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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위험한 시그널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11:32:00
[이제 한서윤 씨에게 전부 보여줘도 됩니다.]

박민재가 돌려보낸 보고서를 확인한 뒤에도 그 문장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누군가가 보여줘도 된다고 허락해서 본 게 아니었다.

내가 보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도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은 끝났다.

명령권도 사라졌다.

그런데 서로에게 느끼는 긴장감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

오후 세 시.

세림홀딩스 대회의실.

나는 협력사 담당자들과 함께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었다.

도현은 정면에서 회의를 이끌고 있었다.

“다음 달 일정은 기존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기는 방향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

회사에서 보는 차도현은 여전히 빈틈이 없었다.

자료를 넘기는 손길도.

질문을 받아치는 속도도.

사람들의 시선을 통제하는 방식도.

그런데 이제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남자가 언제 흔들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멈출 줄 알게 되었는지도.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묘하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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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92화. 열 장을 뒤집어 놓는 법

    문이 닫히자 서윤은 곧바로 소파에 앉았다.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강릉에서 찍은 사진만 따로 모으자 생각보다 많았다.“다섯 장…….”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다.바다.휴게소.숙소.음식.골목.모래 묻은 신발.사진 부스.창밖 풍경.도현.그리고 자신.손가락이 몇 번이나 화면 위에서 멈췄다.첫 번째는 금방 정했다.둘째 날 아침, 자신이 몰래 찍었던 잠든 도현.흐트러진 침대와 바닥의 슬리퍼까지 함께 나온 사진이었다.“이건 무조건.”두 번째는 모래 묻은 두 사람의 신발.세 번째는 사진 부스에서 나온 네 컷을 다시 찍어둔 사진.거기까지는 쉬웠다.문제는 나머지 두 장이었다.서윤은 첫날 바다 사진을 열었다.도현이 바람을 맞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사진.손가락이 선택 버튼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아니.”다시 넘겼다.생선구이.흔들린 길.숙소에 아무렇게나 놓인 두 개의 여행 가방.집 모양 키링까지 보였다.서윤의 손이 멈췄다.“이거.”네 번째.마지막 한 장.한참을 넘기던 서윤은 마지막 날 바다에서 찍은 셀카에 도착했다.자신은 카메라를 보고 있고,도현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이건 너무 티 나는데.”그래도 선택했다.다섯 장.완료.서윤은 사진첩을 닫았다.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똑.“십 분 지났습니다.”“벌써?”“열두 분입니다.”서윤이 문을 열었다.“시간 재고 있었어요?”“아니요. 지나가다 시계를 봤습니다.”“수상해.”도현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서윤이 가로막았다.“잠깐.”“왜요?”“도현 씨 것도 지금 골라요.”“여기서?”“아니.”서윤이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도현 씨 공간 가서.”“서로 격리하는 겁니까?”“비밀이라니까.”도현이 결국 웃었다.“알겠습니다.”도현에게 주어진 시간도 십 분이었다.그런데 칠 분 만에 나왔다.서윤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벌써?”“네.”“대충 골랐죠?”“아닙니다.”“나는 엄청 고민했는데.”“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91화. 벽에 걸린 시간

    다음 날 저녁.현관 앞에 기다리던 택배 상자가 놓였다.서윤은 퇴근하자마자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도현 씨.”“네.”“왔어.”도현이 주방에서 나왔다.서윤은 이미 거실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바로 열 겁니까?”“당연하지.”“옷부터 갈아입고 하죠.”“이것만 보고.”“어제 여행 가방도 나중에 푼다고 해놓고 결국 바로 풀었습니다.”“그거랑 이건 다르지.”서윤이 테이프 끝을 찾았다.도현이 옆에 앉아 커터를 들었다.“손 치우십시오.”“내가 할 수 있는데.”“압니다.”서윤이 멈칫했다.둘의 눈이 마주쳤다.“또 나왔다.”“그러네요.”여행 내내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서윤은 순순히 손을 뗐다.“그럼 해줘.”상자가 열렸다.가장 먼저 작은 액자 세 개가 나왔다.얇은 나무 프레임.검은 프레임.밝은 나무 프레임.서윤이 하나씩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내 거.”얇은 나무 프레임에는 일반 커플 촬영 때 도현이 갑자기 서윤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던 사진을 넣었다.“도현 씨 거.”검은 프레임에는 서윤이 편안하게 도현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마지막 밝은 나무 프레임에는 둘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들어갔다.“이건 주방.”도현이 사진 세 개를 내려다봤다.“정말 다 다르네요.”“뭐가?”“당신 작업실 사진에서는 제가 당신을 보고 있고.”도현이 다음 사진을 가리켰다.“제 쪽에서는 당신이 저를 보고 있고.”그리고 마지막.“이건 둘 다 웃고 있고.”서윤도 그제야 세 장을 차례대로 봤다.“진짜네.”“일부러 고른 겁니까?”“아니.”“그런데 잘 골랐네요.”서윤이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러게.”큰 액자도 있었다.새로 찍은 웨딩사진.두 사람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순간이었다.서윤은 포장을 벗기자마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이거 역시 좋다.”“네.”“처음 결혼했을 때 사진이랑 진짜 다르지?”“많이 다릅니다.”“그때는 나 예쁘게 나오려고 엄청 신경 썼는데.”“이번에도 신경 썼잖습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90화. 집에 와서 펼친 문장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서윤은 신발을 벗고 여행 가방을 안으로 밀었다.“아.”도현이 뒤에서 들어오며 물었다.“왜요?”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거실을 한번 둘러봤다.며칠밖에 비우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반가웠다.식탁 위에는 떠나기 전 꽂아둔 꽃병이 있었고, 벽에는 아직 액자를 기다리는 사진들이 있었다.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찬장 안의 머그 두 개도 보였다.“그냥.”서윤이 웃었다.“집이다.”도현이 현관문을 닫았다.“여행 가서도 집에 오고 싶다더니.”“막상 오니까 더 좋아.”“강릉보다?”“그건 비교하면 안 되지.”서윤이 손을 내밀었다.“가방은 나중에 풀자.”“뭐부터 하려고요?”“엽서.”도현이 웃었다.“역시 그것부터군요.”두 사람은 여행 가방도 그대로 둔 채 식탁에 마주 앉았다.서윤은 가방 안쪽에서 엽서 두 장을 꺼냈다.자신이 도현에게 골라준 밤바다.도현이 자신에게 골라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여행 둘째 날 서로 한 문장씩 적었던 것.서윤이 엽서를 손에 들었다.“바꿔요.”도현이 밤바다 엽서를 건넸다.서윤도 창가 엽서를 내밀었다.“같이 볼까?”“네.”두 장이 동시에 뒤집혔다.서윤은 도현이 쓴 문장을 읽었다.어디에 있어도 당신이 편하게 웃으면 그곳이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서윤의 눈이 그대로 멈췄다.한 번 읽고.다시 읽었다.“……이걸 그때 썼어요?”“네.”“벤치에서?”“네.”“나 바로 옆에 있었는데?”“그러니까 썼죠.”서윤은 엽서를 내려놓지 않았다.“이거 반칙 같은데.”“무슨 반칙입니까?”“내 건 되게 간단하단 말이야.”도현이 이미 서윤의 문장을 읽고 있었다.같이 걷다가 우연히 바다가 나온 밤.“저는 이게 좋은데요.”“너무 짧잖아.”“그래서 좋습니다.”도현이 밤바다 사진을 손끝으로 한번 쓸었다.“제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고.”서윤이 그의 엽서를 다시 봤다.“도현 씨는 왜 이렇게 길게 썼어.”“한 문장입니다.”“글자 수가 다르잖아.”“그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9화. 돌아가기 전 마지막 한 장

    아침.서윤은 눈을 뜨자마자 옆을 확인했다.도현은 없었다.“……도현 씨?”대답도 없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작은 테이블 위에 휴대폰 하나만 놓여 있었다.도현의 것이었다.“어디 갔지?”욕실 문도 열려 있었다.서윤은 급하게 겉옷을 걸치고 객실 문을 열었다.그 순간.“어디 갑니까?”복도 끝에서 도현이 걸어왔다.한 손에는 종이봉투.다른 손에는 음료 두 잔이 들려 있었다.서윤이 멈췄다.“어디 갔었어요?”“아침 사러요.”“말도 안 하고?”“자고 있었습니다.”“깨우지.”“여행 마지막 날인데 더 자게 두고 싶었습니다.”도현이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어제 지나가다 봤던 빵집 열었길래 다녀왔습니다.”서윤은 그제야 봉투를 받았다.따뜻했다.“이거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거?”“네.”“기억했어?”“당신이 가게 앞에서 세 번 봤습니다.”“세 번이나?”“네.”서윤이 웃었다.“들어와요.”둘은 창가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었다.바다가 조금 보였다.서윤은 빵을 뜯다가 갑자기 말했다.“오늘 집 간다.”“네.”“진짜 빠르다.”“어제도 같은 말 했습니다.”“오늘은 느낌이 다르잖아.”서윤은 마지막 빵 조각을 도현 쪽으로 밀었다.“먹어요.”“당신 먹으십시오.”“배불러.”“아까 맛있다고 했잖습니까.”“맛있는 거랑 배부른 건 별개야.”결국 도현이 받아먹었다.서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괜히 웃었다.“왜 봅니까?”“그냥.”“사진?”“아니.”이번에는 정말 아니었다.서윤의 한 장은 이미 어제 아침에 끝났으니까.오히려 궁금한 건 도현의 사진이었다.“도현 씨.”“네.”“아직 안 찍었죠?”도현이 커피를 마셨다.대답하지 않았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 표정 뭐야.”“무슨 표정입니까.”“찍었네.”“마지막에 확인하기로 했습니다.”“그러니까 지금 말고.”“체크아웃하고 나서.”“왜?”“여행 끝까지 기다리죠.”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알았어.”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출발할 때는 가지런했던 가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8화. 여행 가방에 없던 것

    사진 부스를 나온 뒤에도 서윤은 몇 번이나 지갑을 열었다.방금 넣은 네 컷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첫 장은 둘 다 카메라를 보고 있었고.두 번째는 서윤이 도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세 번째는 도현이 서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순간.마지막은—“또 봅니까?”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얼른 지갑을 닫았다.“아니.”“봤잖습니까.”“내 지갑인데 내가 보든 말든.”“그건 맞습니다.”도현이 웃었다.서윤은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물었다.“도현 씨 것도 줘봐.”“왜요?”“잘 넣었나 보게.”“똑같은 사진입니다.”“그래도.”도현이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사진은 카드 사이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서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거기서 빼면 안 돼요.”“언제까지요?”“계속.”“새 사진이 생겨도?”서윤이 잠시 생각했다.“그건 그때 생각하고.”“기준이 없네요.”“내 마음이 기준이야.”“가장 어려운 기준인데.”“싫어요?”“아니요.”도현은 지갑을 다시 넣었다.“따르겠습니다.”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뒤로도 한참을 걸었다.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관광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유명한 곳을 검색하지도 않았다.작은 가게를 구경하고,편의점에서 음료를 하나 사고,벤치가 보이면 잠깐 앉았다.그러다 어느 순간 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나 다리 아파.”도현이 바로 주변을 둘러봤다.“숙소 갈까요?”“응.”“택시 부르죠.”“얼마나 걸리는데?”도현이 지도를 확인했다.“걸으면 삼십 분 정도.”“택시는?”“금방입니다.”서윤이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택시.”“걷는 건 끝?”“오늘 충분히 했어.”“파도랑 뛰기까지 했으니까요.”“그건 운동으로 치면 안 돼.”“왜요?”“재밌었으니까.”도현이 웃었다.“재미있는 운동도 있습니다.”“오늘은 없어.”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서윤은 침대에 엎어졌다.“못 움직이겠다.”도현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씻고 누우십시오.”“조금만 있다가.”“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7화. 바람이 고른 방향

    “진짜 하나도 힌트 안 줄 거예요?”“네.”도현의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서윤은 결국 그의 손을 놓았다.“됐어. 나도 이제 관심 없어.”“정말입니까?”“응.”“그럼 다행이고요.”서윤이 바로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근데 이미 찍은 건 맞아요?”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윤.”“왜.”“관심 없다면서요.”“그건 방금 전의 나고.”“십 초도 안 됐습니다.”“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야.”도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서윤의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둘은 그렇게 골목 끝까지 걸었다.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던 길이었다.그러다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었다.서윤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아, 잠깐.”도현이 웃었다.“오늘도 머리가 난리네요.”“강릉이 나한테 왜 이래.”“바닷가니까요.”“도현 씨는 멀쩡하잖아.”“짧으니까 그렇죠.”서윤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그때 멀리 작은 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큰길에서 옆으로 빠지는 좁은 길이었다.“저기로 갈래요?”“저기요?”“응.”“뭐 있는지 압니까?”“몰라.”서윤이 먼저 방향을 틀었다.“그래서 가보는 거야.”도현도 따라왔다.“오늘 여행 방식에 완전히 적응했네요.”“그러게.”좁은 길을 따라 몇 분쯤 걸었을 때였다.먼저 들린 건 소리였다.파도.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또 바다야?”길 끝으로 내려가자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아까 지나온 곳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여기 좋다.”이번에도 검색해서 찾은 곳은 아니었다.그냥 길이 보여서 들어왔고,그 끝에 바다가 있었다.“오늘은 바다가 자꾸 나오네.”서윤이 말했다.“우리가 바다 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까요.”“그렇게 현실적으로 말하지 마.”도현이 웃었다.둘은 모래 위로 내려갔다.서윤은 이번에는 파도 가까이까지 갔다.물이 밀려오자 뒤로 물러났다.다시 다가가고.또 피했다.도현은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도현 씨도 와요.”“신발 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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