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꺄아아-.
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고, 밥을 한 주걱 펐다.
원래 입맛이 안 돌아서 아침을 안 챙겨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먹고 나가고 싶어진 그였다.
*** “저기요, 계신가요-.”우비를 입은 기탁은 반찬통이 든 방수 가방을 들고서 인협의 집 마당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집 문이 열려있었다.
“저기요! 인협 씨?”
기탁의 부름에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설마.
불길한 느낌에 기탁은 빠르게 걸어가 바람에 흔들려대던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에-.”집안은 엉망이었다. 바닥은 물바다였고, 인협이 늘 덮었던 이불은 한눈에 봐도 푹 젖어있었다.
이전에도 사람이 살만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집으로서의 수명을 다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그란 알 너머의 눈이 커졌다.
“설마….”마른침을 꿀꺽 삼킨 기탁은 조심스럽게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종종 이렇게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사체가 발견되기도 한다고 하던데.
언젠가 소원리와 사정이 비슷한 곳에서 목회를 하던 선배 목사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기탁은 꽉 쥔 주먹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협 씨! 계십니까!”기탁의 부름에 답하는 건 처마 너머로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뿐이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인협은 없었다.
결국 이 시골 마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건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기탁의 눈에 인협의 유일한 짐꾸러미인 캐리어가 들어왔다.
“짐은 아직 그대로 있는데-.”
그 광경에 기탁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마을 맞은편에 흐르는 개천은 현재 장마로 인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기탁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스락. 그때, 집 담장 너머로 빗소리를 뚫고 인기척이 들려서 기탁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협이었다. 그는 거센 빗줄기에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젖은 풀숲을 헤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인협 씨!”기탁은 무언가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이름을 부르며 여러 문을 열어댈 때, 이 이름의 주인이 무사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기탁은 안도감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어, 안녕하세요.”기탁의 등장에 놀란 채로 잠시 멈칫했던 인협은 이내 인사를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들렸다.
기탁은 감격하는 눈으로 담장을 돌아서 집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인협을 바라보았다.
“인협 씨, 제가 진짜 얼마나 간절하게 찾아 헤맸는지 아세요?” “아-.”기탁의 물음에 인협은 흙 묻은 발자국이 찍힌 집안 쪽을 힐끗 확인했다.
“죄송해요. 어젯밤에 물이 너무 심하게 새는 바람에-.”
“그럼, 밤새 어디에서 지냈어요?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셨어도 됐는데.”아차. 기탁의 순진한 물음에 인협의 물기를 털어내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소문을 조심하기는 해야 할 텐데.
인협은 동그란 안경테 너머에서 순진하게 깜빡거리고 있는 기탁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신세를 좀 졌어요. 가까우니까요.” “다음에는 꼭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시면 제가 차로 데리러 올 테니 알려주세요.”자연스럽게 인협에게 핸드폰을 건네려던 기탁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아, 목사의 수작질은 아니고요. 진심으로 걱정되는 마음에-.”지난번 인협의 반응을 떠올리고 아차, 싶었는지 기탁이 당황한 얼굴로 덧붙이며 핸드폰을 뒤로 뺐다.
그 순간 인협이 그것을 낚아채듯이 제 손에 들고는 망설임 없이 제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기탁의 핸드폰으로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교회에 나간다는 말은 못 하겠고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도움은 청하겠습니다. 염치는 없지만.”헝클어진 머리. 문 앞에 나뒹구는 보온 가방. 그리고 인협을 발견하고는 가쁘게 숨을 쉬어대던 기탁의 모습을 짧은 순간 동안 모두 눈에 담았던 인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기탁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인협의 안위를 걱정해 사색이 된 채로 집안을 뒤졌던 것이었다.
지난밤 그를 무작정 찾아와 집안으로 쳐들어왔던 에스더처럼.
“괜찮아요. 절 이용하셔도 좋아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도움 요청해 주세요. 위험하다, 배고프다, 심심하다 뭐든 다 좋습니다.”이제야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은 기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인협이 슬쩍 미소 지었다.
불신을 한 꺼풀 벗겨내니 이제야 그를 향한 상대의 배려와 선한 마음이 보이는 덕분이었다.
“아, 반찬-.”그제야 방문의 이유를 떠올린 기탁은 재빠르게 땅바닥에서 보온 가방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인협에게 건넸다.
“오늘 밤도 지낼 곳이 필요하시면, 교회로 오세요. 나름 아늑하고 쾌적합니다.” “괜찮아요. 오늘도 학교에서 지내도 적당할 거 같아요.”인협의 상냥한 거절에 기탁은 감격한 듯해 보였다.
“네, 아무튼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저희 집에 여분의 이불도 아주 많아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조심스러운 진심과 조금은 서툰 진심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인협은 기탁이 내민 반찬을 순순히 받아서 들었다.
***
“옴마나? 저거 인협인가?” “어어? 그러게, 인협인가봐.”갑순과 복란은 비 내리는 소원리 풍경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서 이전에 말려두었던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때, 학교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인협으로 보이는 인영이 나무 사이에서 하나 뿅 하고 튀어나왔고 때마침 일을 잠시 멈추고는 한숨을 돌리던 갑순의 눈에 띈 것이었다.
“왜 이 시간에 저 녀석이 학교에서 내려온대?”
“그러게. 집에 물이 많이 샜나?”복란의 대꾸에 갑순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인협이 집 담장 너머로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쯧쯔, 그러니까 적당할 때 고치지.”
“이제 철호네도 못 돕겠어. 순옥이가 암이라며.”복란의 말에 갑순이 혀를 끌끌 찼다.
“죽어야 할 나 같은 사람은 안 죽고, 참 애꿎은 젊은 사람들만 괴롭게 하네.”
“언니가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이야.” “비 오는 날 이 정도로 몸이 괴로우면 죽을 때가 된 거 아닌가?”갑순은 주먹으로 며칠째 아리는 무릎을 콩콩 두들겼다.
“아휴, 말을. 그러게 파스 좀 바르고 진통제 좀 먹으라니까. 덜 괴로울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만 피우고-.”
“이 늙은이가 그렇게 약을 처발라서 뭐 해. 들기나 하나.” “한 번이라도 드셔보시고 말을 합시다.”복란의 잔소리에 갑순이 전보다 약간 더 거친 손길로 나물을 다듬었다.
“그나저나, 인협이는 학교에서 지난밤을 보낸 거 같지?”
“그러게. 가장 가까운 데라서 황 선생님한테 도움을 청했으려나.” “황 선생님이랑 인협이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갑순의 말에 복란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떽, 우리 황 선생님이 훨씬 더 아깝지.”
“그래도, 우리 인협이도 그 정도면 인물 괜찮지.” “인물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 못된 인성은 좀 어떻게 고쳐먹을 거냐고.” “딱 봐도 알잖아. 원래 속 여린 놈이 더 시끄럽게 굴어대는 법이야.” “얼씨구-. 저어기 정렬이 아버지는 속이 여려서 그렇게 마누라랑 자식을 패댔대?”늘 우아한 언행을 하는 복란으로서는 가장 욕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나물 다듬기에 집중했다.
“그래, 여리지. 옛날부터 그 집안 유명했어. 첫째 아들만 다 해주고, 둘째인 원길이는 일찌감치 일 시켜서 제 형 뒷바라지시키고, 집안 재산 다 빼돌려서 첫째한테 더 못 해줘서 안달이었지.”
갑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복란은 거친 손길로 다듬던 나물을 집어 던졌다.
“그게 뭐? 우리 시대 때 안 그러고 산 사람 있어? 특히 여자인 우리는 더했지. 봐봐, 여기서 초등학교 제대로 졸업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고.”
“…….”
“아무리 큰 억하심정이 있어도 아무나 사람을 패지는 않아. 그것도 저보다 약한 가족들을.” “우리 바깥양반도-.” “아휴, 언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나쁜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인 거야. 사연 있다고 나쁜 놈 되면, 뭐? 나도, 언니도 한 나쁜 년 되어 있어야지.”복란의 매서운 대꾸에 갑순이 주름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하튼 어디 줘도 아까울 우리 황 선생님, 그런 이상한 사람한테 갖다 붙이지 마. 언니야 어렸을 적부터 인협이를 봐서 정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모르겠다.”
복란의 볼멘소리에 갑순은 더 이상의 주장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