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
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원으로 영입하고 싶고요.” “네?”우겸의 파격적인 제안에 봉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왜….”사실상 현재로서 겉으로 보자면 봉길도, 인협도 팀으로 영입하기에 가치가 최악인 사람들이었다.
감독인 정현과 리그 오브 카오스에서 잔뼈가 은근히 굵은 기태가 흩뿌려놓은 거짓 소문이 업계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을 것이었다.
봉길이 인협의 승부조작건에 약간은 일조했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봉길의 유일한 죄는 인협의 편을 들었던 것 그리고 그를 위해 팀 내에서 목소리를 높여 의혹을 제기한 것뿐이었다.
그런 그가 거슬린 진짜 가해자들이 죄 없는 그를 내몰아버린 것이었지만.
물이 담긴 유리잔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우겸이 입을 열었다.
“저를 한번 믿어보시겠어요?”어차피 인협이 퇴출당한 후에 이미 하락세를 걷고 있는 케이비 팀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우겸이 따로 손을 대지 않아도 케이비 팀은 적당히 자멸할 수 있기에 케이비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아주 낮아 보였다.
그렇다면….
봉길은 긴장한 얼굴로 맞은편 우겸을 응시했다.
*** 지이잉.진동 소리에 겨우 잠에 들었다 눈을 뜬 인협이었다.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어두운 거실에서 문자를 확인했다.
[인협아, 잘 지내고 있니? 못난 엄마가 걱정돼서 연락해]얼핏 보기에는 애정과 걱정이 가득한 문자였다. 그러나 문자를 읽은 인협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돈 떨어졌나 보네.”기댈 데가 없어서 전 국민에게 승부조작으로 낙인찍혀서 나락간 아들에게 문자를.
이전에 잘 나갔을 때,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는다고 느꼈을 적에 이 문자를 받았더라면 인협은 금방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려워졌을 적에 부모가 차갑게 등 돌린 경험은 그간 애정이라고 믿어왔던 그 모든 착각을 깨부숴주었다.
저 정도로 사업이 힘든 거면 빨리 접는 게 맞을 텐데.
인협이 케이비 팀으로 영입된 직후, 그의 부모님은 2층짜리 대형 건물을 인수해 고깃집을 열었다.
고급 한우집. 1년 정도는 반짝 장사가 잘 되다가 주변 가게에 밀려서 계속해서 적자를 내는 중이었다.
그것도 약 3년간.
그럴 때마다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서 인협의 돈으로 적자를 메꿔왔다.
그렇다고 지난 반년간 어떠한 변화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큰 변화 없는 식당에 새롭게 찾아올 손님이라고는 없었고, 날마다 더 낡아가는 건물과 시설 그리고 회전율이 낮기에 고기의 질은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갔다.
그래서 결국 망할 집이었다. 그런데도 인협은 부모님을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하더라도 그들을 도와왔던 것이었다.
어렸을 적 사업이 망하고 빚졌던 시절에 고생했을 그들을 위해서.
그런 때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빚이 어느 정도 해결됐을 때 인협과 동생을 데리러 와주었던 부모님에게 고마워서.
어쩌면 부모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는데, 왠지 모르게 인협은 그들에게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 그렇게 살아왔다.
“빚 갚을 만큼의 돈이 없는데.”선수 시절 동안 늘 숙소에서 합숙하느라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그가 선수 생활 동안 벌어들였던 수십억의 돈은 온전히 가게 적자를 메꾸고 부모님의 허영심을 채우는 도구로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삼천만 원 남짓. 승부조작에 가담한 쓰레기라는 오명.
부모님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을 큰 규모의 가게, 그의 돈으로 들인 비싼 두 대의 외제 차, 그리고 십억이 넘는 아파트.
인협이 삶의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그를 통해 얻은 부나 편의의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으려고 발을 빼던 부모를 마주했을 때의 절망감이란.
그 순간만큼은 인협이 세상 그 어떤 추함을 마주했을 때보다 역했고, 황망했다.
어쩌면 인간의 악의 끝을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혹시 남아 있는 여유자금이 좀 있을까? 엄마 아빠 상황이 많이 힘드네]인협이 난생처음으로 간절하게 뻗어서 내밀었던 손을 힘들다는 이유로 내쳤던 그들은 여전히 힘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언제까지 힘들어하며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을 것인지.
인협은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그대로 거칠게 덮어버렸다. 관사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지이잉.
또다시 들려온 진동에 인협은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인협아, 잘 지내?]봉길이었다.
그가 케이비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그가 퇴출당하기 전에 유일하게 그를 믿어주고 그를 응원해 주던.
그러다가 인협과 함께 팀의 눈 밖에 나게 되었던 그였다.
결국 마지막에는 인협이 모르는 새에 팀에서 핸드폰까지 뺏고 팀 건물 출입금지까지 시키며 억지로 인협과 떼어놓았던 봉길 코치였다.
*** 늦은 밤. 케이비 팀의 숙소 앞.케이비 팀의 리더인 기태와 감독인 정현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주변은 한적했다.
“아, 큰 건수 또 한번하고 은퇴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기태야, 너도 잘 생각해. 너도 이제 퇴물 소리 슬슬 듣고 있지 않냐?”말을 마친 정현이 담배를 세게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훅 뱉었다.
“감독님이 알려주신 종목에 투자한 게 잘 되고 있긴 한데, 딱 십억만 더 땡기고 은퇴하면 좋겠는데요.” “팀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 둘 다 모가지다, 알지?” “네. 아, 나인협 같은 호구 한 명만 더 영입하면 좋겠는데요. 새로 들어온 태우인가 뭔가는 영 시원치 않네요.”태우는 인협의 자리에 영입된 선수였다.
그는 신인 중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어서 큰맘 먹고 영입한 인물이었으나, 팀 내에서 인협의 실력엔 미치지 못해 팀을 완전히 이끌어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면 기존에 있는 애들 중 하나한테 작업 들어가 보던지. 태우를 적당히 모르게 이편으로 끌어들이고.” “근데 인협이 때랑 같은 방식으로 하면 들킬 거 같은데요.” “그럼, 다른 방식으로 한번 해봐. 기태, 너 잘하잖아.”피식 웃고는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끈 정현은 한 손으로 기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난번에도 잘 해냈으니, 이번에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정현은 그렇게 뒷모습을 보이며 손을 살짝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 씨X. 나한테 다 일은 시켜놓고 지는 가만히 앉아서 돈이나 받아먹고. 감독 팔자가 상팔자네, 아주.”기태는 나머지 담배를 태우며 불만 가득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두가 말하듯이 퇴물이 되어버린 그가 이제 큰돈을 만질 방법은 이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도 이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국내 팀 중 공식 2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던 케이비였지만, 그 타이틀마저도 인협이 팀에서 퇴출당한 후에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언젠가 거창한 꿈을 안고서 이 판으로 걸어들어왔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는 아득해져 버린, 아니, 사실은 굳이 상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전의 순수하던 시절을 잠시 떠올린 기태는 이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껐다.
“지X.”어쭙잖은 양심 따위, 있으나 마나였다. 미약할 양심이라면 차라리 버리기를 택한 그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이러고 살 텐데.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야.
“또 어떤 놈한테 작업을 쳐봐야 할까.”기태는 혼잣말을 읊조리고는 정현이 들어간 건물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 장마가 잦아들며, 잠시 비가 그친 어느 날. 회색빛을 띠는 구름 사이에 난 해가 적당히 쨍쨍했다.양옆에 밭이 있는 동네 길을 따라서 올라가는 인협의 뒤에 포터가 나타났다.
“인협이 형!”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들려온 정렬의 부름에 인협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오늘 받았던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일찍 퇴근했어.”두 사람이 만난 시각은 점심시간이 이제 막 지난 한시였다.
평소에는 초등학교가 끝나기 직전에 퇴근해 헐레벌떡 시간 맞춰 오는 정렬이었다.
“어디가? 뒷산에라도 가려고?”인협이 향하던 방향은 마을 안쪽으로 향하는 길.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이자 뒷산 초입에 정렬의 집이 있었다.
“아니.”인협의 짤막한 대답에 정렬의 눈에 그가 든 보온 가방이 여럿 들어왔다.
“교회로 가. 빈 반찬통 갖다드리러.” “태워줄까?”아무리 시골집들이 사이사이에 밭을 두고서 띄엄띄엄 지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걸어서 10분이면 가는 거리였다.
“괜찮은데.” “그냥 타. 내가 심심해서 그래.”정렬의 어리광에 인협은 조수석 문을 열고 트럭에 올라탔다. 텅. 문이 닫히자마자 정렬은 액셀을 밟아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내달렸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비 온 뒤 갠 날의 특유가 상쾌하고도 눅눅한 공기가 스쳤다.
”요즘 학교에서 지낸다며? 지난번에 황 선생님이 알려주시더라고.”인협은 괜한 소문을 막기 위해 자기가 학교에서 지내는 걸로 대충 둘러대자고 이야기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시골 마을에 젊은 남녀가 같은 집에서 지낸다는 소문이 나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응-.” “그럼, 교실에서 지내는 거야? 많이 불편할 텐데-.” “잠만 자는 거니까. 그럭저럭 할만해.” “집 보수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야?”정렬의 과도한 관심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한 인협이 피식 웃었다.
“왜? 나랑 황 선생님이랑 가까워질까 봐?” “어?”정곡을 찔렸는지, 정렬의 얼굴이 붉어졌다.
“걱정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나의 그런 밑바닥을 보여줬는데, 에스더랑 잘될 리가 있나.
제정신 박힌 여자면, 그런 찌질한 모습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도망을 가면 갔지.
인협은 회의를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동네 풍경을 둘러보았다.
게다가 임시 선생님이니까 1년후면 떠날 사람이라고도 했고.
관사에 지내는 선생님들이 대부분 짧은 계약으로 인해 이 외딴 곳에 오게 되었다.
누군가는 시골살이 경험을 위해, 누군가는 도망치듯이,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서 찾아온 선생님들이 근무 기간을 채우면 도망치듯이 떠나는 걸 어렸을 적에도 늘 지켜봤던 그였다.
“선생님은 형이랑 있으면 되게 편해보여. 나한테는 하늘같은 선생님 같은데, 형이랑 있으면 딱 그나이때의 누나처럼 보인달까.” “나를 막대하는 거겠지. 너한테 에스더가 얼마나 상냥하게 하는지 모르지?” “에스더?”저도 모르게 친근한 호칭을 부른 인협은 아차, 싶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교회 주차장에 다다라있었다.
재빠르게 벨트를 푼 인협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일부러 더 밝게 인사를 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인협은 조수석에서 내리고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심란해보이는 정렬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는 인협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도!”포터는 빠르게 후진해 방향을 돌려 오르막을 더 올라갔다. 가장 안쪽 집인 정렬의 집은 소원리 교회에서도 어른 걸음으로 한참을 더 걸어들어가야만 하는 꽤 먼 거리였다.
인협은 착잡한 표정으로 걸어서 소원리 교회 건물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지어져 있는 단층 건물로 향했다.
그 집 옆에는 적당히 낡은 밴이 하나 있었다. 그 옆에 소원리 교회라고 적혀있는 걸 보아하니, 교회용 차량인 것으로 보였다.
에스더의 말로는, 단출한 주택인 그곳이 양 목사 가족이 지내는 집이라고 했다.
현관문 옆 초인종을 누른 인협이 잠시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이내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어? 인협 씨! 반가워요!”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 편한 차림을 한 기탁이 인협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도도. 그의 뒤에 빠르고도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아이가 기탁의 맨다리를 붙들고 서서 그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너는-.” “아, 얘는 저희 집 둘째 예솜이에요.”지난번 소원 초등학교 앞에서 심술맞게 굴어서 울려버렸던 아이였다. 예솜도 마찬가지로 인협을 알아보았는지, 제 아빠 다리 뒤로 다시 숨어버렸다.
“어어? 원래 낯 가리는 애가 아닌데-. 예솜아, 삼촌한테 인사해야지.”기탁의 부드러운 재촉에 예솜은 작은 입술을 꾹 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찬통 갖다드리러 왔어요.” “아, 감사해요. 다음에 만났을 때 주셔도 됐는데요.” “그냥, 오랜만에 비도 그친 겸, 산책 겸 왔어요.” “감사합니다.”인협의 시선이 예솜 쪽으로 향했다. 불편한 마음에 결국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된 그였다.
인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쪼그려 앉아 예솜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예솜아, 안녕? 지난번에 삼촌이랑 만났었지.” “어? 만나셨었어요?” “네, 학교에서요. 근데 그날 제가 기분이 많이 좋지 않아서 예솜이한테 실수를 좀 했어요.”인협의 솔직한 고백에 예솜이 호기심 어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정말 미안해, 예솜아.”인협의 진심 어린 사과에 예솜이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하얗고 말랑한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괜찮아, 삼촌!” “예솜아, 괜찮아요라고 해야지.” “괜찮아요. 그럼, 삼촌 용서해 주는 거지?” “응!”아이의 용서란 쉬웠다.
아무런 계산이 없어서 토라짐도 쉽고 그 감정이 드러나기 쉬운 대신에 인협을 용서하기로 한 예솜의 얼굴은 티 없이 밝았다.
그 밝은 마음의 빛이 마음속에 인협의 마음속까지도 고스란히 비친 것만 같았다.
인협은 그 말끔한 용서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다 자란 어른인 나도 너무 어려워하는 용서가 너에게는 어찌 이리도 쉬울까.
어느새 기탁의 뒤에 숨지 않고 인협 쪽으로 다가온 예솜을 보며 인협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