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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만 미워해요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5 02:20:57

똑똑. 

“미치겠네.”

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

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

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

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스스로 상처받고 힘드니, 제발 날 내버려둬 달라는 세상을 향한 일종의 항복의 의미인지도 몰랐다. 

“후우-.”

나이 스물다섯에 이 낡아빠진 집 외에는 갈 곳 없는 것도, 다른 집을 구할 능력이 없는 것도 혐오스러웠다. 

정말로 케이비 팀 사람들이 말했듯이 나는 구제 불능인 건가. 

인협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여러 번 쓸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우겸이 이전에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과연 당신은 날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아무리 인성이 좋다고 소문이 난 우겸이라 할지라도, 답장하지 않은 인협이 괘씸하다고는 느꼈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이 우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허락지 않았다. 

지금 인협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허울뿐인 자존심과 사람들을 향한 불신뿐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순간, 그것을 의지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비이성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으로 인해 벼랑 끝까지 몰려본 경험은 그 생각을 강하게 붙들도록 만들고는 했다. 

“후-.”

인협은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면서도 괴로워지는 건 인협 자신 뿐이었다. 

내려앉은 어둠에 고스란히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사람을 믿는 것보다는 안전한 불신을 택해 어느 정도의 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어딘가 점점 더 구겨지는 것만 같았다.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렸을까. 잃을게 더 이상 없어서, 이제는 잃을 게 마음뿐이어서 그런 건가. 

인협은 쓴웃음을 지은 채 다시 몸을 뉘었다. 눅눅하고 어딘가 쉰내가 나는 듯한 집안이 그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내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어. 

인협은 모든 걸 포기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잠을 청했다. 

***

삼일 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평소 같았으면 10시에 이미 잠들어있었을 에스더는 부엌 식탁에 앉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수업 계획을 짜느라 늦게 잔 탓에 그녀의 눈은 이미 충혈되어 있었다. 

“아으으-.”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식탁에 쿵쿵 찧어댔다. 

“이 돌머리야아아-.”

에스더는 졸음을 견뎌내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 선생이 넘겨주고 간 수업 자료를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번쩍하는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빗줄기가 유독 거세진 밤이었다. 

그나저나 저 낡은 집에 사는 사람은 괜찮으려나? 

에스더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부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이 꺼진 후라 칠흑같이 어두운 인협의 집 쪽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

지난번에 집에 갔을 때 보니까 물 샌 자국도 여럿 있던데. 

에스더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지랖이야. 저 인간이 도움이 필요하겠어?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에스더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다시 수업 계획 자료로 눈을 돌렸다. 

이 늦은 밤에 누군가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실례일 텐데. 

에스더는 계속해서 드는 충동을 이성적인 생각으로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녀를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었다. 

비이성적이었지만, 직감이라는 게 그녀를 인협의 집으로 이끌어댔다. 

하필이면 지난 며칠 동안 술을 사러 가지도 않은 인협이었다. 한층 더 거세진 빗줄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무시할 수 없는 그 불쾌한 느낌에 에스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한 번만 확인해 보자. 딱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말이야. 

에스더는 우비를 입고서 진흙 바닥이 되었을 운동장을 지나기 위해 작년에 마련해 두었던 장화를 신었다.

혹시 모를 정전에 대비해 마련해 둔 랜턴도 손에 꼭 쥐었다. 

끼이익-. 관사 문이 열리자, 문 앞 불이 켜졌다. 

먹구름에 달조차 덮여버린 칠흑같이 어두운 밤. 번쩍이는 번개만 유일한 빛이었다. 

그 광경을 잠시 서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킨 에스더는 큰 결심을 하고서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담을 돌아서 집 입구에 다다른 에스더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미친 여자가 될지도 몰라. 그래도 한 번만 해보자. 

“저기요-.”

에스더는 일부러 랜턴 불빛을 인협이 있을 거실 쪽 문을 향해 비추었다. 

문의 일부가 반투명한 유리였기에 분명 인협에게까지 불빛이 비칠 터였다.

“인협 씨-!”

에스더의 부름에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문 앞으로 다가섰다. 

찰박찰박. 젖은 흙바닥에 그녀의 장화가 닿으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쿵. 그녀의 주먹이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그런데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쿵쿵쿵. 더 많은 힘이 실린 주먹이 재차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에스더의 심장박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놓아버릴 듯이 위태위태해 보이던 인협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명해졌다. 

게다가 요 며칠 동안 해가 나지 않을 만큼, 거센 장마가 지속되고 있었다. 

“인협 씨! 저기요!!!”

쾅쾅쾅쾅. 에스더의 주먹이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그녀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눈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내가 잡아줄걸.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잡아줄걸. 

그렇게 위태해 보이던 사람 앞에서 어쭙잖게 자존심 부리던 순간들이 크나큰 후회가 되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인협 씨!!!!”

에스더는 결국 잠긴 문손잡이를 잡고서 그것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끼릭, 끼릭. 낡은 문의 얇은 잠금장치는 흔들거리다가 이내 에스더의 힘에 부서져 버렸다.

쾅! 낡은 문이 열리자마자 번개가 치며 집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인협이 에스더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어둠 속에 잡아먹혀 버렸다. 

에스더는 더듬거리며 빛 스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전선에 문제가 있는지,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더는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여느라 잠시 옆에 놔두었던 랜턴을 집어 들어서 집안을 비추었다. 

지붕에서는 물이 새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집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인협이 젖은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저기요!”

에스더는 신발도 벗지 못한채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으로 인협의 볼을 때리기 시작했다. 볼이 매우 차가웠다. 

“저기요, 정신 차려봐요!”

“으-.”

에스더의 거친 손길에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

“저기요!”

희미하던 눈빛에 빛이 돌아오며 인협의 표정이 돌아왔다. 

“정신이 좀 들어요?”

“그냥 가만히 두세요.”

안도한 에스더가 인협에게 묻자, 그는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왜 또 이 난리를-.”

“지금 몸이 얼음장 같아요. 빨리 일어나서 나가요.”

“가만히 두라고요.”

에스더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협의 손을 붙들고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인협이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좀 놔두라고요. 내가 그냥 여기에 있겠다잖아.”

“저기요, 지금 천장에서 물이 새다 못해, 주룩주룩 흐르고 있어요.”

“다 안다고요. 그래서 있는 거예요. 감전이 되든, 저체온증에 죽든 다 좋으니까.”

번쩍이는 번개에 온갖 미움이 담긴 인협의 두 눈이 에스더의 시야에 담겼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존재를 보는듯한 그 강렬한 얼굴에 에스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아니까, 그냥 두라고.”

쿠르릉-. 뒤늦게 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비슷하게 으르렁거리는듯한 거친 음성에 에스더의 숨이 잠시 멎었다. 

저 남자는 도대체 뭐가 저렇게 증오스럽길래.

출처를 알 수 없는 증오만 가득한 음성이 그녀의 가슴을 짓이기는 듯했다. 

“싫어요.”

“뭐라고요?”

“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는 살인자는 되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그쪽이 좀 협조해 줘요.”

에스더가 다시 인협의 손을 붙들었고, 인협은 그런 그녀의 손을 더 거세게 뿌리쳤다. 

“됐다고. 그러니까 왜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 난리야! 왜!!”

“신경 쓰이니까요! 그쪽이 신경 쓰이게 만드니까!!!”

절규에 가까운 인협의 외침에 에스더가 역으로 더 세게 외쳤다. 그 힘찬 음성에 이번에는 인협이 멈칫했다.

“왜 삶을 놓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왜! 여기 어르신들 다 둘러봐요. 90이 다 되신 할머니들, 하루라도 더 제대로 살지 못해 아쉬워해요.”

“…….”

“우리 학교에 조 선생님 알아요? 그 선생님은 암이래요. 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사람들이라고요!”

“어쩌라고요. 나랑은 상관도 없는 사람들.”

뻔한 동정심 유발이라는 생각에 인협은 신물이 난 상태로 대꾸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삶을 이렇게 낭비하는 당신의 삶을 빼앗아서라도 그런 간절한 분들한테 전해드리고 싶어요. 내가 신이라면 그러겠어.”

“…….”

“그 정도로 한심해 보인다고요, 그쪽.”

“뭐라고요?”

“무슨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꼭 세상의 모든 고생이라고는 혼자서만 다 한 것처럼 매일매일을 술로 날려버리고, 마음을 미움으로만 가득 채우지 못해서 안달이고. 그 불행이랑 미움을 남한테 못 전해줘서 안달이고!”

에스더의 말에 인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가 일자, 그의 손에 온기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좀 살아봐요. 누구는 더 살지 못해 안달인 하루라도 한번 제대로 살아보라고요!”

“…….”

“당신의 삶을 미워하려고 애쓰는 만큼, 한번 좋아하려고도 애써봐요. 모든 걸 미워하는 데 낭비하는 에너지가 더 들겠어요.”

“…….”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요. 이렇게 놓아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내가 다 억울하다.”

씩씩. 말을 마친 에스더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모든 걸 놓아버린 인협 앞에서 가득 차오른 분노에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는 에스더였다. 

“그러니까 제발 좀 살아봐요. 그냥 살아있는 시체처럼 굴지 말고요.”

“…….”

“그리고 나는 그쪽이 진짜 시체가 되도록 둘 의향은 전혀 없어요. 지금 그쪽이 이 제안조차 거부한다면, 나는 그쪽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당장 경찰이라도 부를 거예요.”

에스더의 말이 얼마나 진실된지는, 그녀를 짧게 봐온 인협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인협이 이조차도 거부한다면 그녀는 정말 내뱉은 말을 기어이 지키고 말 것이었다. 

“가요.”

그때 에스더가 인협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서 조심스럽게 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속에 그녀의 얼굴이 담겼다. 에스더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당신이 울고 싶어 하는 건데. 나랑 아무런 상관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왜. 감히.

인협은 그런 에스더가 괘씸하면서도, 동시에 도통 그런 얼굴을 한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답 없는 질문이 주어 없이 인협의 가슴을 울려댔다. 에스더의 손만 멀뚱히 내려다보는 인협에게 에스더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알았지만, 인협은 물러나지 않았다. 분명히 몇 시간 전만 해도 오늘 밤 모든 걸 놓아버리라고 작정했었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모든 걸 정리하고, 며칠이 흘러 조용히 발견되기를. 

그렇게 더 이상의 고통도, 후회도, 자신을 향한 혐오도 없는 영면에 이르기를.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인협은 가만히 있었고 어느새 그의 젖은 가슴팍에 에스더의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그녀의 팔이 그를 감쌌고, 어느새 그의 고개는 그녀의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봤을지 모르는 그 따스한 체온에 인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그보다 더 뜨거운 기운이 그의 가슴에서부터 목까지 넘어왔다. 

허-. 

한숨에 가까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억눌러있던 울음 한 자락이 겨우 삐져나왔다. 

토닥토닥. 

그 소리에 에스더의 부드러운 손길이 인협의 차가운 등에 닿았다. 그 손길조차도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인협의 손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에스더의 팔뚝에 닿았다. 그는 무언가에 매달리듯이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울어요. 여기서 다 토해내고 가자고요.”

에스더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울리자, 인협은 눈을 꾹 감았다. 한번 터져 나온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가 됐든, 이왕 살아내야만 하는 하루를 조금만 덜 미워하며 살자고요. 모든 걸 미워하는 것도 힘이 많이 들잖아요.”

그간 많이 힘들었던가, 나는.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지난 몇 달을 떠올렸다. 

자신의 삶에 얽혔을 뿐인데 마치 그들이 그의 삶을 침범하는 것처럼 날을 세우고 날카롭게 굴어대는 건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했었다.

어쩌면 그 미움이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일지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만 살면 꼭 그 삶이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지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한 미움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서.

자신을 향한 분노와 미움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 그것을 주변에 뿜어대지 않고선 못 배겨서.

“그러니까 그만 미워해요. 사람들도, 인협 씨도.”

에스더의 마지막 다독임에 인협의 흐느낌이 더 거세졌다.

자신도 보지 못하던 속마음이 그대로 꿰뚫려 버린 느낌에 그는 결국 높이 쌓아두었던 마음의 성벽이 고스란히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랑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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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 웰컴 투 소원리   71.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 웰컴 투 소원리   70.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 웰컴 투 소원리   69. 물음표로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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