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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사건, 장소는 모두 허구로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아,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요-.”고조된 돔 안의 분위기 위에 해설자의 쾌활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세계적인 게임인 리그 오브 카오스의 월드컵 결승전이 진행되는 날.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팀들이 모두 참여하는 만큼,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난 건 엄청난 광경이었다.
“국내 리그에서는 부동의 1위인 원티드와 그 뒤를 늘 바짝 쫓는 케이비가 있습니다.” “네, 그 두 팀이 다시 월드컵 결승전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요.” “매번 승리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마는 케이비. 오늘만큼은 우승을 거머쥘지 기대가 됩니다.”두 해설자의 의견이 오가고, 각 팀의 다섯 명씩의 선수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몸을 풀고 있다. 전광판에는 선수들의 긴장된 얼굴이 번갈아 비쳤다. 헤드셋을 쓰고서 각자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각 선수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아주 좋은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케이비이지만, 매번 중요한 경기 막바지에 1등의 꿈이 좌절되고 마는데요-.” “맞습니다. 특히나 케이비의 레브 선수가 그런 실수의 중심에 자주 있어서 아쉬움이 큽니다.” “네, 중요한 경기마다 큰 실수가 나오고는 하는 레브 선수인데요. 개인 기량으로만 보면 레전드라고 불리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를 한번 쯤은 꺾을 만도 하기에, 여러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일관성 있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큰 경기인만큼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하는데요-.”그 중 무대 왼쪽의 안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선수가 긴장한 얼굴로 손을 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실수는 안 돼. 케이비의 레브라 불리는, 관심의 중심에 선 나인협이었다.
“인협. 오늘은 실수 없으리라 믿는다, 응?”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에서 들려온 팀 보이스에 인협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안 돼. 생사를 건, 결의가 가득한 그의 눈빛이었다.
“자, 오늘 와 케이비의 역사적인 우승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이 될 것인지 지켜봐 주세요!”와아아-.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쏟아졌다.
마우스를 잡은 인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6개월 후]드르륵, 드르륵-.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동해시 신화읍 소원리. 신화읍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굽이진 길을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외진 마을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캐리어를 끄는 남자는 얇고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쓰고서 잘 정돈되지 않아 덥수룩해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키. 그다지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곳곳을 잘 살펴보면 나름의 매력을 가진, 리그 오브 카오스 계의 몇 안 되는 훈남이라고 한때 불리던 얼굴이었다.
다행히 뼈대는 굵은 편이라 따로 운동한 것 없이 어깨는 좀 있는 편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몸이 마른 편이었다. 그의 몸에서 굳이 근육을 찾아보자면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루느라 돋보이는 전완근 정도였다.
구름도 한 점 없이 맑은 초여름의 하늘 아래. 머리를 태울 듯이 내리쬐는 쨍쨍한 햇볕에 남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사방에 쟁쟁한 푸르름이 가득한 6월의 초여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포장된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푸르름을 머금은 너른 밭과 집들이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봉긋한 산세는 부드럽고 둥그런 편이었다. 산이 마을을 둘러싼 덕분인지, 유독 푸르른 하늘 아래 마을의 푸르름은 배가 되었다.
“이 동네는 변한 게 거의 없네.”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어딘가 잔뜩 날이 선 눈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의 전경을 찬찬히 살폈다.
마을 초입은 평지에 가까웠지만, 산 초입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져 있는 덕분에 길에서도 소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살았던 어렸을 적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고는 새로 지어진 집 두 채와 그가 이곳에 살았을 적에는 없던 작은 교회 건물뿐이었다.
그때는 모든 게 다 멀고 커 보이더니.
기억 속 마을의 풍경보다 축소된 듯한 마을의 전경을 꼼꼼하게 살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완만하던 길이 급격한 오르막으로 바뀌자, 짐이 든 캐리어를 끄는 손에 힘줄이 바짝 섰다.
비교적 선선한 편인 초여름인데도, 그의 이마에는 앞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후-.”양옆에 풀숲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소원 초등학교의 교문이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빼꼼 보였다.
여기도 변한 게 없네.
까르륵-. 주중 낮 시간인지라,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단층짜리 학교 건물 외벽을 어설프게 밝은색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지만, 학교의 낡은 티를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운동장 놀이터도 옛날 것 그대로였고, 관사도 어느 정도 노력은 기울인 듯해 보였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인협은 다시 캐리어를 끌며 학교를 지나갔다.
교문 초입을 어느 정도 지나고 보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마을 뒷산 초입을 향해 오르막으로 경사진 마을이었으나, 신기하게도 학교 터는 마을 어떤 곳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네.”내리막이 조금 완만해진 오르막으로 바뀔 때쯤.
초등학교 언덕 바로 밑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풀숲 사이로 난 길 앞에 멈춰선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 걸음 정도 되는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면, 남자의 어깨높이까지 오는 담으로 둘러진, 낡은 기와집이 보였다. 제대로 된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8년여의 시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거의 폐가처럼 보이는 집.
‘인협이 왔나?’언제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따스함이 머무르던 집은 어느새 아무런 온기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버려진 곳이 되어있었다.
중앙에는 마당을 두고서 기역 자로 꺾인 집이었는데, 꺾여지는 부분에는 집 건물이 끊겨 있고 장독대가 여럿 세워져 있고, 옛날에 사용했던 수돗가가 있었다.
집 입구 바로 옆에는 예전에 변소로 쓰던 작은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창고 공간이 있었다. 사랑방으로 쓰던 공간과 아궁이가 있는 공간을 끝으로 기역자 중 한쪽 공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장독대와 수돗가가 있는 꺾어진 부분을 지나면 있는 공간에는 약간의 현대식 공간이 있었다. 인협이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위인 인협의 아버지가 공을 들여서 고쳐준 공간이라고 들었다.
그곳에는 거실로 사용하던 공간이 있었고, 그 안으로 한 번 더 들어가면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법한 작은 부엌 공간이 나왔다.
부엌 공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부엌과 거실 공간과 두 문으로 연결된 큰방이 있었다.
큰방에서 한지와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을 열면 예전에는 툇마루였지만, 현대식으로 바꾸며 생겨난, 베란다 같은 복도 공간이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복도를 지난 끄트머리에는 예전에 어머니의 공간이었던 작은방이 있었다.
인협은 익숙하고도 낯선 집 외관을 둘러보았다. 돌봄을 받아 낡았어도 포근한 느낌을 주던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흙으로 된 마당에는 구석구석에 듬성듬성 풀이 높게 자라있었고, 마당 한구석을 차지한 아무것도 없는 닭장과 개집은 흉해 보일 뿐이었다.
“후-.”괜한 선택이었나?
이곳으로 오기로 한 건. 집 외관을 찬찬히 둘러본 인협은 약간의 후회를 했다.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의 상태는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계시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인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당연히 제 것이었던 열쇠를 챙겼던 그였다.
당시에 지긋지긋해하던 소원리를 떠났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열쇠였지만.
낡은 쇠붙이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인협은 비릿한 쇠향이 맡아질 때에서야 그것을 낡은 철문으로 가져갔다.
바로 거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철컥. 인협이 약간의 힘을 주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약간 열렸다.
끼익. 녹슨 철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일부러 누군가가 보존이라도 해둔 듯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공간이 보였다. 군데군데 물샌 자국이나, 장판이 들렸다거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은 있었지만.
모든 것이 기억보다 조금 더 낡고 먼지가 쌓여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한숨을 푹 쉬자마자 확 밀려오는 먼지 냄새에 재채기를 연달아 한 인협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건넌방 앞 복도 문을 열어서 그 앞에 놓인 청소도구를 집어 왔다.
유선 청소기와 빗자루와 쓰레받기.
부지런했던 할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걸레질하기 전에 늘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코드를 꽂고 버튼을 작동으로 바꾸니, 낡은 청소기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 바람에 다시 한번 밀려오는 먼지바람에 재채기를 또다시 연거푸 한 인협은 앞으로 지내게 될 거실, 부엌, 그리고 큰방까지 청소기를 꼼꼼히 돌렸다.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청소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당장 허물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간 머무를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다음은 걸레질. 할머니가 습관처럼 하던 걸 기억해 낸 그는, 부엌 낡은 수납장에 쌓여있는 걸레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안의 물건도, 위치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수도를 연결해 두어 다행이었다. 걸레에 물을 꽉 짜낸 뒤, 그는 바닥을 꼼꼼하게 훔쳤다.
기억 속 외할머니처럼 야무진 손짓은 못 됐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흉내는 내는 듯해 보였다.
“하, 이 정도면 됐고-.”집안에 에어컨도 없어, 땀이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대충 닦아낸 그는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그러자, 어둑하던 집안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이 집안을 비추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흠이 아주 잘 드러났다.
군데군데 핀 조그마한 곰팡이 자국. 물샌 자국. 장판이나 벽지가 들리거나 우는 부분들. 그저 자연스럽게 낡아진 부분들이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곳에 햇빛이 내려앉자, 집안이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딘가 따스해 보이는 집안을 보며 인협은 잠시나마 어린 시절 소원리에 살았던 기억 속의 온기를 조금 느낀 것 같았다.
얕은 담 너머로 보이는 마을 풍경과 산의 모습에 인협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늘 분주함에 치이고 노력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불안에 쫓겨 멈춤이라고는 모르던 그의 삶에 드디어 완벽한 고요함이 찾아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망망한 바다 위에 떠다니는 돛단배가 된 막막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당장, 이 고요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특히나 머릿속이 이 정도까지 조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모두 아직도 계시려나?”인협의 가슴팍까지 오는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소원리 마을의 한 자락에는,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집도 있었지만, 낡은 집들 속 완전히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도 두 채가 눈에 띄었다.
새로이 이 따분한 곳으로 이사 온 분들이시려나. 아니면 나처럼 도피하듯이 이곳으로 숨어든 분들이시려나.
인협은 잠시나마 겉보기에도 예쁜 집들의 주인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인협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아 텁텁했던 집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청소하다 보니, 피부가 간질거리기도 했고, 또 청소하느라 땀을 흘려서 물을 끼얹고 싶어진 그였다.
아직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아 군데군데 곰팡이도 슬고, 더러워 보이던 욕실 내부를 떠올린 그는 얼굴을 찌푸린 후, 바로 야외 수돗가로 향했다.
어렸을 적 더운 날이면 이곳에서 남동생인 인섭과 등목을 하거나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는 물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안경을 수돗가에 놓인 작은 돌 위에 벗어둔 그는 씻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 연결되어 있는 짤막한 초록색 호스를 붙든 인협은 더러워진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물을 틀어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어차피 땀과 먼지에 절은 옷들을 모두 벗어 던질 생각이었기에, 젖는 건 상관없었다.
온도 조절도 안 되는 시원한 물을 끼얹자, 추워서 이가 딱 맞물렸다.
이 짓도 어렸을 때나 할만하구나. 20대 중반인 나이에 하니까 곧 심장마비라도 올 것 같네.
인협은 생각보다 더 차가운 물을 견뎌내며 챙겨온 것들로 간이 샤워를 마쳤다. 그러고는 일어나 캐리어에서 미리 꺼내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냈다.
부스럭.
그때 바로 옆 담장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인협이 안경을 벗어둔 탓에 흐릿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집을 둘러싼 풀숲에서 인영이 하나 불쑥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작은 기자회견장. 그곳에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서 인협이 강대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이곳은 우겸이 인맥을 동원해 깔아준 판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케이비팀 소속이었던, 나인협 선수라고 합니다.”억울하게 누명을 쓴 직후에 이곳에 서는 걸 얼마나 꿈꿨던가. 인협은 제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기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은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얼굴로 인협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저는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직접 그 증거들을 보여드리려 합니다.”우겸이 미리 공수해 두었던,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이들과 원티드 스폰서 측에서 주고받았던 문자 캡처본, 태우를 통해 만들어둔 녹취록, 그리고 정현과 모비팀 감독이 멱살을 잡고서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증거들은 더 많았다.인협이 증거들을 공개할 때마다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네, 보시다시피 저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승부조작을 하는 이들로부터 배척받았었고요. 지속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인협이 차분하게 입장표명을 이어가자, 한 기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네, 말씀하세요.”“그렇다면, 왜 이렇게 뒤늦게서야 이 모든 입장을 밝히고 증거들을 밝히시는 건가요? 지금 반년이 좀 넘게 지난 거로 알고 있는데요.”“그건….”인협이 컨펌을 받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은 우겸을 바라보자, 바로 옆자리에 앉은 변호사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도 팀의 승부조작에 대해 심증만 있었을 뿐, 이렇다고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요.”“정확히 어떤 협박이 있었죠?”찰칵찰칵. 시간이 지나며 좀 잦아들었던 플래시 세례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공식적으로 어떠한 발언이라도 하면 소송을 걸
“여기가 나인협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란 말이지.”모자를 푹 눌러쓴 기태는 경기도 어느 외곽에 위치한 식당 외관을 쭉 훑어보았다. 3층짜리 초대형 건물이었으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태는 의아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분명히 정현이 알려준 주소였다. “나 같으면 부모님 식당이나 집이라도 정리해서 소송이라도 제대로 걸었을 텐데. 미련한 놈….”기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현이 보내줬던 인협의 부모님에 대한 정보는 놀라웠다.족히 10억은 넘는 브랜드 아파트에,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이었다. 이 정도의 재력이 있는, 아니면 인협을 통해 부를 쌓았을 부모가 왜 인협이 궁지에 몰렸을 적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진 그였다.보나 마나, 그 고지식한 놈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했겠지.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인협은 이전부터 늘 기태의 심기를 거슬렀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실력은 좋고 성실해서 알려진 것도 싫었고, 미련할 정도로 올곧은 게 보기가 싫었다. 꼭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인협은 묵묵하고 우직했다. 기태와는 다르게. 약간의 괴롭힘에 인협이 흔들렸다면, 기태는 그를 비웃고는 적당한 때 관뒀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고하고 꼿꼿했던 인협의 모습은 기태의 승부욕을 건드리고 말았다.그의 올곧음은 굽은 기태에게 거슬리는 걸림돌이 되고야 말았으니까.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하게 굴 수 있나 보자. 그렇게 하면서 기태는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승부조작으로 얻게 될 돈에도 솔깃했지만, 동시에 이런 나락으로 자빠뜨리면 잘난척하는 인협의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은 호기심도 컸다. 결과적으로 그 호기심은 기태를 잡아먹고 말았지만 말이다.“나인협 그 자식이 적당히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텐데.”인협의 경우에 승부조작 이슈를 크게 키우지 않아 경찰에게까지 넘어가지는 않았었다. 수사가 진행되면 진실이 파헤쳐질 거라는 생각에 정현이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알아가기로한지 하루 만에 이렇게 막 쫓아와서 죄송한데요.”“미안해요.”“뭐가 미안한데요?”성난 유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협은 야속하게도 에스더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렇게 봉길은 인협의 집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이었다. “일단 뭐든 미안해요. 유진 씨를 화나게 해서.”앞서 넙죽 엎드리는 봉길을 보며 유진은 팔짱을 꼈다.“뭘 잘못했는지 알고 사과를 해야지 다음에 또 똑같은 짓을 안 하겠죠?”“어….”희대의 난제. 사랑하는 사람이 던지는 당신이 지금 뭘 잘못한 거 같아요? 라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알려줘요.”“어제 더위를 그렇게 심하게 먹었던 사람이 오늘 야외에서 축구를 해요?”유진의 타박에 봉길의 눈이 커졌다. “날 걱정해서….”“그래요. 걱정이 되어서요. 오늘 서울 올라갈 거라면서요.”뿔난 유진의 표정에 잔뜩 긴장했던 봉길은 크게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날 걱정해서 유진 씨가 이렇게 달려온 거라고요?”“……….”환해진 봉길의 얼굴이 얄미웠으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걱정 끼치는 일 없도록 할게요.”봉길의 깔끔한 사과에 유진은 마음이 확 풀어지는 걸 느꼈다. 남자 앞에서 제 성격이 유순하거나, 상냥한 편은 아니라는 걸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봉길은 과거의 남자들처럼 쩔쩔매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존심을 세우며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물론 유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유진이 화가 난 이유를 듣고는 봉길은 군말 없이 사과하고 앞으로 바뀔 것을 약속했다. ‘너는 여자애가 왜 이렇게 드세?’주아의 친부는 언젠가 이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유진은 어느 정도 이러한 부분이 자신의 일부임을 믿고 살아왔었다. 봉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말끔한 사과에 단숨에 화가 풀린 그녀였다. 애초에 자신이 이렇게 간단하게 화를 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그녀였다. “…….”“왜요?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인협의 집. 씻고 나온 봉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다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인협을 발견했다. “그래서 인협 선수는요.”“네?”“인협 선수는 황 선생님이랑 어떻게 된 거예요?”봉길의 질문에 인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어쩌다가.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모난 자신 때문에 모든 게 오해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러다가 가장 큰 전환점은 장마로 인해 물이 많이 샜을 때였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때. 에스더는 그의 손을 붙들어주었다. 그가 놓으려고 해도 절대로 못 놓도록 꼭 붙들며. 그렇게 에스더가 반강제로 끌어올려 주었기에 지금의 삶이 있었다.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는 삶. 오늘을 죽지 못해 사느라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내일을 생각하고 기대하게 되는 삶을 에스더가 선물해 주었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꿀팁 좀 알려주세요. 저도 유진 씨랑 잘 되고 싶은데….”“글쎄요. 저한테 배울 게 없을 텐데. 특히 연애는요.”“어찌 됐든 지금 성공했잖아요.”“사실 저는 진짜 비겁하고 별로인 사람이었는데 에스더가 구제해 준거나 다름없죠.”구제라. 봉길은 유진과의 관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나같이 쑥맥이고 내세울 게 크게 없는 사람을 유진 씨가 구제해 준 거나 다름없네. “그냥, 유진 씨가 저를 내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납작 엎드려 살아야겠네요.”“맞아요. 그것뿐이죠, 사실. 진짜 별로였던 내 안에 있던,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봐줬던 여자니까요. 엄청 소중하죠.”“와….”불과 반년 전까지 보아왔던 인협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에 봉길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가시를 잔뜩 세우고 경계하던 인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저 말랑말랑한 슬라임 같은 존재 같을 뿐. 황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 걸까. 사랑의 힘이란 무엇인가. 이 어마어마한 현상에 진지한 고찰까지 하게 된 봉길이었다. “내가 인협
“아휴, 나 선생님. 고마워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손님을 맞을 상황도 아니고….”인협, 봉길, 그리고 에스더를 배웅하던 순옥의 곤란한 눈빛이 거실 소파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서 앉은 철호와 그의 앞에 매서운 표정을 짓고 선 유진에게로 잠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간 인협은 그녀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네, 당연하죠. 선생님도 수술하고 회복하고 계신 중인데요.“”고마워요, 이해해 줘서.””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학교에서 만나요.“”네, 감사합니다.”현관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닫힌 후. 세 사람은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며 소원 초등학교로 향하기 시작했다. 봉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력은 회복한 듯해 보였다.“차는 내일 찾으러 와요. 조 선생님 남편분, 내일 일찌감치 철물점으로 출근하실 테니까요.”“네….”봉길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순옥의 집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철호가 집으로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알아차린 철호가 노발대발했고, 덩달아 유진이 봉길을 변호하며 철호와 실랑이를 하게 된 탓에 세 사람은 집에서 걸음을 서둘러 나온 것이었다.봉길은 오늘 일단 인협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하룻밤 묵어본 후, 몸이 회복되면 다음 날인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는 게 맞을까요?”“아니요. 주아 어머님께 맡기기로 해요.”마치 사나운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를 보고 선 것만 같았던 광경을 떠올린 인협이 발길을 돌리려는 봉길을 막았다.“얻어맞아도 내가 얻어맞는 게 맞는데….“”왜요?“”내가 유진 씨를 쫓아다니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오-.”선하고 강단은 있어서 나서야 할 때는 늘 굳건한 편이었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유순해 보이는 봉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 여자를 쫓아다니다니. “역시…. 겉모습만 봐서는 연애할
버스 정류장 앞. 서로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한 봉길과 유진이었다.“그럼, 우리 카페로 가요. 거기에 차가 주차되어 있거든요. 제가 유진 씨 집까지 태워다줄게요.”“아, 버스 타고 들어가도 돼요. 항상 출퇴근할 때마다 타는 버스거든요.”“제가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래요.”“……..”“근데, 유진 씨는 보나 마나 아이 스케줄도 있을 거니까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봉길의 배려에 감동한 유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요. 가는 길에라도 유진 씨 좀 보게.”“그래요, 그럼.”원래도 독립적인 성격이었으나 주아를 가진 걸 알고 주아의 친부에게 버림받을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유진은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절대 기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주변 도움의 손길을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서 홀로 모든 걸 해내 왔던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봉길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유진의 마음을 자꾸만 말랑하게 만들었다. 유진이 기대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유진이 필요하다는 걸 먼저 알려주는 그라서 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봉길은 먼저 자신이 더 취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매일매일 참았어요. 여기까지 달려오는 거.”“왜 그렇게 참았어요?”“유진 씨 입장에서는 무서울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먼저 명함을 받고서도 연락 안 하기로 결정했는데, 내가 바로 카페에 불쑥 나타나면.”그랬을 수도. 봉길과 함께 걷던 유진은 의심 많은 제 성격에 충분히 그랬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제가 워낙 겁쟁이라서요. 100퍼센트의 확신이 없으면 잘 못 움직이는 스타일이거든요. 리스크나 실패를 워낙 싫어해서.”“…….”“미안해요. 사실 내 인생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낸 건데도 많이 늦었죠?”마음이 참 예쁜 사람이라는 게 어찌 이리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묻어나오는지. 봉길의 말에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아….”순간 걸음을 늦추며 비틀거린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