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
“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 “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 “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협과 한 번씩은 마주쳐본 나머지 네 사람이 서로 말하고 싶은 바가 많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여튼, 한번 만나봐. 기절초풍한다.”고 이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마치고는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일단 멀리서 봐도 눈을 이렇게 뜨고 온다니까.”심 씨는 손가락으로 제 눈꼬리를 위로 찢었다.
“이런 씨,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은 나한테 한번 따악 제대로 걸려야 하는데.” “…….” “그런 놈들은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런다니까.”열성을 다해 토해내는 원길의 주장에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눈을 피하며 침묵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에 뒤지지 않는 저속한 말을 얹었을 위인들이 잠잠해지자, 원길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그제야 주변 눈치를 살폈다.
“어이구-.”원길은 저승사자라도 본 양,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 근처 길에 인협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심 씨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인협의 눈이 위로 찢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의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보고 있자니 원길은 조금 전 심 씨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곳은 평소에는 벌레 소리 말고는 별다른 소음 하나 없는 소원리.
그리고 그들 중 유독 목소리가 큰 편인 원길이었다. 게다가 술이 들어가고 흥분한 상태인 그는 더더욱.
맴맴맴-. 찌르르르-.
원길이 크게 떠들 땐 유독 조용해졌던 벌레들이 다시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딱 걸렸는데요.” “뭐-?”인협의 말의 의미를 모르는 원길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아저씨에게 한번 딱 제대로 걸려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딱 걸렸다고요.”옛날 한때는 인협이 원길을 두려워하던 때도 있었다. 어른과 중학생의 차이란 그래도 컸으니까.
술에 영혼이라도 빼앗겨버린 듯한 그의 두 눈은 어린 인협이 피해 갈 이유였다.
그러나 원길보다 키가 더 큰 성인이 된 지금.
그런 원길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한심함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60이 다된 나이에, 아이가 다섯인 아비가 아직도 저러고 있으니.
정렬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인협은 두 눈에 담긴 감정을 굳이 감추지 않고서 원길을 마주 보았다.
“저, 저 되바라진 새X. 어른을 어디서 그딴 눈으로 봐!” “어른…..”어른 노릇 못하는 인간들이 꼭 어른이라고 대접받으려고 하더라.
인협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독이라는 인간도, 케이비의 팀장이었던 기태도.
“어른의 정의가 뭔지는 아세요?” “뭐?”이를 바득거리며 어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을 때, 케이비에서 따돌림당하고 감독에게 늘 혼이 나던 인협은 잠시나마 고통을 놓을 수 있었다.
“어른이란 신체적으로 다 자란 사람이자,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래요.” “저, 저-.”인협의 폭탄 발언에 원길을 말리던 본용과 고 이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자기 자식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해서 아들이 책임지고 있구먼.
인협은 정렬을 떠올리며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었다. 인협은 입꼬리만 올려서 싱긋 웃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에이씨!”성질을 못 이긴 원길이 몸부림을 치자, 인협이 어느 정도 멀어진 걸 확인한 본용과 고 이장은 그의 양팔을 놓아주었다.
술 때문인지, 혈기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진 원길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털썩 앉아, 막걸리로 가득 채운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머머, 박유진보다 더 한 게 소원리에 왔네.”인협 앞에서는 숨죽여 있던 심 씨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웬일인지 그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 “오늘 사실 할 말이 있어서 피곤할 우리 선생님들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어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회의 책상에 둘러앉은 세 선생. 조 선생의 양해를 구하는 말에도 고 선생은 굳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대로면 4교시에는 퇴근했어야 하는 그였지만, 조 선생의 당부에 학교 끝난 후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후까지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안 좋은 소식은 아니죠?”에스더의 질문에 조 선생은 평소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묘하게 그늘져 있었다.
“지난번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쉬었을 때, 검사를 받았었어요. 요즘 좀 안 좋은 증상이 있어서.” “……..”심상치 않은 말에 에스더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고 선생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떨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고 선생을 힐끗 쳐다본 조 선생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장암이래요. 다행히 아직 2기라 그러네요.”늘 그래왔듯이, 남 이야기를 하는 듯이 담담하고도 상냥한 조 선생의 음성에 에스더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 선생의 다리 떨림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됐다.
무늬만 교장인 본용 밑에서 온갖 실무와 잡무와 또한 선생의 의무를 넘어서 아이들을 넘치도록 사랑해 주었던 조 선생이었다.
“2기면 그래도 최악은 아니네요. 천운이에요. 저기 옆 마을 권 씨 할아버지는-.”그답게 이어진 고 선생의 말에 에스더는 처음으로 도끼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매서운 시선에 눈치 없기로 유명한 고 선생조차도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그의 눈치 없음과 잘난 척을 적당한 사회적 미소로 무시하며 살아왔던 에스더였지만, 지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그의 말이 아픈 조 선생에게 어떠한 비수로 꽂힐 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선생님, 치료는요? 당장 시작하셔야죠.” “그래도 후임자가 올 때까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통원할까 해요. 아직 항암이 필요할지도 잘 몰라서요.”조 선생의 대답에 에스더는 입을 헤벌렸다.
조 선생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 철호의 반응이 굳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지금 당장 전국에서 최고라 하는 암센터를 찾아서 조 선생을 데려가 그 곁에서 간호할 거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게 분명했다.
“후임자는요, 선생님. 당장 치료받으러 가셔야죠.” “아니, 그럼-.”이 세상 누구보다 게으르고, 제 몫을 남에게 떠넘기는 걸 즐기면 즐겼지, 결코 그 이상을 떠맡기를 싫어하는 고 선생이 입을 열자마자 에스더는 다시 한번 시선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보나 마나 그는 암 선고를 받은 조 선생 앞에서도 업무 분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위인이었다.
그동안 조 선생이 도맡아 해온 수없는 희생은 차치하고서.
“황 선생님 말씀이라도 고마워요. 그래도 내가 이 학교 사정 뻔히 아는데-.” “저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선생님. 선생님이 맡고 계셨던 업무들을 제가 임시로 맡아도 되고요.” “수술만 하면 회복 기간이 한두 달은 걸릴 거고, 또 수술해 보고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6개월간 항암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 긴 시간을 어떻게-.”조 선생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딸인 유진보다 어린 에스더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고 선생은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그와 함께 일해왔던 조 선생이 그의 성향을 가장 잘 알았으니까.
“교장 선생님께 추가 수당만 말씀해 주세요. 당연히 저도 공짜로 하는 거 아니에요.”조 선생을 안심시키려 일부러 덧붙인 에스더의 말에 조 선생은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구멍만 안 나면 다행인 분교 예산에 에스더에게 더 줄 수 있는 예산이라고는 없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에스더는 조 선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해준 것이었다.
“일단 남편과 상의해 볼게요.” “아뇨, 선생님. 철호 아저씨, 분명히 가만히 안 계실 거예요. 계속 조 선생님이 고집 피우시면 아마 밤중에 선생님을 보쌈해서 몰래 병원으로 가실 분이에요.” “…….” “한시라도 빨리 가셔서 치료를 받아야 아이들을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보시죠.”평소에는 밝은 얼굴로 조 선생의 말이라면 순순히 굴던 에스더였으나,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그래도-.” “저희가 어떻게든 이곳을 지키고 있을게요, 선생님. 그렇죠, 고 선생님?”에스더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고 선생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못한 끄덕거림의 의미를 잘 아는 조 선생은 다시 한번 걱정의 마음을 담은 시선을 에스더에게로 보냈다.
“어차피 초등학생 아이들 과정이잖아요. 제가 한국말이 좀 짧아도 초등학생 아이들은 가르칠 수 있을 거예요.” “…….” “마을 분들도 다 이해해 주실 거예요. 마을 분들 중 조 선생님을 위하지 않는 사람 없으니까요.”에스더의 못마땅한 시선이 잠시 고 선생에게 머물렀으나, 이내 그녀는 안 좋은 마음을 빨리 지워내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그리고 조 선생이 치료를 위해 잠시 휴가를 가고 나면, 좋든 싫든 에스더는 고 선생과 어떻게든 분담을 해야만 할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게으른 쇠똥처럼 에스더가 굴려주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는 몇 달 동안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떻게든 저 인간을 굴려야만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에스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일단 교장 선생님이랑 남편이랑 상의해 보고 알려줄게요-.”걱정 가득한 조 선생의 음성을 끝으로 셋의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