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Do you mind me sitting here?”
(“여기 자리 있어요?”)
작은 몸집의 소녀가 류가 앉은 야외 테이블에 맞은 편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고글과 넥워머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맑았다.
“No, please.”
“Thanks.”
작은 소녀는 핫초코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더니,
자신의 백팩에서 작은 컵라면과 보온병을 꺼냈다.
그리고 마테호른 정상의 야외 테라스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핫초코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이내 사방으로 퍼지는 익숙한 매운 라면 냄새에, 류는 힐끔 소녀를 바라봤다.
그때 그녀와 시선이 어색하게 부딪혔다.
“Would you like a bite?”
(“한 입 드실래요?”)
“No, thanks”
(“괜찮습니다”)
“Well… Suit yourself… but are you sure?”
(“진짜 안 드실래요?”)
“Yep”
소녀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컵라면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자극하는 강한 조미료 냄새에...
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스위스의 칼바람 속에서... 라면 냄새를 참는 건...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한 걸까…
그때 소녀가 컵라면 뚜껑을 능숙하게 삼각형으로 접어 앞접시를 만들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발을 덜어,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거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라면에 류는 내심 당황했다.
분명 거절했음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소녀의 뻔뻔함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건넨 라면이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See? Soup?”
(“괜찮죠? 국물도 드실래요?”)
소녀는 한술 더 떠 아예 컵라면을 용기째 그에게 내밀었다.
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낯선 이가 건넨 라면 용기를 받아 들고 남은 국물까지 들이켰다.
명문가의 장자로서,
평생 받아온 식사 예절 교육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Korean?”
(“한국인이세요?”)
“No, Japanese. Actually… Korean Japanese”
(“아니 한국인은 아니고… 한국계 일본인입니다”)
“그럼 라면은 못 참죠. 특히 스키 후에 라면은 진리니까”
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의자 옆에 놓은 스키 장비들.
그리고 혼자였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까지는 상당한 체력이 필요한 코스였다.
이런 작은 여자아이가 그것도 혼자는 절대 불가능했다.
“여기서 스키로 내려 가려고 요? 혼자?”
“네”
그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아니… 그러다 응급 상황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럼 그냥 죽죠. 뭐… 솔직히 뭐 그렇게 막 살고 싶을 만큼 인생이 재미있지는 않아서… 괜찮아요”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소녀의 태도에,
류는 급하게 벌떡 일어나 그녀의 백팩을 거칠게 붙잡았다.
“너… 안되겠다. 너 몇 살이야? 말해! 부모님 연락처!”
“죄송한데 저 그렇게 꼬맹이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 부모님 안 계세요”
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진짜야? 그래도 Legal guardian (법적 보호자)은 있을 거 아니야”
“있긴 할 텐데… 제가 저... 밑에 떼 놓고 와서”
소녀가 작고 예쁜 손가락을 들어 저 멀리 산 아래를 가리켰다.
“뭐?”
“날… 팔아 먹으려고 하잖아요. 이 타국에서… 그래서 도망치는 중이에요”
류는 소녀를 잠시 가만히 살펴 봤다.
대략 열여섯... 어쩌면 더 어릴지도...
고글을 썼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인형같이 예쁜 미소녀...
그리고 스키복을 입었음에도 아주 가냘픈 몸의 선이 두드러졌다.
서양 변태들이 환장하는 로리타 신드롬에 적합한 외모.
불길한 직감이 스친, 류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현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소녀가 날렵하게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뭐하는 거에요?”
“유괴 범죄 신고!”
“아… 아저씨 되게… 진지하신 편이시구나…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진짜야?”
“그게… 어느 정도는?”
“어?”
“아니에요.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저 가도 되죠?”
“아니! 혼자는 절대 못 내려 가. 대신 산 아래 내려갈 때까지 너… 내 옆에 딱 붙어서 내려와. 내 시야에서 없어지면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네? 네…”
소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그를 따랐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수행원들을 보고 오해한 아이가 다시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그의 주변에 대기 중인 수행원들의 접근을 조용히 막았다.
대학교 스키선수였던 류에 비해,
한참 실력이 모자란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따라 내려왔다.
그러다 고꾸라 넘어지기도 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슬랩스틱에,
류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자... 소녀가 그의 손을 짜증스럽게 쳐냈다.
그리고 더 이상 못 가겠다는 듯 눈밭에 누워 버렸다.
“야! 꼬맹이! 이런 실력으로 여기를 스키로 내려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거야? 그것도 혼자? 너… 나 아니었음 진짜 조난 당했어. 암튼 엄살 그만 피고 일어나!”
그는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소녀가 그의 손은 잡는 척 하다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당겨 넘어 뜨렸다.
그리고 그의 높은 무게중심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그 역시 소녀의 바로 옆 눈밭 위로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야!”
“딱 5분만 요. 딱 5분만 쉬고 일어날 게요”
그녀의 애원하는 목소리에, 류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리며 몸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누운 채, 차가운 눈의 감촉을 받아들였다.
소녀는 쓰고 있는 고글을 벗어 던지고 눈을 감았다.
“꼬맹이! 너 이거 완전 사기인 거 알지? 라면 한입 얻어 먹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
그의 툴툴거리는 농담에 소녀가 깔깔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하얀 설산의 태양 빛이 고스란히 반사된 황금빛 눈동자를...
보석같이 반짝이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순간 류의 심장이 멈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죄송해요.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아저씨 따라오길 잘 한 것 같아요. 안 그랬음 저… 진짜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 할 뻔 했어요”
“왜 죽어도 괜찮을 만큼 세상이 시시하다며? 겁 나?”
“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음… 그냥 팔려 가는 게 훨씬 좋을 뻔 했네요. 아저씨 덕분이에요”
“하하하… 야! 근데 아직 서른 살도 안 됐는데 아저씨 소리는 좀… 억울한데!”
아저씨라는 호칭이 억울하다는 그의 말에,
유진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190cm에 달하는 압도적인 피지컬...
조각처럼 정교하게 빚어진 이목구비에, 어딘지 모르게 예민하고 차가운 인상,
하지만 그 속에 빠져들 것만 같은 깊고 아득한 눈매...
잘생겼다는 세속적인 표현보다는...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무심코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산의 한기마저 단숨에 녹여버릴 것 같은 낯선 열기였다.
“하기사 그쪽… 외모도 아저씨는 아니긴 해요”
“어쭈… 그쪽?”
“아저씨 싫다면서 요”
“됐다. 맘대로 불러라. 일어나! 이제 진짜 내려가야 돼!”
첫 회는 재밌으셨나요? 독자 여러분, 이곳에도 떡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떡밥은 이 단어가 상대에게 어떻게 들리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떡밥은 회수 되는 회를 다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계속 됩니다. 그래도 예시를 들면, 3회 20회 46회 47회에서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계속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독자들을 위해서 스포일러는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한 달 후.자신의 모든 삶이 통째로 화려한 새장 속에 처박히게 될,결혼 날짜가 사전 통보나 상의도 없이 가문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정해졌다.그 날벼락 같은 통보가 떨어진 이후에도,류는 그 어떤 사적인 연락도, 의례적인 메시지 한 통조차 유진에게 건네지 않았다.늘상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침묵만이 그녀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최소한…… 아무리 가문끼리의 정략적 약속이라 해도, 의례적으로나마 내 동의나 기분 정도는 한 번쯤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결혼을 코앞에 앞두고 5달 동안이나 뜨겁게 안았던 당신 애인이라는 여자가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절대 못 헤어지겠다고 무릎까지 꿇고 매달렸는데…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다면, 내가 지금 괜찮은지 정도는 걱정하고 수습하려 드는 게 최소한의 상식이잖아!]류에게 자신을 감정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 인형이었다.오만방자한 그의 태도에, 유진은 머리끝까지 지독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무관심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온몸에 두른 채,그가 선사하는 비참함과 배신감에 완벽하게 면역이 됐다고,사소한 감정 하나쯤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아니었다. 지독한 오만이자 착각이었다.하필이면 인생의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종착지인 결혼을 눈앞에 두고,지금껏 꿋꿋하게 참아내고 억눌러왔던 서러운 감정들이,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일시에 폭발하고 말았다.아니…… 어쩌면 5개월 전,그 은밀하고도 비극적이었던 제주도에서의 그 밤부터……두 사람의 감정 궤도는, 겉잡을 수 없이 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여태껏 단 한 번도 나를 온전한 여자로 바라본 적도 없었으면서… 그것도 무려 5개월이나 온 세상이 다 알게 시끄러운 스캔들을 터뜨려 가며, 그렇게 뜨겁게 다른 여자를 안아놓고… 어떻게 내 앞에서 이렇게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날 함부로 대하고 방치할 수 있죠?]비참함에 유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아무리 내가 당신이 우리 가문에 인질처럼 묶어
유정의 인생 최대의 반항이 끝났다.프랑스 파리로 돌아가기 싫다며, 집안을 상대로 벌였던 지독하고 외로운 가출 소동.재벌가의 압박에, 전쟁이 터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결말은 너무도 싱겁고 허무하게 오유정, 그녀의 완벽한 승리로 쉽게 마무리가 되어버렸다.언제나 그녀의 인생이 그러했듯, 결국 유정이 원하는 대로 됐다.“저… 여기 내 짐 안 빼려고 요. 월세는 1년은 내야 한다고 집에 뻥쳐서 한꺼번에 지불할 게요. 그러니까 혹시 우리 유진이 학교에서 쉘터 필요하면 여기 쓰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아마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계속 여기 쓸 수도 있고…… 나도 우리 집안 분위기를 피해 숨 쉴 공간이 필요하거든요.”유정은 에구치의 좁은 아파트 거실 한구석에,자신의 짐들을 고스란히 남겨두며, 붙잡아달라는 듯……주저리주저리 구차하고 기나긴 변명들을 늘어놓았다.에구치는 덤덤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읊조렸다.“편한대로 해. 잘 해결 되어 다행이다”“네. 요스케 덕분이에요”“난 별로 한 거 없는데…… 내가 더 고맙지. 월세 꼬박꼬박 내는 룸메이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야.”에구치가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아니요. 감사해요. 그리고……”한참 동안, 유정이 월세 계약을 계속 하겠다는 변명을 쏟아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입술 끝에...... 더 무겁게 할 말이 남은 듯,유정은 한동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거렸다.좁은 거실 안에 묘한 텐션이 감돌았다.“뭐… 더 할 말 있어?”“그게 아! 몰라. 나 필터 없어요. 대충 알죠?”“대충. 눈치는 챘어”“내가 요스케한테 반했던 것도 알테고?”유정의 직설적인 화법에, 에구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미소만 지었다.“내가 왜 요스케 포기했는지 알아요?”“나란 놈 별 볼 일 없다는 거 대충 알았을 거잖아. 너랑 나 세상이 달라.”“그런 건 이유도 안돼요. 적어도 나에게는. 나 한다면 하거든요. 수습은 못할지 몰라도......”“하하하…… 최악인
류를 사랑한다는 카린의 고백에 유진은 기분이 별로였다.명치끝이 더러운 오물을 삼킨 것처럼 기분 나쁘게 뒤틀렸다.어쩌면 지난 주말의 여파였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늘 그렇듯,자신이 어쩌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느낀 일말의 풋풋한 설렘마저,그는 어김없이 다른 여자의 흔적을 통해 모조리 처참하게 박살 내 버렸다.이번만큼은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는 멍청하고 순진한 기대를 품었던 제 자신이,지독하게 한심하고 등신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진짜… 기대할 걸 기대했어야지… 바보같이…]수치심이 해일처럼 밀려왔지만,유진은 이내 익숙하게 감정을 거두어들였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서글프게 우는 그 남자의 전 연인을 향해,애써 차분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헤어지지 마세요. 안 헤어져도 돼요.”“네?”카린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유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스캔들이 터지든, 밤새 뭘 하든 난 상관없어요.”이미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빠른 체념.유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질투도, 분노도 섞이지 않은 채 얼음처럼 냉정했다.“그럼 오빠 놔주세요.”“잡고 있었던 적 없어요.”“오빠 저랑 만나는 동안 계속 유진씨 얘기 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여자는 유진씨뿐이라고… 그래서 욕심내지 말라고… 그러니까 유진씨가 먼저 오빠를 버려주세요.”[원하는 여자가 오직 나뿐이라고? 정말 웃기지도 않네.]카린의 절규를 들은, 유진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가슴이 잔인하게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이젠 나를…… 다른 여자들을 내다 버리는, 자기 편리한 이별 핑계로까지, 갖다 쓰는 거야, 이 인간은? 진짜 끝까지 어이없어.]유진은 자신을 붙잡고 애처롭게 애원하는 여자를 한심하다는 듯 빤히 바라봤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저랑 오빠 이미 깊은 관계예요. 저 오빠 없으면 못 살아요. 제발 오빠가 제게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안 그럼 저 죽어요. 제발…”그
“그 아이…… 꼭 고집 안했으면 좋겠다”류의 어머니는 렉스 그룹 도쿄 회장실로 예고도 없이 직접 찾아왔다.방 안을 가득 채운 재벌가 최고 어른의 강압적이고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류는 차갑게 반박했다.“어머니가 반대할 이유 없습니다. 어머니가 제 결혼 상대로 원하시는 기본적인 조건…… 모두를 갖춘 사람입니다”“그래. 한국인이고 좋은 가문에 외모 학력 인성 예의범절까지 전부 갖춘 아이는 맞다. 근데 난 걔가 싫다”“뭐가 문제입니까? 나이가 너무 어린 게 문제입니까? 아시다시피, 어린 여자가 제 취향입니다. 저와 열애설 난 친구들 나이 조사해 보셨으면 아실 것 아닙니까?”류가 펜을 탁 내려놓으며 오만하게 상체를 뒤로 기댔다.류의 건방진 태도에도, 그의 어머니는 매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보기 좋지 않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 아이의 외모… 지나치다. 그리고 그런 그 아이에게 정신 빠진 너도 문제고”“많이 좋아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까? 그 반대라면 몰라도?”“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네 혼 다 빼 먹고 흐트려 놓을 아이이기에 안된다는 거다. 너…… 이미 그 아이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보고를 여기 저기서 받았다. 큰 일하는 놈이 여자 미색에 빠져서, 우선 순위가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어머니의 매서운 다그침이 회장실 벽면을 거칠게 때렸다.“그 아이의 문자 한통에 임원회의며 회사 일정이며 전부 무시하고, 쓸데 없는 곳에 회사 자금을 투자하고…… 그 아이는 네 정신과 이성을 흐트리고 있어. 그래서 안된다”“죄송하지만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류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안 그래도 말씀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저 유진과 약혼 없이 다음 달이라도…… 최대한 빨리 결혼할 생각입니다. 유진과 상의 후 세부 일정 전달드리겠습니다. 어머니께선 그저 축하만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더는 타협할 수 없다는 오만한 아들의 완강한 선언에,회장실의 공기는 영하로 얼어붙었다.
방 문 너머, 침실에 누워 있을 유진의 잔상이,그녀의 살결에서 풍기던 달콤하고 싱그러운 복숭아 향이,지독하게 류의 밤을 괴롭혔다.찹쌀떡처럼 하얗고 말랑하게 자신의 손 안에서…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던 그녀 속살의 감촉이…어두운 펜트하우스의 밤 내내…그의 차가운 이성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헤집어 놓았다.온몸에 열병처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른세수를 했다.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아랫배의 묵직한 정욕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더 빨리 널… 내 곁에 데려와야 겠어. 이제는 정말… 자신이 없어졌어… 내가 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아니. 더 이상은 안되겠어. 못 참겠어… 널 가져야 겠어. 그러지 않으면 난 미쳐 버릴 테니까.]3년의 기다림. 그는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그리고 오늘 밤…가슴이 터지도록 참고 참았던 사랑한다는 말이 결국 터져 나와 버렸다.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안달이 났다.그리고 자신의 것이 된 그녀를 맘껏 사랑하고 싶었다.*따스한 도쿄의 오전 햇살이 눈꺼풀을 찌를 때가 돼서야,유진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침 9시 정각.“음…….”유진은 너무도 잘 잤다.술의 효과인지, 낯선 호텔 방임에도 불구하고 단잠을 잤다.아침 늦게까지, 단 한번의 뒤척임도 없이 눈을 떴다.그리고 이불을 걷는 순간,너무 놀라 다시 이불을 얼굴까지 덮었다.[뭐 야? 왜 팬티 차림…이야?]순식간에 뺨에서부터 온몸의 살결 위로, 새빨간 열기로 소름이 돋아났다.심지어 은밀하게 촉촉히 젖어 있는 팬티…유진은 정신없이 머리 속을 헤맸다.‘사랑해… 널 사랑하게 됐어’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상한 기억의 파편들…선명하게 귓가에 맴도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류의 뜨겁게 달아올랐던 단단한 맨살의 상반신…그리고 부끄러움도 없이,그에게 매달려 유혹하듯 안겨 들던 자신의 낯선 모습까지…한낱 지독한 밤의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입술과 가슴 위로 남겨진
처음으로 평범한 커플처럼 데이트를 했다.꽤나 즐거웠고 편했다.그리고 어느새 유진은 홀짝거리며 2잔의 레몬사와를 모두 마셔 버렸다.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부드럽게 퍼지자,그동안 류를 향해 단단하게 얼려두었던 그녀의 방어벽이…봄눈 녹듯 점점 말랑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게다가 하필이면,지금 제 눈앞에 앉은 남자가,평소처럼 오만하게 통제하려 들거나 짜증 나게 굴지 않았다.아니…… 짜증이 날 정도로,다정하게 자꾸만 자신의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아맸다.브라운 뿔테 안경 너머의 깊고 처연한 눈동자.편안한 캐시미어 니트임에도 드러나는 넒은 어깨.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갈 때마다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다.[이러면 안되는데… 또 다시 이 남자의 놀림감이 되기는 싫은데… 내 마음까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싫은데… 나 왜 이렇게 쉽지?]다시 속도 모르고 설레었다.이렇게 그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어쩌면 스위스때처럼 그가 다시 좋아질 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가,또다시 수면 위로 찰랑거리며 생겨나 버렸다.그 달콤한 기대감에 취해,낮은 도수의 알코올에도 유진은 결국 완벽하게 취해버렸다.탁-.가녀린 팔꿈치를 테이블에 위태롭게 괸 채…깜빡거리던 유진의 긴 속눈썹이,결국 밀려드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감겼다.류는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갈 곳 잃은 그녀의 고개를 제 어깨 위에 가만히 기대게 했다.그러자 유진은 솜털처럼 가볍게 그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완전 아기가 따로 없네. 어떻게 내 품 안에서 이렇게 잘 잘 수가 있니?”자신의 품에 완전히 쏟아져 안긴 채,미세한 숨소리 하나 외엔…아무런 경계도 없이 곤히 잠든 유진을 내려다보며,류의 입가에 나직하고 깊은 웃음이 번져나갔다.가슴 한구석이 채워지는 듯한 지독한 충만감.류는 한 손으로 유진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은 채,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아사쿠사 이자카야로 와’그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문자를 보내고,
‘생일 축하해’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화려한 선물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유진은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상자들 맨 꼭대기에 놓여 있는 작은 카드를 집어 들었다.감정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한 줄의 축하 인사.꼬박 5개월 만에 날아온 그 남자의 메시지였다.직접 찾아오는 정성과 수고를 들이기보다는,이렇게 압도적인 돈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게 훨씬 편하고 익숙한 남자.물론 그와는 태생부터 장거리 만남이었으니,그가 평소처럼 일본 본사에 머물고 있었다면 백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
여전히 비몽사몽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화면에 찍힌 숫자는 오전 7시.아침 잠이 유독 많아 유모가 흔들어 깨워도 겨우 일어나던 유진이 알람도 없이 7시에 혼자 눈을 떴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잠시 따뜻한 침대 속에서 뒤척이던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오전 8시 정각.유모가 조심스럽게 유진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하지만 이미 단정한 외출복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유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혹시 어제 못 잤어요? 대학입학 첫 날이라고 긴장했나?
“왜 벌써부터… 저 건물 공사를 하겠다는 거야? 아직 겨울도 안 끝났는데… 날씨 좀 풀리고 해도 되잖아”“회장님께서 아가씨 결혼을 서두르려고 그러시는 거죠.”유모의 덤덤한 대답에 유진은 짜증이 난 듯 팩 하고 고개를 돌렸다.“굳이… 뭘 그렇게까지.”“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맘 놓고 있을 때에요?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제일 예쁘다는 아이돌 여자애… 그 이름이 뭐더라… 암튼 그 계집애가 그렇게 류 회장님께 꼬리친다고 소문이 파다 하던데… 거기다 류 회장님 마지막으로 아가씨 만나러 제주도 오셨던 게 벌써 5개월이나 됐으니… 걱정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칼날처럼 살갗을 에이는 초 봄의 이른 아침.작업 반장과 리모델링 공사 현장을 둘러보던 에구치는 1층 창문 치수를 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안녕하세요?”그 순간 등 뒤에서 툭 들려온 맑은 목소리.고요한 공사 현장에서 들린 예상치 못한 여자 목소리에,에구치는 크게 놀라 창틀에서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위로 매캐한 공사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어… 괜찮으세요?”에구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무덤덤하게 벌떡 일어나 목장갑을 낀 손으로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