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그녀가 있는 술집을 바라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안으로 다시 들어갈까.
친구들에게 돌아갈까.
아니면 그냥 집에 갈까.
머리로는 세 번째가 정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남자도 있었다.
둘.
여자도 몇 명.
동창 모임인지, 직장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친구는 아니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야, 박동진.”
내가 뭐라고.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한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테이블 사람들이 동시에 웃었다.
그녀도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귀엽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꾸민 것 같았다.
집이나 병원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라 그런지 옷도 신경 쓴 느낌이었다.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고.
나는 한동안 바라보다 문득 주변을 살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냐.’
부산 시내까지 나와서.
술집 앞에서.
한 여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오히려 더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
나는 그냥 보고 있는 거다.
말도 안 걸고.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도 없다.
죄책감까지 느낄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내가 정상적으로 다가가면 그녀도 나를 나쁘게 보지는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동네.
나이도 비슷하고.
예전에 같은 버스를 타던 기억까지 있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서 말을 걸면—
혹시 모르잖아.
호감을 느낄 수도.
나는 잠시 그녀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맞은편 창문이 아니라.
같은 테이블.
“누나, 원래 여기 오래 살았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하고.
맥주 한잔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락처도 알고.
“…….”
상상이 거기까지 가자 피식 웃었다.
“꿈도 크다.”
현실에서는 계단에서 바로 앞에 있어도 말 한마디 못 했다.
번호를 물어볼 용기는 더더욱 없다.
특히 지금은.
백수.
그 단어가 또 마음에 걸렸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 달랐을까.
회사 명함 하나라도 있고.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고.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덜 움츠러들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뭐라도 먹자.”
컵라면 하나.
핫바 하나.
생수.
계산해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물을 붓고 3분.
나는 계속 유리 밖을 봤다.
건너편 술집 입구가 보였다.
“이거 완전 잠복인데.”
혼자 웃었다.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후루룩.
술을 마셔서 그런지 짠 국물이 유난히 맛있었다.
핫바도 한입 베어 물었다.
나는 먹으면서도 몇 번이고 술집을 확인했다.
아직 있다.
10분.
20분.
30분.
친구들에게서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디 갔냐?]
나는 짧게 답했다.
[먼저 간다. 술 많이 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술은 꽤 마셨다.
다만 집으로 가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다리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이상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우연이었다.
다음에는 호기심.
그다음에는 기다림.
이제는……
그녀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는 컵라면 국물을 다 마셨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담배를 한 개비 더 물었다.
불을 붙였다.
후—
‘언제 나오려나.’
시계를 봤다.
11시가 가까웠다.
그때.
술집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담배를 내렸다.
그녀였다.
친구들과 함께 나왔다.
“왔다.”
또 그 말.
며칠 전부터 입에 붙어버린 말.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다 같이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봤다.
오늘 유난히 예뻐 보였다.
아마 옷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술기운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점점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한 남자가 그녀에게 뭔가 말한다.
그녀가 대답한다.
나는 괜히 표정을 굳혔다.
‘누구야.’
바로 다음 순간 스스로에게 말했다.
‘친구겠지.’
그래도 눈이 갔다.
남자는 잠시 후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진짜 미쳤네.”
나는 작게 웃었다.
하나둘 흩어진다.
그녀도 친구 한 명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뒤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저벅.
저벅.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심장이 뛰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덜 긴장됐다.
익숙해진 것이다.
‘이게 익숙해져도 되는 건가.’
그녀는 시내 쪽으로 조금 걷다가 한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간판을 봤다.
올리브영.
“화장품 사려나.”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나도 들어갔다.
문이 열리며 밝은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밖이 어두웠던 탓인지 순간 눈이 부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남성용 화장품 코너로 갔다.
괜히 토너 하나를 들었다.
뒤쪽.
한 코너 건너편에 그녀가 있었다.
친구와 화장품을 보고 있었다.
손등에 뭔가 발라보고.
친구에게 보여주고.
둘이 웃는다.
나는 고개를 숙여 제품 뒷면을 읽는 척했다.
그리고—
힐긋.
또 고개를 내렸다.
잠시 후.
힐긋.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연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냥 쇼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도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 사실에 안심했다.
그녀가 립 제품을 몇 개 집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다른 코너로 이동했다.
나도 한참 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시선만 따라갔다.
‘남자친구는 없나.’
또 그 생각.
나는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멀어서 정확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눈에 띄는 커플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없나…….”
혼잣말처럼 말했다.
순간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오늘 한번 말 걸어볼까?’
머릿속에 생각이 확 들어왔다.
여기라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혹시 저……”
아니다.
뭐라고 할 건데.
같은 동네 사시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지부터 이상하다.
병원에서 봤어요?
더 이상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버스 탔죠?
십 년 전 이야기를 갑자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직 아니다.
시기를 보자.
지금은 아니다.
그녀가 계산을 마쳤다.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있다가 괜히 민망해 작은 립밤 하나를 집었다.
계산했다.
‘내가 이걸 왜 샀지.’
밖으로 나오니 그녀와 친구는 이미 버스정류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조금 떨어져 걸었다.
얼마 뒤 친구와 헤어진 모양이었다.
그녀 혼자 버스를 탔다.
나도 같은 버스.
이번에는 조금 더 먼 자리에 앉았다.
버스 안은 늦은 시간이라 한산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가끔 유리창 반사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버스가 집 근처로 가까워졌다.
그녀가 일어났다.
나도 조금 뒤에 일어났다.
버스에서 내렸다.
밤거리.
둘은 같은 방향.
처음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그녀가 앞.
내가 뒤.
그녀가 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달동네 계단이 시작되자—
그녀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
나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터벅터벅 올라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빨라졌다.
‘뭐지?’
혹시—
나를 눈치챘나?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어젯밤 창가.
오늘 술집.
버스.
이 모든 게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
‘설마.’
나는 거리를 더 벌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빠르게 올라갔다.
원래 밤길에서는 그렇게 걷는 사람도 많다.
특히 여자 혼자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무안해졌다.
‘내가 너무 가까웠나.’
걸음을 더 늦췄다.
그녀와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자기 집 방향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
이상했다.
그동안 나는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그녀가 혹시 나 때문에 불편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천천히 집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왔다.
가방을 던졌다.
주머니에서는 올리브영에서 산 립밤이 나왔다.
“아.”
그걸 보자 헛웃음이 터졌다.
“별걸 다 샀네.”
물을 한 잔 마셨다.
술기운은 많이 가셨다.
그러다—
또 맞은편 창문이 생각났다.
‘집에 들어갔겠지.’
나는 잠깐 망설였다.
오늘은 충분히 봤다.
술집에서도.
올리브영에서도.
버스에서도.
같은 길에서도.
그런데 결국 발은 옥상으로 향했다.
철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
맞은편 집.
3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역시 들어갔네.”
나는 난간 쪽으로 갔다.
그런데—
창문이 닫혀 있었다.
커튼도 쳐져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가 나왔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란 불빛만 커튼 너머로 조금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아침에는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산 시내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술집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올리브영까지 갔다.
같은 버스를 탔다.
같은 길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녀의 창문 앞이었다.
나는 난간에 팔을 올렸다.
“…….”
이젠 솔직히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매일 보고 싶었다.
하루라도 안 보면 궁금했다.
오늘은 뭘 했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기분은 좋았을까.
일은 힘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이 계속 생겼다.
처음에는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 사람이 궁금했다.
너무 궁금했다.
나는 닫힌 커튼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보고 싶네.”
이 말은 전과 조금 달랐다.
창문을 통해 보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녀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스스로도 놀랐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나를 모른다.
내 이름도.
내가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동진.”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너 진짜 큰일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닫힌 창문을 바라봤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저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