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
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
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
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
그 환경이 주는 안락함도 꽤 컸다.
“…….”분명 죽으리라고 결심했던 날이었는데.
잠에서 깨어 지붕에서 줄줄 흐르던 물줄기를 본 인협은 그때 결심했었다.
하루하루 버티고 유지하기도 지친 삶에 더 이상의 문제는 그를 넘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누군가에게는 작고 사소한 이유라 할지라도, 매일 아침에 일어날 힘조차 없는 그에게는 그를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소한 이유가 또 그를 살도록 만들어주었다.
잠시 그에게 닿았던 누군가의 체온이 더 이상 세상을 향해 미움을 쏟아내지 않아도 살아있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었다.
무채색의 세상에 누군가가 색을 풀어놓은 것처럼, 에스더가 인협을 안아주었던 순간부터 지난 몇 달간 고통 외에는 몽땅 사라져 버렸던 인협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과 세상을 향한 미움만 가득하던 감정이 아주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굳게 걸어 잠가두었던 감정의 문이 열리며, 에스더를 향한 고마움이 피어올랐다.
오랫동안 그 안에 존재하지 않던 감정이었다. 가득한 미움 사이로 느껴질 틈이 없던 감정이었다.
또한 모든 게 흐릿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모든 감각이 되살아난 듯이 모든 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바깥의 빗소리, 그의 몸을 감싼 물의 온기, 그리고 그를 비추는 욕실의 불빛.
문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여대는 에스더의 발걸음 소리까지도.
먹먹하게 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생생하게 그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동안 꼭 붕 떠 있는 채로 살다가 드디어 땅에 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거지?
그 일이 일어난 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제대로 된 하루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원망과 자책, 그리고 취기로만 가득하던 기억들이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마치 누가 눈에 씌워져 있던 색안경을 벗겨낸 듯이,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이전에는 타당하다고만 느껴졌던 모든 분노가 이제는 약간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었다.
그 정도까지 화나 있을 일은 아니었는데. 그 정도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와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약간 삐뚤어져 있던 그의 시각을 다시 0도로 돌려놓은 것만 같았다.
고요한 욕실 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다시 잡은 인협은 마저 씻은 후, 수건을 몸에 둘렀다.
똑똑. 때마침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 씻은 것 같아서요. 갈아입을 옷이요.” ”아, 네.“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음성에 인협은 잠가두었던 욕실 문을 조금 열고서 그녀가 내민 옷가지를 받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주섬주섬 입고서 욕실 밖으로 향했다. 에스더가 준 옷은 다행히도 딱 맞았다.
“아, 다행이네요. 옷은 잘 맞네요.” “고마워요.”이제야 분노 대 분노가 아니라, 드디어 제 나이대의 성인이 되어 성인 대 성인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이 든 두 사람이었다.
그 이질감에 두 사람은 왠지 모를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애꿎은 주변만 둘러볼 뿐이었다.
“집이 좋네요.” “아, 네. 다행히 이부자리가 여유분이 있어서요. 저는 소파에서 잘 테니, 인협 씨가 안방 침대에서 자요.” “아뇨, 에스더 씨가 원래 자던 침대에서 자요. 내가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 “그러다가-.”또 마음이 바뀌어서 그쪽이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요?
미처 끝마치지 못한 에스더의 질문을 고스란히 알아들은 인협은 피식 웃었다.
비아냥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에스더로서는 처음 보는 그의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이제 그런 마음이 쉽사리 다시 생기지는 않을 테니.” “정말요?” “네. 크나큰 결정이었는데…. 실패했으니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또 그런 짓 하면, 나도 못 살아요.” “왜요?”에스더의 극단적인 말에 인협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내 삶 망치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왜라는 의문이 또다시 인협의 머릿속을 채웠다.
“난 그쪽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해봤자,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정도.” “옆집 사람이고 나발이고, 나는 지나가는 행인이 내 눈앞에서 그렇게 되어도 똑같은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인생을 좀 피곤하게 사는 편이시네요.”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튀어나온 솔직한 진심에 인협은 헙, 하고서 에스더의 눈치를 살폈다.
에스더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지만, 굳이 말을 더 덧붙이지는 않았다.
날이 날인만큼, 인협을 평소보다 조금 더 배려하려는 그녀의 노력이었다.
“뭐, 지나친 오지랖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태어나기를 지나친 오지라퍼로 태어난 것을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 “당장 옆에서 누군가가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걸 도저히 모르는 척을 못 하겠더라고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에스더의 설명에 인협은 신기함을 느꼈다.
자신의 삶의 몫도 버거울 텐데, 왜 굳이 타인의 괴로움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 마치 그게 자신의 몫이라도 되는 양.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설 수 있는,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온 그인지라 그런 에스더가 더더욱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 거칠고 냉정한 세상 속에서 이런 가치관을 갖고서 살아온 사람이라니. 일종의 희귀종이나 돌연변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거슬렸었나 봐요.” “네?” “사실, 에스더 씨한테 유독 더 그렇게 대했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너무 달라서.” “…….” “너무 달라서 이게 진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진짜라고 하기엔 너무 좋은 마음이니까.”가시를 벗겨낸 인협은 말랑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솔직했다.
너무 말랑거리고 순수해서 이런 사람은 처음 대해보는 에스더가 당황스러울 만큼.
“뭐, 사실 거창하거나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상대를 향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랄까.”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좋은 마음인 거죠.”새벽의 특권일까.
둘은 평소보다 더 솔직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투두둑. 빗소리가 관사 건물을 두드리는 소리만 어렴풋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이만 자러 가볼까요?” “아, 좋죠.”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에스더는 서둘러 대화를 끝마쳤다.
에스더가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 쪽으로 몸을 틀자, 인협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거실에서 자요.” “나, 내일 일찍 출근해요. 괜히 인협 씨 잠 깨울 거예요.” “시끄러워도 잘 자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까 집에서 자고 있던 거 보면 알잖아요.” “그래도-.” “내가 객이에요. 에스더 씨가 집주인이고. 절대로 나 혼자 어디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인협의 다짐에도 에스더의 불안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 바로 옆 바닥에라도 재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요.” “알겠어요.”물러서지 않는 인협만 바라보던 에스더는 이내 이쯤에서 실랑이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아, 그리고 내가 내일 교장 선생님께 비어 있는 옆 관사를 인협 씨한테 내어줄 수 있나 한번 여쭤볼게요.” “네?” “내가 여기에 오기 직전에 돈을 지원받아서 관사 두 채 전부를 싹 다 고쳤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옆집도 이 정도로 새집 같을 거예요.” “정말요? 선생님들만 머무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시골 마을이 절차가 없다지만-.”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리였지만, 몇몇 마을 어른들의 반대가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어른들 대다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인협이 사용한다고 하면 더 거센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건 그러네요. 어느 정도의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겠어요.” “…….” “아!”그 순간, 에스더의 두 눈이 반짝였다.
“명분이 필요하다면, 임시 선생님 자격은 어때요?” “네?” “지금 조 선생님께서 암 치료 때문에 적어도 몇 달간은 자리를 비우실 예정이에요. 그래서 내가 여섯 과목을 도맡아 가르치고 있거든요.” “내가 그런 일을 해도 돼요?” “왜요? 마을의 소문난 모범생이었다면서요. 교장님도 이곳에 사신 지 오래되셨으니, 그런 그쪽의 실력을 모르시진 않을 것 같고.” “아무리 분교라지만, 이렇게 절차 없이 막 해도 될까요?” “어쩔 수 없죠. 이 작은 분교에 선생님을 어떻게 빠른 시일내에 구하겠어요. 이렇게라도 메꿔야 아이들이 뒤처지지 않죠.”에스더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 인협은 더 이상의 반박은 하지 못했다.
“알겠어요, 그럼.” “아, 혹시 악기 다룰 줄 알아요?” “네, 피아노랑 기타 조금요.”예전에 프로게이머 시절에 취미로 배워두었던 악기였다.
둘 다 곧잘 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인협의 재능을 아까워할 정도였다.
그런 인협의 답에 에스더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너무 잘 됐다!“ ”왜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음악 선생님이 필요했거든요. 내가 어떻게든 다른 과목은 쫓아가 보겠는데, 그건 재능의 영역인지 도저히 안 되어서요.” “아-.” “그럼, 예체능을 아예 인협 씨에게 맡기고 두 과목 정도를 고 선생님께 맡기면 좋겠다.” “고 선생님?” “고제환 선생님이요!” “아, 제환이 형이요?”어렴풋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인상 깊은 얼굴에 인협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형이세요?” “아, 열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어렸을 때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더라고요.”열다섯 살…. 보통 그 정도면 삼촌이라고 하지 않나?
고 선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협을 본 에스더는 의아해하며 생각했다.
“아무튼 아는 사이라니까 다행이네요.”
“뭐, 알기는 아는데 그렇게까지 좋은 사이는 아니죠. 사실 난 옛날에도 입바른 소리 잘해댔었으니까요.” “아-.”늘 자신이 최고라고 칭송받아야만 하는 제환과 모든 것에 심드렁한 인협은 겉모습만 봐도 매우 극과 극이었다.
딱 봐도 물과 기름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인협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 스물다섯이요.” “어? 동갑이네요. 이런 외딴 시골에서 만나기 힘든 동갑내기인데, 우리 말 놓을까요?” “그러죠.”에스더의 제안을 인협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뚱한 무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얼굴은 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럼, 잘 자. 일단 내일 교장 선생님께 허락받고 알려줄게.” “그래.”언어의 변화에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애꿎은 벽만 훑어보며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그래.” “그리고 사람들한테 여기서 잤다는 사실, 최대한 비밀로 해줘.” “아-.”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인협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 젊은 남녀가 한집에서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두 사람은 당장 그다음 날 결혼이라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응.” “그럼, 진짜 들어갈게. 안녕.”에스더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근데 있잖아, 내 말도 너무 듣지 마.”“응?”“내 말은 그냥 참고만 해. 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봤을 땐 이런 마음이구나, 라고 참고만 해. 결정할 때는 너만 생각하고.“”…….“에스더의 당부에 인협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카페에서 들었던 우겸의 제안이 떠올라서였다. ‘10월부터 신생팀을 시작할 겁니다. 저를 주축으로요.’‘근데,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인협의 경계 섞인 눈빛을 한참 동안 응시한 우겸이 피식 웃었다.‘제가요. 한동안 사람들의 동경 어린 눈빛에 익숙해져 있었나 봐요. 이런 눈빛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 보면.’‘…….’‘제가 피땀 눈물을 흘려서 만들어 둔 제 대외적인 이미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느 정도의 신뢰는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오만함이었나 봐요.’‘아, 제 대외적인 이미지와 저를 묻어버린 사람들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당한 게 있어서요.’‘미안합니다.’인협의 말에 우겸이 너무나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우경은 매우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불명예스러운 퇴출 선수가 되어버린 인협 앞에서 이렇게까지 겸손하게 구는 걸 보면. 어느 분야의 오랜 1인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봉길 코치님도…. 혹시 우겸 선수가 보냈던 건가요?‘’넵. 아, 그럼 명함 받았던 거예요?’‘사실 그때도 소원리에 있었어요. 하필이면 봉길 코치님이 맞닥뜨렸던 분이 저를 가장 아끼시는 할머니 중 하나셨고요.’‘아하….’‘새로운 팀을 꾸려서 어찌할 생각이죠? 제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도 이미 낙인처럼 찍힌 오명은 벗겨지지 않을 건데요. 그리고 케이비 측에서도 제가 복귀한다고 하면 누명을 더 씌워서 저를 고소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우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인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제게도 다 계획이 있어요. 아, 그리고 저희 팀 감독님은 조봉길 코치님이 될 예정이에요.’‘아….’‘구미가 매우 당기죠? 제가 알기로
늦은 저녁의 소원리. 사이사이에 밭을 두고서 띄엄띄엄 떨어진 집 두 채를 걸러 가로등 하나씩 놓인 어두운 길을 두 사람은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정렬을 위로하고 그를 집으로 보낸 후에야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래는 정렬에게 함께 읍내나 시내에라도 나가서 기분 전환하고 오자고 하려던 두 사람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정렬의 상태가 심각한 걸 깨닫고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후….”한숨을 내쉬며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약해져 완전히 어두워지는 구간에서는 약하게 빛나는 별들까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다 보였다.밤하늘은 오늘도 더럽게 예쁘네. 세상만사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때맞춰 자리를 지키며 빛을 내는 별들과 달을 올려다보며 에스더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작은 삶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자연은 그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양,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이럴 때마다 자신이 이 광대한 우주의 먼지 한 톨 같은 존재인지를 자각하면서도 동시에 요동치는 제 삶과는 달리 전혀 요동 없는 자연을 우러러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한결 가라앉혀져 있었다.이런 걸 보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크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존재가 작다는 생각이 도움이 되는 게 아니려나.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불쑥 들려온 인협의 질문에 터덜터덜 걷던 에스더는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정말 알 수가 없지. 불행은 나쁜 사람들을 찾아가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세상에서 저렇게 선한 사람이 없는데 불행을 다 맞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불행 총량의 법칙을 굳게 믿어.” “뭐?”에스더의 엉뚱한 의견에 인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이 평생 견뎌야 할 불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그래서 초년에 다 겪어내고 나면, 노년이 수월하고 그게 아니면 반대가 되어서 자기 몫의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가.” “이렇게라도
“아니, 그렇게 하니까 심 씨가 깨갱하고 뼈도 못 추리고 가는 거 아니겠어요?“정 씨의 신이 난 목소리에 식탁에서 밥을 먹던 본용이 껄껄 웃었다.”그동안 한 게 있어서 우리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하긴 하네. 그 여자, 남을 얼마나 깔보고 다녔어?“ ”그죠?” ”지난번에 재형이에 관해 입 놀려댄 거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심 씨와 정 씨의 실랑이가 있던 날. 본용은 뒤늦게 집에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서로에게 엄청난 막말이 오가던 때. 심 씨는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그들의 손주, 재형까지 욕을 하고 만 것이었다.그 순간, 애써 정 씨를 말리던 본용은 그대로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재형은 작은방 안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무튼 속이 시원~ 하네요.” “그러네.” “그나저나, 우리 재형이가 인협이를 굉장히 따르더라고요?” “응? 인협이를?”정 씨의 말에 본용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래요, 인협이요. 인협이만 보면 순한 강아지처럼 되더라니까요. 인협이가 한마디하면 딱 들어먹고.” “그래?”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인 재형이 유독 믿고 따른다는 말에 본용의 마음이 움직였다.“그러니까, 인협이가 학교에 최대한 오래 붙어있도록 월급이라도 더 주는 건 어때요? 듣자 하니, 50밖에 안 받고 일하고 있다면서요.” “…….”소원 초등학교의 예산은 늘 빡빡했지만, 지역 교육청과 잘 이야기해서 추가 인원에 대한 예산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한번 이야기해 볼게. 힘을 한번 써보면 월급을 100까지는 올려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요.”정 씨는 인협과 에스더에게 완전히 반해버린 모양인지, 남은 식사 시간 내내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본용에게 들려주었다. *** “정렬아!” “정렬 씨!”에스더와 인협은 마을의 맨 안쪽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정렬의 이름을 불렀다. 정렬에게 연락해도 닿지 않아 결국
“어? 다시 오셨네요.”마스크를 쓴 우겸이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온 걸 발견한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선수던데. 전 세계적으로 팬도 많고. 유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기 짝이 없는 우겸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한곳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우라는 있었으나, 외모로는 크게 특출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아, 제가 지인한테 간곡한 부탁을 받아서요.” “네?” “제가 여기로 올 수 없던 그분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며 한번 말을 전해보도록 할게요.” “…….”뭐지? 저렇게 유명한 사람의 지인이 날 알 리가 있나?도통 뜻을 알 수 없는 우겸의 말에 유진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조봉길, 혹시 기억나시나요?”잊어본 적 없는 이름을 우겸이 언급하자, 유진의 눈이 커졌다. 맞다. 그 사람도 리그 오브 카오스 팀 코치라고 했었는데. 명함을 받은 날 검색해 봤던 내용들을 떠올린 그녀였다. “표정 보니까 기억하시나 보네요.” “네, 기억은 하죠. 알바하다가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유진의 말에 우겸은 조용히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저돌적인 분이시네, 우리 봉길 코치님.“그런데요?” “네?” “근데 왜 연락 안 하세요?” “제가 왜 꼭 연락해야 하나요?”유진의 역질문에 우겸은 당황도 하지 않고서 씩 웃었다. 재밌는 분이시네. 꼭 봉길 코치님이랑 이어드리고 싶어질 만큼. “당사자는 오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나 보내고…. 혹시 사람 갖고 장난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인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매우 불쾌하고요.” “아…. 장난은 전혀 아니에요. 제가 봉길 코치님의 마음을 잘못 전달한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 “봉길 코치님은 매우 진지하세요.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놈의 진지함. 진심 빼면 시체인양 주아의 친부는 늘 그것을 남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걸 진심이라고 바보같이 믿었던 그녀였고.
토요일. 이른 아침의 소원리 앞 버스 정류장. “그래서, 둘이서만 가니까 좋아?” “또 놀리지?”인협과 에스더는 정류장 의자에 함께 붙어 앉은 채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무더운 7월 말의 날씨도 새롭게 사귀기 시작한 이들의 애정행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사이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으나, 잠시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을 살짝 펼칠 때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은 손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귀기 전에는 이런 미련한 짓을 왜 굳이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해 왔던 인협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내일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찰나의 스킨십도 참지 못하는 연인들을 보며 한심해했던 그였다. 애초에 사랑이 미련한 짓인데 말이야. 이 험한 세상에서 상대를 위해 나를 다 내놓는 거라는 게.애초에 사랑부터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니, 무더운 날 손잡는 거쯤이야. 인협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에스더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정렬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어?”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허어, 근데 그런 애를 밀어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되면 이 좁은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껄끄러워. 나야 어차피 떠날 사람이고, 정렬 씨도 높은 확률로 풋사랑을 하는 걸 거고. 어차피 내가 기를 쓰고서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 못 해.”에스더의 설명에 인협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연애 고수지?” “고수는. 중학생 때 풋내기 연애 두 주 해본 거 외에는 나도 연애 경험 없네요.” “근데 뭐가 이렇게 여유로워?”인협은 괜스레 억울해지는 마음에 물었다. “사람 경험의 차이랄까? 교회도 그렇고, 교육계라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진상 집합소거든.” “응?” “교회에는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도 해. 대체로 상처 입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종교에 잘 기대고는 하니. 또, 교사 실습을 하다 보면 별의별 애들도 만나고, 그 문제적 행동의 근원인 어마어마한
“뭐지….”인협은 관사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보낸 문자에도 에스더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인협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관사 문도 두들겨보았으나, 에스더는 침묵할 뿐이었다. “나도 나름의 은인인데, 은인을 왜 이렇게 대하냐고….”시무룩한 얼굴로 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줄 알았더니, 워낙 따스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확 사라지니 외로움이 하루 사이에 사무칠 지경이었다.“너무하다, 에스더야….”인협은 꿍얼거리듯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후-.”너무해. 알려주지도 않고. 정렬이랑 읍내 나가는 게 왜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인협은 답답함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다짐했다.“대답할 때까지 두드린다, 내가.”오랜만에 그의 승부욕이 발동된 것이었다. 인협은 성큼성큼 걸어서 집에서 나가, 에스더의 집 문 앞에 섰다.큰소리를 내면 동네 창피해서라도 나오겠지.쾅쾅쾅쾅! 그는 힘을 꽉 준 주먹으로 최대한 큰 소리로 문을 두들겼다. “황 선생님! 황 선생님!!”쪽팔림도 무릅쓰고 인협은 목소리 높여서 애타게 외쳐댔다.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서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물론 인협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에스더가 맞은편에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인협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아무런 답이 없길래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당연히 말이지. 그것도 아주 다정한 말.”인협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에스더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미간의 주름은 덤이었다. “뭐?” “나 안으로 좀 들어가도 돼?” “…….” “나도 나름 손님인데.”힘껏 인협을 노려본 에스더는 마지못해 인협이 집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주었다. 이대로 인협을 문전박대했다가는 또 어떤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협의 등 뒤로 에스더가 일부러 더 힘주어 당긴 현관문이 굉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