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오후.서윤은 《사이》의 창가 의자에 앉아 도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도현은 처음에는 책을 읽었다.십 분쯤 지나자 결국 책을 덮었다.“서윤.”“응.”“계속 그렇게 볼 겁니까.”“응.”“왜.”“연습.”“무슨 연습을 사람 얼굴만 보면서 합니까.”서윤은 무릎 위에 올려둔 스케치북을 펼쳤다.“어제 말했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그려준다고.”“지금 그리면 되잖습니까.”“아직 뭘 그릴지 못 정했어요.”“어제는 전부 고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그러니까 고르는 중.”서윤의 시선이 다시 도현에게 향했다.오늘 도현은 편한 검은 티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집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었다.그런데 막상 그림으로 남긴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어나봐요.”도현이 순순히 일어났다.“창가.”자리를 바꿨다.서윤은 의자에 도현을 앉혀놓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팔은 편하게.”“이렇게?”“응.”잠시 바라봤다.“아닌데.”“뭐가.”“너무 멀쩡해.”“그림을 그리는데 멀쩡하면 안 됩니까.”“내가 그리고 싶은 도현 씨는 이게 아닌 것 같아.”서윤은 다시 고민했다.소파에도 앉혀봤다.책도 들려봤다.커피잔까지 가져왔다.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결국 도현이 물었다.“대체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은 겁니까.”“그걸 찾고 있다니까.”“한 시간째?”서윤이 벽시계를 찾듯 주변을 봤다가 멈췄다.《사이》에는 일부러 시계를 두지 않았다.“한 시간이나 됐어요?”“체감상.”“거짓말.”도현이 웃었다.서윤은 그 얼굴을 바라봤지만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이것도 아니야.”“웃는 얼굴 그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그건 어제 아침에 그렸잖아요.”서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다른 거.”“뭘.”“나만 아는 얼굴.”도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멈췄다.“그게 뭡니까.”“모르겠어.”서윤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그러니까 찾는 중이지.”도현이 옆에 앉았다.“그냥 평소처럼 있다가 찾으면 그때 그리십시오.
“이제 마음대로 봐요.”그 말이 떨어진 뒤에도 도현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의 허리를 감싼 채 얼굴만 바라봤다.서윤이 먼저 눈썹을 올렸다.“왜요.”“마음대로 보라고 해서.”“그래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그건 아닙니다.”도현의 손이 흰 셔츠의 옷깃을 천천히 정리했다.이미 단추 하나는 서윤이 직접 더 풀어둔 상태였다.조금 전 그림 속에서는 단정하게 흘러내리던 셔츠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도현이 손끝으로 옷깃을 살짝 밀었다.한쪽 어깨가 드러났다.그곳에 입술이 닿았다.서윤이 숨을 들이켰다.“아까도 이거 보고 있었어요?”“네.”“그림 그리면서?”“계속.”“그래서 참았다는 거예요?”도현이 이번에는 목 가까이에 입을 맞췄다.“그것만은 아닙니다.”서윤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또 뭐.”“말하면 또 놀릴 것 같은데.”“안 놀릴게요.”“못 믿겠습니다.”서윤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말해봐요.”도현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길게 풀어진 머리.손등을 덮던 소매.그리고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던 서윤.“당신이 제 옷을 입고 있는 게 생각보다 좋았습니다.”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왜?”“제 것인데 당신한테 더 잘 어울려서.”“그건 칭찬인가?”“칭찬입니다.”“그럼 이 셔츠 내가 가져도 돼요?”도현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조건이 있습니다.”“뭔데.”“가끔 입어주십시오.”서윤이 웃었다.“그 정도면 쉽지.”도현이 다시 가까워졌다.이번 키스는 아까보다 느렸다.서윤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등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고개만 조금 돌리면 두 사람이 전부 보일 터였다.그런데 이번에는 보지 않았다.그저 자신에게 닿는 입술과 가까운 체온에 집중했다.도현이 떨어지려 하자 서윤이 옷자락을 잡았다.“어디 가요.”“안 갑니다.”“그럼 왜 떨어져.”서윤이 다시 끌어당겼다.입술이 겹쳤다.몇 번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도현이 웃었다.“오늘 그림 그리느라 참은 건 저인데.”
“……아마도.”서윤의 대답에 도현이 또 웃었다.“지금 또 웃었어요.”“당신 때문에.”“그러니까 그대로 있어요.”“사람이 어떻게 계속 같은 표정으로 있습니까.”“내가 알아서 할게요.”서윤은 결국 《사이》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져왔다.다시 식탁에 앉았을 때 도현은 이미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 자세 좋아요.”“아침 먹다 말고 정말 그리게요?”“응.”서윤은 스케치북을 펼쳤다.“대신 나 못 그린다고 놀리기 없기.”“지난번 그림도 좋았습니다.”“그건 도현 씨가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고.”“그럴 수도 있죠.”서윤의 연필이 멈췄다.“그렇게 바로 인정한다고?”“좋아하는 사람이 그린 제 얼굴인데 마음에 안 들 이유가 있습니까.”서윤은 괜히 입술을 한번 눌렀다.“그냥 커피나 마셔요.”“웃으면 안 됩니까.”“아니.”서윤이 다시 종이를 봤다.“웃어야 돼요.”“어렵군요.”“그러니까 나 봐요.”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향했다.서윤은 연필을 움직이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도현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맞아. 그거.”몇 초 뒤 다시 확인했다.또 눈이 마주쳤다.또 웃었다.세 번째에도 마찬가지였다.서윤이 결국 연필을 내려놓았다.“알겠다.”“뭘.”“도현 씨 웃게 하는 법.”“뭡니까.”“나 보면 돼.”도현이 피식 웃었다.서윤은 바로 연필을 들었다.“또 했다.”“일부러 아닙니다.”“움직이지 마요.”선 하나.눈매.입술 끝.서윤은 몇 번이나 종이와 도현을 번갈아 봤다.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결국 삼십 분쯤 지나서야 연필을 내려놨다.“됐다.”“보여주십시오.”“잠깐.”서윤은 그림 아래에 뭔가 적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돌렸다.도현이 그림을 봤다.정교하지는 않았다.선도 조금 어설펐다.하지만 커피잔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얼굴만큼은 분명했다.그 아래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나를 보면 웃는 사람.도현이 한동안 말이
서윤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익숙한 침실 천장이 아니었다.낮은 간접조명.벽을 따라 이어진 책장.그리고 시야 끝에 걸린 커다란 거울.서윤은 몇 초 동안 눈만 깜빡였다.그러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느꼈다.“아.”《사이》였다.정말 여기서 잠들었다.서윤은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러그 위에 나란히 누운 채였다.언제 가져왔는지 얇은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서윤은 어젯밤을 천천히 떠올렸다.춤을 췄고.그림을 그리다가 실패했고.샌드위치를 먹었다.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소파에 있다가 러그로 내려왔다.그 뒤로는—서윤이 입술을 꾹 눌렀다.“진짜 오래 있었네.”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도현이 눈을 떴다.“깼습니까.”잠긴 목소리였다.“응.”“잘 잤어요?”“도현 씨는?”“방금까지 잘 잤습니다.”서윤이 웃었다.“여기서 자니까 어때요?”도현은 잠시 주변을 봤다.“침대가 더 편합니다.”“분위기 없게.”“허리는 솔직합니다.”서윤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게 누가 여기서 자자고 했지.”“당신.”“말리지 그랬어요.”“안 들었을 것 같은데.”“맞아요.”서윤은 다시 도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몇 시지?”둘 다 동시에 문 쪽을 봤다.휴대폰도 시계도 밖에 있었다.서윤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근데 밖이 밝긴 해요.”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아침은 맞는 것 같습니다.”“몇 시인지는 모르고?”“네.”서윤이 만족스럽게 다시 누웠다.“그럼 됐어.”“확인 안 합니까.”“조금 있다가.”도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서윤은 그 손길을 받다가 갑자기 물었다.“도현 씨.”“네.”“어제 제일 좋았던 거 뭐였어요?”“하나만?”“응.”도현은 꽤 오래 생각했다.서윤이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왜 그렇게 오래 고민해요.”“많아서.”“그중 하나.”도현의 시선이 방 가운데로 향했다.“춤.”서윤의 눈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윤은 어둠 속에서 도현의 가슴에 기대 있었다.방 안은 조용했다.희미하게 들리는 건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도현 씨.”“네.”“안 졸려요?”“조금.”“나도.”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윤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도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목으로 내려갔다.익숙한 은색 팔찌가 손끝에 걸렸다.서윤은 각인된 부분을 찾아 천천히 문질렀다.“이거 여기서 만지니까 이상하다.”“팔찌?”“응.”붙잡아 달라고 말할 수 있도록.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와 지금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서윤이 도현의 손을 꽉 잡았다.“지금은 말 안 해도 잡고 있는데.”“그러네요.”“도현 씨도.”“네.”“잡아달라고 말해도 돼요.”잠깐 정적이 흘렀다.도현이 손을 뒤집어 서윤의 손을 맞잡았다.“그럼 잡고 있어주십시오.”서윤은 대답 대신 손에 힘을 줬다.“이렇게?”“조금 더.”서윤이 웃었다.“욕심 생겼네.”“말해도 된다면서요.”“잘했어요.”서윤은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어둠에 눈이 익었지만 여전히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궁금해졌다.“나 지금 보고 싶어요?”“네.”“얼마나?”“불을 켜고 싶을 정도로.”서윤이 소파에서 내려왔다.“그럼 켜요?”“당신이 정하십시오.”서윤은 조명 스위치 앞에 섰다.손끝이 다이얼에 닿았다.아주 조금 돌렸다.바닥 가까이부터 희미한 빛이 번졌다.조금 더.소파의 윤곽이 보였다.도현의 얼굴도 천천히 드러났다.서윤은 거기서 멈췄다.“이 정도.”도현이 그녀를 바라봤다.서윤도 그를 봤다.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옷깃도 마찬가지였다.서윤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다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그리고 웃었다.“엉망이네.”“누가요.”“둘 다.”도현이 일어났다.서윤 앞으로 걸어왔다.“후회합니까.”“뭘.”“거울 크게 한 거.”“전혀.”서윤은 거울 앞으로 갔다.도현도 자연스럽게 뒤에 섰다.서윤은 거울 속의 자신보다 도현을 먼저 봤다
러그 위에 누운 채 서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현의 팔을 베고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낮게 켜둔 간접조명 때문에 방 안에는 부드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음악도 어느새 멈췄다.“도현 씨.”“네.”“우리 지금 몇 시쯤 됐을까요?”“시간 안 보기로 했습니다.”“알아요. 그냥 맞혀보라고.”도현이 잠시 생각했다.“열한 시?”“나는 열두 시 넘었을 것 같은데.”“확인할까요?”“아니.”서윤이 바로 대답했다.“궁금한 채로 있을래요.”도현의 가슴에 뺨을 붙였다.규칙처럼 정해놓고 지키려는 게 아니었다.그저 오늘만큼은 다음 시간이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았다.잠시 뒤 서윤이 몸을 일으켰다.“배고파요.”도현도 따라 일어났다.“뭐 먹을까요.”“잠깐.”서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밖에 나가면 휴대폰 보게 될 것 같아.”“안 보면 됩니다.”“냉장고에 뭐 있어요?”“샌드위치 만들어 먹을 정도는.”서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섰다.“그럼 빨리 갔다 와요.”“같이 안 갑니까?”“나는 여기 있을래.”“혼자?”“응.”서윤이 러그 위에 다시 털썩 누웠다.“도현 씨 없는 《사이》도 한번 있어보고 싶어.”도현이 문 앞에서 돌아봤다.“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천천히 해요.”문이 열렸다.그리고 닫혔다.서윤은 혼자 남았다.조용했다.그녀는 천장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소파.책장.거울.창가의 의자.조금 전까지 도현과 함께 있었던 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이상하게 외롭지는 않았다.오히려 편했다.서윤은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아직 책이 많지는 않았다.둘이 같이 읽을 만한 것 몇 권.도현의 건축 책 몇 권.그리고 아래쪽 한 칸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서윤이 열어봤다.두 장의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자신이 그린 도현.나를 볼 때 제일 다정한 사람.그리고 도현이 그린 자신.나를 보고 웃기 직전.“벌써 가져다 놨네.”서윤은 혼자 웃었다.그때 문이 열렸다.“뭘 보고 있습니까.”도현이었다.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