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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의 등장(2)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10:48:45

“으아아아악-!!!!”

인협이 놀랄 새도 없이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 갑작스럽고 우렁찬 비명에 인협은 놀라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젊은 사람 같은데, 이 마을에는 왜? 

인협은 호기심에 안경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바로 썼다. 그러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눈과 콧구멍을 있는 대로 크게 개방한 여자 하나가 보였다. 

까무잡잡한 편인 피부에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지만, 팔다리는 얇고 긴 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어딘가 탄탄한 인상을 주었다. 

모델 한혜지를 닮은 거 같은데? 아주 좋게 말하면 피겨 여신 김윤아와도 언뜻 닮은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눈에 띄는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매력이 충분히 있는 인상이었다. 

182센티미터인 인협과 눈높이가 많이 다르지 않은 걸 보아하니, 키가 적어도 170센티미터는 넘는 듯해 보였다.

“어, 어-.”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잠시 인협의 헐벗은 상체로 내려갔다가 황급히 그의 눈으로 돌아왔다. 

“전 아무것도 못 봤-.”

“누구신데 남의 집 옆을 막 다니십니까?”

얼굴이 붉어진 채로 황급히 변명하려던 여자의 말을 인협이 막았다. 그러자 여자는 천천히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또 다른 충격으로 인해 헤벌어진 입이 보였다. 

무슨 뻐끔대는 붕어 같네. 그 모습에 인협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저, 저-.”

“……”

흔들리는 동공.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여자는 이내 더 깊이 팬 인협의 미간 주름을 보고는 황급히 제정신을 붙들었다.

“아, 저는 저기 소원 초등학교 관사에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름은 황에스더예요. 나이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입니다.”

한국 나이? 에스더의 이질적인 소개법에 인협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애석하게도 그 표정 변화는 에스더의 오해를 사, 그녀의 어깨를 한껏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이곳에 사람이 사는 줄 알았더라면 돌아갔을 거예요. 그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여길 지름길로 많이 다녔거든요. 아시다시피 여기가 관사에서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잖아요.”

에스더는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가파른 턱 위에 풀숲 사이로 보이는 관사 건물을 가리켰다. 

인협의 냉정한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쫓았다가 이내 궁지에 몰린 한 마리의 쥐 같은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에스더에게로 향했다. 

“그쪽한테 여기가 지름길이고 뭐고 제 알 바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지나다니지 마세요.”

“아-.”

따지고 보면 담장 너머로 나 있는 길인데, 혹시 이 길로 지나다니는 것도 안 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진 에스더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이는 인협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적 미소를 지었다.

웬 듣도 보도 못한 싸가지가 왔어. 분명히 갑순 할머니가 예전에 여기에 되게 좋으신 분들이 살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에스더는 속으로 인협을 매섭게 욕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미소를,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듯한 표정을 짓는 인협의 모습에 그마저도 약간 희미해졌지만.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 손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꼴 자주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에스더의 의문 가득한 눈빛을 읽어낸 인협의 대답에 그녀는 약간 찔렸지만, 그래도 미소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아, 네. 그럼요. 혹시 그쪽은-?”

에스더가 펼친 양손을 조심스럽게 인협 쪽으로 향하게 하자, 인협은 무슨 의미냐는 듯한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댔다. 

“혹시 이름이랑 나이가?”

”알 거 없어요. 어차피 마을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낼 마음도 없으니까, 신경 끄고 사시죠.”

말을 마친 인협은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고는 수건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낡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에스더는 입을 떡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었다. 

진짜 그냥 들어가 버린 거야? 사람이 저 정도로 싸가지가 없어도 될 노릇이냐고? 

에스더는 경악한 얼굴로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흥, 내가 다시는 여기를 지나다니나 봐라.”

그렇게 집을 사수하고 싶으면, 아예 오늘 온다고 미리미리 광고를 해놓던지. 다 알 수 있게 어디에 써 붙여 놓던지!

어차피 오랫동안 주인 없는 집이라 소원리에서 지내게 된 지난 일여 년간 마음껏 지나다녔던 길인지라, 에스더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스더는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동네 길을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아주 볼품없는 몸매더구먼. 참나, 그렇게 형편없는 몸매는 한 트럭 보여줘도 싫다고. 그냥 남자 알몸을 갑자기 봤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던 남자의 눈빛을 떠올린 에스더는 더 세게 쾅쾅거리며 발을 굴렀다. 

짜증 나. 그런 볼품없고 부정적인 인간한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두고 봐. 이 소원리에는 안 퍼지는 소식이나 소문이 없으니까. 

“그쪽 이름쯤이야 내일이면 마을에 다 광고되겠지. 흥! 주제에 되게 비싸게 구네. 지가 무슨 유명 인사라도 되는 줄 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에는 평균 이하의 외모를 한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한 괘씸함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이것이 소원리의 앙숙이 될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열기가 가득한 리그 오브 카오스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경기장. 

총 팀스코어 2대1의 상황으로 케이비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5판 3선승제로 결정지어지는 결승전이었기에, 지금보다 한 스코어라도 더 내어주면 지난 1년간 모두가 치열하게 준비해 왔던 월드컵 경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역시 케이비는 만년 그래왔듯이 2등에 그치고 말 것이었다. 

케이비 팀은 국내 부동의 1위 원티드와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월드 랭킹 1위 카이 선수의 그림자에 다시 한번 눌려버린 2인자라는 타이틀을 벗기를 바라왔다. 

한때는 카이 선수를 잇거나 뛰어넘을 선수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레브이자 인협은 그 누구보다 이 기회가 간절했다. 

“아아! 케이비!!! 오늘 드디어 레브 선수의 활약으로 첫 월드컵 우승을 따내는 날일까요?!”

“레브 선수가 아주 미쳐 날뛰는 중입니다!”

비등비등한 상황 속, 경기는 치열하고도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뒤늦게 케이비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찰나의 순간들이 이어지고, 경기 속 인협의 활약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아, 케이비!! 이제 마지막 포탑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역전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승기를 완전히 가져갈 수 있겠는데요.”

“원티드에서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해설자의 흥분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자, 마지막 마무리 들어가자. 지금이다-.”

원티드의 다섯이 모두 마지막 포탑 주변을 지키기 위해 집결해 있었다. 

그 주변을 맴돌며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던 때. 

케이비의 리더인 기태가 지시를 내리자마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인협이 팀 연습 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야, 먼저 튀어 나가면 어떡해!”

“어-?”

하지만 그 순간, 기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인협이 다른 이들보다 미세하게 앞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뭉쳐서 공격에 들어가야 유리할 상황에, 인협 혼자서 동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연습 때는 바로 들어가자고-. 

이상함을 감지할 새도 없이 어느새 다른 팀원들과 거리가 벌어져 있었고, 인협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걸 직감했을 땐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원티드의 세 선수가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인협의 모니터에는 곧 리스폰 화면이 떠 있었다. 

“아아! 이게 뭔가요!!”

가장 앞장서서 상대 팀을 공격해 줘야 할 원딜이자 공격력이 가장 강한 포지션인 인협이 사라지자, 원티드 팀이 다급하게 뒤따른 나머지 케이비 팀원들을 집어삼키는 건 한순간이었다.

참패. 다섯 모두가 황망한 얼굴로 발이 묶여버렸다. 

원티드 팀이 일제히 포탑들을 부수고 케이비가 지켜내야 하는 본진까지 진출했고, 한순간에 중심을 모두 다 잃어버린 케이비로 인해 경기 분위기가 뒤집혀버렸다.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기어이 회복하지 못한 채로 케이비는 마지막 게임을 내어주고 말았다. 

“와아아아-!!”

“아, 케이비! 이게 뭡니까!”

이번에도 월드컵 결승전은 원티드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케이비를 응원하던 팬들의 황망한 표정보다 더 참담한 얼굴로 헤드셋을 벗어 내린 케이비 팀은 무대에서 내려와 한 줄로, 대기실로 내려왔다. 

“야, 이 X신아!”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대기실로 내려가자마자 케이비의 감독인 정현의 욕지거리가 가장 먼저 인협에게 꽂혔다.

“내가 몇 번을 말해! 팀원들보다 그렇게 네가 잘난 거 같아? 어? 왜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해-.”

“그게-.”

“왜 다른 애들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냐고, 새X야!”

인협은 억울한 마음을 갖고서 오더를 내렸던 기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인 기태는 꾹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부족한 팀원을 향한 질책을 다 받아내겠다는 듯한 숭고해 보이는 그 태도에 인협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인협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아냥거리고, 그 누구보다 날 선 눈빛으로 그를 질타했을 그였다. 

그러나 지금 기태는 그 누구보다 겸손해‘보이는’ 리더였다. 인협의 시선이 천천히 각 팀원에게로 옮겨갔다.

모두 화도 나고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 패배의 원인은 너인 게 명확하니, 굳이 내게 그 이유를 묻지는 말라는 표정이었다. 

“뭐? 기태랑 애들은 왜 쳐다봐? 어? 또, 또 똑같은 변명을 하려고? 기태가 지시를 잘못 내렸다고? 다른 애들이 또 연습 때처럼 안 했다고?”

“……….”

“어?! 말 좀 해봐, 이 새X야!”

감독의 폭언이 이어지자, 인협은 순간 기태와 그의 옆에 선 준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발견했다.

또 일부러 그런 거야. 

인협은 점점 더 노골적이게 되어가는 기태와 준영의 따돌림에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반년 전쯤부터 시작된 묘한 따돌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협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가. 

그 이유가 실력과 인기 차이로 인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별다른 이유 없는 괴롭힘이었다. 

거세지는 괴롭힘과 그 사정을 모르고 인협만 밟아대는 감독의 만행에 나머지 두 팀원도 결국 침묵하며 그들의 괴롭힘에 가담하고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 그것이 바로 팀 내 인협의 포지션이었다. 

세간에는 알려질 일도 없을, 그런 비참한 자리. 세상은 그를 케이비에 가서 몰락한 선수 취급을 할 뿐이었다. 

아니면 빛나던 순간 케이비에 영입되어 온 팀을 함께 추락시키고 있는 문제아 취급이라든지. 

“감독님, 진정하세요.”

케이비의 코치인 봉길이 인협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인협에게 매섭게 다가서는 정현을 겨우 막아섰다. 

그나마 케이비 팀 내에서 공평히 인협을 대해주고 그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성기 때 워낙 이름을 떨쳤던 봉길의 실력 덕분인지, 아니면 하는 것 없이 기합만 시키는 정현을 대신해서 살뜰하게 팀을 꾸려나가는 봉길의 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현은 봉길에게만큼은 조금 부드러웠다. 

“아휴, 저 새X는 아주 구제 불능이라니까. 왜 쟬 아직도 빨아주는 애들이 있나 몰라-.”

정현은 거친 말을 남기고는 마지막으로 인협을 죽일 듯이 쏘아봤다. 

늘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나, 팀의 미묘한 따돌림은 그의 발목을 늘 잡았다.

또 기사가 나겠구나. 

의 떨어진 기량과 오판을 신나게 떠들어대고 씹어대겠지. 인협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공공연한 2인자 팀인 케이비로 이적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이 게임판에서 잘 버텨내서 팀을 1인자의 자리에 올려보겠노라고. 

그러나, 그 꿈은 이내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제는 선수로서 생명 유지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할 터였다. 

쾅. 정현과 그를 달래려 애를 쓰는 봉길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는 정적이 흘렀다. 

“야, 똑바로 안 하냐?”

팀원끼리만 남겨지자마자 태세 전환을 빠르게 한 기태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에 날이 선 인협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인협의 분노 섞인 시선이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기태와 준영은 파하하, 하고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어쭈? 주제에 꼴아봐? 야, 너만 아니었어도 오늘 우리 우승했어, 새X야.”

“도대체 저한테 이렇게까지 굴어서 얻는 게 뭡니까?”

“글쎄?”

참다가 날린 인협의 질문에 기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냥.”

“‘그냥’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한 사람의 커리어를 망쳐도 되는 겁니까?”

“아,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네. 네가 우리 커리어를 망친다는 생각은 안 들고?”

기태의 당당한 태도에 인협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기태가 이리도 당당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팀을 스폰서해주는 회사의 임원진에 그의 아버지가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었다.

공공연한 비밀 덕분에 팀 내 사람들은 기태 앞에서 티 나게 굽신거리고는 했었다. 

유일하게 순수 실력으로만 코치 자리를 얻어내었던 봉길만은 제외하고. 

“잘 생각해. 여기서 누구 한 명만 빠지면 다 좋아질 거 같으니까.”

낄낄. 마지막으로 인협을 비웃어준 기태와 준영도 대기실을 나갔다. 

“……”

숨 막히는 정적 속. 양측 눈치만 보며 조용히 있던 나머지 두 

팀원은 자리를 떠버렸다. 

“후우-.”

진짜 나만 떠나면 아무 문제가 없어지는 건가. 

인협은 쓰러지듯이 대기실 소파에 앉으며 생각했다. 

케이비 팀의 제일 가는 실력자가 인협이기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점점 이러한 생각은 그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최면에 걸려들듯이, 그 생각은 강하던 인협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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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들어가기 싫네. 인협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고행길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서 있기만 하는 에스더였다.“이참에 차라리 번호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잖아.”음식만 앞에 두고 문자를 보내는 거지.인협을 마주하기 싫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스더는 이내 스스로를 세차게 비웃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기겁하는 사람이 핸드폰 번호를 잘도 주겠네.눈앞에 절로 그려지는 상황에 에스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 “하아, 진짜 들어가기 싫어.”그때 끼이익, 하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인협이 걸어 나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에스더는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싶어서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댔다. 애석하게도 길가 풀숲은 그녀를 숨겨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발각된 에스더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내가 죄지었어? 지난번처럼 무단침입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여기는 엄연히 동네 길인데요?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잖아요.”에스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인협의 집으로 꺾어지는 길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반박에 인협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오늘 아무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에요. 저 언덕 위 교회 사모님이 그쪽한테 반찬 좀 전해달라고 하셔서요.”에스더는 용기를 내어서 어느새 제게 가까워진 인협에게 봉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을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습니까?”“어어, 이런 신성한 일요일에 무슨 소리예요?”“일요일은 그쪽한테나 신성하지,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인협은 가볍게 에스더가 내민 반찬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또 술 사러 가죠?”“그러든 말든.”“어제 내가 말했잖아요.

  • 웰컴 투 소원리   08. 산미치광이

    “이게 맞나?”“나도 몰라.”철호와 태욱은 긴장한 얼굴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들 예배가 시작된 후. 부인인 조 선생과 영애에게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잠시 인협의 집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아니, 그 폐가에 사람이 들어와 산다꼬?”“그러니까. 못해도 10년 정도는 방치되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소원리에 왔을 때 이미 김 씨 할머니네 부부가 돌아가신 후였으니까.”“그래?”“응.”귀향하기 전에도 영애를 따라서 소원리를 일 년에도 여러 번씩 찾아왔던 태욱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지나가다 마주쳤던 어린 시절의 인협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읍내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쯤 부모님의 상황이 좀 잘 풀리게 되어서 다시 인협이랑 동생을 데리고 갔다고 들었고. 태욱은 사실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두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와중에 인협이 나이에 답지 않게 어둡던 인상을 하고 있던 건 기억이 났다.“그 꼬맹이는 어떻게 자랐으려나?”태욱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 들어갔다.“저기요, 계십니까?”목소리가 큰 철호가 담장 너머에서 외쳤다. 그러자, 이내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낡은 철문이 열렸다.얼마나 관리가 안 되어있으면 저 철문에 기름칠 한번을 안 했대.굳이 집안까지 둘러보지 않아도, 집안 상태가 눈에 훤하다고 느낀 철호였다.“누구시죠?”그 어둡던 꼬맹이는 더 어두워지고, 가시까지 돋아나 버렸구나. 차가운 표정으로,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인협을 본 태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협의 두 눈은 고요하고 어두워 보였으나, 동시에 세상을 향해 불만 가득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아, 인협아. 나 태욱이 아저씨야, 기억나? 문 씨 할머니네 첫째 딸인 영애 이모의 남편.”“아-.”태욱의 기나긴 소개에도 인협은 꼿꼿한 태도로 일관했다. 큰일이

  • 웰컴 투 소원리   07. 철호와 태욱

    바로 다음 날. 일요일 이른 아침. 소원리의 주말은 대체로 주중의 낮시간보다 더 소란스러운 편이었다. 그 이유는 소원리 교회에서는 10시 예배가 드려지기 때문이었다.다른 날에는 보통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간 어르신들이 활동한 후, 아이들이 작은 소란을 피우며 등교하고 나면 해가 중천에 뜰 낮에서 이른 오후 시간까지 소원리 마을은 초등학교 부근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편이었다.5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없던 마을이었는데, 먼 읍내 교회까지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온 갑순과 인자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덕분일까. 양기탁 목사가 젊은 나이에 외진 시골 마을 목회를 꿈꾸게 되면서 주변에서 지원을 받아서 30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교회 건물을 짓게 되었다.그 옆에는 30평 남짓 되는 단층짜리 벽돌집이 있었다. 양 목사의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신축인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외관은 가장 밋밋했다. 그 이유는 후원받은 돈을 몽땅 교회를 짓는 데에다 쓴 탓에 돈을 아끼느라, 막상 사택으로 쓸 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 직접 양 목사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해봤자 소원리에 사는 사람들이나, 옆 동네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가끔 넘어와 예배를 드릴 뿐이었다.단출하게 지어진 교회 건물 안에는 예배드리는 예배실과 화장실, 그리고 그 밑에 지하층에 모두가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딸린 작은 부엌만 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황 선생님.”“아휴, 목사님. 교회에서는 계급장 떼고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교회를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양 목사의 밝은 인사에 에스더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양 목사가 환하게 웃었다.“어떻게 그래요. 일요일에만 제가 다른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죠. 일단 제가 머리가 안 좋아서 헷갈립니다.”에스더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사람 다섯이 겨우 앉을만한 장의자 여럿이 중간에 뻗은 복도를 기준으로 양옆에 놓인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소원리 교회 안에는 일종의 룰이 하나 있었다. 교회지만, 모든 직분을 떼고

  • 웰컴 투 소원리   06. 작은 돌멩이가

    그녀가 뒤로 쓰러지며, 뒤에 있던 원목 수납장에 뒤통수를 부딪친 탓이었다. “으윽-.”에스더는 밀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를 벌레 보듯이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인협은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당에 소쿠리를 들고 있는 갑순과 그 옆에 선 복란이 보였다. 함께 살며 유독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을 에스더는 소원리 듀오 할머니라고 부르고는 했다. “너, 너-.”“인협이, 이 몹쓸 놈아!”복란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던 사이, 오이와 애호박,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집어던진 갑순은 굽어진 허리에도 꽤 빠른 걸음으로 인협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입술은 노환으로 떨리는 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격렬한 분노로 인해 더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위험해!”그러자 복란이 그런 갑순을 가로막았다. “어디 이 좋아진 세상에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이야!”“주먹질 안 했어요. 이 사람이 제 팔을 붙들고 놓질 않아서-.”옛 할머니들이 종종 그랬듯, 갑순의 남편은 술을 마시면 돌변해 그녀를 괴롭게 하고는 했었다. 노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기 직전에는 비교적 순순하게 굴었던 그였으나, 그 아픔이 아직도 생생할 걸 알기에 인협조차도 그런 갑순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게 뭐! 그렇다고 여자를 때려! 이거 놔, 저 금수보다 못한 놈은 한대라도 때려줘야 쓰겠어-.”한번 자극당한 갑순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니, 진정해. 이 나이에 이 난리 피우면 쓰러져.”복란은 갑순 옆에서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곧 아흔을 바라보는 갑순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에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제가 먼저 귀찮게 매달리다가 이 사람이 뿌리쳐서 쓰러지게 된 거예요.”“그래?”에스더의 설명에 일순간 갑순의 몸부림이 멈췄다. 그러자 마당에는 급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휴-.”복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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