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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각자의 고민

作者: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4 00:07:31

“끄으응-.”

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

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

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

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수업에 참여할 아이들을 상상한 에스더는 울상을 하고서 무너져 내렸다. 

“어떡하지?”

답 없는 질문만 관사 안에 울렸다. 

투두둑. 그때,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났다. 

“아, 벌써 장마철이구나.”

동해의 장마철은 보통 6월 말에 찾아오는 편이었으나 올해는 조금 일찍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싸, 일단 체육 수업은 실내에서 대충 이론이랑 게임으로 대체해서 진행해 보자. 

에스더는 벌써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흐릿해진 풍경 사이로 뭉툭하게 퍼진 작은 불빛이 눈에 띄었다.

“아니야, 미친 생각이지. 아무리 급해도 저 인간을 어떻게 선생으로….”

지난번, 학교에 가끔 놀러 오는 다섯 살배기 예솜을 대하던 인협의 모습을 떠올린 에스더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 세상에서 아이를 가장 안 예뻐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인협일 것이었다. 

“정렬 씨한테라도 한번 부탁해 볼까?”

에스더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렬은 돈도 거의 되지 않는 농사일 외에 가계를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인 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결과 유림이 풍족하지는 못해도 큰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그런 정렬 씨에게 일을 포기하고 봉사나 다름없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안 해야 하는 짓이지. 

“저 인간이 성격만 좀 좋았으면-.”

지난번에 들어보니까 공부도 잘했다던데. 

에스더는 팔짱을 끼고서 창밖 불빛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아이고-.”

“언니, 일어났나?”

갑순의 앓는 소리에 옆방에서 복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 

낡은 한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솨아아, 하고 내리는 장맛비 소리 사이에 들렸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갑순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고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비 오는 날이면 늘 온갖 곳이 다 쑤시고는 했다. 

더 가까이서 들려온 문소리와 함께 습한 기운과 비료 냄새가 섞인 비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비가 오니 많이 쑤셔?”

“안 쑤시는 데가 있나.”

“아이고-.”

복란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방 안으로 들어와 갑순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차 늙은 사이에.”

“그래도 내가 좀 더 덜 고장 나고 조금이라도 더 젊잖아. 나중에 내가 아프면 언니도 나한테 이렇게 해줘.”

“나중은 무슨. 당장 내일 눈뜰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껄껄껄. 갑순의 농담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얼핏 들으면 무례할 수도 있는 이런 농담은 늙은이들만의 특권이었다. 

그새 갑순의 시선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으로 향했다. 처마 너머로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퍽 굵었다. 

”또 자식들 걱정돼?“

“걱정되지. 애들 사는 데에 홍수는 안 날까,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네.”

“하여튼 산전수전 아무렇지 않게 겪어낸 언니가 이런 쓸데없는 걱정하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언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시골에 사는 우리가 자식들을 더 걱정시키는 게 맞아.”

“…….”

“도시가 얼마나 더 잘돼있는데.”

긴 시간 동안 대구에서 살다 온 복란인지라, 그녀는 도시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끽해야 한 달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한 읍내에 나가는 게 일상의 전부인 갑순이었다. 

어쩌다 자식들이 모시고 도시에 나가도 웬 이 세계에 간 것처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도시란 미지의 세계요, 어쩌면 결코 그녀가 속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옆에 흐르는 강이 불어나서 소도 떠내려오고 사람도 떠내려오고-. 산사태도 많이 나서 집도 묻히고 했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고모님이랑 사촌 동생도 그렇게 잃었다고. 언니가 백번은 말해준 거 같은데.”

“…….”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옅어진다는데. 

어찌 그날 느꼈던 공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장마철에 대한 공포는 영혼에 새겨진 것처럼, 수많은 괜찮은 장마철을 겪어내도 여전히 갑순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늙은 대로 늙은 자신은 죽으면 만다지만, 갑순은 늘 비가 올 때마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손주와 죽음을 자꾸만 연관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지나친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는 늙은 엄마가 되었을 뿐이었다.

서운함이 섞인 갑순의 시선이 아침부터 아무 전화도 울리지 않은 애꿎은 전화기로 향했다.

비 때문에 할일이 없어진 탓에 비 내리는 풍경만 보고 있자면, 쳇바퀴 돌듯이 지난번 통화로 없애버렸던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니,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자식들은 그래. 팽팽하게 젊어서 사느라 바쁘지.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잘 산다는 게 복이고.”

“어째 늙어갈수록 사람 속이 좁아져.”

“몸이 여기저기 고장이 나니까, 자꾸만 누워있게만 되어서 그래. 우리도 바빴던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사실 갑순에 비해 자식 걱정은 덜 한 편인 복란인지라, 해당 사항은 없었지만, 그녀는 공감의 의미로 기꺼이 갑순과 한편이 되어주었다.

“그러게. 이놈의 망할 비나 그쳤으면 좋겠네.”

“밭에 나가라도 있어야 잡생각이 덜할 텐데, 그치?”

“……”

“보일러 좀 틀어줄까? 여름에도 종종 추워하잖아.”

나이가 들어가니 체온이 내려가며, 여름에도 종종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는 하는 갑순이었다. 

“방에서 이불 덮고 있으면 괜찮아.”

”그래-.“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울 비가 꼭 누군가를 잡아먹으러 온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갑순은 주름진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

툭, 툭-.

볼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곤히 잠들어 있던 인협이 눈을 떴다. 

톡. 그때,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뭐야-.”

당황한 인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사방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불이 꺼진 집안은 어둡기만 했다.

인협은 불을 켜고서 집안을 살폈다. 물샌 자국이 난 곳부터 시작해, 족히 서너 군데는 더 물이 새고 있었다. 

“아-.”

그때 아저씨들이 도와주신다고 할 때 도움받을 걸 그랬어. 

집 상태에 관한 걱정이 가득하던 철호와 태욱의 눈빛을 떠올린 그는 거친 손짓으로 뒷머리를 쓸었다.

그는 일단 욕실에서 적당한 크기에 바가지와 부엌 찬장에서 그릇을 가져와 물이 새는 곳에다가 두었다. 

집안을 쭉 둘러보니, 물이 새는 곳이 족히 열 곳은 넘었다.

”괜찮나?“

이제 막 시작된 장맛비 줄기는 그다지 굵은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두 주 정도는 지속될 비였다. 

그리고 더 거세질 빗줄기였고. 

“……..”

뒤늦게라도 보수를 시작해 볼까 했지만, 집 보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협이 봐도 장마철에는 공사를 하는 게 아니겠다 싶었다. 

일단 버텨보자.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서울 자취방은 이미 다 정리하고 내려왔고, 본가에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은 그였다. 

그렇다고 따로 번듯한 숙소를 구할 돈을 쓰기에는, 프로 게이머 시절 벌어두었던 돈 중에서 가족에게 넘기지 않은 일부만 갖고 있어서 겨우 몇 달 생활비를 하면 끝일 돈이었다. 

“정렬이한테 일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해봐야 하나.”

안 되면 데리고 다니면서 조수로라도 써달라고 해야겠네. 일이라도 배우게. 

인협은 짐을 물이 새지 않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며 고민했다.

***

우중충. 

장마가 시작된 소원리의 하늘을 교무실 창문으로 내다본 에스더는 이보다 적절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원 초등학교의 교내는 유독 어둡고 습했다. 이런 기운이 학생들에게도 내려앉는 건지, 이런 날씨인 날에는 유독 아이들이 더 차분해지고는 했다. 

조 선생님은 잘하고 계시려나. 

남편인 철호와 상의한 후, 결국 조 선생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병가를 내기로 했다. 이 소식에 대해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말로 설명을 해주고 있을 터였다. 

소식을 들은 본용은 곧바로 병가를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조 선생의 간곡한 부탁에 그녀의 일을 이어받을 에스더에게 추가로 약간의 돈을 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본용은 발을 빼려고 시동을 걸었던 고 선생에게 에스더를 도와 적어도 두 과목 정도는 맡아달라고 그에게 신신당부를 해주었다. 

명색이 교장이어도 학교 운영에는 전혀 관심 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고 선생의 뺀질거림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동네 어른이자, 아버지와 가장 절친인 본용의 부탁인지라 고 선생은 거부하지도 못한 채 우는 얼굴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중에는 가장 쉬워 보이는 미술과 체육을 날름 골라버린 게 얄미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어디냐는 생각에 에스더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음악 시간은 어떡하냐고-.”

에스더는 당장 내일부터 맡게 될 과목들을 떠올리고는 눈앞이 캄캄해져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조 선생이 남겨준 교육 자료를 훑어보는 중이었는데, 에스더는 더욱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가르칠 때는 주말에 잠깐 짬 내서 수업 계획을 짜고 자료를 만들면 일주일 동안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목들까지 가르치자니 날마다 잠을 줄여가며 수업 계획을 짜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으아-.”

쓰러지듯이 책상에 몸을 기댄 에스더는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내뱉은 말이니,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지. 아이들도 배워야 할 것 아니야. 

주루룩. 유리창에 빗물이 연달아 부딪쳐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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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웰컴 투 소원리   20. 조금은 서툰 진심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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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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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웰컴 투 소원리   16. 장마의 시작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 웰컴 투 소원리   15. 어른의 정의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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