었다.“지금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십시오.”“각 도시 복지 기준을 비교할 사람이 필요해요.”“인사전략팀을 붙이겠습니다.”“도현 씨 회사 사람을요?”“싫다면 외부 용역을 쓰십시오.”“비용이 들어요.”“당신이 밤새는 것도 비용입니다.”결국 외부 전문팀을 투입했다.일주일 뒤 다섯 도시가 공유할 최소 복지기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