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아으, 으으-.”
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는 인협에게 에스더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응, 가끔 이렇게 악몽을 꿔.” “언제부터?” “글쎄…. 한 반년 전쯤부터?”늘 악몽의 내용은 똑같았다.
예전에 케이비에서 당하던 사건들의 향연이던지, 아니면 좀 더 안 좋은 날에는 실제 있던 사건에 인협의 상상이 더해진 최악이 펼쳐지고는 했다.
오늘은 유독 더 그런 날이었고.
“반년 전….”그때 이렇게 인생을 놓아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건가.
에스더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인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놀랐어. 누가 네 목이라도 조르는 줄 알았거든.”악몽이 시작된 후로는 쭉 혼자서 지내고 있었기에, 인협은 제가 악몽을 꿀 때마다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아, 나는 그날의 기억에 그 정도로 괴롭구나.
인협은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괜찮아?”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인협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했다.
“…….” “미안, 많이 놀랐지?”인협의 사과에 마음이 복잡해진 에스더였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스더의 대답에 인협이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뭐가 됐든지, 네가 반년 후까지 이 정도로 괴로워할 정도면 네가 범죄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네가 피해자인 게 아닌가 싶어서.” “피해자….”피해자라는 단어에 인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세상 모두가 그를 가해자이자, 범죄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아무 변명을 하지 않자, 그는 어느새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한 파렴치한 놈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케이비 측에서 몰래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이걸 노리고 인협의 입을 닫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인생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그를 향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무한한 신뢰와 응원.
케이비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갈 때부터 간절히 바랐지만, 그 누구도 인협에게 보내준 적이 없던 것이었다.
언젠가 얻었다고 자부했던 때도 있었으나, 그 인기는 논란 한 번에 한순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콱 막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인협은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느 가해자가 이렇게 괴로워해. 떵떵거리면서 잘 살기나 하겠지.” “그러게.” “아니면 약간의 죄책감 정도는 자기 합리화로 지워내 버리고 있겠지.”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피식 웃으며 케이비에 남아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아무 문제가 없던 것처럼, 그 사람들은 승부조작을 통해서 얻은 이익을 함께 나누며 행복하겠지.
어차피 은퇴까지 모을 수 있는 자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금액을 받았을 테니.
그 인간들은 한 사람을, 그 이익을 위해 완전히 지옥 속으로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를 기억이나 할까.
“그러니까 네가 괴롭다는 이유로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괴로운 건 괴로운 거지,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 “…….” “정 괴로우면 널 괴롭게 한 인간들 멱살이나 한번 시원하게 잡아보든지.”에스더다운 결론에 인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이 엉뚱한 여자 앞에서는 무거웠던 것들이 유독 가벼워지고는 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죽이는 건 그만해. 그냥 차라리 세상이나 널 괴롭게 한 인간들을 괴롭히자고.”이어진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에스더의 얼굴은 어느새 꽤 비장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 어린 얼굴은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던 인협의 마음에 강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뿐인 술도, 네 목을 틀어쥔 것만 같은 지독한 악몽도. 아무도 몰라주지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네가 알잖아. 그러니까 그냥 대신 널 이렇게 몰아넣은 세상에 덤벼.” “…….” “용서나 그런 거창한 뜻은 잘 모르겠고, 나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짖을 거야. 이런 날 미친개라고 욕하라 해. 내 속이라도 시원해져서 내 삶이 덜 망가지면 그만 아니겠어?” “그러게.”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혼자서는 이 악몽을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지는 듯했었는데.
신기하게도 에스더의 존재에 악몽의 여파는 금방 옅어지고 말았다.
모든 걸 금방 훌훌 털어내 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런 인협을 묵묵히 지켜보던 에스더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발 뻗고 편하게 자자. 잠이라도 잘 자서 힘이 생겨야 잘 짖을 수 있지.”말을 마친 에스더는 인협의 가슴팍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서 그를 눕혔다.
그러고는 인협의 위에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자.”나긋한 에스더의 음성에 신기하게도 잠이 몰려와 인협은 눈을 감았다.
악몽을 꾸고 나면 늘 끔찍한 불면의 밤이 따르고는 했는데, 오늘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더는 조용히 그런 인협을 지켜보았고, 어느새 인협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스더는 처음으로 보는, 한결 편안해진 인협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 좋은 꿈 꾸고.”그녀는 나지막한 인사를 내뱉고는 제 침대에 누웠다.
***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소원 초등학교의 교무실. “싫어요.” “아니, 왜-.”심술 가득한 표정의 제환을 보며 에스더는 이를 악물었다.
인협에게 예체능 관련 과목 세 가지를 모두 넘기고, 고 선생에게 도덕과 사회만 더 맡아달라는 부탁을 에스더가 그에게 전한 직후였다.
“내가 왜요?” “네?” “내가 왜 쉬운 체육이랑 미술을 놔두고 도덕이랑 사회를 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제환의 대꾸에 에스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기적이고 분위기 파악이 잘 안되는 사람이라는 건 애초에 알았다.
조 선생이 남기고 간 수많은 일들 중 가장 쉬운 부분 두 개를 맡았다고 뻗대는 제환을 보며 에스더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인협이한테는 멱살을 시원하게 잡으라고 해놓고는 정작 나는 멱살 한번 시원하게 잡을 줄을 모르는구나. 나는 위선자야.
“우리, 이제 한 배를 탔잖아요 고 선생님. 그런데 사실 제가 영어 말고도 주요 과목을 여러 개 맡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서요.”저와 한배를 탔다는 말에 일순간 밝아진 고 선생의 표정을 본 에스더는 속으로 질색하고 말았다.
“흐흠, 우리 황 선생님이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한다면야…. 하, 근데 또 다른 젊은 남자 선생이라니. 게다가 선생 자격도 충분하지 않은데. 쯧.” “그래도, 예체능만 임시로 맡는 거니까요. 교장 선생님께서도 동의하셨어요.” “우리 황 선생,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고 선생의 흑심 가득한 질문에 에스더는 관자놀이에 힘줄이 팍 서는 걸 느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지 같은 줄 아나.
분노가 차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웃었다.
“흐흥,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인협…. 씨 같은 사람에게 흑심을 품겠어요?”편하게 인협을 불렀다가는, 에스더를 제 미래의 부인인 마냥 마을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고 선생이 어떤 소문을 퍼뜨릴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1년만 살다가 갈 거니까, 조용히 있자고 다짐하며 참았던 게 고 선생을 이 정도로 설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헛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거짓을 진실로 탈바꿈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에스더는 소원리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흐음-.” “아무튼 교장 선생님께서도 받아들이신 사안이에요. 고 선생님이 다른 두 과목 못 맡아주신다고 하면, 교장 선생님께 한 번 더 상의드려 볼게요.” “아, 아녜요. 특별히 내가 황 선생님의 예쁜 얼굴을 봐서라도 맡아줄게요.”아무리 이장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설쳐대는 제환이어도, 교장인 본용을 그는 어느 정도 무서워했다.
에스더의 말에 제환은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서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윙크를 한번 했다.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입에서 훅 풍겨온 악취에 억지 미소를 지은 에스더가 흐흐흐, 하고 한번 웃었다.
제환의 만행을 적당한 타이밍에 늘 잘라내 주던 조 선생이 사라지니, 그는 나날이 더 활개를 쳐대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두 사람만 학교에 남게 된 게 운명이라도 되듯이.
“아하하, 사실 제가 그렇게 예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에스더는 등에 돋아난 소름에 몸을 살짝 떨고는 다시 제 자리로 향했다.
으으, 인협아. 빨리 와라.
제환과 단둘이 남은 학교 안은 매우 숨이 막혔기에 에스더는 인협을 한시라도 빨리 교사로 끌어 들여야만 했다.
*** “아으씨-.”유진은 버스에서 내려서 바로 우산을 펼쳤다. 그 짧은 새에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꽤 젖어있었다.
단발머리에 16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아담한 키. 그러나 그녀의 총명한 두 눈과 얼굴에는 똑 부러짐이 가득했다.
보통은 엄마인 조 선생이 유진의 딸인 주아를 유진 대신 데리고 퇴근을 하고는 했는데, 이제 조 선생과 아빠인 철호는 암 치료를 위해 춘천에서 한동안 지내기로 한 터라 주아의 픽업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영애의 카페에는 사정을 알리고 근무시간을 단축한다고 미리 이야기해 둔 터였다.
순옥의 친한 친구이자, 유진의 사장인 영애는 당연히 그녀의 사정을 우선시해 주었다.
횡단보도도 없는 길을 건너며 장마철 때문에 구겨져 있던 유진의 얼굴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최 씨의 가게 좁은 처마 밑에 있는 평상에 고 이장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늙은 분들이 체력도 좋으셔.
그들 중 몇몇은 손에 담배를 들고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독한 장마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라이.”그녀는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서 마을 길로 향하기 위해 애를 썼다.
“유진아!”고 이장의 부름에 욕을 읊조린 유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리 와봐라.”고 이장의 부름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한 유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를 피하고만은 살 수 없는 좁은 소원리였으니 말이다.
유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한 걸음으로 평상 쪽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좀 어떠시다드나?” “아, 춘천에 대학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거기에 대장암을 잘 아시는 교수님이 계시기도 하고, 서울은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엄마가 동해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도 싫다고 하셔서요.” “아이고, 너희 엄마가 뭘 모른다. 서울에 큰 병원 가셔서 치료받으셔야지.”고 이장의 부인 심 씨의 말에 유진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서울로 올라갔으면 딸이랑 손녀 나 몰라라 하고 멀리 갔다고 욕했을 거면서.
그저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 두는 것만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이라는 게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저 제 통찰만 가장 좋은 거고, 남 일에 입방아 찧어대는 게 낙인 시골 사람들이니까.
인간다운 정은 아주 잠깐 발휘하고, 제 판단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떠벌거려야 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게 자고로 여자는 집안을 돌봐야 하는 거야. 봐라, 나랑 정 씨 아주머니 중에 그렇게 크게 아픈 사람이 있나.” “…….” “학교 일 때문에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야, 너희 엄마도. 건강한 게 복이라니까. 아, 오해하지 마. 너희 엄마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 “그럼, 그럼.”심 씨의 말에 본용의 부인인 정 씨가 맞장구를 쳤다. 소원리에서 가장 짝짜꿍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마을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 그것을 낙으로 삼는 불쌍한 인생들.
누군가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의 행운을 자랑할 기회라고 굳게 믿는 지긋지긋한 사람들.
다행히 그것에 쉽사리 휘말리지 않는 영애와 순옥의 등장에 한풀 꺾인 사람들이었다.
최 씨는 모르는 척하며 마른안주를 씹어댔고, 고 이장과 원길은 껄껄 웃을 뿐이었다. 무리 내 유일하게 본용만이 유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 선생의 은혜를 많이 입은 것도 있었지만, 소원리 미친개라 불리는 유진의 엄청난 성질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이내 싱긋 웃었고, 그 표정 변화에 본용이 조용히 흠칫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주머니들도 건강 조심하세요.” “어머머, 걱정 고마워. 우리 두 사람은 타고나길 건강 체질이라서 괜찮단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잖아요? 매우 건강하셨던 저희 엄마가 갑자기 대장암에 걸렸듯이, 아주머니한테 어떤 문제가 찾아올지.” “어머, 너 무슨 불길한 소리를-.” “조심하세요. 아프실 때 누군가가 너무 집구석만 돌봐서 저렇게 된 게 아니냐고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요.”유진의 말에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솨아아-. 그 사이를 메꾸는 거센 빗소리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너, 지금 뭐라 했니?” “왜요? 저는 아주머니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데요.”씩씩거리는 심 씨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유진은 우산을 꽉 붙들고 뒤를 돌아서 다시 학교로 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막되어 먹으니, 애 아빠도 모르게 애를 하나 덜컥 낳아오지.” “제 엄마 아빠가 저 때문에 이런 시골에 온 줄도 모르고.”심 씨와 정 씨의 반격이 들려와 유진은 뒤로 홱 돌아섰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겁쟁이들이 뒤에서는 말이 많지.
유진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는 생각했다.
“아줌마들 자식 관리 잘하세요, 네? 안 그러면 제가 아주머니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뭐?” “사십 먹고서 부모님 해주는 밥 먹고 사는 반 대머리 아들보다는, 제 밥벌이하면서 손주를 보여드린 제 삶이 낫겠어요!”벙찐 심 씨의 얼굴을 본 유진은 한번 환하게 웃고선 몸을 휙 돌렸다.
흥분한 심 씨와 정 씨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진은 팽, 하고 비웃을 뿐이었다.
맨날 혼자서 열받고 끝나면서 저 아줌마는 매번 시비를 걸어대. 저런 어쭙잖은 동정을 할 거면, 돈이나 반찬이라도 하나 해주고 하라고.
엄마인 순옥의 체면만 아니었다면 제게 시비를 걸어오는 어른들을 말로 흠씬 더 두들겨 패줬을 유진이었다.
막 내뱉는 모든 말들이 모두 자기 삶으로 돌아가기를. 나는 다 거절해 버릴 테니까.
신도 저렇게 허구한 날 술판이나 벌여대며 남 씹기 좋아하는 사람들보단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의 손을 더 들어주겠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지시길.”혼잣말을 중얼거린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감사합니다 :)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