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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색안경을 벗겨낸 듯이

Penulis: 랑끗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7-26 11:20:41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

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

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

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

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

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

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

그 환경이 주는 안락함도 꽤 컸다. 

“…….”

분명 죽으리라고 결심했던 날이었는데. 

잠에서 깨어 지붕에서 줄줄 흐르던 물줄기를 본 인협은 그때 결심했었다.

하루하루 버티고 유지하기도 지친 삶에 더 이상의 문제는 그를 넘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누군가에게는 작고 사소한 이유라 할지라도, 매일 아침에 일어날 힘조차 없는 그에게는 그를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소한 이유가 또 그를 살도록 만들어주었다. 

잠시 그에게 닿았던 누군가의 체온이 더 이상 세상을 향해 미움을 쏟아내지 않아도 살아있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었다.

무채색의 세상에 누군가가 색을 풀어놓은 것처럼, 에스더가 인협을 안아주었던 순간부터 지난 몇 달간 고통 외에는 몽땅 사라져 버렸던 인협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과 세상을 향한 미움만 가득하던 감정이 아주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굳게 걸어 잠가두었던 감정의 문이 열리며, 에스더를 향한 고마움이 피어올랐다. 

오랫동안 그 안에 존재하지 않던 감정이었다. 가득한 미움 사이로 느껴질 틈이 없던 감정이었다.

또한 모든 게 흐릿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모든 감각이 되살아난 듯이 모든 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바깥의 빗소리, 그의 몸을 감싼 물의 온기, 그리고 그를 비추는 욕실의 불빛. 

문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여대는 에스더의 발걸음 소리까지도. 

먹먹하게 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생생하게 그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동안 꼭 붕 떠 있는 채로 살다가 드디어 땅에 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지난 몇 달 동안 나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거지? 

그 일이 일어난 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제대로 된 하루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원망과 자책, 그리고 취기로만 가득하던 기억들이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마치 누가 눈에 씌워져 있던 색안경을 벗겨낸 듯이,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이전에는 타당하다고만 느껴졌던 모든 분노가 이제는 약간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었다. 

그 정도까지 화나 있을 일은 아니었는데. 그 정도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와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약간 삐뚤어져 있던 그의 시각을 다시 0도로 돌려놓은 것만 같았다. 

고요한 욕실 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다시 잡은 인협은 마저 씻은 후, 수건을 몸에 둘렀다. 

똑똑. 때마침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 씻은 것 같아서요. 갈아입을 옷이요.”

”아, 네.“

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음성에 인협은 잠가두었던 욕실 문을 조금 열고서 그녀가 내민 옷가지를 받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주섬주섬 입고서 욕실 밖으로 향했다. 에스더가 준 옷은 다행히도 딱 맞았다. 

“아, 다행이네요. 옷은 잘 맞네요.”

“고마워요.”

이제야 분노 대 분노가 아니라, 드디어 제 나이대의 성인이 되어 성인 대 성인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이 든 두 사람이었다. 

그 이질감에 두 사람은 왠지 모를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애꿎은 주변만 둘러볼 뿐이었다.

“집이 좋네요.”

“아, 네. 다행히 이부자리가 여유분이 있어서요. 저는 소파에서 잘 테니, 인협 씨가 안방 침대에서 자요.”

“아뇨, 에스더 씨가 원래 자던 침대에서 자요. 내가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

“그러다가-.”

또 마음이 바뀌어서 그쪽이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요? 

미처 끝마치지 못한 에스더의 질문을 고스란히 알아들은 인협은 피식 웃었다. 

비아냥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에스더로서는 처음 보는 그의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이제 그런 마음이 쉽사리 다시 생기지는 않을 테니.”

“정말요?”

“네. 크나큰 결정이었는데…. 실패했으니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또 그런 짓 하면, 나도 못 살아요.”

“왜요?”

에스더의 극단적인 말에 인협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내 삶 망치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왜라는 의문이 또다시 인협의 머릿속을 채웠다. 

“난 그쪽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해봤자,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정도.”

“옆집 사람이고 나발이고, 나는 지나가는 행인이 내 눈앞에서 그렇게 되어도 똑같은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인생을 좀 피곤하게 사는 편이시네요.”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튀어나온 솔직한 진심에 인협은 헙, 하고서 에스더의 눈치를 살폈다. 

에스더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지만, 굳이 말을 더 덧붙이지는 않았다.

날이 날인만큼, 인협을 평소보다 조금 더 배려하려는 그녀의 노력이었다. 

“뭐, 지나친 오지랖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태어나기를 지나친 오지라퍼로 태어난 것을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

“당장 옆에서 누군가가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걸 도저히 모르는 척을 못 하겠더라고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에스더의 설명에 인협은 신기함을 느꼈다. 

자신의 삶의 몫도 버거울 텐데, 왜 굳이 타인의 괴로움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 마치 그게 자신의 몫이라도 되는 양.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설 수 있는,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온 그인지라 그런 에스더가 더더욱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 거칠고 냉정한 세상 속에서 이런 가치관을 갖고서 살아온 사람이라니. 일종의 희귀종이나 돌연변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거슬렸었나 봐요.”

“네?”

“사실, 에스더 씨한테 유독 더 그렇게 대했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너무 달라서.”

“…….”

“너무 달라서 이게 진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진짜라고 하기엔 너무 좋은 마음이니까.”

가시를 벗겨낸 인협은 말랑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솔직했다. 

너무 말랑거리고 순수해서 이런 사람은 처음 대해보는 에스더가 당황스러울 만큼.

“뭐, 사실 거창하거나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상대를 향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랄까.”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좋은 마음인 거죠.”

새벽의 특권일까. 

둘은 평소보다 더 솔직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투두둑. 빗소리가 관사 건물을 두드리는 소리만 어렴풋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이만 자러 가볼까요?”

“아, 좋죠.”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에스더는 서둘러 대화를 끝마쳤다. 

에스더가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 쪽으로 몸을 틀자, 인협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거실에서 자요.”

“나, 내일 일찍 출근해요. 괜히 인협 씨 잠 깨울 거예요.”

“시끄러워도 잘 자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까 집에서 자고 있던 거 보면 알잖아요.”

“그래도-.”

“내가 객이에요. 에스더 씨가 집주인이고. 절대로 나 혼자 어디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인협의 다짐에도 에스더의 불안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 바로 옆 바닥에라도 재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요.”

“알겠어요.”

물러서지 않는 인협만 바라보던 에스더는 이내 이쯤에서 실랑이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아, 그리고 내가 내일 교장 선생님께 비어 있는 옆 관사를 인협 씨한테 내어줄 수 있나 한번 여쭤볼게요.”

“네?”

“내가 여기에 오기 직전에 돈을 지원받아서 관사 두 채 전부를 싹 다 고쳤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옆집도 이 정도로 새집 같을 거예요.”

“정말요? 선생님들만 머무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시골 마을이 절차가 없다지만-.”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리였지만, 몇몇 마을 어른들의 반대가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어른들 대다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인협이 사용한다고 하면 더 거센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건 그러네요. 어느 정도의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겠어요.”

“…….”

“아!”

그 순간, 에스더의 두 눈이 반짝였다. 

“명분이 필요하다면, 임시 선생님 자격은 어때요?”

“네?”

“지금 조 선생님께서 암 치료 때문에 적어도 몇 달간은 자리를 비우실 예정이에요. 그래서 내가 여섯 과목을 도맡아 가르치고 있거든요.”

“내가 그런 일을 해도 돼요?”

“왜요? 마을의 소문난 모범생이었다면서요. 교장님도 이곳에 사신 지 오래되셨으니, 그런 그쪽의 실력을 모르시진 않을 것 같고.”

“아무리 분교라지만, 이렇게 절차 없이 막 해도 될까요?”

“어쩔 수 없죠. 이 작은 분교에 선생님을 어떻게 빠른 시일내에 구하겠어요. 이렇게라도 메꿔야 아이들이 뒤처지지 않죠.”

에스더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 인협은 더 이상의 반박은 하지 못했다. 

“알겠어요, 그럼.”

“아, 혹시 악기 다룰 줄 알아요?”

“네, 피아노랑 기타 조금요.”

예전에 프로게이머 시절에 취미로 배워두었던 악기였다. 

둘 다 곧잘 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인협의 재능을 아까워할 정도였다. 

그런 인협의 답에 에스더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너무 잘 됐다!“

”왜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음악 선생님이 필요했거든요. 내가 어떻게든 다른 과목은 쫓아가 보겠는데, 그건 재능의 영역인지 도저히 안 되어서요.”

“아-.”

“그럼, 예체능을 아예 인협 씨에게 맡기고 두 과목 정도를 고 선생님께 맡기면 좋겠다.”

“고 선생님?”

“고제환 선생님이요!”

“아, 제환이 형이요?”

어렴풋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인상 깊은 얼굴에 인협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형이세요?”

“아, 열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어렸을 때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열다섯 살…. 보통 그 정도면 삼촌이라고 하지 않나? 

고 선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협을 본 에스더는 의아해하며 생각했다.

 

“아무튼 아는 사이라니까 다행이네요.”

“뭐, 알기는 아는데 그렇게까지 좋은 사이는 아니죠. 사실 난 옛날에도 입바른 소리 잘해댔었으니까요.”

“아-.”

늘 자신이 최고라고 칭송받아야만 하는 제환과 모든 것에 심드렁한 인협은 겉모습만 봐도 매우 극과 극이었다. 

딱 봐도 물과 기름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인협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 스물다섯이요.”

“어? 동갑이네요. 이런 외딴 시골에서 만나기 힘든 동갑내기인데, 우리 말 놓을까요?”

“그러죠.”

에스더의 제안을 인협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뚱한 무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얼굴은 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럼, 잘 자. 일단 내일 교장 선생님께 허락받고 알려줄게.”

“그래.”

언어의 변화에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애꿎은 벽만 훑어보며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그래.”

“그리고 사람들한테 여기서 잤다는 사실, 최대한 비밀로 해줘.”

“아-.”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인협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 젊은 남녀가 한집에서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두 사람은 당장 그다음 날 결혼이라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응.”

“그럼, 진짜 들어갈게. 안녕.”

에스더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랑끗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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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 웰컴 투 소원리   70.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 웰컴 투 소원리   69. 물음표로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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