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스스로 상처받고 힘드니, 제발 날 내버려둬 달라는 세상을 향한 일종의 항복의 의미인지도 몰랐다.
“후우-.”나이 스물다섯에 이 낡아빠진 집 외에는 갈 곳 없는 것도, 다른 집을 구할 능력이 없는 것도 혐오스러웠다.
정말로 케이비 팀 사람들이 말했듯이 나는 구제 불능인 건가.
인협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여러 번 쓸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우겸이 이전에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과연 당신은 날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아무리 인성이 좋다고 소문이 난 우겸이라 할지라도, 답장하지 않은 인협이 괘씸하다고는 느꼈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이 우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허락지 않았다.
지금 인협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허울뿐인 자존심과 사람들을 향한 불신뿐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순간, 그것을 의지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비이성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으로 인해 벼랑 끝까지 몰려본 경험은 그 생각을 강하게 붙들도록 만들고는 했다.
“후-.”인협은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면서도 괴로워지는 건 인협 자신 뿐이었다.
내려앉은 어둠에 고스란히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사람을 믿는 것보다는 안전한 불신을 택해 어느 정도의 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어딘가 점점 더 구겨지는 것만 같았다.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렸을까. 잃을게 더 이상 없어서, 이제는 잃을 게 마음뿐이어서 그런 건가.
인협은 쓴웃음을 지은 채 다시 몸을 뉘었다. 눅눅하고 어딘가 쉰내가 나는 듯한 집안이 그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내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어.
인협은 모든 걸 포기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잠을 청했다.
*** 삼일 후.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평소 같았으면 10시에 이미 잠들어있었을 에스더는 부엌 식탁에 앉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수업 계획을 짜느라 늦게 잔 탓에 그녀의 눈은 이미 충혈되어 있었다.
“아으으-.”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식탁에 쿵쿵 찧어댔다.
“이 돌머리야아아-.”에스더는 졸음을 견뎌내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 선생이 넘겨주고 간 수업 자료를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번쩍하는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빗줄기가 유독 거세진 밤이었다.
그나저나 저 낡은 집에 사는 사람은 괜찮으려나?
에스더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부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이 꺼진 후라 칠흑같이 어두운 인협의 집 쪽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지난번에 집에 갔을 때 보니까 물 샌 자국도 여럿 있던데.
에스더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지랖이야. 저 인간이 도움이 필요하겠어?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에스더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다시 수업 계획 자료로 눈을 돌렸다.
이 늦은 밤에 누군가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실례일 텐데.
에스더는 계속해서 드는 충동을 이성적인 생각으로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녀를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었다.
비이성적이었지만, 직감이라는 게 그녀를 인협의 집으로 이끌어댔다.
하필이면 지난 며칠 동안 술을 사러 가지도 않은 인협이었다. 한층 더 거세진 빗줄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무시할 수 없는 그 불쾌한 느낌에 에스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한 번만 확인해 보자. 딱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말이야.
에스더는 우비를 입고서 진흙 바닥이 되었을 운동장을 지나기 위해 작년에 마련해 두었던 장화를 신었다.
혹시 모를 정전에 대비해 마련해 둔 랜턴도 손에 꼭 쥐었다.
끼이익-. 관사 문이 열리자, 문 앞 불이 켜졌다.
먹구름에 달조차 덮여버린 칠흑같이 어두운 밤. 번쩍이는 번개만 유일한 빛이었다.
그 광경을 잠시 서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킨 에스더는 큰 결심을 하고서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담을 돌아서 집 입구에 다다른 에스더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미친 여자가 될지도 몰라. 그래도 한 번만 해보자.
“저기요-.”에스더는 일부러 랜턴 불빛을 인협이 있을 거실 쪽 문을 향해 비추었다.
문의 일부가 반투명한 유리였기에 분명 인협에게까지 불빛이 비칠 터였다.
“인협 씨-!”에스더의 부름에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문 앞으로 다가섰다.
찰박찰박. 젖은 흙바닥에 그녀의 장화가 닿으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쿵. 그녀의 주먹이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그런데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쿵쿵쿵. 더 많은 힘이 실린 주먹이 재차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에스더의 심장박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놓아버릴 듯이 위태위태해 보이던 인협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명해졌다.
게다가 요 며칠 동안 해가 나지 않을 만큼, 거센 장마가 지속되고 있었다.
“인협 씨! 저기요!!!”쾅쾅쾅쾅. 에스더의 주먹이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그녀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눈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내가 잡아줄걸.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잡아줄걸.
그렇게 위태해 보이던 사람 앞에서 어쭙잖게 자존심 부리던 순간들이 크나큰 후회가 되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인협 씨!!!!”에스더는 결국 잠긴 문손잡이를 잡고서 그것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끼릭, 끼릭. 낡은 문의 얇은 잠금장치는 흔들거리다가 이내 에스더의 힘에 부서져 버렸다.
쾅! 낡은 문이 열리자마자 번개가 치며 집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인협이 에스더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어둠 속에 잡아먹혀 버렸다.
에스더는 더듬거리며 빛 스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전선에 문제가 있는지,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더는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여느라 잠시 옆에 놔두었던 랜턴을 집어 들어서 집안을 비추었다.
지붕에서는 물이 새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집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인협이 젖은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저기요!”에스더는 신발도 벗지 못한채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으로 인협의 볼을 때리기 시작했다. 볼이 매우 차가웠다.
“저기요, 정신 차려봐요!” “으-.”에스더의 거친 손길에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
“저기요!”희미하던 눈빛에 빛이 돌아오며 인협의 표정이 돌아왔다.
“정신이 좀 들어요?” “그냥 가만히 두세요.”안도한 에스더가 인협에게 묻자, 그는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왜 또 이 난리를-.” “지금 몸이 얼음장 같아요. 빨리 일어나서 나가요.” “가만히 두라고요.”에스더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협의 손을 붙들고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인협이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좀 놔두라고요. 내가 그냥 여기에 있겠다잖아.” “저기요, 지금 천장에서 물이 새다 못해, 주룩주룩 흐르고 있어요.” “다 안다고요. 그래서 있는 거예요. 감전이 되든, 저체온증에 죽든 다 좋으니까.”번쩍이는 번개에 온갖 미움이 담긴 인협의 두 눈이 에스더의 시야에 담겼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존재를 보는듯한 그 강렬한 얼굴에 에스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아니까, 그냥 두라고.”쿠르릉-. 뒤늦게 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비슷하게 으르렁거리는듯한 거친 음성에 에스더의 숨이 잠시 멎었다.
저 남자는 도대체 뭐가 저렇게 증오스럽길래.
출처를 알 수 없는 증오만 가득한 음성이 그녀의 가슴을 짓이기는 듯했다.
“싫어요.” “뭐라고요?” “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는 살인자는 되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그쪽이 좀 협조해 줘요.”에스더가 다시 인협의 손을 붙들었고, 인협은 그런 그녀의 손을 더 거세게 뿌리쳤다.
“됐다고. 그러니까 왜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 난리야! 왜!!” “신경 쓰이니까요! 그쪽이 신경 쓰이게 만드니까!!!”절규에 가까운 인협의 외침에 에스더가 역으로 더 세게 외쳤다. 그 힘찬 음성에 이번에는 인협이 멈칫했다.
“왜 삶을 놓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왜! 여기 어르신들 다 둘러봐요. 90이 다 되신 할머니들, 하루라도 더 제대로 살지 못해 아쉬워해요.” “…….” “우리 학교에 조 선생님 알아요? 그 선생님은 암이래요. 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사람들이라고요!” “어쩌라고요. 나랑은 상관도 없는 사람들.”뻔한 동정심 유발이라는 생각에 인협은 신물이 난 상태로 대꾸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삶을 이렇게 낭비하는 당신의 삶을 빼앗아서라도 그런 간절한 분들한테 전해드리고 싶어요. 내가 신이라면 그러겠어.” “…….” “그 정도로 한심해 보인다고요, 그쪽.” “뭐라고요?” “무슨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꼭 세상의 모든 고생이라고는 혼자서만 다 한 것처럼 매일매일을 술로 날려버리고, 마음을 미움으로만 가득 채우지 못해서 안달이고. 그 불행이랑 미움을 남한테 못 전해줘서 안달이고!”에스더의 말에 인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가 일자, 그의 손에 온기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좀 살아봐요. 누구는 더 살지 못해 안달인 하루라도 한번 제대로 살아보라고요!” “…….” “당신의 삶을 미워하려고 애쓰는 만큼, 한번 좋아하려고도 애써봐요. 모든 걸 미워하는 데 낭비하는 에너지가 더 들겠어요.” “…….”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요. 이렇게 놓아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내가 다 억울하다.”씩씩. 말을 마친 에스더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모든 걸 놓아버린 인협 앞에서 가득 차오른 분노에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는 에스더였다.
“그러니까 제발 좀 살아봐요. 그냥 살아있는 시체처럼 굴지 말고요.” “…….” “그리고 나는 그쪽이 진짜 시체가 되도록 둘 의향은 전혀 없어요. 지금 그쪽이 이 제안조차 거부한다면, 나는 그쪽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당장 경찰이라도 부를 거예요.”에스더의 말이 얼마나 진실된지는, 그녀를 짧게 봐온 인협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인협이 이조차도 거부한다면 그녀는 정말 내뱉은 말을 기어이 지키고 말 것이었다.
“가요.”그때 에스더가 인협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서 조심스럽게 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속에 그녀의 얼굴이 담겼다. 에스더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당신이 울고 싶어 하는 건데. 나랑 아무런 상관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왜. 감히.
인협은 그런 에스더가 괘씸하면서도, 동시에 도통 그런 얼굴을 한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답 없는 질문이 주어 없이 인협의 가슴을 울려댔다. 에스더의 손만 멀뚱히 내려다보는 인협에게 에스더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알았지만, 인협은 물러나지 않았다. 분명히 몇 시간 전만 해도 오늘 밤 모든 걸 놓아버리라고 작정했었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모든 걸 정리하고, 며칠이 흘러 조용히 발견되기를.
그렇게 더 이상의 고통도, 후회도, 자신을 향한 혐오도 없는 영면에 이르기를.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인협은 가만히 있었고 어느새 그의 젖은 가슴팍에 에스더의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그녀의 팔이 그를 감쌌고, 어느새 그의 고개는 그녀의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봤을지 모르는 그 따스한 체온에 인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그보다 더 뜨거운 기운이 그의 가슴에서부터 목까지 넘어왔다.
허-.
한숨에 가까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억눌러있던 울음 한 자락이 겨우 삐져나왔다.
토닥토닥.
그 소리에 에스더의 부드러운 손길이 인협의 차가운 등에 닿았다. 그 손길조차도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인협의 손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에스더의 팔뚝에 닿았다. 그는 무언가에 매달리듯이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울어요. 여기서 다 토해내고 가자고요.”에스더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울리자, 인협은 눈을 꾹 감았다. 한번 터져 나온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가 됐든, 이왕 살아내야만 하는 하루를 조금만 덜 미워하며 살자고요. 모든 걸 미워하는 것도 힘이 많이 들잖아요.”그간 많이 힘들었던가, 나는.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지난 몇 달을 떠올렸다.
자신의 삶에 얽혔을 뿐인데 마치 그들이 그의 삶을 침범하는 것처럼 날을 세우고 날카롭게 굴어대는 건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했었다.
어쩌면 그 미움이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일지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만 살면 꼭 그 삶이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지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한 미움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서.
자신을 향한 분노와 미움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 그것을 주변에 뿜어대지 않고선 못 배겨서.
“그러니까 그만 미워해요. 사람들도, 인협 씨도.”에스더의 마지막 다독임에 인협의 흐느낌이 더 거세졌다.
자신도 보지 못하던 속마음이 그대로 꿰뚫려 버린 느낌에 그는 결국 높이 쌓아두었던 마음의 성벽이 고스란히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