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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금은 서툰 진심

Autor: 랑끗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7-26 11:27:04

꺄아아-.

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

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고, 밥을 한 주걱 펐다. 

원래 입맛이 안 돌아서 아침을 안 챙겨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먹고 나가고 싶어진 그였다. 

***

“저기요, 계신가요-.”

우비를 입은 기탁은 반찬통이 든 방수 가방을 들고서 인협의 집 마당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집 문이 열려있었다. 

 

“저기요! 인협 씨?”

기탁의 부름에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설마. 

불길한 느낌에 기탁은 빠르게 걸어가 바람에 흔들려대던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에-.”

집안은 엉망이었다. 바닥은 물바다였고, 인협이 늘 덮었던 이불은 한눈에 봐도 푹 젖어있었다. 

이전에도 사람이 살만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집으로서의 수명을 다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그란 알 너머의 눈이 커졌다. 

“설마….”

마른침을 꿀꺽 삼킨 기탁은 조심스럽게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종종 이렇게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사체가 발견되기도 한다고 하던데. 

언젠가 소원리와 사정이 비슷한 곳에서 목회를 하던 선배 목사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기탁은 꽉 쥔 주먹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협 씨! 계십니까!”

기탁의 부름에 답하는 건 처마 너머로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뿐이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인협은 없었다. 

결국 이 시골 마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건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기탁의 눈에 인협의 유일한 짐꾸러미인 캐리어가 들어왔다.

 

“짐은 아직 그대로 있는데-.”

그 광경에 기탁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마을 맞은편에 흐르는 개천은 현재 장마로 인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기탁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스락. 그때, 집 담장 너머로 빗소리를 뚫고 인기척이 들려서 기탁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협이었다. 그는 거센 빗줄기에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젖은 풀숲을 헤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인협 씨!”

기탁은 무언가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이름을 부르며 여러 문을 열어댈 때, 이 이름의 주인이 무사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기탁은 안도감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어, 안녕하세요.”

기탁의 등장에 놀란 채로 잠시 멈칫했던 인협은 이내 인사를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들렸다. 

기탁은 감격하는 눈으로 담장을 돌아서 집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인협을 바라보았다. 

“인협 씨, 제가 진짜 얼마나 간절하게 찾아 헤맸는지 아세요?”

“아-.”

기탁의 물음에 인협은 흙 묻은 발자국이 찍힌 집안 쪽을 힐끗 확인했다.

 

“죄송해요. 어젯밤에 물이 너무 심하게 새는 바람에-.”

“그럼, 밤새 어디에서 지냈어요?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셨어도 됐는데.”

아차. 기탁의 순진한 물음에 인협의 물기를 털어내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소문을 조심하기는 해야 할 텐데. 

인협은 동그란 안경테 너머에서 순진하게 깜빡거리고 있는 기탁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신세를 좀 졌어요. 가까우니까요.”

“다음에는 꼭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시면 제가 차로 데리러 올 테니 알려주세요.”

자연스럽게 인협에게 핸드폰을 건네려던 기탁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아, 목사의 수작질은 아니고요. 진심으로 걱정되는 마음에-.”

지난번 인협의 반응을 떠올리고 아차, 싶었는지 기탁이 당황한 얼굴로 덧붙이며 핸드폰을 뒤로 뺐다. 

그 순간 인협이 그것을 낚아채듯이 제 손에 들고는 망설임 없이 제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기탁의 핸드폰으로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교회에 나간다는 말은 못 하겠고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도움은 청하겠습니다. 염치는 없지만.”

헝클어진 머리. 문 앞에 나뒹구는 보온 가방. 그리고 인협을 발견하고는 가쁘게 숨을 쉬어대던 기탁의 모습을 짧은 순간 동안 모두 눈에 담았던 인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기탁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인협의 안위를 걱정해 사색이 된 채로 집안을 뒤졌던 것이었다. 

지난밤 그를 무작정 찾아와 집안으로 쳐들어왔던 에스더처럼. 

“괜찮아요. 절 이용하셔도 좋아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도움 요청해 주세요. 위험하다, 배고프다, 심심하다 뭐든 다 좋습니다.”

이제야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은 기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인협이 슬쩍 미소 지었다. 

불신을 한 꺼풀 벗겨내니 이제야 그를 향한 상대의 배려와 선한 마음이 보이는 덕분이었다. 

“아, 반찬-.”

그제야 방문의 이유를 떠올린 기탁은 재빠르게 땅바닥에서 보온 가방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인협에게 건넸다.

“오늘 밤도 지낼 곳이 필요하시면, 교회로 오세요. 나름 아늑하고 쾌적합니다.”

“괜찮아요. 오늘도 학교에서 지내도 적당할 거 같아요.”

인협의 상냥한 거절에 기탁은 감격한 듯해 보였다. 

“네, 아무튼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저희 집에 여분의 이불도 아주 많아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조심스러운 진심과 조금은 서툰 진심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인협은 기탁이 내민 반찬을 순순히 받아서 들었다.

***

“옴마나? 저거 인협인가?”

“어어? 그러게, 인협인가봐.”

갑순과 복란은 비 내리는 소원리 풍경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서 이전에 말려두었던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때, 학교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인협으로 보이는 인영이 나무 사이에서 하나 뿅 하고 튀어나왔고 때마침 일을 잠시 멈추고는 한숨을 돌리던 갑순의 눈에 띈 것이었다. 

“왜 이 시간에 저 녀석이 학교에서 내려온대?”

“그러게. 집에 물이 많이 샜나?”

복란의 대꾸에 갑순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인협이 집 담장 너머로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쯧쯔, 그러니까 적당할 때 고치지.”

“이제 철호네도 못 돕겠어. 순옥이가 암이라며.”

복란의 말에 갑순이 혀를 끌끌 찼다. 

“죽어야 할 나 같은 사람은 안 죽고, 참 애꿎은 젊은 사람들만 괴롭게 하네.”

“언니가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이야.”

“비 오는 날 이 정도로 몸이 괴로우면 죽을 때가 된 거 아닌가?”

갑순은 주먹으로 며칠째 아리는 무릎을 콩콩 두들겼다. 

“아휴, 말을. 그러게 파스 좀 바르고 진통제 좀 먹으라니까. 덜 괴로울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만 피우고-.”

“이 늙은이가 그렇게 약을 처발라서 뭐 해. 들기나 하나.”

“한 번이라도 드셔보시고 말을 합시다.”

복란의 잔소리에 갑순이 전보다 약간 더 거친 손길로 나물을 다듬었다. 

“그나저나, 인협이는 학교에서 지난밤을 보낸 거 같지?”

“그러게. 가장 가까운 데라서 황 선생님한테 도움을 청했으려나.”

“황 선생님이랑 인협이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갑순의 말에 복란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떽, 우리 황 선생님이 훨씬 더 아깝지.”

“그래도, 우리 인협이도 그 정도면 인물 괜찮지.”

“인물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 못된 인성은 좀 어떻게 고쳐먹을 거냐고.”

“딱 봐도 알잖아. 원래 속 여린 놈이 더 시끄럽게 굴어대는 법이야.”

“얼씨구-. 저어기 정렬이 아버지는 속이 여려서 그렇게 마누라랑 자식을 패댔대?”

늘 우아한 언행을 하는 복란으로서는 가장 욕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나물 다듬기에 집중했다. 

“그래, 여리지. 옛날부터 그 집안 유명했어. 첫째 아들만 다 해주고, 둘째인 원길이는 일찌감치 일 시켜서 제 형 뒷바라지시키고, 집안 재산 다 빼돌려서 첫째한테 더 못 해줘서 안달이었지.”

갑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복란은 거친 손길로 다듬던 나물을 집어 던졌다. 

“그게 뭐? 우리 시대 때 안 그러고 산 사람 있어? 특히 여자인 우리는 더했지. 봐봐, 여기서 초등학교 제대로 졸업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고.”

“…….”

“아무리 큰 억하심정이 있어도 아무나 사람을 패지는 않아. 그것도 저보다 약한 가족들을.”

“우리 바깥양반도-.”

“아휴, 언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나쁜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인 거야. 사연 있다고 나쁜 놈 되면, 뭐? 나도, 언니도 한 나쁜 년 되어 있어야지.”

복란의 매서운 대꾸에 갑순이 주름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하튼 어디 줘도 아까울 우리 황 선생님, 그런 이상한 사람한테 갖다 붙이지 마. 언니야 어렸을 적부터 인협이를 봐서 정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모르겠다.”

복란의 볼멘소리에 갑순은 더 이상의 주장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랑끗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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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웰컴 투 소원리   20. 조금은 서툰 진심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 웰컴 투 소원리   19. 색안경을 벗겨낸 듯이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갈아입을 옷이-.”“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경이 주는 안락

  • 웰컴 투 소원리   18. 그만 미워해요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 웰컴 투 소원리   17. 각자의 고민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 웰컴 투 소원리   16. 장마의 시작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 웰컴 투 소원리   15. 어른의 정의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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