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내일 저녁 7시. 지난번 그 집으로 오세요.]
메시지를 읽은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세 번째 명령인가요?] 답장은 곧바로 왔다. [아닙니다.] [세 번째 명령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할 겁니다.] 명령보다 더 긴장되는 말이었다. 무슨 자격을 확인한다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입력창 위에서 멈췄다. 답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조급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고, 다음 명령이 언제인지 먼저 물었다. 차도현은 아마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계약을 단순히 돈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 --- 다음 날 저녁 6시 42분. 나는 검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십팔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일찍 오라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집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은 끝에 검은색 원피스를 골랐다. 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아무렇게나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옷. 화장도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썼다. 그가 알아볼지조차 모르면서. 나는 초인종을 누르려다 손을 멈췄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문 앞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올까. 그때 검은 대문이 먼저 열렸다. 차도현이 안쪽에 서 있었다. 오늘도 검은 셔츠 차림이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한 손에는 얇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살폈다. “일찍 왔군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거짓말.” 너무 즉각적인 대답에 눈을 피했다. “일찍 오면 안 돼요?” “안 된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가 몸을 옆으로 비켰다. “들어오세요.” 지난번과 같은 거실이었다. 검은 소파와 유리 테이블. 정돈된 공간에는 여전히 생활감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난번보다 덜 낯설었다. 오히려 내가 이곳에 다시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차도현은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앉으세요.” 나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가 맞은편에 앉을 줄 알았지만, 차도현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향은 분명히 닿았다. 차갑고 깨끗한 향. 전화를 통해 들었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긴장했습니까?” “조금요.” “왜요?” “자격을 확인한다고 했잖아요.” “탈락할까 봐 걱정됩니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답을 알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계약을 계속하고 싶었다. 다음 명령을 받고 싶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 선택이 돈 때문이라는 변명이 사라질 것 같았다. 차도현이 서류철을 펼쳤다. 안에는 첫날 작성했던 계약서와 규칙표가 들어 있었다. 오른쪽 위에는 두 개의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1/12. 2/12. 두 번의 명령이 끝났다는 흔적이었다. “오늘은 계약을 계속하기 전에 몇 가지를 확인할 겁니다.” “검사라도 해요?” “비슷합니다.” 그가 규칙표를 내 앞에 놓았다. “첫 번째 규칙.” 나는 적힌 문장을 읽었다.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할 것. “질문을 할 테니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싫은 질문이면요?” “말하기 싫다고 답해도 됩니다.” “그럼 자격 확인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솔직하게 거절하는 것도 대답입니다.” 여전히 이상한 남자였다.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열어두면서도, 결국은 스스로 더 깊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계약을 계속하고 싶은 이유가 돈뿐입니까?” 예상했던 질문인데도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 계약서에 서명한 이유는 분명 돈이었다. 오백만 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은 이미 받았다.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이유는 위약금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차도현은 첫 번째 명령을 거부해도 계약금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계속하겠다고 선택했다. “처음에는 돈 때문이었어요.” “지금은?” 나는 손가락 끝을 내려다봤다. “잘 모르겠어요.” “그건 솔직한 답입니까, 피하기 위한 답입니까?”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도망칠 틈이 없었다.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다음이 궁금해요.” “무엇이?” “당신이 어떤 명령을 할지.” 그의 시선이 조금 깊어졌다. “명령받는 상황이 궁금한 겁니까, 내가 궁금한 겁니까?” 이번에는 정말 대답하기 어려웠다.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명령이 궁금한 건지. 차도현이라는 사람이 궁금한 건지. 혹은 그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한 건지. “둘 다인 것 같아요.” 그가 잠시 침묵했다. 표정만으로는 만족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질문.” 차도현은 내 손을 바라봤다. “계약 중 나를 무서워한 적이 있습니까?” “처음에는요.” “지금은?” 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무서워요.” “무엇이?” “당신이 아니라.” 말끝을 흐렸다. 그가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는데도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변할지요.” 그 말을 꺼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에는 누가 저한테 뭘 시키면 싫었어요. 간섭받는 것도 싫었고요.” “지금도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시키는 건…….”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계속 기다리게 돼요.” 고백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차도현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내 손목을 잡지 않았다. 다만 손등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렸다. 닿을 듯 말 듯한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맥박이 빨라졌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가 내 손등을 천천히 눌렀다. “지금 내가 세 번째 명령을 내리길 원합니까?” 이번에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네.” “명확하게 대답하세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차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원해요.” 그의 손가락이 내 손에서 떨어졌다. 접촉은 짧았는데, 사라진 자리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좋습니다.” 차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하죠.” 나는 긴장한 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지난번 내가 무릎을 꿇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차가운 바닥. 내려다보던 시선. 잘했다는 목소리. “한서윤 씨.” “네.” “지금부터는 계약 시간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말투는 여전히 존댓말이었지만, 목소리는 더 낮고 단호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폈다. “계약 중에는 나를 어떻게 부르기로 했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주인님.” “다시.” “주인님.” 그의 시선이 얼굴에 머물렀다. “오늘 세 번째 명령은 간단합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작은 검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상자를 열자 검은색 천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눈가리개였다. 손끝이 조금 굳었다. 차도현은 물건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상자만 열어둔 채 물었다. “사용해 본 적 있습니까?” “없어요.” “불편합니까?” 나는 눈가리개를 바라봤다. 시야를 가린다는 건 내 통제권을 일부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이 있었다. 궁금했다. “조금 긴장돼요.” “싫습니까?” “아니요.” “확실합니까?” “네.” 차도현이 상자에서 눈가리개를 꺼냈다. 부드러운 천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늘어졌다. “세 번째 명령입니다.” 그가 내 뒤로 천천히 걸어왔다. 등 뒤에서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걸 착용하고, 내가 벗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눈을 뜨지 마세요.” 그의 손이 내 관자놀이 근처에서 멈췄다. 아직 닿지는 않았다. “동의합니까?” 나는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동의해요.” “계약 중에는?” 그가 낮게 되물었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 “네, 주인님.” 그제야 부드러운 천이 눈앞을 덮었다. 시야가 완전히 사라졌다. 매듭이 머리 뒤에서 조심스럽게 묶였다. 차도현의 손끝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목덜미를 스쳤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어깨가 움찔했다. “너무 조입니까?” “아니요.” “불편하면 바로 말하세요.” “네.” 어둠 속에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침묵. “주인님?”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가 정말 방 안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을 뻗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움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오른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합니까?” 생각보다 가까웠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네.” “나를 보고 싶습니까?” “네.” “왜요?” 또다시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표정이 궁금해서요.” “무슨 표정일 것 같습니까?” “저를 보고 있을 것 같아요.” “보고 있습니다.” 짧은 대답에 온몸이 긴장했다. 시야가 없다는 사실보다 그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서 있는지.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끝이 떨리는지. 모든 걸 그만 보고 있었다. “손을 앞으로 내미세요.” 나는 천천히 양손을 내밀었다. 곧 그의 손바닥이 내 손 아래에 닿았다.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뺄 수 있도록 받치고만 있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는 그의 손에 의지해 발을 옮겼다. “다시.” 한 걸음 더. “멈추세요.” 그가 가까이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어디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섭습니까?” “조금요.” “세이프워드는?” “빨간불.” “말하고 싶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두려움은 있었지만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차도현이 내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가 턱 끝에 닿았다. 고개가 아주 조금 들렸다. “잘하고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그 한마디에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느슨해졌다. 그는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떤 말이 나를 안심시키고, 어떤 침묵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지. “세 번째 명령의 목적이 뭔지 압니까?” “모르겠어요.”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를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격을 확인한 거예요?” “네.” “제가 못 믿는다고 했으면요?” “오늘 명령은 하지 않았겠죠.” 그의 손가락이 턱에서 떨어졌다. “계약은 계속됐을 수도 있고요.” “왜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맡기라고 강요하는 건 계약이 아니니까.” 그의 말은 늘 단순했다. 거부할 수 있다. 멈출 수 있다. 준비되지 않으면 기다린다. 그런데 그 단순한 규칙들이 오히려 나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한서윤 씨.” “네.” “이제 선택하세요.” “뭘요?” “여기서 끝낼지, 조금 더 계속할지.” 어둠 속에서 숨을 삼켰다. 그가 명령을 내렸지만, 끝을 결정할 기회를 내게 주고 있었다. 나는 원하면 지금 눈가리개를 벗을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계속할래요.” “계약 중에는?”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계속하고 싶어요, 주인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가락 사이로 깊이 들어왔다. 단단하지만 아프지 않은 힘이었다. “그럼 나를 믿고 따라오세요.”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따라갔다. 몇 걸음 뒤, 무릎 뒤쪽에 무언가 닿았다. 소파인 것 같았다. “앉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췄다. 푹신한 가죽 소파가 몸을 받쳤다. 차도현의 손은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제 눈가리개를 벗기겠습니다.” 그의 손이 머리 뒤로 향했다. 매듭이 풀리고, 천이 천천히 내려왔다. 빛이 들어오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차도현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높이보다 조금 낮았다. 그 모습이 예상 밖이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항상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았어요.” “그게 더 좋습니까?”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차도현은 눈가리개를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가져왔다. 오른쪽 위에 새로운 숫자를 적었다. 3/12. 그 숫자를 보는 순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세 번째 명령이 끝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아홉 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 “오늘 명령은 여기까지입니다.” 그가 말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차도현이 나를 바라봤다. “왜요?”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말하세요.” “오늘 자격을 확인했잖아요.” “그랬죠.” “저, 통과한 거예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내 앞에 섰다. 다시 익숙한 높이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오늘 명령을 끝까지 수행했으니 당연히 통과했습니다.” 나는 괜히 안도했다. 그런데 차도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그가 내 턱 아래로 손을 뻗었다. 닿기 직전 멈춘 손끝이 시선을 붙잡았다. “한서윤 씨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나를 믿는다는 것.”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게 왜 문제예요?” “믿음과 의존은 아주 가까우니까.” 그가 손을 거두었다. “나를 믿되, 나 없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어요.” 즉시 대답했지만 차도현은 믿지 않는 눈이었다.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했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 명령은 언제예요?” 차도현이 문고리를 잡은 채 나를 돌아봤다. “방금 내가 했던 말은 듣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냥 일정이 궁금한 거예요.” “벌써 세 번째로 같은 변명을 하는군요.” 얼굴이 뜨거워졌다. 차도현은 문을 열어주며 낮게 말했다. “다음에는 기다리지 마세요.” “네?” “내가 연락하기 전에 먼저 연락해도 됩니다.” 대문 밖으로 나온 뒤에도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먼저 연락해도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의 채팅창을 여러 번 열었다. 무슨 말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들어왔다고 할까. 오늘은 고마웠다고 할까. 아니면 다음 명령이 궁금하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도현이었다. [오늘 잘했습니다.] 그 아래 새로운 메시지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 명령은 오늘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답장을 썼다. [저도 쉽게 끝낼 생각 없어요.] 보내고 나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읽음 표시가 떴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좋습니다.] [그 말, 네 번째 명령 때 확인하죠.] 나는 어두운 현관에 선 채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아홉 번. 이제 그의 명령은 아홉 번 남았다. 그런데 나는 벌써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사진 부스를 나온 뒤에도 서윤은 몇 번이나 지갑을 열었다.방금 넣은 네 컷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첫 장은 둘 다 카메라를 보고 있었고.두 번째는 서윤이 도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세 번째는 도현이 서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순간.마지막은—“또 봅니까?”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얼른 지갑을 닫았다.“아니.”“봤잖습니까.”“내 지갑인데 내가 보든 말든.”“그건 맞습니다.”도현이 웃었다.서윤은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물었다.“도현 씨 것도 줘봐.”“왜요?”“잘 넣었나 보게.”“똑같은 사진입니다.”“그래도.”도현이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사진은 카드 사이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서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거기서 빼면 안 돼요.”“언제까지요?”“계속.”“새 사진이 생겨도?”서윤이 잠시 생각했다.“그건 그때 생각하고.”“기준이 없네요.”“내 마음이 기준이야.”“가장 어려운 기준인데.”“싫어요?”“아니요.”도현은 지갑을 다시 넣었다.“따르겠습니다.”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뒤로도 한참을 걸었다.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관광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유명한 곳을 검색하지도 않았다.작은 가게를 구경하고,편의점에서 음료를 하나 사고,벤치가 보이면 잠깐 앉았다.그러다 어느 순간 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나 다리 아파.”도현이 바로 주변을 둘러봤다.“숙소 갈까요?”“응.”“택시 부르죠.”“얼마나 걸리는데?”도현이 지도를 확인했다.“걸으면 삼십 분 정도.”“택시는?”“금방입니다.”서윤이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택시.”“걷는 건 끝?”“오늘 충분히 했어.”“파도랑 뛰기까지 했으니까요.”“그건 운동으로 치면 안 돼.”“왜요?”“재밌었으니까.”도현이 웃었다.“재미있는 운동도 있습니다.”“오늘은 없어.”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서윤은 침대에 엎어졌다.“못 움직이겠다.”도현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씻고 누우십시오.”“조금만 있다가.”“
“진짜 하나도 힌트 안 줄 거예요?”“네.”도현의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서윤은 결국 그의 손을 놓았다.“됐어. 나도 이제 관심 없어.”“정말입니까?”“응.”“그럼 다행이고요.”서윤이 바로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근데 이미 찍은 건 맞아요?”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윤.”“왜.”“관심 없다면서요.”“그건 방금 전의 나고.”“십 초도 안 됐습니다.”“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야.”도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서윤의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둘은 그렇게 골목 끝까지 걸었다.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던 길이었다.그러다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었다.서윤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아, 잠깐.”도현이 웃었다.“오늘도 머리가 난리네요.”“강릉이 나한테 왜 이래.”“바닷가니까요.”“도현 씨는 멀쩡하잖아.”“짧으니까 그렇죠.”서윤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그때 멀리 작은 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큰길에서 옆으로 빠지는 좁은 길이었다.“저기로 갈래요?”“저기요?”“응.”“뭐 있는지 압니까?”“몰라.”서윤이 먼저 방향을 틀었다.“그래서 가보는 거야.”도현도 따라왔다.“오늘 여행 방식에 완전히 적응했네요.”“그러게.”좁은 길을 따라 몇 분쯤 걸었을 때였다.먼저 들린 건 소리였다.파도.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또 바다야?”길 끝으로 내려가자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아까 지나온 곳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여기 좋다.”이번에도 검색해서 찾은 곳은 아니었다.그냥 길이 보여서 들어왔고,그 끝에 바다가 있었다.“오늘은 바다가 자꾸 나오네.”서윤이 말했다.“우리가 바다 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까요.”“그렇게 현실적으로 말하지 마.”도현이 웃었다.둘은 모래 위로 내려갔다.서윤은 이번에는 파도 가까이까지 갔다.물이 밀려오자 뒤로 물러났다.다시 다가가고.또 피했다.도현은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도현 씨도 와요.”“신발 젖습니다.”
서윤이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꽤 밝았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까지 길게 번져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어젯밤 뒤집어둔 휴대폰도 그대로였다.도현의 팔은 자신의 허리 위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진짜 자네.”평소라면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있을 사람이었다.서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도현을 구경했다.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힘이 완전히 빠진 얼굴.이불 밖으로 조금 나온 손.그 순간 어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서로 몰래 한 장씩 찍기.서윤의 시선이 협탁으로 향했다.휴대폰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바다를 보는 도현.젖은 머리로 침대에 앉아 있던 도현.밤길을 걷던 도현.그때마다 조금 더 기다렸다.그런데 지금은—서윤이 아주 천천히 휴대폰을 집었다.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켰다.화면 안에 도현이 들어왔다.잠든 얼굴만 찍으려다 조금 뒤로 물렸다.흐트러진 이불.베개.침대 옆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슬리퍼.그리고 잠든 도현.서윤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찰칵.단 한 장.곧바로 휴대폰을 뒤집었다.“됐다.”괜히 심장이 빨리 뛰었다.도현이 눈을 뜰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찍었습니까?”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굳었다.“……자고 있었잖아.”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방금 깼습니다.”“봤어요?”“뭘요.”“내가 찍는 거.”“확실히는 못 봤습니다.”서윤이 경계하듯 휴대폰을 끌어안았다.“그럼 모르는 거야.”“알겠습니다.”“그리고 보여달라고 하면 안 돼.”“마지막 날까지.”“응.”도현이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서윤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왜 웃어요.”“당신이 드디어 한 장 쓴 것 같아서요.”“모른다니까.”“네. 모릅니다.”“진짜 얄미워.”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윤은 웃고 있었다.자신의 한 장은 끝났다.이제 남은 건 도현이었다.시간을
도현의 머리가 거의 마를 때까지 서윤은 수건을 놓지 않았다.“됐어.”수건을 치우자 헝클어진 머리가 드러났다.서윤이 손끝으로 앞머리를 정리했다.“이제 사람 같다.”“그전에는 뭐였습니까.”“물에 빠진 사람.”“바다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요.”“비유잖아.”도현이 서윤의 손목을 잡았다.“이제 당신 차례 아닙니까?”“뭐가?”“샤워.”“아.”서윤은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현을 봤다.“나 씻고 나오면 뭐 할 거예요?”“기다려야죠.”“그냥?”“뭘 원합니까?”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건 내가 씻고 나와서 생각할래.”그녀가 손목을 빼내려 하자 도현이 바로 놓아주었다.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자면 안 돼요.”“안 잡니다.”“진짜.”“기다리겠습니다.”그제야 서윤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윤은 편한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도현은 침대 헤드에 기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서윤이 나오자 바로 화면을 껐다.“뭐 봤어요?”“내일 날씨.”“계획 세운 거 아니죠?”“비가 오는지만 봤습니다.”“와?”“안 옵니다.”“그럼 됐네.”서윤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다가 드라이어를 찾았다.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주세요.”“내가 할 수 있어.”“압니다.”서윤이 웃었다.“우리 오늘 이 말 몇 번 하는지 알아요?”“뭘요.”“‘할 수 있어.’ ‘압니다.’”도현도 웃었다.“그래도 주십시오.”결국 서윤은 드라이어를 넘겼다.침대 끝에 앉자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도현의 손가락이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갈랐다.서윤은 눈을 감았다.“좋아.”“뭐가요.”“여행 와서 이런 거.”“집에서도 해주는데요.”“그러니까 좋은 거야.”도현이 바람을 약하게 줄였다.“아까 제가 한 말이랑 똑같네요.”“뭐?”“낯선 데서도 똑같은 거.”서윤은 대답 대신 웃었다.머리를 다 말린 뒤에도 두 사람은 바로 눕지 않았다.서윤은 창가로 갔다.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서윤이 다시 눈을 뜬 건 창밖의 빛이 조금 어두워진 뒤였다.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낯선 천장.낯선 침대.그리고 베개 대신 머리 아래에 놓인 익숙한 팔.서윤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도현 씨.”“깼습니까?”바로 대답이 돌아왔다.서윤은 고개만 조금 들었다.“안 잤어요?”“잠깐 졸았습니다.”“나 얼마나 잤어?”“시간 안 봤습니다.”“진짜?”“네.”서윤은 협탁 위 휴대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헐.”“몇 시입니까.”“일곱 시 넘었어.”그제야 배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서윤이 그대로 멈췄다.도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들었습니다.”“못 들은 척해.”“꽤 크게 났는데요.”“그러니까 못 들은 척하라고.”서윤은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배고파.”“나갈까요?”“응.”그러면서도 일어나지는 않았다.도현이 물었다.“지금?”“오 분 뒤.”“아까도 십 분 더 잔다고 하고 꽤 오래 잤습니다.”“여행 왔으니까 괜찮아.”“그건 맞습니다.”서윤이 슬쩍 웃었다.“도현 씨.”“네.”“팔 안 저려요?”“조금.”서윤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말 안 했어?”“잘 자길래.”“그래도 빼지.”“당신이 잡고 있었습니다.”서윤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봤다.도현의 셔츠 자락이 손안에 잡혀 있었다.“내가?”“네.”“기억 안 나.”“자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합니까.”서윤은 구겨진 셔츠 부분을 손바닥으로 펴줬다.“미안.”“괜찮습니다.”“이것도 찍었어?”도현이 웃었다.“아니요.”“진짜?”“후보로는 생각했습니다.”서윤의 눈이 커졌다.“후보?”“한 장만 찍기로 했으니까.”“아.”서윤은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러면 안 찍은 게 다행인가.”“왜요.”“나 자고 있었잖아.”“평소 모습 찍자면서요.”“그건 맞는데…….”서윤이 잠깐 고민했다.“다음에는 그냥 찍어요.”“자는 모습도?”“응.”“나중에 취소하기 없습니다.”“대신 진짜 이상하게 나오면 공개만 하지
강릉에 가까워질수록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서윤은 아까보다 자주 창문 밖을 내다봤다.그러다 멀리 푸른빛이 보이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도현 씨.”“네.”“저거 바다 아니야?”도현도 앞을 보며 대답했다.“맞는 것 같습니다.”“진짜?”서윤이 창문 가까이 붙었다.건물 사이로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푸른색.그것만으로도 표정이 달라졌다.“숙소 가지 말고 진짜 바로 가요.”“그러기로 했잖습니까.”“혹시 피곤해서 마음 바뀔까 봐.”“안 바뀌었습니다.”“그럼 가까운 데 아무 데나.”“검색 안 하고?”서윤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바다만 나오면 돼.”도현은 길을 따라 그대로 차를 움직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췄다.서윤은 문을 열자마자 바람에 머리카락부터 흐트러졌다.“추워.”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차에 타지는 않았다.도현이 트렁크에서 얇은 겉옷을 꺼냈다.“입어요.”“도현 씨는?”“저는 괜찮습니다.”“또 그러지.”서윤은 옷을 받아 입었다.“같이 추워요.”“그건 이상한 요구인데요.”“그럼 나중에 춥다고 하지 마.”“알겠습니다.”두 사람은 나란히 바다 쪽으로 걸었다.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서윤의 걸음도 빨라졌다.모래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한 순간 그녀가 멈췄다.“와.”그 말 하나뿐이었다.도현은 옆에서 서윤을 바라봤다.서윤은 한동안 바다만 봤다.사진부터 찍지도 않았다.휴대폰도 꺼내지 않았다.그냥 눈앞에 펼쳐진 물결을 보고 있었다.“좋다.”도현이 물었다.“많이요?”“응.”서윤이 그제야 옆을 돌아봤다.“강릉 고르길 잘했다.”“둘이 골랐죠.”“동시에.”“네.”“그것도 신기해.”서윤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가까이 걸었다.서윤은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모습을 보다가 도현에게 말했다.“밤에 여기 다시 올까?”“벌써 밤 산책 장소 정하는 겁니까?”“아.”서윤이 입을 다물었다.“그러네.”“계획 없이 걷기로 했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