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끄으응-.”
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수업에 참여할 아이들을 상상한 에스더는 울상을 하고서 무너져 내렸다.
“어떡하지?”답 없는 질문만 관사 안에 울렸다.
투두둑. 그때,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났다.
“아, 벌써 장마철이구나.”동해의 장마철은 보통 6월 말에 찾아오는 편이었으나 올해는 조금 일찍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싸, 일단 체육 수업은 실내에서 대충 이론이랑 게임으로 대체해서 진행해 보자.
에스더는 벌써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흐릿해진 풍경 사이로 뭉툭하게 퍼진 작은 불빛이 눈에 띄었다.
“아니야, 미친 생각이지. 아무리 급해도 저 인간을 어떻게 선생으로….”지난번, 학교에 가끔 놀러 오는 다섯 살배기 예솜을 대하던 인협의 모습을 떠올린 에스더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 세상에서 아이를 가장 안 예뻐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인협일 것이었다.
“정렬 씨한테라도 한번 부탁해 볼까?”에스더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렬은 돈도 거의 되지 않는 농사일 외에 가계를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인 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결과 유림이 풍족하지는 못해도 큰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그런 정렬 씨에게 일을 포기하고 봉사나 다름없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안 해야 하는 짓이지.
“저 인간이 성격만 좀 좋았으면-.”지난번에 들어보니까 공부도 잘했다던데.
에스더는 팔짱을 끼고서 창밖 불빛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아이고-.”
“언니, 일어났나?”갑순의 앓는 소리에 옆방에서 복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
낡은 한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솨아아, 하고 내리는 장맛비 소리 사이에 들렸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갑순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고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비 오는 날이면 늘 온갖 곳이 다 쑤시고는 했다.
더 가까이서 들려온 문소리와 함께 습한 기운과 비료 냄새가 섞인 비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비가 오니 많이 쑤셔?” “안 쑤시는 데가 있나.” “아이고-.”복란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방 안으로 들어와 갑순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차 늙은 사이에.” “그래도 내가 좀 더 덜 고장 나고 조금이라도 더 젊잖아. 나중에 내가 아프면 언니도 나한테 이렇게 해줘.” “나중은 무슨. 당장 내일 눈뜰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껄껄껄. 갑순의 농담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얼핏 들으면 무례할 수도 있는 이런 농담은 늙은이들만의 특권이었다.
그새 갑순의 시선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으로 향했다. 처마 너머로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퍽 굵었다.
”또 자식들 걱정돼?“ “걱정되지. 애들 사는 데에 홍수는 안 날까,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네.” “하여튼 산전수전 아무렇지 않게 겪어낸 언니가 이런 쓸데없는 걱정하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언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시골에 사는 우리가 자식들을 더 걱정시키는 게 맞아.” “…….” “도시가 얼마나 더 잘돼있는데.”긴 시간 동안 대구에서 살다 온 복란인지라, 그녀는 도시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끽해야 한 달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한 읍내에 나가는 게 일상의 전부인 갑순이었다.
어쩌다 자식들이 모시고 도시에 나가도 웬 이 세계에 간 것처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도시란 미지의 세계요, 어쩌면 결코 그녀가 속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옆에 흐르는 강이 불어나서 소도 떠내려오고 사람도 떠내려오고-. 산사태도 많이 나서 집도 묻히고 했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고모님이랑 사촌 동생도 그렇게 잃었다고. 언니가 백번은 말해준 거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옅어진다는데.
어찌 그날 느꼈던 공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장마철에 대한 공포는 영혼에 새겨진 것처럼, 수많은 괜찮은 장마철을 겪어내도 여전히 갑순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늙은 대로 늙은 자신은 죽으면 만다지만, 갑순은 늘 비가 올 때마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손주와 죽음을 자꾸만 연관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지나친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는 늙은 엄마가 되었을 뿐이었다.
서운함이 섞인 갑순의 시선이 아침부터 아무 전화도 울리지 않은 애꿎은 전화기로 향했다.
비 때문에 할일이 없어진 탓에 비 내리는 풍경만 보고 있자면, 쳇바퀴 돌듯이 지난번 통화로 없애버렸던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니,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자식들은 그래. 팽팽하게 젊어서 사느라 바쁘지.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잘 산다는 게 복이고.” “어째 늙어갈수록 사람 속이 좁아져.” “몸이 여기저기 고장이 나니까, 자꾸만 누워있게만 되어서 그래. 우리도 바빴던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사실 갑순에 비해 자식 걱정은 덜 한 편인 복란인지라, 해당 사항은 없었지만, 그녀는 공감의 의미로 기꺼이 갑순과 한편이 되어주었다.
“그러게. 이놈의 망할 비나 그쳤으면 좋겠네.” “밭에 나가라도 있어야 잡생각이 덜할 텐데, 그치?” “……” “보일러 좀 틀어줄까? 여름에도 종종 추워하잖아.”나이가 들어가니 체온이 내려가며, 여름에도 종종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는 하는 갑순이었다.
“방에서 이불 덮고 있으면 괜찮아.” ”그래-.“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울 비가 꼭 누군가를 잡아먹으러 온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갑순은 주름진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 툭, 툭-.볼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곤히 잠들어 있던 인협이 눈을 떴다.
톡. 그때,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뭐야-.”당황한 인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사방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불이 꺼진 집안은 어둡기만 했다.
인협은 불을 켜고서 집안을 살폈다. 물샌 자국이 난 곳부터 시작해, 족히 서너 군데는 더 물이 새고 있었다.
“아-.”그때 아저씨들이 도와주신다고 할 때 도움받을 걸 그랬어.
집 상태에 관한 걱정이 가득하던 철호와 태욱의 눈빛을 떠올린 그는 거친 손짓으로 뒷머리를 쓸었다.
그는 일단 욕실에서 적당한 크기에 바가지와 부엌 찬장에서 그릇을 가져와 물이 새는 곳에다가 두었다.
집안을 쭉 둘러보니, 물이 새는 곳이 족히 열 곳은 넘었다.
”괜찮나?“이제 막 시작된 장맛비 줄기는 그다지 굵은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두 주 정도는 지속될 비였다.
그리고 더 거세질 빗줄기였고.
“……..”뒤늦게라도 보수를 시작해 볼까 했지만, 집 보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협이 봐도 장마철에는 공사를 하는 게 아니겠다 싶었다.
일단 버텨보자.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서울 자취방은 이미 다 정리하고 내려왔고, 본가에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은 그였다.
그렇다고 따로 번듯한 숙소를 구할 돈을 쓰기에는, 프로 게이머 시절 벌어두었던 돈 중에서 가족에게 넘기지 않은 일부만 갖고 있어서 겨우 몇 달 생활비를 하면 끝일 돈이었다.
“정렬이한테 일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해봐야 하나.”안 되면 데리고 다니면서 조수로라도 써달라고 해야겠네. 일이라도 배우게.
인협은 짐을 물이 새지 않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며 고민했다.
*** 우중충.장마가 시작된 소원리의 하늘을 교무실 창문으로 내다본 에스더는 이보다 적절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원 초등학교의 교내는 유독 어둡고 습했다. 이런 기운이 학생들에게도 내려앉는 건지, 이런 날씨인 날에는 유독 아이들이 더 차분해지고는 했다.
조 선생님은 잘하고 계시려나.
남편인 철호와 상의한 후, 결국 조 선생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병가를 내기로 했다. 이 소식에 대해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말로 설명을 해주고 있을 터였다.
소식을 들은 본용은 곧바로 병가를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조 선생의 간곡한 부탁에 그녀의 일을 이어받을 에스더에게 추가로 약간의 돈을 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본용은 발을 빼려고 시동을 걸었던 고 선생에게 에스더를 도와 적어도 두 과목 정도는 맡아달라고 그에게 신신당부를 해주었다.
명색이 교장이어도 학교 운영에는 전혀 관심 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고 선생의 뺀질거림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동네 어른이자, 아버지와 가장 절친인 본용의 부탁인지라 고 선생은 거부하지도 못한 채 우는 얼굴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중에는 가장 쉬워 보이는 미술과 체육을 날름 골라버린 게 얄미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어디냐는 생각에 에스더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음악 시간은 어떡하냐고-.”에스더는 당장 내일부터 맡게 될 과목들을 떠올리고는 눈앞이 캄캄해져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조 선생이 남겨준 교육 자료를 훑어보는 중이었는데, 에스더는 더욱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가르칠 때는 주말에 잠깐 짬 내서 수업 계획을 짜고 자료를 만들면 일주일 동안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목들까지 가르치자니 날마다 잠을 줄여가며 수업 계획을 짜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으아-.”쓰러지듯이 책상에 몸을 기댄 에스더는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내뱉은 말이니,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지. 아이들도 배워야 할 것 아니야.
주루룩. 유리창에 빗물이 연달아 부딪쳐 흘렀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