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6화. 비상 연락망
[이번엔 아닌데]
휴대폰 화면에 뜬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이번엔 아니라니.
도윤이 핑계가 아니라면, 대체 뭐라는 건데.
나는 큰길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채 답장을 쓰려다 지우고, 다시 쓰려다 또 지웠다.
처음엔 [무슨 뜻인데요]라고 썼다가 지웠고, 그다음엔 [장난하지 마요]라고 썼다가 지웠다.
결국 가장 무난한 문장을 골랐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보내고 나니 괜히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응]
고작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가 이상하게 사람을 더 신경 쓰이게 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미쳤나 봐.”
작게 중얼거리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나를 흘끗 보고 지나갔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져 괜히 빠르게 걸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신발장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대학 첫날이었다.
그냥 대학 첫날.
그런데 나는 오늘 길 잃은 아이를 달랬고, 고등학교 때 피해 다니던 이태건과 재회했고, 아이 엄마라는 소문에 휘말렸고, 병원에 갔고, 태건의 집까지 다녀왔다.
정상적인 하루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하린이었다.
[야 유민서]
[살아있냐]
[답장 안 하면 너네 집 쳐들어간다]
[이태건 집 갔다며]
[너 지금 뭐 하는 중인데]
[설마 아직 거기야?]
나는 급히 답장을 보냈다.
[집이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나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 야! 유민서! 너 진짜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할래?
“미안.”
― 미안으로 끝날 일이야? 너 오늘 학교 첫날에 일진 선배 애랑 엮이고, 애 엄마 소문 나고, 병원 갔다가, 그 선배 집까지 갔어. 이게 미안으로 끝날 일이냐고.
“정리해서 들으니까 더 이상하네.”
― 원래 이상해!
나는 신발장 앞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자마자 등이 푹 꺼졌다.
그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느꼈다.
“도윤이가 아팠어.”
― 그 애기?
“응. 열이 나서 어린이집에서 연락 왔고, 병원 같이 갔어.”
― 아니, 어린이집이 왜 너한테 연락을 해?
“도윤이가 내 번호 적힌 쪽지를 가지고 있었대.”
― 너 번호를 왜 줬는데?
“그건 네가 적어줬잖아.”
잠깐 정적이 흘렀다.
― 아.
“아?”
― 내가 그랬지.
“응. 네가 그랬어.”
하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 그래도 그게 진짜 어린이집 비상 연락망처럼 쓰일 줄은 몰랐지.
나도 몰랐다.
그냥 도윤이가 내 손을 놓지 않으니까, 하린이 장난처럼 적어준 쪽지였다. 그런데 그 쪽지 하나가 나를 병원으로, 태건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제는 이태건의 휴대폰에 내 번호까지 저장돼 있었다.
도윤이 비상 연락망.
말도 안 되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거절하지 않은 건 나였다.
― 그래서 이태건 선배는 어때?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 사람. 네가 고등학교 때 무서워했다며.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무서운 건 맞았다.
지금도 가끔 그 눈을 보면 몸이 먼저 굳었다.
하지만 오늘 본 태건은 무섭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윤 이마를 몇 번이나 확인하던 손.
약병 뚜껑을 제대로 못 열 만큼 긴장하던 얼굴.
내가 계단에서 남학생들에게 말했을 때 조용히 기다려주던 시선.
그리고 마지막 문자.
도망가지 마.
도윤이 핑계 대지 마요.
이번엔 아닌데.
나는 괜히 이마를 짚었다.
“잘 모르겠어.”
― 위험해?
“응.”
― 어떤 의미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은 눈치가 빨랐다.
― 아. 그쪽이구나.
“무슨 그쪽.”
― 사람 위험하게 흔드는 쪽.
“아니야.”
― 너 대답 느렸어.
“피곤해서 그래.”
― 그래. 피곤한 애가 목소리는 왜 그렇게 들떠 있는데?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린이 수화기 너머에서 낮게 웃었다.
― 아무튼 조심해. 소문 아직 완전히 안 가라앉았어. 근데 웃긴 건, 아까 네가 계단에서 한 말 퍼졌나 봐.
“무슨 말?”
― 아이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게 벌써 퍼졌어?”
― 응. 누가 댓글에 썼더라. 유민서가 직접 말했대. 애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아이 이름 꺼내지 말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까지 올라갔구나.”
― 근데 그 뒤로 분위기 좀 바뀌었어. 이태건 애 엄마냐고 난리 치던 애들보다, 애기 얘기 그만하라는 댓글이 더 많아졌어.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
적어도 도윤 이름이 더 이상 장난처럼 오르내리진 않았으면 했다.
― 내일 학교 올 거지?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가기 싫었다.
하루만 쉬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오늘 일을 전부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갈 거야.”
― 오. 유민서 성장했네.
“놀리지 마.”
― 진심이야. 내가 옆에 있을게.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고마워.”
전화를 끊고 씻고 나오자, 밤이 깊어 있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이태건에게 도착했다고 연락해야 했다.
해야 한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하는 게 괜히 이상했다.
정말 도윤 때문인지, 아니면 태건 때문인지 나도 헷갈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어요]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봤다.
1분.
3분.
5분.
왜 답장이 없지.
설마 도윤이 다시 아픈가.
아니면 태건이 잠든 건가.
그럴 수 있다. 오늘 태건도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10분쯤 지났을 때 메시지가 왔다.
[도윤이 열 내림]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자]
[누가요?]
[너]
나는 화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명령인가.
나는 괜히 반항심이 올라와 답장을 썼다.
[그쪽도 자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나중에]
또 그랬다.
나중에.
태건은 잠자는 것도 미루는 사람 같았다.
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이 자요?]
[응]
[그럼 그쪽도 자면 되잖아요]
조금 긴 침묵 뒤, 답장이 왔다.
[애 열 다시 오를까 봐]
그 한 문장에 마음이 조용해졌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태건의 집. 작은 매트. 잠든 도윤. 그리고 그 옆에서 열을 확인하며 밤을 새울 이태건.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알람 맞춰놓고 조금이라도 자요]
[네가 깨워줄 거야?]
심장이 덜컥했다.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야.
이 사람 뭐야.
한참 답장을 못 하고 있는데, 다시 메시지가 왔다.
[농담]
전혀 농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져 이불을 끌어올렸다.
[농담 이상해요]
[처음 해봐서]
[거짓말하지 마요]
[진짜인데]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고등학교 때의 이태건이 농담을 처음 해봤다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을 웃기는 법보다, 아이 열 재는 법을 먼저 외운 사람 같았으니까.
그날 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느껴졌다.
어제보다는 덜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누군가는 대놓고 쳐다봤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보다가 나를 확인했다.
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 걸었다.
도망가지 않기로 했으니까.
“유민서!”
하린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왔네. 잘했어.”
“내가 초등학생이야?”
“오늘은 칭찬받아도 돼.”
하린은 내 팔짱을 끼고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 덕분에 조금 덜 혼자인 기분이었다.
우리는 첫 강의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런데 강의동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야?”
하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무리 너머를 보았다.
그리고 멈췄다.
이태건이 서 있었다.
검은 후드.
한 손에는 작은 아이 가방.
다른 손에는 작은 물병.
도윤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있었다.
어제의 소문 때문에.
그리고 그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나라는 걸, 나는 너무 쉽게 알았다.
하린이 내 팔을 꽉 잡았다.
“민서야.”
“응.”
“쟤 너 기다리는 거 맞지?”
“아닌 것 같기도...”
그 순간 태건이 나를 봤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그는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내 주변의 시선들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망했다. 맞네.”
태건은 내 앞에 멈췄다.
“유민서.”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왜요?”
태건은 손에 들고 있던 아이 가방에서 작은 자동차 장난감을 꺼냈다.
빨간색 미니카였다.
어제 내가 도윤에게 굴려줬던 그 장난감.
“도윤이가 너한테 주래.”
나는 멍하니 미니카를 내려다봤다.
“이걸요?”
“응.”
“왜요?”
“고맙다고.”
그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하린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나는 장난감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 위에 작은 빨간 자동차가 올라왔다. 어제 도윤이 약을 먹고 약속처럼 굴려달라던 자동차.
이런 걸 학교까지 가져오다니.
“이걸 굳이 여기까지 가져왔어요?”
“도윤이가 울어서.”
“왜요?”
“네가 안 받으면 싫대.”
나는 한숨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태건이 그걸 봤다.
“웃네.”
“안 웃었어요.”
“웃었어.”
“아니라고요.”
“그럼 됐다.”
“뭐가요?”
“오늘은 안 도망가네.”
말문이 막혔다.
주변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다.
소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이 상황은 분명 또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제만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나는 빨간 미니카를 가방 앞주머니에 조심히 넣었다.
“도윤이 열은요?”
“내렸어. 어린이집 갔고.”
“다행이네요.”
“오늘 끝나고 시간 돼?”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하린이 옆에서 작게 숨을 삼켰다.
나는 태건을 올려다봤다.
“왜요?”
“도윤이가 너 또 오래.”
“또 도윤이 핑계네요.”
“이번엔 맞아.”
그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아닌 때도 있었다는 거네요.”
태건의 눈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짧은 침묵.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봤다.
“있었지.”
그 한마디에 주변 소리가 멀어졌다.
하린이 옆에서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작게 말했다.
“둘이 진짜 뭐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태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내 가방에 넣힌 빨간 미니카를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아니라고 해도.
우린 이미 너무 엮였다고.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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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