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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사건, 장소는 모두 허구로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아,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요-.”고조된 돔 안의 분위기 위에 해설자의 쾌활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세계적인 게임인 리그 오브 카오스의 월드컵 결승전이 진행되는 날.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팀들이 모두 참여하는 만큼,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난 건 엄청난 광경이었다.
“국내 리그에서는 부동의 1위인 원티드와 그 뒤를 늘 바짝 쫓는 케이비가 있습니다.” “네, 그 두 팀이 다시 월드컵 결승전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요.” “매번 승리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마는 케이비. 오늘만큼은 우승을 거머쥘지 기대가 됩니다.”두 해설자의 의견이 오가고, 각 팀의 다섯 명씩의 선수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몸을 풀고 있다. 전광판에는 선수들의 긴장된 얼굴이 번갈아 비쳤다. 헤드셋을 쓰고서 각자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각 선수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아주 좋은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케이비이지만, 매번 중요한 경기 막바지에 1등의 꿈이 좌절되고 마는데요-.” “맞습니다. 특히나 케이비의 레브 선수가 그런 실수의 중심에 자주 있어서 아쉬움이 큽니다.” “네, 중요한 경기마다 큰 실수가 나오고는 하는 레브 선수인데요. 개인 기량으로만 보면 레전드라고 불리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를 한번 쯤은 꺾을 만도 하기에, 여러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일관성 있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큰 경기인만큼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하는데요-.”그 중 무대 왼쪽의 안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선수가 긴장한 얼굴로 손을 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실수는 안 돼. 케이비의 레브라 불리는, 관심의 중심에 선 나인협이었다.
“인협. 오늘은 실수 없으리라 믿는다, 응?”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에서 들려온 팀 보이스에 인협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안 돼. 생사를 건, 결의가 가득한 그의 눈빛이었다.
“자, 오늘 와 케이비의 역사적인 우승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이 될 것인지 지켜봐 주세요!”와아아-.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쏟아졌다.
마우스를 잡은 인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6개월 후]드르륵, 드르륵-.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동해시 신화읍 소원리. 신화읍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굽이진 길을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외진 마을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캐리어를 끄는 남자는 얇고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쓰고서 잘 정돈되지 않아 덥수룩해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키. 그다지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곳곳을 잘 살펴보면 나름의 매력을 가진, 리그 오브 카오스 계의 몇 안 되는 훈남이라고 한때 불리던 얼굴이었다.
다행히 뼈대는 굵은 편이라 따로 운동한 것 없이 어깨는 좀 있는 편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몸이 마른 편이었다. 그의 몸에서 굳이 근육을 찾아보자면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루느라 돋보이는 전완근 정도였다.
구름도 한 점 없이 맑은 초여름의 하늘 아래. 머리를 태울 듯이 내리쬐는 쨍쨍한 햇볕에 남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사방에 쟁쟁한 푸르름이 가득한 6월의 초여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포장된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푸르름을 머금은 너른 밭과 집들이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봉긋한 산세는 부드럽고 둥그런 편이었다. 산이 마을을 둘러싼 덕분인지, 유독 푸르른 하늘 아래 마을의 푸르름은 배가 되었다.
“이 동네는 변한 게 거의 없네.”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어딘가 잔뜩 날이 선 눈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의 전경을 찬찬히 살폈다.
마을 초입은 평지에 가까웠지만, 산 초입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져 있는 덕분에 길에서도 소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살았던 어렸을 적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고는 새로 지어진 집 두 채와 그가 이곳에 살았을 적에는 없던 작은 교회 건물뿐이었다.
그때는 모든 게 다 멀고 커 보이더니.
기억 속 마을의 풍경보다 축소된 듯한 마을의 전경을 꼼꼼하게 살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완만하던 길이 급격한 오르막으로 바뀌자, 짐이 든 캐리어를 끄는 손에 힘줄이 바짝 섰다.
비교적 선선한 편인 초여름인데도, 그의 이마에는 앞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후-.”양옆에 풀숲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소원 초등학교의 교문이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빼꼼 보였다.
여기도 변한 게 없네.
까르륵-. 주중 낮 시간인지라,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단층짜리 학교 건물 외벽을 어설프게 밝은색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지만, 학교의 낡은 티를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운동장 놀이터도 옛날 것 그대로였고, 관사도 어느 정도 노력은 기울인 듯해 보였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인협은 다시 캐리어를 끌며 학교를 지나갔다.
교문 초입을 어느 정도 지나고 보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마을 뒷산 초입을 향해 오르막으로 경사진 마을이었으나, 신기하게도 학교 터는 마을 어떤 곳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네.”내리막이 조금 완만해진 오르막으로 바뀔 때쯤.
초등학교 언덕 바로 밑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풀숲 사이로 난 길 앞에 멈춰선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 걸음 정도 되는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면, 남자의 어깨높이까지 오는 담으로 둘러진, 낡은 기와집이 보였다. 제대로 된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8년여의 시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거의 폐가처럼 보이는 집.
‘인협이 왔나?’언제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따스함이 머무르던 집은 어느새 아무런 온기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버려진 곳이 되어있었다.
중앙에는 마당을 두고서 기역 자로 꺾인 집이었는데, 꺾여지는 부분에는 집 건물이 끊겨 있고 장독대가 여럿 세워져 있고, 옛날에 사용했던 수돗가가 있었다.
집 입구 바로 옆에는 예전에 변소로 쓰던 작은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창고 공간이 있었다. 사랑방으로 쓰던 공간과 아궁이가 있는 공간을 끝으로 기역자 중 한쪽 공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장독대와 수돗가가 있는 꺾어진 부분을 지나면 있는 공간에는 약간의 현대식 공간이 있었다. 인협이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위인 인협의 아버지가 공을 들여서 고쳐준 공간이라고 들었다.
그곳에는 거실로 사용하던 공간이 있었고, 그 안으로 한 번 더 들어가면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법한 작은 부엌 공간이 나왔다.
부엌 공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부엌과 거실 공간과 두 문으로 연결된 큰방이 있었다.
큰방에서 한지와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을 열면 예전에는 툇마루였지만, 현대식으로 바꾸며 생겨난, 베란다 같은 복도 공간이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복도를 지난 끄트머리에는 예전에 어머니의 공간이었던 작은방이 있었다.
인협은 익숙하고도 낯선 집 외관을 둘러보았다. 돌봄을 받아 낡았어도 포근한 느낌을 주던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흙으로 된 마당에는 구석구석에 듬성듬성 풀이 높게 자라있었고, 마당 한구석을 차지한 아무것도 없는 닭장과 개집은 흉해 보일 뿐이었다.
“후-.”괜한 선택이었나?
이곳으로 오기로 한 건. 집 외관을 찬찬히 둘러본 인협은 약간의 후회를 했다.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의 상태는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계시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인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당연히 제 것이었던 열쇠를 챙겼던 그였다.
당시에 지긋지긋해하던 소원리를 떠났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열쇠였지만.
낡은 쇠붙이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인협은 비릿한 쇠향이 맡아질 때에서야 그것을 낡은 철문으로 가져갔다.
바로 거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철컥. 인협이 약간의 힘을 주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약간 열렸다.
끼익. 녹슨 철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일부러 누군가가 보존이라도 해둔 듯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공간이 보였다. 군데군데 물샌 자국이나, 장판이 들렸다거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은 있었지만.
모든 것이 기억보다 조금 더 낡고 먼지가 쌓여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한숨을 푹 쉬자마자 확 밀려오는 먼지 냄새에 재채기를 연달아 한 인협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건넌방 앞 복도 문을 열어서 그 앞에 놓인 청소도구를 집어 왔다.
유선 청소기와 빗자루와 쓰레받기.
부지런했던 할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걸레질하기 전에 늘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코드를 꽂고 버튼을 작동으로 바꾸니, 낡은 청소기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 바람에 다시 한번 밀려오는 먼지바람에 재채기를 또다시 연거푸 한 인협은 앞으로 지내게 될 거실, 부엌, 그리고 큰방까지 청소기를 꼼꼼히 돌렸다.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청소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당장 허물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간 머무를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다음은 걸레질. 할머니가 습관처럼 하던 걸 기억해 낸 그는, 부엌 낡은 수납장에 쌓여있는 걸레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안의 물건도, 위치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수도를 연결해 두어 다행이었다. 걸레에 물을 꽉 짜낸 뒤, 그는 바닥을 꼼꼼하게 훔쳤다.
기억 속 외할머니처럼 야무진 손짓은 못 됐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흉내는 내는 듯해 보였다.
“하, 이 정도면 됐고-.”집안에 에어컨도 없어, 땀이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대충 닦아낸 그는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그러자, 어둑하던 집안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이 집안을 비추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흠이 아주 잘 드러났다.
군데군데 핀 조그마한 곰팡이 자국. 물샌 자국. 장판이나 벽지가 들리거나 우는 부분들. 그저 자연스럽게 낡아진 부분들이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곳에 햇빛이 내려앉자, 집안이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딘가 따스해 보이는 집안을 보며 인협은 잠시나마 어린 시절 소원리에 살았던 기억 속의 온기를 조금 느낀 것 같았다.
얕은 담 너머로 보이는 마을 풍경과 산의 모습에 인협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늘 분주함에 치이고 노력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불안에 쫓겨 멈춤이라고는 모르던 그의 삶에 드디어 완벽한 고요함이 찾아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망망한 바다 위에 떠다니는 돛단배가 된 막막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당장, 이 고요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특히나 머릿속이 이 정도까지 조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모두 아직도 계시려나?”인협의 가슴팍까지 오는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소원리 마을의 한 자락에는,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집도 있었지만, 낡은 집들 속 완전히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도 두 채가 눈에 띄었다.
새로이 이 따분한 곳으로 이사 온 분들이시려나. 아니면 나처럼 도피하듯이 이곳으로 숨어든 분들이시려나.
인협은 잠시나마 겉보기에도 예쁜 집들의 주인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인협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아 텁텁했던 집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청소하다 보니, 피부가 간질거리기도 했고, 또 청소하느라 땀을 흘려서 물을 끼얹고 싶어진 그였다.
아직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아 군데군데 곰팡이도 슬고, 더러워 보이던 욕실 내부를 떠올린 그는 얼굴을 찌푸린 후, 바로 야외 수돗가로 향했다.
어렸을 적 더운 날이면 이곳에서 남동생인 인섭과 등목을 하거나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는 물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안경을 수돗가에 놓인 작은 돌 위에 벗어둔 그는 씻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 연결되어 있는 짤막한 초록색 호스를 붙든 인협은 더러워진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물을 틀어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어차피 땀과 먼지에 절은 옷들을 모두 벗어 던질 생각이었기에, 젖는 건 상관없었다.
온도 조절도 안 되는 시원한 물을 끼얹자, 추워서 이가 딱 맞물렸다.
이 짓도 어렸을 때나 할만하구나. 20대 중반인 나이에 하니까 곧 심장마비라도 올 것 같네.
인협은 생각보다 더 차가운 물을 견뎌내며 챙겨온 것들로 간이 샤워를 마쳤다. 그러고는 일어나 캐리어에서 미리 꺼내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냈다.
부스럭.
그때 바로 옆 담장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인협이 안경을 벗어둔 탓에 흐릿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집을 둘러싼 풀숲에서 인영이 하나 불쑥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포터는 열심히 내달렸다. 읍내로 나가던 길의 차 안 분위기와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에스더와 인협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직접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서로가 아닌 정렬을 향해 보내던 따스한 모습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심어준 듯싶었다.정렬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던 에스더는 치킨집에서 보았던 인협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나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성격 파탄자처럼 굴던 그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던 시간이었다.저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인협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고 미워하던 시간만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인협이 소원리로 오게 된 이유를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사람에게도 타당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과 함께.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입구로 진입했다. 차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어둠 속에서도 정렬은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그만큼 이 동네에 익숙한 그였다. “어어-.”그때 포터가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 내리막으로 향한 탓에 에스더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 형 먼저 내려주고 선생님 내려드릴게요.” 정렬이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인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핑계를 대고 관사 앞까지 걸어가서 데려다주기 딱 좋을 터였다. “응, 나 먼저 내려줘.”물론 에스더에게 정렬이 아깝다고 생각한 인협이었지만, 저 정도로 좋아 죽으려는 정렬의 마음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협의 말에 정렬은 재빠르게 인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차를 세웠다
신화읍의 어느 한 옛날 통닭집.다섯 자리 남짓 있는 홀 한구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치킨을 시켜두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에스더와 정렬만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인협은 묵묵히 500cc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정렬은 앞에 콜라를 두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인해 정렬부터 시작해 그의 동생들까지도 술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유림이가요-.” “하하하-.”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렬의 막둥이 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인협은 조용히 술잔을 다 비워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어쭙잖게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면, 인협은 다시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로 인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한 두 사람을 인협은 묵묵히 구경만 하면 됐다. 사실 에스더가 주로 떠들고, 정렬은 떠드는 에스더를 사랑스러워하며 중간중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을 하거나 내색하지 않아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게 약간 힘든 부분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쁘진 않았다. 에스더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한순간도 가시지를 않았다.아무래도 데이트에 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고제환은 도대체 뭐지? 인협은 날개 부위를 뜯으며 에스더와 인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소원리로 다시 오게 된 거야?”다 뜯은 날개뼈를 뼈통에 집어넣으려던 인협은 정렬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어렸을 적, 교육을 위한다는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컴퓨터는커녕,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살던 정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렬은 돌아가는 세상사에 유독 관심 없어 했었다. 인협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도 숨길 예정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어느 날 불현듯이 소원리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진실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