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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도망가지 않는 사람

Autor: Rionha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07 19:19:37

# 5화. 도망가지 않는 사람

약 냄새가 나는 손끝이 자꾸 신경 쓰였다.

도윤은 약을 먹고도 한참 칭얼거렸다. 감기 기운 때문인지, 낯선 병원과 약국을 다녀온 탓인지, 아이는 태건의 품에 안긴 채 내 손가락만 꼭 붙잡고 있었다.

“누나...”

작은 목소리가 잠결처럼 새어 나왔다.

나는 도윤의 손을 빼지 못했다.

“응, 여기 있어.”

그 말에 도윤의 손가락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태건은 그런 도윤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문이 열리자 생각보다 작은 집 안이 보였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고 하기엔 물건이 많았고, 아이가 있는 집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색깔 블록과 작은 자동차들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벽에는 삐뚤빼뚤 붙은 스티커가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린이용 물컵, 체온계, 반쯤 접힌 어린이집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이태건의 집.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고등학교 때의 이태건은 늘 복도 끝, 학교 뒤편, 소문 속에 있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의 물컵과 체온계를 두고 사는 사람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들어와.”

태건이 낮게 말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괜찮아요. 약만 먹였으니까 저는 이제...”

“손.”

그가 내 말을 끊었다.

“도윤이가 안 놔.”

내 손가락을 잡은 도윤의 손이 보였다. 아이는 태건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내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결국 신발을 벗었다.

“잠깐만 있을게요.”

“응.”

태건은 도윤을 방 안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눕자마자 다시 칭얼거리며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침대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도윤아, 누나 여기 있어.”

“가지 마...”

“안 가. 잠들 때까지만 있을게.”

“잠들면 가?”

작은 눈이 반쯤 떠졌다.

그 질문에 대답이 막혔다.

아이의 말은 가끔 너무 정직해서, 어른의 애매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태건이 대신 말했다.

“누나는 집에 가야 돼.”

도윤의 입술이 삐죽였다.

“싫어.”

“도윤아.”

“누나 있어.”

태건은 한숨을 삼키듯 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사람을 겁먹게 하던 이태건이, 세 살짜리 아이 앞에서는 이렇게 자주 졌다.

나는 도윤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그럼 누나가 도윤이 잠드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

“진짜?”

“응. 진짜.”

“손.”

“손 잡고 있을게.”

도윤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방 안은 조용해졌다. 창문 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태건은 문가에 기대서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도윤의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봐요?”

“신기해서.”

“뭐가요?”

“얘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

“애들은 원래 아픈 날엔 아무한테나 붙는 거 아니에요?”

“아무한테나 안 붙어.”

태건의 대답은 짧았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도윤의 숨소리가 조금씩 고르게 변했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작은 손가락이 내 손가락 하나를 꼭 감싸고 있었다.

태건이 낮게 말했다.

“고마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뭐가요.”

“오늘.”

“아이가 아팠잖아요.”

“그래도.”

그는 잠든 도윤을 내려다봤다.

“네가 안 왔으면 좀 힘들었을 거야.”

그 말은 이상하게 마음 한쪽을 건드렸다.

이태건이 힘들었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들렸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도윤이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요.”

“응.”

“어린이집에서 많이 울었대요.”

“알아.”

태건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나한테 전화 오기 전에 이미 많이 울었을 거야.”

“태건 씨가 늦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울면, 부모는 늘 자기 탓을 먼저 하는 걸까. 태건이 부모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지금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했다.

잠시 뒤, 태건이 거실로 나갔다가 물컵을 들고 돌아왔다.

“마셔.”

“괜찮아요.”

“병원까지 뛰어왔잖아.”

“그쪽도 뛰어왔잖아요.”

“난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우리는 잠깐 서로를 보았다.

도윤이 작게 뒤척였다.

나는 바로 손을 토닥였다.

“쉬이. 괜찮아.”

도윤은 다시 잠잠해졌다.

태건이 물컵을 침대 옆 작은 협탁에 내려놓았다.

“고집 세네.”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말이 나가고 나서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태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말 잘하네.”

“원래 못하는 편은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는 한마디도 안 했잖아. 나만 보면 도망가고.”

또 그 얘기.

나는 괜히 목이 말라 물컵을 들었다.

“그때는... 무서웠으니까요.”

“지금은 안 무섭고?”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안 무섭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무섭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전과는 다른 무서움이었다.

그가 화낼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자꾸 신경 쓰이게 될까 봐 무서웠다.

“조금은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태건의 눈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럼 오늘도 도망가겠네.”

“도망가는 거 아니고 집에 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니거든요.”

도윤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아이는 깊이 잠든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빼려 했지만, 도윤은 잠결에도 다시 붙잡았다.

태건이 그걸 보고 낮게 웃었다.

“못 가겠네.”

“웃을 일이 아니거든요.”

“나도 웃긴 건 아니야.”

그런데 그의 얼굴은 조금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도윤이 잠들면 진짜 갈 거예요.”

“알아.”

“붙잡지 마세요.”

태건은 잠깐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내가?”

그 물음이 이상했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붙잡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는 시선을 피했다.

“도윤이가요.”

“아.”

그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둘 다 알았다.

그 말이 도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걸.

도윤이 완전히 잠든 뒤에도 나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가 혹시 깰까 봐, 그리고 태건이 방 문가에 그대로 서 있어서.

겨우 손을 빼고 거실로 나오자, 태건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요?”

“에타.”

그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태건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보았다.

아까 하린이 보내준 글은 댓글이 더 늘어 있었다.

[인문관에서 이태건 애 엄마 봄]

[진짜 신입생이라며?]

[애가 아빠라고 부른 남자가 이태건 맞음?]

[그럼 애 엄마 아니면 뭔데]

[근데 애 얼굴 언급은 좀 아니지 않냐]

[여자애 이름 까는 건 선 넘음]

[이태건이랑 엮이면 피곤하겠다]

댓글들은 멋대로였다.

나와 태건, 도윤의 하루를 아무렇게나 잘라 붙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추측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걱정하는 척하며 더 큰 말을 얹었다.

태건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내가 처리할게.”

그 말에 나는 바로 그를 봤다.

“어떻게요?”

“글 올린 놈 찾으면 돼.”

“찾아서요?”

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얼굴이 더 위험했다.

나는 낮게 말했다.

“싸우지 마요.”

그가 나를 봤다.

“싸운다고 안 했어.”

“그 얼굴은 싸운다는 얼굴인데요.”

“...”

“도윤이 자요.”

그 말에 태건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글은 신고해요. 캡처도 해두고. 근데 찾아가서 겁주거나, 때리거나, 그런 건 하지 마요.”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저도 알아요.”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근데 태건 씨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떠들어요. 도윤이까지 더 말하게 돼요.”

도윤이라는 이름에 태건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나는 조금 놀랐다.

“진짜요?”

“네가 하지 말라며.”

그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내 말이 그렇게 쉽게 통할 줄 몰랐다.

태건은 나를 보며 말했다.

“대신 너도 혼자 보지 마. 이런 거.”

“그럼요?”

“나한테 보내.”

“왜요?”

“내가 봐야지.”

“그럼 태건 씨가 또 화내잖아요.”

“참을게.”

그 말에 나는 잠깐 멈췄다.

참을게.

고작 세 글자였는데, 어쩐지 무거웠다.

태건은 참는 법을 배우는 중인 사람 같았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바로 주먹부터 쥐던 사람이, 이제는 도윤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나 때문에 멈추는 법을 배우는 사람.

나는 괜히 목이 막혔다.

“잘했어요.”

말이 나가고 나서 내가 더 놀랐다.

태건도 조금 멈췄다.

“뭐?”

“방금요. 안 찾아가겠다고 한 거.”

“애 취급하냐.”

“칭찬받을 일은 맞잖아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

“진짜 이상한 애네.”

“또 이상하대.”

“근데.”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나쁘진 않네.”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이제 갈게요.”

태건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밤이잖아.”

“아직 밤 아니에요.”

“그래도.”

이번엔 거절하려다가, 도윤이 깰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1층까지만요.”

태건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나오는데, 집 안쪽에서 도윤이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동시에 멈췄다.

잠시 뒤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잘 자네요.”

“응.”

태건은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낡은 빌라 계단에는 낮은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게 둘 다 천천히 걸었다.

2층과 1층 사이 계단참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던 남학생 둘이 멈춰 섰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은 나와 태건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했다.

한 명이 휴대폰을 든 채 중얼거렸다.

“진짜 같이 있었네.”

내 몸이 굳었다.

태건이 먼저 움직이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태건이 나를 내려다봤다.

하지 마요.

소리 내지 않았지만, 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멈췄다.

남학생 하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 그냥... 에타에서 봐서요.”

그냥.

그 말에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는 계단을 한 칸 내려갔다.

“그냥이요?”

남학생들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봤다.

태건도 나를 봤다.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아이 아파서 병원 다녀왔고, 약 먹이고 재운 거예요.”

“아,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어떤 뜻이었는데요?”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나 태건 씨 얘기는 그렇다 쳐도, 아이 얘기는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잖아요.”

“...”

“그냥 봤다, 그냥 궁금했다, 그냥 말한 거다. 그 그냥이 제일 무례해요.”

계단이 조용해졌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불편하게 굴면 피하고, 소문이 나면 숨고, 나만 조용하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도윤이 아팠고, 태건은 참았고, 나는 그걸 봤다.

그걸 아무렇게나 씹히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계단을 비켜 내려간 뒤에야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태건은 한참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잘했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칭찬을 들을 일이었나.

아니, 아까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잘했어요.

잘했어.

나는 시선을 피했다.

“태건 씨가 움직일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응.”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무슨 오해.”

“제가... 막 태건 씨 편든다거나.”

“편든 거 아니야?”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건은 한 걸음 내려와 내 옆에 섰다.

“아니어도 돼.”

그가 말했다.

“근데 방금은 내 편 같았어.”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윤이 편이었어요.”

“그럼 나도 껴 있네.”

“왜 그렇게 되는데요?”

“도윤이 아빠니까.”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빌라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골목은 조용했고, 가로등 아래에 작은 벌레들이 날고 있었다.

“여기까지면 돼요.”

내가 말했다.

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괜찮아요. 큰길까지 금방이에요.”

“번호.”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네 번호.”

“왜요?”

“도윤이 비상 연락망.”

나는 어이없어서 그를 보았다.

“비상 연락망이요?”

“응.”

“방금 너무 자연스럽게 핑계 대신 거 알아요?”

“핑계 아니야. 오늘 봤잖아. 도윤이가 너 찾는 거.”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정말 도윤이 때문에예요?”

태건은 내 휴대폰을 받아들며 잠깐 멈췄다.

“처음은.”

“처음은?”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 번호를 찍어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곧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내 이름을 저장하려다가 멈췄다.

“뭐라고 저장해.”

“유민서요.”

“도윤이 누나?”

“하지 마세요.”

“비상 누나?”

“진짜 하지 마세요.”

태건은 아주 조금 웃었다.

그리고 화면에 천천히 입력했다.

[유민서]

그 세 글자가 그의 휴대폰 안에 들어가는 걸 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그의 번호를 저장했다.

[이태건]

저장하고 나서 화면을 끄려는데, 태건이 물었다.

“성까지?”

“그럼 뭐라고 해요?”

“태건.”

“싫어요.”

“왜.”

“이상하니까요.”

“뭐가.”

“그냥요.”

태건은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이 자꾸 사람을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도망가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집 도착하면 문자해.”

“제가 왜요?”

“비상 연락망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지.”

“도윤이 핑계 대지 마요.”

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를 가만히 보았다.

나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갈게요.”

“유민서.”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요?”

“도망가지 마.”

골목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망가지 마.

그 말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부탁처럼 들렸다.

나는 겨우 말했다.

“집에 가는 거라니까요.”

“응.”

그는 낮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도착하면 연락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큰길까지 걷는 동안, 휴대폰이 손 안에서 이상하게 무거웠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 화면만 보고 있었다.

연락을 해야 하나.

안 하면 정말 도망가는 것 같을까.

결국 나는 짧게 보냈다.

[도착했어요]

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

답장은 조금 늦게 왔다.

[도망가지 마]

나는 화면을 오래 내려다봤다.

그 말이 또 왔다.

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가 답장을 썼다.

[도윤이 핑계 대지 마요]

보내고 나서 심장이 뛰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이번엔 아닌데]

나는 침대 끝에 앉은 채 한참 그 문장을 보았다.

이번엔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도윤이가 나를 붙잡는다고만 생각했던 하루였다.

그런데 어쩌면.

나를 붙잡은 건 아이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 조용한 대학 생활은 끝났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생각보다 그게 싫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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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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