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으, 으으-.”
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는 인협에게 에스더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응, 가끔 이렇게 악몽을 꿔.” “언제부터?” “글쎄…. 한 반년 전쯤부터?”늘 악몽의 내용은 똑같았다.
예전에 케이비에서 당하던 사건들의 향연이던지, 아니면 좀 더 안 좋은 날에는 실제 있던 사건에 인협의 상상이 더해진 최악이 펼쳐지고는 했다.
오늘은 유독 더 그런 날이었고.
“반년 전….”그때 이렇게 인생을 놓아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건가.
에스더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인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놀랐어. 누가 네 목이라도 조르는 줄 알았거든.”악몽이 시작된 후로는 쭉 혼자서 지내고 있었기에, 인협은 제가 악몽을 꿀 때마다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아, 나는 그날의 기억에 그 정도로 괴롭구나.
인협은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괜찮아?”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인협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했다.
“…….” “미안, 많이 놀랐지?”인협의 사과에 마음이 복잡해진 에스더였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스더의 대답에 인협이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뭐가 됐든지, 네가 반년 후까지 이 정도로 괴로워할 정도면 네가 범죄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네가 피해자인 게 아닌가 싶어서.” “피해자….”피해자라는 단어에 인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세상 모두가 그를 가해자이자, 범죄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아무 변명을 하지 않자, 그는 어느새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한 파렴치한 놈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케이비 측에서 몰래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이걸 노리고 인협의 입을 닫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인생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그를 향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무한한 신뢰와 응원.
케이비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갈 때부터 간절히 바랐지만, 그 누구도 인협에게 보내준 적이 없던 것이었다.
언젠가 얻었다고 자부했던 때도 있었으나, 그 인기는 논란 한 번에 한순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콱 막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인협은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느 가해자가 이렇게 괴로워해. 떵떵거리면서 잘 살기나 하겠지.” “그러게.” “아니면 약간의 죄책감 정도는 자기 합리화로 지워내 버리고 있겠지.”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피식 웃으며 케이비에 남아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아무 문제가 없던 것처럼, 그 사람들은 승부조작을 통해서 얻은 이익을 함께 나누며 행복하겠지.
어차피 은퇴까지 모을 수 있는 자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금액을 받았을 테니.
그 인간들은 한 사람을, 그 이익을 위해 완전히 지옥 속으로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를 기억이나 할까.
“그러니까 네가 괴롭다는 이유로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괴로운 건 괴로운 거지,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 “…….” “정 괴로우면 널 괴롭게 한 인간들 멱살이나 한번 시원하게 잡아보든지.”에스더다운 결론에 인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이 엉뚱한 여자 앞에서는 무거웠던 것들이 유독 가벼워지고는 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죽이는 건 그만해. 그냥 차라리 세상이나 널 괴롭게 한 인간들을 괴롭히자고.”이어진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에스더의 얼굴은 어느새 꽤 비장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 어린 얼굴은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던 인협의 마음에 강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뿐인 술도, 네 목을 틀어쥔 것만 같은 지독한 악몽도. 아무도 몰라주지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네가 알잖아. 그러니까 그냥 대신 널 이렇게 몰아넣은 세상에 덤벼.” “…….” “용서나 그런 거창한 뜻은 잘 모르겠고, 나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짖을 거야. 이런 날 미친개라고 욕하라 해. 내 속이라도 시원해져서 내 삶이 덜 망가지면 그만 아니겠어?” “그러게.”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혼자서는 이 악몽을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지는 듯했었는데.
신기하게도 에스더의 존재에 악몽의 여파는 금방 옅어지고 말았다.
모든 걸 금방 훌훌 털어내 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런 인협을 묵묵히 지켜보던 에스더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발 뻗고 편하게 자자. 잠이라도 잘 자서 힘이 생겨야 잘 짖을 수 있지.”말을 마친 에스더는 인협의 가슴팍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서 그를 눕혔다.
그러고는 인협의 위에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자.”나긋한 에스더의 음성에 신기하게도 잠이 몰려와 인협은 눈을 감았다.
악몽을 꾸고 나면 늘 끔찍한 불면의 밤이 따르고는 했는데, 오늘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더는 조용히 그런 인협을 지켜보았고, 어느새 인협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스더는 처음으로 보는, 한결 편안해진 인협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 좋은 꿈 꾸고.”그녀는 나지막한 인사를 내뱉고는 제 침대에 누웠다.
***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소원 초등학교의 교무실. “싫어요.” “아니, 왜-.”심술 가득한 표정의 제환을 보며 에스더는 이를 악물었다.
인협에게 예체능 관련 과목 세 가지를 모두 넘기고, 고 선생에게 도덕과 사회만 더 맡아달라는 부탁을 에스더가 그에게 전한 직후였다.
“내가 왜요?” “네?” “내가 왜 쉬운 체육이랑 미술을 놔두고 도덕이랑 사회를 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제환의 대꾸에 에스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기적이고 분위기 파악이 잘 안되는 사람이라는 건 애초에 알았다.
조 선생이 남기고 간 수많은 일들 중 가장 쉬운 부분 두 개를 맡았다고 뻗대는 제환을 보며 에스더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인협이한테는 멱살을 시원하게 잡으라고 해놓고는 정작 나는 멱살 한번 시원하게 잡을 줄을 모르는구나. 나는 위선자야.
“우리, 이제 한 배를 탔잖아요 고 선생님. 그런데 사실 제가 영어 말고도 주요 과목을 여러 개 맡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서요.”저와 한배를 탔다는 말에 일순간 밝아진 고 선생의 표정을 본 에스더는 속으로 질색하고 말았다.
“흐흠, 우리 황 선생님이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한다면야…. 하, 근데 또 다른 젊은 남자 선생이라니. 게다가 선생 자격도 충분하지 않은데. 쯧.” “그래도, 예체능만 임시로 맡는 거니까요. 교장 선생님께서도 동의하셨어요.” “우리 황 선생,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고 선생의 흑심 가득한 질문에 에스더는 관자놀이에 힘줄이 팍 서는 걸 느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지 같은 줄 아나.
분노가 차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웃었다.
“흐흥,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인협…. 씨 같은 사람에게 흑심을 품겠어요?”편하게 인협을 불렀다가는, 에스더를 제 미래의 부인인 마냥 마을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고 선생이 어떤 소문을 퍼뜨릴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1년만 살다가 갈 거니까, 조용히 있자고 다짐하며 참았던 게 고 선생을 이 정도로 설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헛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거짓을 진실로 탈바꿈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에스더는 소원리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흐음-.” “아무튼 교장 선생님께서도 받아들이신 사안이에요. 고 선생님이 다른 두 과목 못 맡아주신다고 하면, 교장 선생님께 한 번 더 상의드려 볼게요.” “아, 아녜요. 특별히 내가 황 선생님의 예쁜 얼굴을 봐서라도 맡아줄게요.”아무리 이장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설쳐대는 제환이어도, 교장인 본용을 그는 어느 정도 무서워했다.
에스더의 말에 제환은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서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윙크를 한번 했다.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입에서 훅 풍겨온 악취에 억지 미소를 지은 에스더가 흐흐흐, 하고 한번 웃었다.
제환의 만행을 적당한 타이밍에 늘 잘라내 주던 조 선생이 사라지니, 그는 나날이 더 활개를 쳐대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두 사람만 학교에 남게 된 게 운명이라도 되듯이.
“아하하, 사실 제가 그렇게 예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에스더는 등에 돋아난 소름에 몸을 살짝 떨고는 다시 제 자리로 향했다.
으으, 인협아. 빨리 와라.
제환과 단둘이 남은 학교 안은 매우 숨이 막혔기에 에스더는 인협을 한시라도 빨리 교사로 끌어 들여야만 했다.
*** “아으씨-.”유진은 버스에서 내려서 바로 우산을 펼쳤다. 그 짧은 새에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꽤 젖어있었다.
단발머리에 16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아담한 키. 그러나 그녀의 총명한 두 눈과 얼굴에는 똑 부러짐이 가득했다.
보통은 엄마인 조 선생이 유진의 딸인 주아를 유진 대신 데리고 퇴근을 하고는 했는데, 이제 조 선생과 아빠인 철호는 암 치료를 위해 춘천에서 한동안 지내기로 한 터라 주아의 픽업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영애의 카페에는 사정을 알리고 근무시간을 단축한다고 미리 이야기해 둔 터였다.
순옥의 친한 친구이자, 유진의 사장인 영애는 당연히 그녀의 사정을 우선시해 주었다.
횡단보도도 없는 길을 건너며 장마철 때문에 구겨져 있던 유진의 얼굴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최 씨의 가게 좁은 처마 밑에 있는 평상에 고 이장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늙은 분들이 체력도 좋으셔.
그들 중 몇몇은 손에 담배를 들고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독한 장마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라이.”그녀는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서 마을 길로 향하기 위해 애를 썼다.
“유진아!”고 이장의 부름에 욕을 읊조린 유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리 와봐라.”고 이장의 부름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한 유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를 피하고만은 살 수 없는 좁은 소원리였으니 말이다.
유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한 걸음으로 평상 쪽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좀 어떠시다드나?” “아, 춘천에 대학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거기에 대장암을 잘 아시는 교수님이 계시기도 하고, 서울은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엄마가 동해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도 싫다고 하셔서요.” “아이고, 너희 엄마가 뭘 모른다. 서울에 큰 병원 가셔서 치료받으셔야지.”고 이장의 부인 심 씨의 말에 유진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서울로 올라갔으면 딸이랑 손녀 나 몰라라 하고 멀리 갔다고 욕했을 거면서.
그저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 두는 것만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이라는 게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저 제 통찰만 가장 좋은 거고, 남 일에 입방아 찧어대는 게 낙인 시골 사람들이니까.
인간다운 정은 아주 잠깐 발휘하고, 제 판단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떠벌거려야 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게 자고로 여자는 집안을 돌봐야 하는 거야. 봐라, 나랑 정 씨 아주머니 중에 그렇게 크게 아픈 사람이 있나.” “…….” “학교 일 때문에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야, 너희 엄마도. 건강한 게 복이라니까. 아, 오해하지 마. 너희 엄마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 “그럼, 그럼.”심 씨의 말에 본용의 부인인 정 씨가 맞장구를 쳤다. 소원리에서 가장 짝짜꿍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마을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 그것을 낙으로 삼는 불쌍한 인생들.
누군가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의 행운을 자랑할 기회라고 굳게 믿는 지긋지긋한 사람들.
다행히 그것에 쉽사리 휘말리지 않는 영애와 순옥의 등장에 한풀 꺾인 사람들이었다.
최 씨는 모르는 척하며 마른안주를 씹어댔고, 고 이장과 원길은 껄껄 웃을 뿐이었다. 무리 내 유일하게 본용만이 유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 선생의 은혜를 많이 입은 것도 있었지만, 소원리 미친개라 불리는 유진의 엄청난 성질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이내 싱긋 웃었고, 그 표정 변화에 본용이 조용히 흠칫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주머니들도 건강 조심하세요.” “어머머, 걱정 고마워. 우리 두 사람은 타고나길 건강 체질이라서 괜찮단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잖아요? 매우 건강하셨던 저희 엄마가 갑자기 대장암에 걸렸듯이, 아주머니한테 어떤 문제가 찾아올지.” “어머, 너 무슨 불길한 소리를-.” “조심하세요. 아프실 때 누군가가 너무 집구석만 돌봐서 저렇게 된 게 아니냐고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요.”유진의 말에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솨아아-. 그 사이를 메꾸는 거센 빗소리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너, 지금 뭐라 했니?” “왜요? 저는 아주머니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데요.”씩씩거리는 심 씨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유진은 우산을 꽉 붙들고 뒤를 돌아서 다시 학교로 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막되어 먹으니, 애 아빠도 모르게 애를 하나 덜컥 낳아오지.” “제 엄마 아빠가 저 때문에 이런 시골에 온 줄도 모르고.”심 씨와 정 씨의 반격이 들려와 유진은 뒤로 홱 돌아섰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겁쟁이들이 뒤에서는 말이 많지.
유진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는 생각했다.
“아줌마들 자식 관리 잘하세요, 네? 안 그러면 제가 아주머니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뭐?” “사십 먹고서 부모님 해주는 밥 먹고 사는 반 대머리 아들보다는, 제 밥벌이하면서 손주를 보여드린 제 삶이 낫겠어요!”벙찐 심 씨의 얼굴을 본 유진은 한번 환하게 웃고선 몸을 휙 돌렸다.
흥분한 심 씨와 정 씨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진은 팽, 하고 비웃을 뿐이었다.
맨날 혼자서 열받고 끝나면서 저 아줌마는 매번 시비를 걸어대. 저런 어쭙잖은 동정을 할 거면, 돈이나 반찬이라도 하나 해주고 하라고.
엄마인 순옥의 체면만 아니었다면 제게 시비를 걸어오는 어른들을 말로 흠씬 더 두들겨 패줬을 유진이었다.
막 내뱉는 모든 말들이 모두 자기 삶으로 돌아가기를. 나는 다 거절해 버릴 테니까.
신도 저렇게 허구한 날 술판이나 벌여대며 남 씹기 좋아하는 사람들보단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의 손을 더 들어주겠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지시길.”혼잣말을 중얼거린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감사합니다 :)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