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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Author: KRYSE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2 10:35:04
새벽 5시 30분.

유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

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

유진은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정원 한편의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묵묵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잠시 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친 유진이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

허리를 숙여 흙을 만지던 에구치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어제 저희 언니가 밤늦게까지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워낙 대책 없는 스타일이라 걱정했거든요”

“그럼… 다음에 뵙죠”

에구치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 하자 유진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을 뻔하다가 허공에서 손을 거두며 외쳤다.

“저! 제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 드릴 게요”

“네?”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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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 식품관에서 최고급 식재료들과 온갖 간식 그리고 셰프급 주방 도구들을 두 손 가득 무겁게 사 들고 유정과 유진은 에구치의 임대 아파트로 향했다.텅 비어있는 좁은 주방.그곳이 새로 산 각종 조리도구들로 가득 채워졌다.그리고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정이 번개처럼 주문한 4인용 최고급 세라믹 식탁 세트와 번쩍이는 최신 주방 가전들이 집 안으로 배달되어 들어왔다.“와… 이렇게 가구까지 들어오니까 꼭 어렸을 때 너랑 나 소꿉놀이 주방세트에서 엄마놀이 하는 것 같다. 여기 부엌 사이즈가 딱 그때랑 비슷한 것 같지?”“여기 공용 공간인데… 우리 맘대로 이렇게 짐들 채워도 되나? 집주인한테 미리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딱 보면 몰라? 진짜 컵라면 밖에 안 먹은 부엌이야. 아무 것도 없잖아. 심지어 접시도 수저세트도 컵도 딱 2개씩. 그리고 나 혼자 쓰자고 이래? 다 같이 쓸 거고 거기다 이렇게 텅 빈 주방을 꽉꽉 채워준다는데 감사해야지 무슨?”유정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온통 신이 나 있었다.반면에 유진은 남의 영역을 강제로 침범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도저 같은 유정의 말대로 상황은 종료되었다.마블링이 예술인 최고급 한우 등심을 듬뿍 넣은 불고기 오일 파스타…은은한 레몬 소스를 곁들인 그릴 납작복숭아 샐러드…그리고 달콤하게 토치로 그을린 크렘 브륄레까지.유진은 고등학교 시절 스위스 요리학교에서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역시! 우리 유진… 결혼 수업 한다고 배운 솜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너 아예 이쪽으로 커리어를 잡아도 될 듯! 사실 파리에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보다 네가 해 준 음식이 더 그리웠어”새 식탁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며 유정이 만족스러운 듯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웠다.언니의 미소에 잠시 불편했던 유진의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음식 식는데… 언제 오신다고 했어?”유진이 은근슬쩍 현관문을 흘낏 바라보며 묻자 유정이 포크를 쥐며 쾌활하

  •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EPISODE 20

    새벽 5시 30분.유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유진은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정원 한편의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묵묵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잠시 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친 유진이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허리를 숙여 흙을 만지던 에구치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유진은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어제 저희 언니가 밤늦게까지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죠?”“네. 괜찮습니다”“다행이네요. 워낙 대책 없는 스타일이라 걱정했거든요”“그럼… 다음에 뵙죠”에구치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 하자 유진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을 뻔하다가 허공에서 손을 거두며 외쳤다.“저! 제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 드릴 게요”“네?”에구치의 짙은 눈동자가 유진을 향했다.유진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여기…지대가 높아서… 아래 정류장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고 힘드니까”“괜찮습니다. 바이크로 와서…”에구치가 헬멧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리고 정원 한 편에 서 있는 블랙 색상의 바이크가 눈에 보였다.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묵직한 바이크 시트 위로 무심히 걸쳐지는 순간…엔진이 거칠고 와일드한 배기음을 토해내며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매캐한 가솔린 냄새와 에구치의 묵직한 잔상이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유진은 자신이 선의로 베푼 호의가 단칼에 베어나가자 가슴 한구석이 쌉싸름했다.마치 자신과 친해지기를 꺼려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정중했다.어제 저녁 순대국밥집에서 유정의 엉뚱한 궤변을 들으며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그 남자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온도감.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서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전공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유진의 시

  •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EPISODE 19

    그의 집에 오자마자 유정은 집도 둘러보지 않고 유진의 차 트렁크에서 거대한 여행 가방을 낑낑거리며 꺼내 와 텅 빈 작은 아파트에 냅다 짐부터 풀었다.화려한 대저택에 비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좁고 소박한 아파트였다.벽에 비스듬히 기댄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얆은 티셔츠 너머로 풍기는 짙은 수컷의 체취가 좁은 임대 아파트 벽면에 부딪히며 묘하게 야릇하고 밀폐된 긴장감을 자아냈다.“이 방인데… 둘러 보세요”싱글 침대 하나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에 187cm의 단단하고 거대한 에구치의 체구가 들어서자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훅 밀려들며 비좁아졌다.“여기 지내기 괜찮겠어요?”에구치가 방문 틀에 기댄 채 묻자 유정이 침대 매트리스에 털썩 앉으며 화사하게 웃었다.유정의 얼굴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감돌았다.“네. 딱인데요. 제 마음에 쏙 들어요”“그럼 한달에 50만원. 공과금 포함해서 주면 됩니다”“저 혼자 쓰는 비용인 거죠?”“네”“그럼 월세를 100 드릴게요. 그럼 유진이 여기서 맘껏 있어도 될까요? 여기 유진이 학교 바로 앞이고 저랑 유진이 한 몸이라 계속 붙어 다닐 것 같은데”에구치는 탁자 위의 현금 뭉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하게 대꾸했다.“공간이 크지 않아서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면 70만원만 주시죠”“아니요. 100 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유진이도 맘이 편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공용공간에서 생활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할게요. 불편하시지 않게”“전 상관없어요. 집에서는 잠만 자니까…”에구치의 무뚝뚝하면서도 배려 깊은 태도에 유정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근데 호칭은 어떻게 정리할까요?”“맘대로 하세요. 편한대로”“그럼 오빠? 어때요?”“저 죄송한데… 먼저 일어나 볼게요. 언니! 나 갈게”“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집에는 이미 안 들어간다고 했는데 왜?”“그건 부산 갈 줄 알았으니까 그런 거고 언니도 피곤할테니까 그냥 혼자 편히 쉬어”유진은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좁은

  •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EPISODE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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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EPISODE 17

    청담동의 한 중고 명품 숍.유진은 자신이 가진 에르메스 켈리 백 컬렉션 중 하나와 반클리프 아펠 목걸이를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팔아치웠다.솔직히 평생 가격표를 보고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유진은 그 제품들의 가격도 제대로 몰랐다.그리고 거의 사용도 하지 않은 제품을 팔면서 숍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보여준 금액이 맞는 금액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손에 쥐어진 현금 뭉치가 생각보다 큰 금액이어서 차로 돌아오자마자 유진은 폰으로 중고 시세를 검색해 보았다.그리고 이내 이마를 짚었다.“아… 너무 싸게 팔았네”“뭐야? 우리 청담동 한복판에서 대놓고 호구 당한 거야?”“그러니까 대책도 없이 이렇게 서두르니까… 암튼 담부터는 국물도 없어”“알았다. 대신 크게 갚을 게. 사채이자로”유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어느 호텔로 갈래?”“글쎄… 반얀으로 갈까? 아님 깔끔하게 신라?”두 자매가 세상 물정 모르는 화려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뒷좌석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구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화에 훅 끼어 들었다.“얼마나 가출할 예정인 가요?”“최대한 오래? 하지만 안 들키고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6월 말에 다음 학기 등록금이 비서실에서 지불될 테니까. 그럼 대략 3개월?”유정의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에구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럼 그 다음은 요?”“이제 계획 세워 봐야 줘”“지금 버짓 (Budget)이 얼마 죠?”이번엔 유진이 백미러로 에구치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현금으로 대략 2천만원. 중간 중간 생활비는 내 카드로 결제하면 되니까… 3개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유진의 말에 에구치가 폰 화면을 슥슥 넘기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검색해 보니… 말씀하신 호텔 비용만 한달 3천인데 3개월 가능하겠어요?”“그럼…”순간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유정과 유진은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수천만 원짜리 명품 백은 가볍게 던지면서도 정작 한 달 생

  •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EPISODE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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