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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의 등장(2)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10:48:45

“으아아아악-!!!!”

인협이 놀랄 새도 없이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 갑작스럽고 우렁찬 비명에 인협은 놀라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젊은 사람 같은데, 이 마을에는 왜? 

인협은 호기심에 안경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바로 썼다. 그러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눈과 콧구멍을 있는 대로 크게 개방한 여자 하나가 보였다. 

까무잡잡한 편인 피부에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지만, 팔다리는 얇고 긴 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어딘가 탄탄한 인상을 주었다. 

모델 한혜지를 닮은 거 같은데? 아주 좋게 말하면 피겨 여신 김윤아와도 언뜻 닮은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눈에 띄는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매력이 충분히 있는 인상이었다. 

182센티미터인 인협과 눈높이가 많이 다르지 않은 걸 보아하니, 키가 적어도 170센티미터는 넘는 듯해 보였다.

“어, 어-.”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잠시 인협의 헐벗은 상체로 내려갔다가 황급히 그의 눈으로 돌아왔다. 

“전 아무것도 못 봤-.”

“누구신데 남의 집 옆을 막 다니십니까?”

얼굴이 붉어진 채로 황급히 변명하려던 여자의 말을 인협이 막았다. 그러자 여자는 천천히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또 다른 충격으로 인해 헤벌어진 입이 보였다. 

무슨 뻐끔대는 붕어 같네. 그 모습에 인협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저, 저-.”

“……”

흔들리는 동공.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여자는 이내 더 깊이 팬 인협의 미간 주름을 보고는 황급히 제정신을 붙들었다.

“아, 저는 저기 소원 초등학교 관사에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름은 황에스더예요. 나이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입니다.”

한국 나이? 에스더의 이질적인 소개법에 인협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애석하게도 그 표정 변화는 에스더의 오해를 사, 그녀의 어깨를 한껏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이곳에 사람이 사는 줄 알았더라면 돌아갔을 거예요. 그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여길 지름길로 많이 다녔거든요. 아시다시피 여기가 관사에서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잖아요.”

에스더는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가파른 턱 위에 풀숲 사이로 보이는 관사 건물을 가리켰다. 

인협의 냉정한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쫓았다가 이내 궁지에 몰린 한 마리의 쥐 같은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에스더에게로 향했다. 

“그쪽한테 여기가 지름길이고 뭐고 제 알 바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지나다니지 마세요.”

“아-.”

따지고 보면 담장 너머로 나 있는 길인데, 혹시 이 길로 지나다니는 것도 안 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진 에스더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이는 인협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적 미소를 지었다.

웬 듣도 보도 못한 싸가지가 왔어. 분명히 갑순 할머니가 예전에 여기에 되게 좋으신 분들이 살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에스더는 속으로 인협을 매섭게 욕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미소를,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듯한 표정을 짓는 인협의 모습에 그마저도 약간 희미해졌지만.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 손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꼴 자주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에스더의 의문 가득한 눈빛을 읽어낸 인협의 대답에 그녀는 약간 찔렸지만, 그래도 미소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아, 네. 그럼요. 혹시 그쪽은-?”

에스더가 펼친 양손을 조심스럽게 인협 쪽으로 향하게 하자, 인협은 무슨 의미냐는 듯한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댔다. 

“혹시 이름이랑 나이가?”

”알 거 없어요. 어차피 마을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낼 마음도 없으니까, 신경 끄고 사시죠.”

말을 마친 인협은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고는 수건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낡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에스더는 입을 떡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었다. 

진짜 그냥 들어가 버린 거야? 사람이 저 정도로 싸가지가 없어도 될 노릇이냐고? 

에스더는 경악한 얼굴로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흥, 내가 다시는 여기를 지나다니나 봐라.”

그렇게 집을 사수하고 싶으면, 아예 오늘 온다고 미리미리 광고를 해놓던지. 다 알 수 있게 어디에 써 붙여 놓던지!

어차피 오랫동안 주인 없는 집이라 소원리에서 지내게 된 지난 일여 년간 마음껏 지나다녔던 길인지라, 에스더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스더는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동네 길을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아주 볼품없는 몸매더구먼. 참나, 그렇게 형편없는 몸매는 한 트럭 보여줘도 싫다고. 그냥 남자 알몸을 갑자기 봤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던 남자의 눈빛을 떠올린 에스더는 더 세게 쾅쾅거리며 발을 굴렀다. 

짜증 나. 그런 볼품없고 부정적인 인간한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두고 봐. 이 소원리에는 안 퍼지는 소식이나 소문이 없으니까. 

“그쪽 이름쯤이야 내일이면 마을에 다 광고되겠지. 흥! 주제에 되게 비싸게 구네. 지가 무슨 유명 인사라도 되는 줄 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에는 평균 이하의 외모를 한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한 괘씸함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이것이 소원리의 앙숙이 될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열기가 가득한 리그 오브 카오스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경기장. 

총 팀스코어 2대1의 상황으로 케이비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5판 3선승제로 결정지어지는 결승전이었기에, 지금보다 한 스코어라도 더 내어주면 지난 1년간 모두가 치열하게 준비해 왔던 월드컵 경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역시 케이비는 만년 그래왔듯이 2등에 그치고 말 것이었다. 

케이비 팀은 국내 부동의 1위 원티드와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월드 랭킹 1위 카이 선수의 그림자에 다시 한번 눌려버린 2인자라는 타이틀을 벗기를 바라왔다. 

한때는 카이 선수를 잇거나 뛰어넘을 선수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레브이자 인협은 그 누구보다 이 기회가 간절했다. 

“아아! 케이비!!! 오늘 드디어 레브 선수의 활약으로 첫 월드컵 우승을 따내는 날일까요?!”

“레브 선수가 아주 미쳐 날뛰는 중입니다!”

비등비등한 상황 속, 경기는 치열하고도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뒤늦게 케이비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찰나의 순간들이 이어지고, 경기 속 인협의 활약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아, 케이비!! 이제 마지막 포탑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역전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승기를 완전히 가져갈 수 있겠는데요.”

“원티드에서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해설자의 흥분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자, 마지막 마무리 들어가자. 지금이다-.”

원티드의 다섯이 모두 마지막 포탑 주변을 지키기 위해 집결해 있었다. 

그 주변을 맴돌며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던 때. 

케이비의 리더인 기태가 지시를 내리자마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인협이 팀 연습 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야, 먼저 튀어 나가면 어떡해!”

“어-?”

하지만 그 순간, 기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인협이 다른 이들보다 미세하게 앞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뭉쳐서 공격에 들어가야 유리할 상황에, 인협 혼자서 동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연습 때는 바로 들어가자고-. 

이상함을 감지할 새도 없이 어느새 다른 팀원들과 거리가 벌어져 있었고, 인협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걸 직감했을 땐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원티드의 세 선수가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인협의 모니터에는 곧 리스폰 화면이 떠 있었다. 

“아아! 이게 뭔가요!!”

가장 앞장서서 상대 팀을 공격해 줘야 할 원딜이자 공격력이 가장 강한 포지션인 인협이 사라지자, 원티드 팀이 다급하게 뒤따른 나머지 케이비 팀원들을 집어삼키는 건 한순간이었다.

참패. 다섯 모두가 황망한 얼굴로 발이 묶여버렸다. 

원티드 팀이 일제히 포탑들을 부수고 케이비가 지켜내야 하는 본진까지 진출했고, 한순간에 중심을 모두 다 잃어버린 케이비로 인해 경기 분위기가 뒤집혀버렸다.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기어이 회복하지 못한 채로 케이비는 마지막 게임을 내어주고 말았다. 

“와아아아-!!”

“아, 케이비! 이게 뭡니까!”

이번에도 월드컵 결승전은 원티드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케이비를 응원하던 팬들의 황망한 표정보다 더 참담한 얼굴로 헤드셋을 벗어 내린 케이비 팀은 무대에서 내려와 한 줄로, 대기실로 내려왔다. 

“야, 이 X신아!”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대기실로 내려가자마자 케이비의 감독인 정현의 욕지거리가 가장 먼저 인협에게 꽂혔다.

“내가 몇 번을 말해! 팀원들보다 그렇게 네가 잘난 거 같아? 어? 왜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해-.”

“그게-.”

“왜 다른 애들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냐고, 새X야!”

인협은 억울한 마음을 갖고서 오더를 내렸던 기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인 기태는 꾹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부족한 팀원을 향한 질책을 다 받아내겠다는 듯한 숭고해 보이는 그 태도에 인협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인협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아냥거리고, 그 누구보다 날 선 눈빛으로 그를 질타했을 그였다. 

그러나 지금 기태는 그 누구보다 겸손해‘보이는’ 리더였다. 인협의 시선이 천천히 각 팀원에게로 옮겨갔다.

모두 화도 나고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 패배의 원인은 너인 게 명확하니, 굳이 내게 그 이유를 묻지는 말라는 표정이었다. 

“뭐? 기태랑 애들은 왜 쳐다봐? 어? 또, 또 똑같은 변명을 하려고? 기태가 지시를 잘못 내렸다고? 다른 애들이 또 연습 때처럼 안 했다고?”

“……….”

“어?! 말 좀 해봐, 이 새X야!”

감독의 폭언이 이어지자, 인협은 순간 기태와 그의 옆에 선 준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발견했다.

또 일부러 그런 거야. 

인협은 점점 더 노골적이게 되어가는 기태와 준영의 따돌림에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반년 전쯤부터 시작된 묘한 따돌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협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가. 

그 이유가 실력과 인기 차이로 인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별다른 이유 없는 괴롭힘이었다. 

거세지는 괴롭힘과 그 사정을 모르고 인협만 밟아대는 감독의 만행에 나머지 두 팀원도 결국 침묵하며 그들의 괴롭힘에 가담하고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 그것이 바로 팀 내 인협의 포지션이었다. 

세간에는 알려질 일도 없을, 그런 비참한 자리. 세상은 그를 케이비에 가서 몰락한 선수 취급을 할 뿐이었다. 

아니면 빛나던 순간 케이비에 영입되어 온 팀을 함께 추락시키고 있는 문제아 취급이라든지. 

“감독님, 진정하세요.”

케이비의 코치인 봉길이 인협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인협에게 매섭게 다가서는 정현을 겨우 막아섰다. 

그나마 케이비 팀 내에서 공평히 인협을 대해주고 그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성기 때 워낙 이름을 떨쳤던 봉길의 실력 덕분인지, 아니면 하는 것 없이 기합만 시키는 정현을 대신해서 살뜰하게 팀을 꾸려나가는 봉길의 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현은 봉길에게만큼은 조금 부드러웠다. 

“아휴, 저 새X는 아주 구제 불능이라니까. 왜 쟬 아직도 빨아주는 애들이 있나 몰라-.”

정현은 거친 말을 남기고는 마지막으로 인협을 죽일 듯이 쏘아봤다. 

늘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나, 팀의 미묘한 따돌림은 그의 발목을 늘 잡았다.

또 기사가 나겠구나. 

의 떨어진 기량과 오판을 신나게 떠들어대고 씹어대겠지. 인협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공공연한 2인자 팀인 케이비로 이적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이 게임판에서 잘 버텨내서 팀을 1인자의 자리에 올려보겠노라고. 

그러나, 그 꿈은 이내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제는 선수로서 생명 유지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할 터였다. 

쾅. 정현과 그를 달래려 애를 쓰는 봉길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는 정적이 흘렀다. 

“야, 똑바로 안 하냐?”

팀원끼리만 남겨지자마자 태세 전환을 빠르게 한 기태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에 날이 선 인협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인협의 분노 섞인 시선이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기태와 준영은 파하하, 하고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어쭈? 주제에 꼴아봐? 야, 너만 아니었어도 오늘 우리 우승했어, 새X야.”

“도대체 저한테 이렇게까지 굴어서 얻는 게 뭡니까?”

“글쎄?”

참다가 날린 인협의 질문에 기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냥.”

“‘그냥’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한 사람의 커리어를 망쳐도 되는 겁니까?”

“아,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네. 네가 우리 커리어를 망친다는 생각은 안 들고?”

기태의 당당한 태도에 인협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기태가 이리도 당당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팀을 스폰서해주는 회사의 임원진에 그의 아버지가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었다.

공공연한 비밀 덕분에 팀 내 사람들은 기태 앞에서 티 나게 굽신거리고는 했었다. 

유일하게 순수 실력으로만 코치 자리를 얻어내었던 봉길만은 제외하고. 

“잘 생각해. 여기서 누구 한 명만 빠지면 다 좋아질 거 같으니까.”

낄낄. 마지막으로 인협을 비웃어준 기태와 준영도 대기실을 나갔다. 

“……”

숨 막히는 정적 속. 양측 눈치만 보며 조용히 있던 나머지 두 

팀원은 자리를 떠버렸다. 

“후우-.”

진짜 나만 떠나면 아무 문제가 없어지는 건가. 

인협은 쓰러지듯이 대기실 소파에 앉으며 생각했다. 

케이비 팀의 제일 가는 실력자가 인협이기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점점 이러한 생각은 그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최면에 걸려들듯이, 그 생각은 강하던 인협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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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가기로한지 하루 만에 이렇게 막 쫓아와서 죄송한데요.”“미안해요.”“뭐가 미안한데요?”성난 유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협은 야속하게도 에스더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렇게 봉길은 인협의 집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이었다. “일단 뭐든 미안해요. 유진 씨를 화나게 해서.”앞서 넙죽 엎드리는 봉길을 보며 유진은 팔짱을 꼈다.“뭘 잘못했는지 알고 사과를 해야지 다음에 또 똑같은 짓을 안 하겠죠?”“어….”희대의 난제. 사랑하는 사람이 던지는 당신이 지금 뭘 잘못한 거 같아요? 라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알려줘요.”“어제 더위를 그렇게 심하게 먹었던 사람이 오늘 야외에서 축구를 해요?”유진의 타박에 봉길의 눈이 커졌다. “날 걱정해서….”“그래요. 걱정이 되어서요. 오늘 서울 올라갈 거라면서요.”뿔난 유진의 표정에 잔뜩 긴장했던 봉길은 크게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날 걱정해서 유진 씨가 이렇게 달려온 거라고요?”“……….”환해진 봉길의 얼굴이 얄미웠으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걱정 끼치는 일 없도록 할게요.”봉길의 깔끔한 사과에 유진은 마음이 확 풀어지는 걸 느꼈다. 남자 앞에서 제 성격이 유순하거나, 상냥한 편은 아니라는 걸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봉길은 과거의 남자들처럼 쩔쩔매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존심을 세우며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물론 유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유진이 화가 난 이유를 듣고는 봉길은 군말 없이 사과하고 앞으로 바뀔 것을 약속했다. ‘너는 여자애가 왜 이렇게 드세?’주아의 친부는 언젠가 이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유진은 어느 정도 이러한 부분이 자신의 일부임을 믿고 살아왔었다. 봉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말끔한 사과에 단숨에 화가 풀린 그녀였다. 애초에 자신이 이렇게 간단하게 화를 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그녀였다. “…….”“왜요? 내가 또 뭐 잘못했어

  • 웰컴 투 소원리   59. 예뻐 뭐가 됐든

    인협의 집. 씻고 나온 봉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다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인협을 발견했다. “그래서 인협 선수는요.”“네?”“인협 선수는 황 선생님이랑 어떻게 된 거예요?”봉길의 질문에 인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어쩌다가.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모난 자신 때문에 모든 게 오해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러다가 가장 큰 전환점은 장마로 인해 물이 많이 샜을 때였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때. 에스더는 그의 손을 붙들어주었다. 그가 놓으려고 해도 절대로 못 놓도록 꼭 붙들며. 그렇게 에스더가 반강제로 끌어올려 주었기에 지금의 삶이 있었다.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는 삶. 오늘을 죽지 못해 사느라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내일을 생각하고 기대하게 되는 삶을 에스더가 선물해 주었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꿀팁 좀 알려주세요. 저도 유진 씨랑 잘 되고 싶은데….”“글쎄요. 저한테 배울 게 없을 텐데. 특히 연애는요.”“어찌 됐든 지금 성공했잖아요.”“사실 저는 진짜 비겁하고 별로인 사람이었는데 에스더가 구제해 준거나 다름없죠.”구제라. 봉길은 유진과의 관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나같이 쑥맥이고 내세울 게 크게 없는 사람을 유진 씨가 구제해 준 거나 다름없네. “그냥, 유진 씨가 저를 내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납작 엎드려 살아야겠네요.”“맞아요. 그것뿐이죠, 사실. 진짜 별로였던 내 안에 있던,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봐줬던 여자니까요. 엄청 소중하죠.”“와….”불과 반년 전까지 보아왔던 인협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에 봉길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가시를 잔뜩 세우고 경계하던 인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저 말랑말랑한 슬라임 같은 존재 같을 뿐. 황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 걸까. 사랑의 힘이란 무엇인가. 이 어마어마한 현상에 진지한 고찰까지 하게 된 봉길이었다. “내가 인협

  • 웰컴 투 소원리   58. 일장춘몽

    “아휴, 나 선생님. 고마워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손님을 맞을 상황도 아니고….”인협, 봉길, 그리고 에스더를 배웅하던 순옥의 곤란한 눈빛이 거실 소파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서 앉은 철호와 그의 앞에 매서운 표정을 짓고 선 유진에게로 잠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간 인협은 그녀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네, 당연하죠. 선생님도 수술하고 회복하고 계신 중인데요.“”고마워요, 이해해 줘서.””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학교에서 만나요.“”네, 감사합니다.”현관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닫힌 후. 세 사람은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며 소원 초등학교로 향하기 시작했다. 봉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력은 회복한 듯해 보였다.“차는 내일 찾으러 와요. 조 선생님 남편분, 내일 일찌감치 철물점으로 출근하실 테니까요.”“네….”봉길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순옥의 집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철호가 집으로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알아차린 철호가 노발대발했고, 덩달아 유진이 봉길을 변호하며 철호와 실랑이를 하게 된 탓에 세 사람은 집에서 걸음을 서둘러 나온 것이었다.봉길은 오늘 일단 인협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하룻밤 묵어본 후, 몸이 회복되면 다음 날인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는 게 맞을까요?”“아니요. 주아 어머님께 맡기기로 해요.”마치 사나운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를 보고 선 것만 같았던 광경을 떠올린 인협이 발길을 돌리려는 봉길을 막았다.“얻어맞아도 내가 얻어맞는 게 맞는데….“”왜요?“”내가 유진 씨를 쫓아다니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오-.”선하고 강단은 있어서 나서야 할 때는 늘 굳건한 편이었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유순해 보이는 봉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 여자를 쫓아다니다니. “역시…. 겉모습만 봐서는 연애할

  • 웰컴 투 소원리   57. 왜 더 좋아지지?

    버스 정류장 앞. 서로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한 봉길과 유진이었다.“그럼, 우리 카페로 가요. 거기에 차가 주차되어 있거든요. 제가 유진 씨 집까지 태워다줄게요.”“아, 버스 타고 들어가도 돼요. 항상 출퇴근할 때마다 타는 버스거든요.”“제가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래요.”“……..”“근데, 유진 씨는 보나 마나 아이 스케줄도 있을 거니까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봉길의 배려에 감동한 유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요. 가는 길에라도 유진 씨 좀 보게.”“그래요, 그럼.”원래도 독립적인 성격이었으나 주아를 가진 걸 알고 주아의 친부에게 버림받을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유진은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절대 기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주변 도움의 손길을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서 홀로 모든 걸 해내 왔던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봉길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유진의 마음을 자꾸만 말랑하게 만들었다. 유진이 기대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유진이 필요하다는 걸 먼저 알려주는 그라서 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봉길은 먼저 자신이 더 취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매일매일 참았어요. 여기까지 달려오는 거.”“왜 그렇게 참았어요?”“유진 씨 입장에서는 무서울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먼저 명함을 받고서도 연락 안 하기로 결정했는데, 내가 바로 카페에 불쑥 나타나면.”그랬을 수도. 봉길과 함께 걷던 유진은 의심 많은 제 성격에 충분히 그랬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제가 워낙 겁쟁이라서요. 100퍼센트의 확신이 없으면 잘 못 움직이는 스타일이거든요. 리스크나 실패를 워낙 싫어해서.”“…….”“미안해요. 사실 내 인생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낸 건데도 많이 늦었죠?”마음이 참 예쁜 사람이라는 게 어찌 이리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묻어나오는지. 봉길의 말에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아….”순간 걸음을 늦추며 비틀거린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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