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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화. 말하지 않는 허락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9 02:52:19

며칠 뒤.

나는 도현에게 먼저 제안했다.

“오늘은 질문 줄여볼까요?”

그의 표정이 바로 진지해졌다.

“동의 확인을 줄이자는 뜻입니까?”

“아니.”

“그럼?”

“말로만 안 하고.”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신호.”

도현은 한동안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역시.

나는 설명했다.

손바닥을 펴면 계속.

손가락 두 개면 천천히.

주먹을 쥐면 멈춤.

말은 언제든 가능.

빨강이라는 말도 그대로 유효.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절대 없애지 않는 거예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해볼래요?”

“네.”

그날은 소리가 적었다.

도현이 손목을 잡기 전.

내 눈을 봤다.

나는 손바닥을 폈다.

계속.

손이 닿았다.

조금 강해졌다.

나는 그대로.

조금 더.

손가락 두 개.

즉시 힘이 줄었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확인하듯 내 눈을 바라봤다.

나는 다시 손바닥을 폈다.

그렇게 진행됐다.

평소라면.

괜찮습니까.

색깔.

계속합니까.

수없이 오가던 문장이 없었다.

대신 서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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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41화. 흐트러진 셔츠

    “이제 마음대로 봐요.”그 말이 떨어진 뒤에도 도현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의 허리를 감싼 채 얼굴만 바라봤다.서윤이 먼저 눈썹을 올렸다.“왜요.”“마음대로 보라고 해서.”“그래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그건 아닙니다.”도현의 손이 흰 셔츠의 옷깃을 천천히 정리했다.이미 단추 하나는 서윤이 직접 더 풀어둔 상태였다.조금 전 그림 속에서는 단정하게 흘러내리던 셔츠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도현이 손끝으로 옷깃을 살짝 밀었다.한쪽 어깨가 드러났다.그곳에 입술이 닿았다.서윤이 숨을 들이켰다.“아까도 이거 보고 있었어요?”“네.”“그림 그리면서?”“계속.”“그래서 참았다는 거예요?”도현이 이번에는 목 가까이에 입을 맞췄다.“그것만은 아닙니다.”서윤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또 뭐.”“말하면 또 놀릴 것 같은데.”“안 놀릴게요.”“못 믿겠습니다.”서윤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말해봐요.”도현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길게 풀어진 머리.손등을 덮던 소매.그리고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던 서윤.“당신이 제 옷을 입고 있는 게 생각보다 좋았습니다.”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왜?”“제 것인데 당신한테 더 잘 어울려서.”“그건 칭찬인가?”“칭찬입니다.”“그럼 이 셔츠 내가 가져도 돼요?”도현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조건이 있습니다.”“뭔데.”“가끔 입어주십시오.”서윤이 웃었다.“그 정도면 쉽지.”도현이 다시 가까워졌다.이번 키스는 아까보다 느렸다.서윤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등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고개만 조금 돌리면 두 사람이 전부 보일 터였다.그런데 이번에는 보지 않았다.그저 자신에게 닿는 입술과 가까운 체온에 집중했다.도현이 떨어지려 하자 서윤이 옷자락을 잡았다.“어디 가요.”“안 갑니다.”“그럼 왜 떨어져.”서윤이 다시 끌어당겼다.입술이 겹쳤다.몇 번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도현이 웃었다.“오늘 그림 그리느라 참은 건 저인데.”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40화. 웃는 얼굴을 그리는 법

    “……아마도.”서윤의 대답에 도현이 또 웃었다.“지금 또 웃었어요.”“당신 때문에.”“그러니까 그대로 있어요.”“사람이 어떻게 계속 같은 표정으로 있습니까.”“내가 알아서 할게요.”서윤은 결국 《사이》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져왔다.다시 식탁에 앉았을 때 도현은 이미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 자세 좋아요.”“아침 먹다 말고 정말 그리게요?”“응.”서윤은 스케치북을 펼쳤다.“대신 나 못 그린다고 놀리기 없기.”“지난번 그림도 좋았습니다.”“그건 도현 씨가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고.”“그럴 수도 있죠.”서윤의 연필이 멈췄다.“그렇게 바로 인정한다고?”“좋아하는 사람이 그린 제 얼굴인데 마음에 안 들 이유가 있습니까.”서윤은 괜히 입술을 한번 눌렀다.“그냥 커피나 마셔요.”“웃으면 안 됩니까.”“아니.”서윤이 다시 종이를 봤다.“웃어야 돼요.”“어렵군요.”“그러니까 나 봐요.”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향했다.서윤은 연필을 움직이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도현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맞아. 그거.”몇 초 뒤 다시 확인했다.또 눈이 마주쳤다.또 웃었다.세 번째에도 마찬가지였다.서윤이 결국 연필을 내려놓았다.“알겠다.”“뭘.”“도현 씨 웃게 하는 법.”“뭡니까.”“나 보면 돼.”도현이 피식 웃었다.서윤은 바로 연필을 들었다.“또 했다.”“일부러 아닙니다.”“움직이지 마요.”선 하나.눈매.입술 끝.서윤은 몇 번이나 종이와 도현을 번갈아 봤다.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결국 삼십 분쯤 지나서야 연필을 내려놨다.“됐다.”“보여주십시오.”“잠깐.”서윤은 그림 아래에 뭔가 적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돌렸다.도현이 그림을 봤다.정교하지는 않았다.선도 조금 어설펐다.하지만 커피잔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얼굴만큼은 분명했다.그 아래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나를 보면 웃는 사람.도현이 한동안 말이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39화. 아침이 된 줄도 모르고

    서윤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익숙한 침실 천장이 아니었다.낮은 간접조명.벽을 따라 이어진 책장.그리고 시야 끝에 걸린 커다란 거울.서윤은 몇 초 동안 눈만 깜빡였다.그러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느꼈다.“아.”《사이》였다.정말 여기서 잠들었다.서윤은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러그 위에 나란히 누운 채였다.언제 가져왔는지 얇은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서윤은 어젯밤을 천천히 떠올렸다.춤을 췄고.그림을 그리다가 실패했고.샌드위치를 먹었다.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소파에 있다가 러그로 내려왔다.그 뒤로는—서윤이 입술을 꾹 눌렀다.“진짜 오래 있었네.”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도현이 눈을 떴다.“깼습니까.”잠긴 목소리였다.“응.”“잘 잤어요?”“도현 씨는?”“방금까지 잘 잤습니다.”서윤이 웃었다.“여기서 자니까 어때요?”도현은 잠시 주변을 봤다.“침대가 더 편합니다.”“분위기 없게.”“허리는 솔직합니다.”서윤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게 누가 여기서 자자고 했지.”“당신.”“말리지 그랬어요.”“안 들었을 것 같은데.”“맞아요.”서윤은 다시 도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몇 시지?”둘 다 동시에 문 쪽을 봤다.휴대폰도 시계도 밖에 있었다.서윤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근데 밖이 밝긴 해요.”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아침은 맞는 것 같습니다.”“몇 시인지는 모르고?”“네.”서윤이 만족스럽게 다시 누웠다.“그럼 됐어.”“확인 안 합니까.”“조금 있다가.”도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서윤은 그 손길을 받다가 갑자기 물었다.“도현 씨.”“네.”“어제 제일 좋았던 거 뭐였어요?”“하나만?”“응.”도현은 꽤 오래 생각했다.서윤이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왜 그렇게 오래 고민해요.”“많아서.”“그중 하나.”도현의 시선이 방 가운데로 향했다.“춤.”서윤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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