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미국 뉴욕 맨해튼 록펠러 센터 65층, 레인보우 룸(Rainbow Room). 해외 100대 글로벌 기업 총수들과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운집한 가운데, 2026 포브스(Forbes) 글로벌 어워드가 해외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받은 공동 소개문에는 시후의 이름 다음에 ‘그의 아내’라는 표현이 이어져 있었다. 은서는 줄을 그어 자신의 직책으로 고쳤다. 통합 자산이라는 숫자도 회사 가치와 개인 보유 재산을 나누어 설명하도록 요청했다.
“둘이 같이 받는 상인데 너무 따지는 것 같나요?”
시후는 수정한 종이를 받았다.
“네 이름이 빠진 쪽이 잘못 쓴 거지.”
시후는 그녀가 그은 선을 지우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크기로 적힌 시안을 나란히 놓았다.
은서는 수정한 소개문을 한 번 더 읽었다. 문장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누구의 아내라
서울 귀환 후, 밤 11시.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스튜디오. 두 아이는 성북동 별채에서 편안히 잠들었고, 시후와 은서는 단 하루 동안 모든 대외 업무를 내려놓고 둘만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10억 사기 덫에 걸려 벼랑 끝에 몰렸던 26살의 은서가 찾아왔던 칠흑 같은 ‘창문 없는 방’.그러나 오늘, 그 방은 전면 특수 스마트글래스 통유리창으로 한강의 황금빛 물결과 서울의 별빛 야경을 온전히 담아내는 찬란한 빛의 궁전이 되어 있었다. 은서가 얇은 실크 셔츠만을 걸친 채 창가에 기대어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다가온 시후의 큰 손이 은서의 발목에 채워진 핑크 다이아몬드 발찌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은서는 들어올 때 벽의 이음새를 한 번 만졌다. 원래 창이 없던 집무실과 바깥쪽 공간을 나누던 벽의 자리였다. 새로 마감한 면은 매끈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문이 있던 방향이 남아 있었다.“남겨둔 물건이 있나?”시후가 물었다. 은서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당시 사용하던 스탠드의 교체 전구가 포장째 들어 있었다. 사소한 물건 하나가 오래전의 냄새를 끌고 왔다. 젖은 코트와 종이, 어두운 방에서 처음 맡은 시더우드 향.은서는 서랍을 닫고 문으로 걸어갔다. 잠금쇠를 만지지 않아도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을 잠깐 열었다가 제 손으로 닫았다. 시후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오늘은 제가 여기 오자고 했죠.”“그래.”“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돌아갈 때도 제가 먼저 문을 여는 거.”시후의 눈이 손잡이에 머물렀다. 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묻지 않았다. 자신이 만질 때마다 떠올리는 감각을 남자도 잠깐 생각해봤으면 했다.문밖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미국 뉴욕 맨해튼 록펠러 센터 65층, 레인보우 룸(Rainbow Room). 해외 100대 글로벌 기업 총수들과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운집한 가운데, 2026 포브스(Forbes) 글로벌 어워드가 해외에 생중계되고 있었다.대기실에서 받은 공동 소개문에는 시후의 이름 다음에 ‘그의 아내’라는 표현이 이어져 있었다. 은서는 줄을 그어 자신의 직책으로 고쳤다. 통합 자산이라는 숫자도 회사 가치와 개인 보유 재산을 나누어 설명하도록 요청했다.“둘이 같이 받는 상인데 너무 따지는 것 같나요?”시후는 수정한 종이를 받았다.“네 이름이 빠진 쪽이 잘못 쓴 거지.”시후는 그녀가 그은 선을 지우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크기로 적힌 시안을 나란히 놓았다.은서는 수정한 소개문을 한 번 더 읽었다. 문장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누구의 아내라는 말 대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적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무대에 오를 마음을 가볍게 했다.담당자가 다시 인쇄해 가져온 종이를 시후가 그녀에게 먼저 건넸다. 은서는 자기 부분을 읽은 뒤 이번에는 맞다고 했다. 시후도 자신의 이름 아래 내용을 확인했다. 서로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나란히 종이를 내려놓았다.그가 담당자에게 직접 돌려주었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수정된 소개문에는 EUN에서 해온 일이 제자리를 찾았다. 은서는 그 짧은 문장 뒤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무대에서 질문을 받으면 그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무대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시후의 소매 단추가 의자 틈에 걸렸다. 은서가 손을 뻗어 빼주었다. 거울 앞에서 자세를 고치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방금 표정은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군.”“왜요? 세상에서 제일
일주일 후, 한남동 ‘EUN’ 글로벌 타워 최상층 30층 펜트하우스 ‘유리궁전’.사방이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푸른 물결과 맑은 가을 하늘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가운데, 아들 도윤과 딸 서아의 성대한 ‘첫돌 잔치’가 열렸다. 순백의 실크 턱시도를 입은 시후와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은 은서가 돌잡이 테이블 앞에 쌍둥이를 앉혔다.은서는 음식보다 아이들이 앉을 의자를 먼저 확인했다. 도윤은 낯선 옷깃이 불편한지 자꾸 잡아당겼고, 서아는 머리 장식을 세 번이나 벗었다. 시후가 장식을 다시 집으려 하자 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 사진에 없어도 돼요. 싫다는데.”남자가 장식을 내려놓았다. 기념사진을 찍을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들렸지만, 시후는 장식을 다시 집지 않았다. 아이의 옷깃부터 편하게 펴 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사회자가 돌잡이 물건을 설명하는 동안 은서는 인장을 만졌다. 법인 인장을 본떠 만든 기념 모형이었다. 실제 업무에 쓰는 인장은 사무실에 보관돼 있었다. 만년필 역시 뚜껑이 열리지 않게 준비했고, 루페는 그녀가 옆에서 함께 잡아줄 생각이었다.시후가 진짜 인장을 가져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은서는 제 아버지에게 받았던 무거운 시선들을 떠올렸다.“오늘 잡는 걸로 회사 맡길 거 아니죠?”은서는 모형 인장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이들이 뜻을 모르고 집는 물건에 어른들의 바람만 무겁게 얹고 싶지는 않았다. 도윤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드리자 그녀는 그 손을 따라 작게 두드려줬다.그가 짧게 웃었다.“그럴 생각이었으면 이사회를 불렀겠지.”“자, 우리 도윤 도련님과 서아 아기씨의 돌잡이를 시작하겠습니다!”하객들이 숨을 죽
오전 10시, 서울 성북동 구 서경그룹 본가 대저택 정문.16살에 이 정문을 처음 지날 때, 은서는 어머니 손을 놓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어떤 집일지 몰랐다. 오늘은 문 위에 달린 금빛 현판을 읽으며 안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서울시 제1호 미래문화유산: 故 서혜진 앤틱 보석 아카데미 및 박물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서울시장, 그리고 유럽 명품 하우스 수장 등 수백 명의 하객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에메랄드빛 테일러드 수트를 단아하게 차려입은 은서가 단상 옆에서 순서를 기다렸다.조금 전, 손님을 맞기 전에 은서는 안내판의 설명을 한 줄 고쳤다. 서혜진의 이름 앞에 길게 붙은 가문의 직함을 덜고, 실제로 만들었던 작품과 연구를 먼저 적었다. 어머니는 누군가의 아내로만 기억될 사람이 아니었다.전시 담당자가 바꾼 설명문을 보여주었다. 은서는 어머니가 돋보기를 걸어두었던 책상 모서리를 만지다가 손을 거뒀다. 이제는 관람객이 함께 볼 유품이었다. 작은 흠집까지 남기기로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다.“수선하면 새것처럼 만들 수 있었는데.”시후가 뒤에서 말했다.“새 책상은 어디에나 있어요. 어머니가 쓰신 자국은 여기에만 있고요.”은서는 책상 앞 의자가 놓일 자리를 봤다. 이제 저곳에는 어머니 대신 배우러 온 사람이 앉을 것이다. 흠집이 난 모서리에 손을 올려보고, 이런 책상에서 어떤 보석이 나왔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었다.전시 담당자가 보존용 덮개를 씌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은서는 그러라고 한 뒤 한 걸음 물러났다. 자기만 만질 수 있는 유품으로 묶어두려 했다면 박물관을 열 이유도 없었다. 손을 뗀 자리가 잠깐 서늘했다.시후는 손을 뻗지 않고 옆에서 지켜봤다. 은서가 살피는 자리를 따라 그의 시선도 옮겨 갔다. 정문으로
다음 날 정오, 눈보라가 걷히고 거울처럼 맑게 갠 스위스 레만 호수.푸른 만년설 봉우리가 호수 수면에 그림처럼 비치는 가운데, 카일이 현지에서 마련한 전용 요트가 부드럽게 물결을 갈랐다. 지중해의 에밀리아호를 옮겨온 것이 아니라, 레만 호수에서 운항하는 배였다.요트 2층 테라스 데크.배에 오르기 전 은서는 바람을 확인하고 선장에게 가까운 항로로 부탁했다. 아이들이 불편해하면 곧 돌아오기로 했다. 시후는 전에 이 호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은서가 난간에서 한 걸음 떨어진 의자를 고르자 곁의 자리를 당겼다.서아는 담요 밖으로 손을 내밀어 햇빛을 잡으려 했다. 도윤은 물결보다 시후의 셔츠 단추에 관심이 많았다. 은서는 아이들의 얼굴이 가려지지 않게 모자를 조금 올려주었다.“이 풍경을 기억할까요?”도윤이 그때 시후의 손가락을 잡았다. 남자가 호수에서 눈을 떼자 아이가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은서는 웃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먼 풍경을 모두 담지 못해도 오늘 누구의 품에서 물결을 봤는지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담요가 들려 그녀는 사진을 찍기 전에 아이부터 덮어줬다.“기억하게 해주면 되지. 사진으로.”시후가 휴대폰을 내밀었지만 한 손에 아이가 있어 화면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은서가 대신 받아들었다. 카메라에는 호수보다 남자의 턱과 아이의 손이 크게 찍혔다. 그녀는 다시 찍지 않고 저장했다. 멋진 풍경만 남겼다면 오늘 시후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따스한 햇살 아래, 은서와 시후는 따뜻한 니트 옷을 입은 아기 도윤과 서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이들이 알프스의 맑은 바람에 방긋 웃으며 옹알이를 터뜨렸다. 시후가 은서의 곁으로 다가와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케이스 안에는 최상급 마터호른 에메랄드와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
은서는 로젠버그 고성의 현관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예전에는 이 문을 지나 도망쳤고, 그 뒤에는 시후가 부서진 문 너머로 들이닥쳤다. 지금은 새로 손본 문짝이 열리고 카일이 아이들을 맞으러 나왔다.“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요.”카일이 팔을 벌리자 도윤은 시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아는 낯선 은빛 지팡이에 손을 뻗었다. 은서가 아이의 손을 받아 내리며 웃었다.이번 연회는 이미 지난 결혼기념일과 다가오는 아이들의 첫돌을 함께 축하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결혼식과 출생일이 같은 계절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오래 의논해 정했다.카일이 준비한 방의 열쇠를 은서에게 건넸다. 그녀가 받아 가방 안에 넣자 시후는 짐을 든 채 기다렸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날짜도 정해 두고 온 여행이었다. 은서는 가방을 여미며 가져온 짐을 살폈다. 전처럼 무엇을 두고 나가야 할지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아이들이 쉴 방을 확인한 뒤 은서는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시후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었다.***스위스 몽트뢰, 알프스 만년설과 레만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의 로젠버그 고성(Château de Rosenberg). 결혼 기념 연회와 쌍둥이 도윤과 서아의 첫돌을 앞두고, 유럽 하이주얼리 업계와 주요 컬렉터 300여 명이 운집한 그랜드 볼룸.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순백의 실크 오프숄더 드레스를 유려하게 걸친 한은서가 단상에 올랐다.그녀의 목에는 어머니의 혼이 깃든 200캐럿 마터호른 에메랄드 네크리스가 눈부신 초록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턱시도를 입고 곁에 선 시후가 은서와 눈을 맞췄다. 지난날 레만 호숫가 선착장에서 두 무릎을 꿇던 모습이 잠깐 겹쳤다. 은서는 인사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이 편히 쉬고 있는지 한 번 더 떠올렸다.&l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