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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마의 시작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4 00:04:56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

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

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

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

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

카운터에 서서 가게 매출을 확인하던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에게 물었다. 

복란이 소문난 멋쟁이 할머니라면, 영애는 소원리에서 제일 가는 멋쟁이 중년 여성의 표본이었다. 

검은색 쉬폰 블라우스와 슬랙스 아래로 보이는 탄탄하게 잘 관리된 몸매, 꼿꼿한 허리, 그리고 눈에 띄는 미인상은 아니지만 특유의 매력을 풍기는 당당한 웃상의 영애였다. 

그녀는 앞머리도 없는 단발을 하고서 붉은색을 띈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철호가 놀러 왔어.“

”어어? 철호 씨가? 왜?“

“시원한 거 하나 내려주려고.”

“철호 씨 따뜻한 거밖에 안 먹잖아.“

”글쎄, 시원한 커피 좀 내려달래.“

태욱의 말에 영애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나름의 걱정이 담긴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순옥이 언니한테 문자라도 한번 해봐야 하나-.“

”그러지 마.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소원리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는 두 가정이었다.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모자라, 두 부부는 꼭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고는 했다. 

영애의 조카와 조 선생의 손녀인 주아도 비슷한 또래였기에 아이들도 꼭 함께 만나고는 했다.

”유진이도 오늘 아무런 내색 없었는데-.“

영애는 창고 쪽에서 일하고 있을, 조 선생의 딸 유진을 떠올리고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유진이한테는 말 못 했을 수도 있지. 철호 씨, 유진이를 워낙 끔찍하게 생각하잖아.“

”그래, 나 같아도 집에 큰일 있으면 우리 애들한테 말 못 했겠네.“

태욱의 대꾸에 쉽사리 납득한 영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적당히 모르는 척해줘. 집에 가서 알려줄게. 철호가 뭔지 말해주면.”

“그래.”

“나 간다-.”

창고에서 나오는 유진을 발견한 태욱은 서둘러 커피를 내려서 쉬던 창가 자리로 향했다.

대형 카페인지라, 다행히도 태욱이 앉아 있던 창가 자리는 유진이 계속 일할 카운터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

넋을 놓고서 흐릿한 눈빛으로 바깥 풍경만 바라보는 철호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태욱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동해 풍경이 하나도 담기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 어-.”

철호는 여전한 표정으로 태욱이 건네준 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잠시 그 잔을 쥔 채로 멍하니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

“누가 네 가슴에 천불을 질렀어. 언놈이야.”

“암이래.”

“뭐?”

철호의 두서없는 고백에 놀란 태욱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순옥이가 암이래. 흐흐흑-.”

그를 겨우겨우 지탱해 오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려버린 듯, 철호는 카페에서 일하는 유진을 의식해 최대한 숨죽인 채로 울기 시작했다. 

카페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손님들이 흐느낌의 근원지를 찾아서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철호야….”

허망한 표정으로 철호를 지켜보던 태욱은 조용히 냅킨 몇 장을 내밀었다. 철호는 양손으로 그걸 붙든 채로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그의 어깨로 향하던 태욱이 손이 순간 멈칫했다. 

어떤 위로가 네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안 가는 친구의 고통에 태욱을 조용히 눈물지으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6월 중순의 동해 날씨는 반짝거리고 바닷빛으로 예뻤다. 야속할 만큼.

“미안해. 어젯밤에 소식 듣고 아침부터 정말 어찌저찌 일하다가 네가 생각나서 무작정 여기로 온 거야.”

철호의 초췌한 몰골을 본 태욱은 그가 지난밤 동안 잠을 얼마나 설쳤을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은 찾아봤어?”

“응, 순옥이가 잠들자마자 다 알아봤지. 사실 오늘 철물점에서도 병원에 연락 돌려서 알아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유진이는?”

태욱의 질문에 이제야 겨우 커피잔으로 향하던 손길이 멈칫했다. 

“아직 몰라.”

“간도 크다. 근데 딸내미가 일하는 데로 찾아오고.”

“이야기할 사람이 너뿐이니까. 이걸 유진이가 몰라서 다행-.”

“내가 뭘 모르는데?”

“어이구!”

둘의 대화에 불쑥 치고 들어온 유진은 먹음직스러운 페이스트리가 몇 개 담긴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철호의 몰골을 발견했다. 

아, 여보. 

태욱은 속으로 탄식했다. 평소 같았으면 유진의 존재가 철호에게 분명 위로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앞치마를 매고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유진의 생김새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똘똘함이었다.

명문대에 입학할 정도로 영특하고, 똑 부러지는 유진이었다. 

“아빠, 울었어?”

“아냐, 울기는-.”

철호가 급하게 얼굴을 수습하자,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말하게 될 거, 빨리 말해. 아빠가 직접 이야기한 거잖아. 가족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만 한다고.”

언젠가 유진이 볼록 부른 배를 손으로 감싸고 철호를 거의 1년 만에 만났을 때, 철호가 엉엉 울면서 말했던 것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철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왜? 엄마가 나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래?”

하지만 상대는 사랑하는 딸이자, 집안의 사실상 실세인 유진이었다. 

철호는 슬픔도 잊고서 눈만 끔뻑여댔다. 둘의 눈치를 살핀 태욱은 개입을 시도했다.

“유진아, 그래도 네 아빠가 다 생각이 있겠지-.”

“조용. 조용히 하세요, 아저씨.”

사장님에서 아저씨로 호칭이 바뀐 걸 알아차린 태욱은 깨갱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박유진이 누구냐? 소원리의 발바리, 즉 미친개로 소문난 여자였다. 

원래도 똑 부러지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나, 온갖 험한 일을 겪고서 애 엄마까지 되었다 보니 유진은 완전체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보수적인 시골 마을의 유일한 미혼모의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그 틈바구니에서 아이까지 지켜내기 위해 더 사나워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마을에서 나는 죄인이요, 하고 고개를 숙여버리면 이미 숙여진 고개를 더 숙이게 만들고 일평생 그 일만 우려먹으며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그래서 완전체가 된 유진은 이제 도끼눈을 뜨고서 제 아빠인 철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지금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

“아냐, 아냐-.”

유진이 핸드폰을 꺼내 들자마자 철호는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막았다. 

“그게-.”

철호가 운을 띄우자마자 무언가 직감한 유진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지난번에 엄마 몸 좀 안 좋다고 병원 가서 검사했다던 거 결과 나온 거야?”

“어-.”

유진의 날카로운 질문에 철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왜? 뭐길래 울기까지 해?”

“너희 엄마 대장암이래. 대장암 2기.”

철호의 대답에 유진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깃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는 중심을 잡고 다시 표정 관리를 했다.

보나 마나 아내 바보인 철호는 와르르 무너져 내린 상태일 테니, 그녀마저 무너져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야, 수술받고 치료 잘 받으면 되잖아. 요새는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말기 암도 다 고쳐낸다잖아.”

의료 지식이 없는 덕분에 막 던질 수 있는 지나친 낙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온갖 최악의 상상을 끌어안고 있는듯한 아빠인 철호의 얼굴에다가 조금이라도 낙관을 더 해주고 싶어진 그녀였다. 

“그래, 그렇겠지.”

“아빠, 그리고 아빠가 이러면 어떡해. 아빠가 이러고 있으면 엄마가 또 괜찮은 척해야 하잖아.”

유진의 말에 철호는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벅벅 닦아냈다. 

“우리 유진이, 참 잘 컸어.”

“애 낳고 많이 독해졌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요.”

태욱의 말에 웃지도 않고 대꾸한 유진은 다시 철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 제발 정신 차려. 운다고 도움 안 돼. 나, 근무 마치고 좋은 병원 있는지 최대한 알아볼게. 아, 집에 갈 때는 눈에 부기 잘 빼고 가고?”

유진은 손으로 철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다. 

태욱은 경이로운 것을 바라보듯이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딸내미들도 유진이처럼 저렇게 씩씩하면 좋겠다.”

“너무 씩씩해서 탈이지.”

“니네 집 대장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진짜 대장님 같다.”

”그러게나 말이야.”

철호는 어느새 말라버린 눈물 자국을 남기고서 허허, 웃고 말았다. 

랑끗

감사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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