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식탁에 앉기까지 권희연의 볼은 시종일관 빨갰다.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우유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힐끔거렸다. 방금 주방에 있었던 사람이 차승혁이라니.
도우미가 어제 휴가를 내면서 퇴근 전에도 재차 얘기했지만 갑자기 돌아오는 바람에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차승혁은 성격이 쌀쌀맞고 말수가 적은 편이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그녀가 항상 리드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눈치껏 칭찬으로 분위기를 살렸다.
“요리도 할 줄 알아요?”
“그럼요.”
차승혁의 말투가 무덤덤했다.
“나에 대해 아는 건 있고?”
대화는 늘 이렇게 끊기기 일쑤였다.
결혼하고 나서 가끔 비아냥거릴 때가 있었는데 아마 전 남친과 도피하려 했던 일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심하지 않아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권희연은 결국 입을 다물고 먹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차승혁은 작은 샌드위치 여섯 개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다 먹어요.”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거지?
처음으로 만들어준 요리인데 남기는 꼴은 보기 싫다는 건가? 그래서 아마 이런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도 모른다.
권희연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다 못 먹어요.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후나 내일 먹으면 안 돼요?”
“네.”
차승혁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설마 농담인가?
말도 안 돼, 기분이 이 정도로 좋다니?
그리고 밥 먹는 내내 침묵이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권희연이 설거지를 했다.
주방에서 나오자 차승혁은 이미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린 톤 셔츠는 일반적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색이지만 피부가 워낙 하얀 편이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유난히 맑고 깨끗해 보였다.
귓가에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승혁은 불을 붙였지만 담배를 꺼내지 않았고 마치 지루함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같은 동작만 반복했다.
곧이어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권희연은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넌지시 물었다.
“요즘 시간 있어요? 아빠가 밥 먹으러 오라고 하네요.”
“아니요. 나중에 가요.”
권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승혁은 은색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투자액이 얼마나 되는데요?”
그녀를 돕겠다는 뜻이었다.
권희연은 민망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나한테는 껌값이죠.”
“알아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혹시 몰라서 여지는 두었다.
“일단 저 혼자서 투자자를 찾아볼게요.”
차승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다음 한 마디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거기 약 올려두었어요.”
약이라니?
권희연이 집어 들고 확인하는 찰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런 약도 있을 줄이야.
...
차승혁이 떠난 뒤 권희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휴대폰에 저장한 투자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찍고 싶은 작품은 로맨스 코미디 영화 [짝사랑]이다.
각본은 무명의 신인 작가가 집필했고, 등장인물들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풋풋한 짝사랑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 직접 대본을 수정했다.
“올해 예산 삭감으로 투자는 어려울 것 같아요.”
“로맨스 코미디는 최근에 손해 본 적이 많아서 투자 대상에 없어요.”
“신인 감독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
방 안이 어두워지자 권희연은 그제야 시계를 바라보았다. 때는 이미 저녁 8시를 가리켰다.
투자자들은 기회는커녕 설명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감독으로 일한 지 어언 2년, 특히 여성은 이 바닥에서 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렇게 연달아 좌절을 겪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허탈한 나머지 쪼그리고 앉아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투자자의 연락인 줄 알았는데 차승혁의 비서 김훈이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연말이라 일이 많아 요즘 집에 못 들어간다고 하시네요.”
사무실에 침대가 있기에 바쁘면 종종 외박했다.
권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고 김훈이 회의실 문을 살포시 열었다.
차승혁은 회사 임원들과 미팅 중이며 한창 인수합병의 장단점에 대해 논의했다. 테이블에 도시락이 두 봉지나 놓여 있었지만 상사가 말을 꺼내기 전에 아무도 꼼짝 안 했다.
김훈이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모님께 연락드렸어요.”
차승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를 잠시 중단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말을 마치고 나서 자리를 뜨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도시락을 가지러 갔다. 월급쟁이가 그렇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사무실로 돌아온 차승혁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라고 하던?”
김훈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 말도 없었어요.”
차승혁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김훈이 셰프가 만들어서 가져온 도시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식사하시겠어요?”
이내 무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 엔터 대표님께 연락해 봐.”
비록 업계에서 상위권에 드는 제작사이지만 차광 그룹의 이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게다가 차광 그룹은 전국 영화관의 3/1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차승혁과 친해지는 게 나무 엔터 대표 지선호의 평생소원이 되었다. 그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작용하면 영화 편성에서 비중을 높일 수 있어 곧바로 수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 신분과 지위가 높은 데다가 성격마저 쌀쌀맞아 당최 연이 닿지 않았다.
차승혁의 연락이라는 소리에 지선호는 룸 안을 가득 메운 배우와 감독을 내팽개치고 일부러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말씀하세요.”
“안녕하세요, 지 대표님. 괜찮은 작품이 있어서 대표님 명의로 투자하고 싶어요. 수수료로 20%를 드리죠.”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이지 않은가?
게다가 차승혁이 점 찍어둔 작품인데 망할 걱정은 없다.
지선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수수료가 웬 말입니까? 무슨 작품인데요? 저도 겸사겸사 투자해도 될까요?”
차승혁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메이저 급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식사 한 끼 대접할게요.”
지선호는 서둘러 사양했다.
예의상 겸손하게 말한 줄 알았는데 차승혁의 비서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 넋을 잃고 말았다.
[짝사랑.]
감독이 누구지? 듣도 보도 못했는데?
...
권희연은 대충 저녁을 먹고 침실로 돌아와 휴대폰 연락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락할 만한 사람은 이미 연락을 다 돌렸고, 투자는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거절하거나 고민 좀 해본다는 애매한 답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투자자를 소개받아야 할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임시방편으로 웹 영화라도 찍어서 반응을 보기로 했다.
이때, 휴대폰이 울리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권 감독님? 청운 기획 윤서준입니다. 투자자들과 함께 감독님의 작품 설명서를 봤는데 마음에 들어서 투자하기로 결정했어요. 언제 시간 있어요? 구체적인 건 직접 만나서 얘기해요.”
윤서준은 청운 기획의 대표였다.
권희연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작품이 그의 눈에 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감사합니다! 전 내일도 가능해요.”
“그럼 오전 10시에 뵙는 거로 하시죠.”
“네.”
전화를 끊고 곽태민이 술잔을 들어 윤서준과 건배했다.
“감사해요. 대표님.”
윤서준이 활짝 웃었다.
“별말씀을요. 저도 곽 대표님과 권 감독님의 사정이 딱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죠.”
곽태민은 잔에 담긴 와인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꼭 빼앗아 올 거예요.”
...
허가인에게 좋은 소식을 공유한 다음 권희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소파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내 샤워를 마치고 팩까지 했고, 내일 최상의 컨디션으로 투자자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다음 날 아침 9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절친 시예진의 연락을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녀는 대뜸 물었다.
“희연아, 곽태민이 귀국한 다음 둘이 만난 적 있어?”
권희연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곧이어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알고 있을걸? 파파라치한테 사진이 찍혀서 실검 1위에 올랐어!”
권희연은 어안이 벙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